소설리스트

13화.전직 여행 (14/278)

《전직 여행》

 비욘드에 접속하니 한밤중이었다. 현실과 비욘드를 오가며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를 보낸 탓에 침대에 누웠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떴다.

 하룬은 숙소와는 다른 낯선 여관방의 풍경을 보고 자신이 여관에 투숙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창을 통해 어둠을 쫓는 햇살이 비쳐 드는 것을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녀석들과는 아침을 먹은 후에 만나기로 했으니 아직은 시간이 있구나.’

 지난 3개월 동안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몸에 익어 굳이 할 일이 없는데도 이 시간이면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멍하니 자리에 누워 있던 하룬은 그동안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부상으로 받은 방어구 세트를 확인해 봐야 해.”

 수석 수료한 덕분에 받은 아이템을 이제껏 확인하지 못했다. 물론 기초 과정이니 그리 귀중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수석 수료생에게 주는 것이니 기대할 만했다.

 인벤토리에서 방어구 세트를 꺼낸 하룬은 내용물을 꺼내 아이템들을 확인해 보였다.

『믹싱 하드 레더

등급: 레어(중)

방어력: 30/30

내구력: 200/200

설명: 다섯 가지 가죽을 겹쳐 압착해서 만든 혼합 가죽으로, 하프 드워프들이 만든 하드 레더이다. 방어력도 뛰어나지만 내구력은 거의 최상급이며 장기간의 여행에도 얼룩과 먼지가 잘 생기지 않는다.

옵션: 힘 +3

제한: 무

믹싱 슈즈

등급: 레어(중)

내구력: 200/200

설명: 혼합 가죽과 그리폰의 날개 근육으로 만든 신발. 여전히 날고 싶어 하는 그리폰의 꿈이 서린 신발로 하프 드워프들이 반장화 형태로 만들었다. 얼룩과 먼지가 생기지 않는다.

옵션: 민첩 +5

제한: 무

믹싱 토시

등급: 레어(중)

방어력: 120/120

공격력: 15~20

내구력: 300/300

설명: 혼합 가죽으로 외피를 삼고 오우거의 머리뼈를 넣어 방호력을 올렸다. 일반 검으로는 오우거의 뼈는 물론 가죽을 상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단검이나 비수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옵션: 화염 저항력 +10

제한: 무

믹싱 장갑

등급: 레어(중)

방어력: 120/120

공격력: 30~40

내구력: 300/300

설명: 혼합 가죽들을 중첩하여 강도를 높이고 오우거의 뼈로 속을 채워 만든 장갑. 일반 철검을 깨뜨릴 수 있는 강도를 지니고 있다. 독에 강력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옵션: 힘 +5』

 하룬은 숨길 수 없는 기쁨에 탄성을 질렀다. 기초 과정에서 이렇게 멋진 아이템이 주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노멀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어 아이템일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수련만 했던 하룬이었기에 무기나 방어구 같은 정보에는 취약해 접속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아이템을 얻은 것이다.

 하룬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상으로 받은 가죽 방어구 세트를 착용했다.

 -혼합 가죽 방어구 세트를 착용했습니다.

 -세트 효과가 생깁니다.

『믹싱 가죽 방어구 세트

설명: 혼합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 세트를 착용했을 때는 개별로 착용했을 때와 달리 특별한 효과가 주어진다.

효과: 힘 +10

     방어력 +100

     내구력 +50

     민첩 +10

     화염 저항력 +10%

     마법 저항력 +10%』

 하룬은 입을 떡 벌렸다. 스텟의 증가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화염과 마법 저항력까지 생긴 것이다. 마법 저항력이 +10%라는 것은 마법의 피해를 10%나 줄여준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정말 눈이 돌아갈 정도의 효과였다.

 ‘돈이 필요한데 팔아 버릴까?’

 어차피 귀속 아이템도 아닌데 이런 엄청난 방어구 세트를 착용할 필요가 있을지 갈등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증거를 팔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은 내가 입자.’

