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진수 형 (13/278)
  • 《진수 형》

     접속을 해제하고 캡슐에서 눈을 뜬 하룬은 첫인상과 달리 이곳이 무척이나 안온하고 익숙하게 느껴져 마치 오랫동안 살아왔던 정든 집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반갑게 그를 맞으며 인사해 오는 벨의 존재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벨, 요즘 비욘드는 어때?”

     -좋죠. 갈수록 신규 유저들이 늘고 있으니까요. 유저들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아이템도 제법 나오고 환거래나 경매가 점차 활성화되고 있어요. 더구나 퀘스트를 받았다는 유저들이 늘어났어요. 그동안 그런 게임 요소들이 없었던 까닭은 유저들의 실력이 너무 낮아서라는 것이죠.

     두루뭉슬하게 물어보는 하룬의 물음이었지만 그가 알고 싶은 것들을 콕 집어서 설명해주는 벨이었다.

     “벨, 전직에 대해 검색한 정보를 좀 말해줘.”

     굳이 검색한 정보를 다 읽을 필요는 없었다. 벨의 놀라운 능력이라면 알아서 정리한 것을 이야기해 줄 테니 말이다.

     -아, 오빠도 레벨이 10에 도달했죠? 언제 됐는데요?

     “몰라. 한동안 안내음을 끄고 수련하는 데만 열중했으니까. 중간에 확인해보니 그 사이에 됐더라고.”

     벌써 게임 시간으로 석 달이나 흘렀으니 아무리 소울 포인트를 위해 직접 몬스터를 상대하며 전직 도시로 여행하는 비욘드의 시스템이라고는 해도 이미 상당한 수가 전직했을 것이다.

     -비욘드는 다른 게임과 달리 전직하는 데 무엇보다 소울 포인트(S.P.)가 중요해요. 이 비욘드의 세계에 유저가 공헌하는 점수인 S.P.는 오크 한 마리당 1점 정도인데 유저 전용의 사냥터에서는 획득할 수가 없어요.

     거기까지는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S.P.를 가장 빨리 얻는 방법은 칭호를 획득하거나 보스 몹을 잡는 거지요. 전사 계열의 경우는 NPC와 사승을 맺더라도 이 S.P.가 부족하면 전직할 수 없어요.

     그것은 공평하다고 생각되었다. 하룬의 경우 아직 전직 여행을 떠나기 전이지만 캣랫 던전을 클리어하고 캣랫들을 잡은 결과 벌써 S.P.가 30이었다. 여행만 안전하다면 전직을 위한 조건은 편하게 채울 수 있었다.

     ‘어차피 늦었으니 마음을 편하게 먹자. 용병대를 만들어 의뢰를 받을 수 있으면 그렇게 여행하면서 전직이 가능한 마을을 찾아보자.’

     하룬은 벨에게 다시 지도를 보여 달라고 해서 목적지 세 곳을 정했다. 지도상으로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어쨌든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미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어요.

     “응, 뭔데?”

     하룬을 보던 벨이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은 게임하는 오빠에게 자동으로 공급되는 영양 성분과 약들 중에 떨어져 가는 것들이 제법 많아졌어요. 시급하게 채워 넣지 않으면 지금처럼 로그아웃하지 않고 연속으로 게임을 즐기거나 능력을 채우기가 힘들 거예요.

     “음,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그 문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 벨의 내부에 들어 있던 엄청난 분량의 식재료들을 떠올리자 눈앞이 아득했다.

     “채우는 데 얼마나 들까?”

     -그것은 아직 확인을 못 했어요. 일반적인 식재료는 지금 필요한 양과 가격을 검색하는 중이지만 약재는 불가능해요. 오빠의 경우 워낙 희귀한 약재들이 많이 들어가는 상황이에요. 더구나 구하는 것도 문제고요.

     “그래, 그것도 문제구나. 배리어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도 많던데. 일단 전직이 우선이니까 그 후에 생각해 보자.”

     -아, 나왔어요. 일단 한 달 후에 필요한 것들의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식재료의 리스트는 어마어마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가 먹어 치운 양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났던 것이다.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게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먹어 치운 거라고?”

     -네, 앞으로 전직할 때까지 열흘 정도 걸린다고 잡고 계산한 필요량을 포함시킨 거지만요. 대형마트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계산하니 약재를 빼고 약 100만 원이 조금 넘네요.

     “제길! 엄청나게 먹었구나.”

     -그만큼 오빠 육체의 신진대사가 남들의 몇 배에 해당할 정도로 활발했다는 증거지요.

     하긴 그의 육체적인 변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입은 하나도 없는데 돈을 써야 하는 상황이니 그게 문제였다.

     “히유, 세상에 공으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구나.”

     -푸훗.

     하룬의 탄식에 벨이 우스운지 작게 웃었다.

     “일단 전직이 먼저야. 그 후에 노가다를 뛰어서라도 어떻게든 벌어야지. 이게 다 내 몸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들인데.”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최소한 저 돈을 주기적으로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벨, 혹시 물건의 시세 같은 자료가 일반적인 정보도 구할 수 있을까?”

     거점 도시로 이동하려면 나름대로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이미 서비스가 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그런 정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를 미리 알아야 바가지를 쓰지 않을 것이다.

     -곧 준비할게요.

     벨에게 각종 정보를 받은 하룬은 한 시간에 걸쳐 그것들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숙지했다.

     식료품을 사기 위해 문을 나선 하룬은 잠시 진수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집에 있을까?’

     평일 이 시간에 집에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해보는 생각이었다. 이 F구역에 와서 유일하게 정을 준 사람이 바로 진수였다.

     ‘있을 리가 없지. 지금쯤 농장에서 한창 일할 시간인데.’

     하룬은 쓴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떼었다. 일단 마트에 다녀와야 했다. 돌아와서 그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밖에서 기다리기라도 할 참이었다.

     우웅- 끽!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열리는 문을 통해 복도로 나오는 사람은 바로 진수였다. 낡은 외투에 눈만 내놓은 터번에는 두터운 먼지가 쌓여 있고, 드러난 두 눈에는 진한 피곤이 묻어 나왔다.

     “진수 형!”

     “누구?”

     놀랍게도 진수는 하룬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직 밖으로 나가기 전이라 외투도 여미지 않았고, 터번을 두르지 않아 얼굴과 몸이 다 드러났지만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 저 하룬, 아니 정민이잖아요.”

     “어엉? 정민이?”

     진수는 한참 동안 동그래진 눈으로 하룬을 유심히 살폈지만 놀란 빛은 없어지지 않았다.

     “너 정민이 맞니?”

     “후훗.”

     대답 없이 웃고만 있는 하룬을 향해 진수는 눈을 비비고는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눈앞에서 친근한 웃음을 보내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던 정민과 사뭇 달랐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적당하게 발달된 근육들과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달라진 얼굴선이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정말 정민이야?”

     “내가 그렇게 