 회색 방어구를 착용한 하룬의 모습은 그야말로 멋진 전사의 표상이었다. 비록 울퉁불퉁한 근육질은 아니지만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가슴 그리고 잘록한 허리를 가진 그는 아직 검을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날카로운 예기를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전사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하룬은 수련하면서 선물로 받은 암기들을 토시와 벨트의 암기대에 빼곡하게 장착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엘저가 선물로 준 강철검의 성능도 확인했다.

『강철검

등급: 매직(상)

공격력: 50~70

내구도: 220/250

설명: 하프 드워프들만의 특수한 방식으로 제조된 강철검이다. 나이 쉽게 상하지 않으며 내구도 역시 쉽게 하락하지 않는다.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하는 전사나 용병들에게 알맞은 검이다.

옵션: 힘 +5

제한: 없음』

 강철검의 사양도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현실과 비욘드를 통틀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선물로 준 아이템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세상에 처음 들어서는 초보 용병 하룬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필수적인 무기였다.

 하룬은 여관과 붙은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한 다음 배낭을 메고 서문 근처에 있는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녀석들과 거기서 보기로 한 것이다.

 길드 사무실 앞에서 각자 엄청난 부피의 배낭을 멘 재수 4인방을 볼 수 있었다. 뭘 어떻게 챙겼는지 각자가 진 배낭으로도 모자라 손에 든 가방도 터질 것처럼 빵빵했다.

 “대장!”

 “왜 이제 와, 대장?”

 지탄과 라트리나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기대에 들뜬 얼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필립과 시린느는 이런 꼴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불만인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와, 대……장.”

 “왔어?”

 두 사람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행의 서두부터 얼굴을 붉히기는 그래서 억지로 인사를 받는 하룬이었다. 대장이라는 말은 아직 서로에게 어색했지만 그래도 듣고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 어디로 가는 거야?”

 “일단은 파로스 자작령으로 간다.”

 지탄의 말에 하룬은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전직도시를 말해주었다.

 “흐흐, 우리 용병단 본부가 있는 방향이다.”

 지탄은 환호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왕 하는 여행이면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곳을 원했던 것이다.

 “그래도 여행이 어디야? 난 우리 용병단이 황도에 올 때까지 어디서 지낼지 눈앞이 캄캄했다고.”

 라트리나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비로소 얼굴을 풀었다.

 어차피 그들의 실력으로는 혼자서 고향까지 갈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용병단에 빌붙어 고향으로 가기도 뭐한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는 한 가지는 자신들의 용병단이 황도를 목적으로 하거나 경유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다섯 명만으로 웬만한 용병대에도 위험한 길을 떠나는 것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나름 자신하는 실력들과 하룬의 놀라운 정령술 그리고 소수가 가지는 이점을 생각하면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원인 모를 괴병에 걸린 그들은 하룬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그가 원하면 지옥에라도 쫓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 일단 치료약의 재료비부터 수금할까?”

 하룬이 사악하게 웃으며 손을 벌리자 라트리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눈을 질끈 감더니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최소한의 유지 비용만 가지고 있는 황도의 지부장을 달달 볶아 마련한 눈물 젖은 돈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행 경비!”

 다시 품속에서 다른 돈주머니를 꺼내는 세 사람의 손이 잘게 떨렸다.

 -지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다 챙기고도 모자라 지부 운영 경비를 몽땅 달라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러는 거냐고요!

 라트리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귓가에는 지부장들의 끔찍한 쇳소리가 아직도 쟁쟁했다. 아마 나중에 부모가 이것을 알면 그들은 꽤나 시달려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경비가 든 돈주머니를 건네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애써 진정시키는 세 사람이었다. 필립에게 받은 주머니를 열어보니 자신이 얘기한 대로 노란 골드화가 서른 개 남짓 들어 있었다.

 라트리나를 제외한 세 명에게서 무려 390골드라는 엄청난 돈을 챙긴 하룬은 가슴이 뿌듯했다.

 “자, 이제 용병대 등록하러 가자.”

 용병대 등록의 최소 인원은 다섯 명이라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10골드나 되는 등록비가 너무나 아까웠다. 용병대장의 인증이 새겨진 팔찌를 찬 하룬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녀석들에게 사악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 돈은 결국 녀석들에게 받아 낼 심산이었다.

 필립의 의견대로 돌풍 용병대로 이름을 정하고 하룬을 대장으로 등록했다. 최소 인원에 경력도 없는 용병대가 최하 등급인 D등급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게시판을 살펴보았지만 그들로서는 맡을 수 있는 의뢰가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한 하룬은 아쉬워하며 길드 사무실을 나왔다. 차라리 개인이라면 참가할 의뢰들이 좀 눈에 띄었다.

 “일단 출발하지. 혹시 빠진 것이 있으면 다음 마을에서 보충하기로 하자. 오늘은 이어락까지 가야 하니까 서둘러야 해.”

 이어락은 이곳 황도에서 하루가 꼬박 걸리는 곳에 위치한 귀 모양의 거대한 바위를 말한다.

 “말을 타고 가면 빠를 텐데.”

 “시끄러! 말 가격이 장난인 줄 알아? 너희들을 치료하기 위해 산 약초들 때문에 내 쌈짓돈을 다 털었어.”

 애초에 말을 타지 못하는 하룬은 아예 말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걸어갈 계획이었다.

 벨이 준 정보에 따르면 말 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노역마도 한 필에 보통 20골드가 넘었다. 탈 만한 말이라면 40골드는 호가했다. 다른 교통 수단이 없는 이 비욘드의 세상에서는 당연한 시세지만 이제 게임을 시작해서 겨우 전직 조건을 갖춘 유저에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벌써 성문 주변에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황도라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이나 물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하긴 수백만이 거주하는 황도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 오늘은 검문이 왜 이리 빡빡하지?”

 “제길! 저기 봐. 기사들까지 있잖아.”

 줄을 서서 문을 나가던 하룬의 귀에 앞에 가던 상인들의 대화가 들렸다. 문 쪽을 보니 빛나는 풀 플레이트 갑옷을 착용하고 강렬한 기세를 발산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오늘 무슨 일 있나?”

 “아니야, 한 이 주일 전부터 이래. 무슨 일인지 몰라도 밖으로 나가는 짐은 샅샅이 수색한다니까.”

 과연 그의 말대로 기사들은 수문 병사들을 감독해서 세밀하게 짐을 수색하고 있었다.

 “어떤 지랄 맞은 흉악범이라도 탈출한 걸까? 누군지 간덩이가 부었군.”

 “그거야 알 수 없지.”

 두런거리는 상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기다리던 하룬 일행은 금세 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용병대 표식과 수색하고 말 것도 없는 짐 덕분이었다.

 하룬과 재수 4인방은 착잡한 기분으로 멀어져 가는 황성을 돌아보았다. 안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압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적어도 이백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거대한 성을 감싸고 있는 성벽의 높이는 5미터가 훨씬 넘었고, 그 길이가 얼마나 긴지 눈으로 다 좇을 수도 없었다.

 ‘이런 곳에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구경 한번 못 한 것이 좀 걸리네.’

 그 점은 아쉬웠지만 이렇게 용병으로 비욘드의 세상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무척이나 가벼웠다.

 하룬은 잠시 멈추어 서서 상태 창을 열어보았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

레벨: 10

칭호: 용병대장(외 2개)

생명력: 480

마나: 490

정령력: 200

힘: 47(+15)        체력: 38

지식: 21        지혜: 39

행운: 26        민첩: 32(+12)

지구력: 12      심안: 6

집중: 14        통솔력: 100

S.P.: 30         명성: 300

화염 저항력: +10%

마법 저항력: +10%

용병대 전체 상태 창』

 용병대장이라는 칭호가 새로 생겼고, 통솔력이라는 항목이 생성되었다. 그 때문인지 소울 포인트가 10이나 올라갔고, 명성도 200이나 올랐다.

 넥컴월의 공지대로 명석이 500 이상 올라가면 상거래나 귀족들을 상대할 때 상당한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태 창 밑에 ‘용병대 전체 상태 창’이 붉은 색으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 내가 대장이라서 이렇게 대원들의 상태 창을 볼 수 있는 거구나.’

 “용병대 전체 상태 창!”

『이름: 돌풍 용병대

등급: D급 소형 용병대

특화 분야: 없음

구성원: 필립, 지탄, 시린느, 라트리나』

 구성원을 클릭하자 개인의 상태 창이 보였다.

『이름: 필립

종족: 인간NPC

직업: 검사

레벨: 35

칭호: 4급 용병

생명력: 1,140     마나: 735

힘: 43           체력: 47

지식: 25         지혜: 20

행운: 5          민첩: 15

집중: 5』

 ‘어? 스텟이 왜 이래?’

 필립은 이미 전직한 상태이고 35레벨이라 생명력이나 마나 수치가 하룬보다 훨씬 더 높았지만 스텟은 아니었다. 그보다 낮은 기본 스텟에 더해 집중 스텟이 하나 더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룬은 옆에 있는 지탄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름: 지탄

종족: 인간NPC

직업: 검사

레벨: 25

칭호: 5급 용병

생명령: 12,20     마나: 475

힘: 57           체력: 55

지식: 5          지혜: 5

행운: 5          민첩: 5』

 지탄은 필립보다 더했다. 힘과 체력은 높지만 지식과 지혜가 너무 낮아 불균형을 이루었다. 지탄이 어떤 캐릭터인지 스텟을 보는 것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영락없는 탱커구나.’

『이름: 시린느

종족: 인간NPC

직업: 검사

레벨: 21

칭호: 5급 용병

생명력: 765     마나: 735

힘: 25          체력: 27

지식: 18        지혜: 25

행운: 7         민첩: 11

교태: 6』

 시린느의 스텟은 평범했다. 모든 스텟이 균형을 이루었다는 것 외에는 특징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장점이 없는 쓸데없는 캐릭터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교태라는 특이한 스텟이 인상적이었다.

『이름: 라트리나

종족: 인간NPC

직업: 검사

레벨: 24

칭호: 5급 용병

생명력: 800     마나: 575

힘: 32         체력: 31

지식: 14       지혜: 16

행운: 8        민첩: 22』

 라트리나는 힘과 체력이 좋고 민첩성이 뛰어난 캐릭터였다. 성정은 가볍고 급하지만 몸놀림이 날래고 힘이 좋아 시린느보다는 훨씬 쓸모 있어 보였다.

 하룬은 재수 4인방의 상태 창을 보고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용병대를 이루어 여행하자면 각자 역할을 맡아 유기적으로 협동해야만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이전에 몇 번 안 되는 게임을 한 것밖에는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해야 하는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약한 몬스터를 상대해 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그렇게 상태 창을 닫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필립의 경우 레벨이 30이 넘는데 스텟치는 전직도 하지 않은 자신보다 더 낮았던 것이다.

 재수 4인방의 상태 창을 분석해 보니 초기 스텟은 평균 50으로 잡고 레벨 보너스로 받은 스텟을 합하면 110, 거기에 수련으로 평균 1정도를 얻는 것 같았다. 그의 경우와는 너무나 많이 달랐다. 이들과 비교하는 그는 거의 괴물 수준이었다.

 ‘벨의 뛰어난 성능과 약의 도움 때문이구나.’

 하룬은 벨과 양부가 구해 준 약재가 그에게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확실하게 인지했다.

 벨이 그가 필요한 영양분과 약재를 자동적으로 적시에 공급해 주고 자는 사이 피로를 풀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무식하게 수련할 수 없었을 것이고, 능력이 일취월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혼합 가죽으로 만든 하드 레더의 세트 효과와 강철검의 옵션으로 힘과 민첩이 대폭 올라간 수치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자, 가자!”

 하룬과 재수 4인방은 파로스 자작령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황도 인근 지역은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진 초지였다. 방목하면 딱 맞을 것 같은데 몬스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무성한 풀만 지천으로 자라나 있었다.

 멀리 보이는 곳에는 조그만 사람의 형체가 움직이고 색깔도 다른 것으로 보아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 같은데, 하룬 일행이 가는 곳은 잘 다져진 대로가 풀밭 사이로 나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툭 터지는 듯 시원하고 호쾌한 기분을 안겨 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바뀌지 않는 풍경이 되어 그 감동이 사라졌다. 대부분이 무릎 위를 조금 넘는 키를 가진 풀들이었는데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제법 단단하고 날카로운 잎사귀를 가졌다.

 곧 태양이 중천을 향해 올라가며 따가운 햇살과 열기를 뿜기 시작하자 풀이 익어 가듯 처음 맡아 보는 진한 풀 냄새가 났지만 이내 무감각해졌다.

 배리어에 싸인 유니온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과 진한 자연의 향기를 음미하며 걷는 하룬도, 여행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으로 마음이 복잡한 재수 4인방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낮의 햇볕이 강렬해지는 시간, 일행은 초지 가운데 넓은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대장, 한낮에는 쉬는 것이 일반적이야. 점심을 먹고 낮잠이라도 잔 다음 더위가 조금 약해지만 출발하는 게 몸의 피로를 줄이는 방법이야.”

 다른 사람들과 달리 몇 번 용병단을 따라 다닌 경험이 있는 필립의 조언대로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야, 너희들은 빨리 식사 준비해!”

 “그게…… 알았어, 대장.”

 정말 이렇게 일행의 식사를 준비하게 될 줄 몰랐던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이미 약속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세력을 지닌 용병단주의 딸들로, 그동안 다른 용병들과 달리 호사를 누리고 살았던 그녀들은 식사를 준비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뭘 하지?”

 “뭘 하긴, 수프나 끓이고 사 온 빵에 훈제 고기를 넣어서 먹으면 되지.”

 난감해하는 시린느와 달리 라트리나는 쉽게 말했다.

 “그럼 네가 불을 피워. 내가 나머지를 준비할게.”

 시린느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선기를 놓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근처에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다. 그러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라트리나를 불렀다.

 “그런데 나 불을 피워본 적이 없어.”

 “엉? 나도 없는데.”

 두 여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하룬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룬은 필립, 지탄과 함께 가지고 온 물건들을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왜?”

 “그게…… 불을 피워 본 적이 없어서.”

 난감해하는 두 여자의 말에 필립과 지탄이 나서려고 했지만 이내 움찔거리더니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생각해보니 그들 역시 불을 피워 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용병행을 해 보았던 필립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화석으로 피우면 되잖아. 누구 발화석 가지고 온 사람?”

 필립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발화석이 있어도 어떻게 불을 피우는지는 모른다. 물론 본 적도 없었다. 달랑 옷가지와 무기만 챙긴 라트리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두 사람도 자신이 직접 짐을 챙기지 않아서 발화석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심하네. 니들이 용병단의 후계자들이 맞긴 하냐? 그래가지고 무슨 여행을 한다고…… 쯔쯧.”

 하룬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날카롭게 베었지만 할 말이 없는 네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용병단의 후계자로 아카데미에 다니며 검술과 운영을 위한 행정, 회계 같은 것들을 배웠지만 실제적인 지식은 없는 것이다.

 “저리 비켜!”

 강한 짜증이 섞인 하룬의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달리 대응할 말이 없는 듯 두 여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물론 하룬 역시 발화석으로 불을 피우는 방법은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싸가지라는 에센셜 정령이 있었다. 불 피우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녀석을 소환하려면 기본적으로 중독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짜증이 난 것이다.

 하룬은 재수 4인방에게 등을 돌리고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나와.”

 “뭐야? 잘 쉬고 있는데 귀찮게 왜 불러?”

 소환된 싸가지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게 또 개기네. 너 또 맞고 싶지? 이젠 안 맞으면 심심하지?”

 “알았어, 알았다고! 능력이 없으면 마음이라도 착해야지 툭하면 폭력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하고. 에이!”

 연방 투덜거리는 싸가지가 나오자마자 역시나 중독되었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중독되었습니다. 초당 10의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빨리 불이나 피워 봐.”

 “에이, 별일도 아니네. 그런 하찮은 일로 이 위대한 싸가지를 불러내다니. 이건 그야말로 에고 마법검으로 고기를 자르는 짓과 같다고.”

 “시끄러워!”

 빡!

 “악! 파이어!”

 뒤통수를 오지게 맞고서야 싸가지는 투덜거림을 멈추고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나뭇가지는 금방 활활 타올랐다.

 “정령이구나!”

 “정말이었어.”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직접 눈으로 정령을 보진 못해도 하룬이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것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공간에서 어떤 미지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빌어먹을! 이제 알았냐, 시린느? 너 때문에 내 신세가 이렇게 꼬였다는 것만 기억해라.”

 라트리나가 시린느를 향해 그동안의 불만을 표출했다.

 “흥! 누가 정령마법사인 줄 알았냐고. 더구나 마나의 맹세까지 한 것을 어떻게 알겠어. 애초에 난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지 확실히 마법사가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다고. 그러는 너야말로 마법사를 동원해서 스캔하고는 하룬이 마법사가 아니라고 주장했잖아.”

 “아무튼! 너 때문에 내가 이 꼴로 코가 꿰였잖아.”

 “누가 할 소리.”

 “시끄러워! 이걸들을 전부 그냥!”

 으득!

 불을 피우고 황급히 해독약을 먹은 하룬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불을 피우자고 이 귀한 해독약을 먹어야 한다니 정말 한심했던 것이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다들 움찔했다. 이제까지 이런 하룬의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하룬의 눈에서 살벌한 빛이 강렬하게 쏘아졌다.

 두 여자는 하룬의 박력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냄비를 꺼내 물과 수프 가루를 한꺼번에 넣은 시린느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다른 조언자를 찾아 헤맸지만 세 사람은 애써 모른 척했다. 자칫하면 또 하룬에게 역정을 들을지 모르니 말을 아끼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 됐어, 대장.”

 챙겨 온 물건들을 파악하던 하룬과 필립 그리고 지탄은 불가로 갔다. 그동안 정해진 식사에 규칙적으로 식사하던 버릇 때문인지 식사 때가 되니 무척 허기가 진 것이다.

 “여기.”

 시린느가 떠 준 수프와 빵을 받아들고 나무 밑으로 온 하룬이 먼저 한 스푼 떠먹었다.

 “윽!”

 “우왁!”

 “크윽!”

 그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필립과 지탄도 비명을 지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세 사람은 동시에 시린느를 바라보았다.

 “그게…… 수프는 처음 끓이는 거라서.”

 시린느는 나름 귀여운 척하며 이 순간을 넘기려고 했지만 세 사람은 입에 물고 있던 수프를 토해 냈다.

 “으으으!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

 “너 첩자지?”

 필립과 지탄은 황급히 물을 찾으며 시린느를 째려보았다.

 “이잉. 그러니까 나 음식 못한다고. 나 이런 거엔 재능이 없으니까 제발 시키지 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시린느의 음성에서 물기가 잔뜩 묻어났다.

 “대장, 앞으로 쟤 식사 당번에서 아예 제외시키지?”

 “앞으로 이런 음식들만 먹는다면 난 말라 죽을 거야.”

 물을 연방 들이켜던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시린느의 어깨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하룬은 분명히 보았다.

 ‘흠. 고문관 짓을 해서 아예 식사 당번에서 벗어나겠다 이거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하룬은 처음부터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기에 두 사람과 달리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시린느는 좋게 말하면 똑똑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유형이었다.

 “좋아, 내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사람 만들어 주지. 시린느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때까지 식사를 전담한다. 망치는 재료 값은 나중에라도 다 받아 낼 거니까 알아서 하도록. 하다 보면 늘겠지.”

 필립과 지탄은 물론 불안한 얼굴로 곁에 서 있던 라트리나마저 폭탄 같은 하룬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계속 이런 음식을 먹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짐을 보니 지탄이 비상식량을 많이 가져왔네. 빵도 많고 육포도 많으니까 요리를 망치면 그걸로 먹으면 되지. 대신 시린느는 네가 한 음식이니까 그걸 먹도록 해.”

 그 말에 다행이라는 듯 세 사람의 얼굴은 정상을 찾았지만 어느새 얼굴을 가린 두 손을 내린 시린느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잘할 때까지 하면 돼. 뭐, 끝까지 못하면 내가 치료를 늦추어서라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칠 테니까.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못하는 것이 있느면 잘할 때까지 노력해. 같이 있는 동안 내가 확실하게 특기를 만들어 줄 테니까.”

 그 말에 다시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네 사람이었다.

 ‘독한 놈!’

 그들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 같이 먹자고.”

 하룬은 입안에 남은 수프의 감각을 다시 음미하더니 주저없이 수프를 퍼서 입에 넣은 다음 물을 마셨다. 그리고 빵을 씹으면서 조금씩 목으로 넘기니 먹지 못할 것도 없었다.

 수시로 해독약을 먹는 것은 물론 엘저가 만든 극악의 음식도 먹었는데 이 정도야 충분히 참을 만했다.

 필립과 지탄은 하룬이 먹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다시 수프를 조심스럽게 먹어 보았지만 이내 인상을 쓰며 뱉어 냈다. 묵묵히 빵과 수프를 물과 같이 먹는 하룬을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떠올랐다. 자신들은 입안에 물고 있는 것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룬을 제외한 세 사람은 결국 수프를 먹지 못하고 버렸다. 빵과 물로 배를 채운 것이다. 물론 시린느는 아예 굶어야만 했다.

 그 파장은 무척이나 컸다. 수련했을 때 먹는 양이 많았기에 거기에 길들여진 위가 금방 공복을 호소했고, 배가 고파서 그런지 등에 진 배낭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결국 해가 넘어가려 할 때 한 언덕에 도착한 일행은 허기와 피로로 죽을 지경이 되었다.

 “자, 여기 발화석이 있으니까 불 피워. 넌 앞으로 식사를 전담할 거니까 불 피우는 것도 네가 담당해.”

 하룬은 짐 정리를 하면서 필립의 짐 속에서 찾은 발화석과 솜을 시린느에게 주었다. 지부에 있던 용병이 짐을 챙긴 탓에 필립은 그 안에 무엇이 드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과 라트리나는 우리가 잘 천막을 치고, 혹시 모르니까 지탄은 나하고 함정을 설치하자.”

 다들 쉴 생각밖에 없었기에 하룬의 말에 지체 없이 움직였지만 시린느는 울상이 되어 바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울 생각은 고사하고 그녀 때문에 허기로 고생한지라 그녀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숙영지를 향한 방향에 함정 몇 개를 설치하고, 방울이 달린 실을 쭉 두른 하룬과 지탁이 돌아와 보니 다행히도 불이 피워져 있었다. 결국 시린느가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하하하!”

 그녀의 얼굴을 본 지탄이 배를 움겨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검댕으로 더러워진 그녀의 얼굴이 실로 볼만했던 것이다. 이미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만든 필립과 라트리나 역시 웃음을 간신히 참는 얼굴이었다.

 “고생했다.”

 하룬은 연방 입을 오므리고 바람을 불어 불길을 키우는 시린느의 곁을 지나며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검은 얼굴에 두 줄기 눈물 선이 생기고 환희의 미소가 떠오른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스스로 요령을 찾아낸 것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마침내 새로운 수프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도 그걸 먹을 용기가 나지 않는지 가까이 가지 않았다. 하룬 역시 나무 국자를 잡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수프를 떴다.

 “음, 괜찮은데. 반나절 만에 이렇게 발전하다니 대단하네. 자, 다들 먹자고. 이건 아까와 달리 제법 먹을 만하다고.”

 정말 맛있게 먹는 하룬의 모습에 용기를 낸 세 사람이 수프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은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따듯하고 구수한 수프의 맛이 느껴진 것이다. 물론 제대로 풀리지 않아 덩어리들도 있고, 야체와 고기 분말이 다 우러나지는 않았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먹을 만했다.

 “정말 눈물 난다.”

 지탄의 말대로 용병 아카데미를 나온 지 하루 만에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눈물겨웠다.

 아까는 정말 최악이었다. 유난히 먹을 것을 밝히는 지탁으로서는 그런 최악의 수프를 먹으면서 여행하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행복해진 상황이었다.

 “휴우, 내가 먹는 거로 이렇게 마계에서 천계를 오간 건 처음이다.”

 필립의 말에 지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프를 퍼 먹었다.

 모두가 만족한 표정으로 먹는 것을 본 시린느의 얼굴에는 습관적으로 짓는 요염한 미소 대신 수줍어하면서도 자부심이 우러나는 순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여행하는 동안 재수 4인방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대장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남자인 하룬과 필립 그리고 지탄은 친구처럼 편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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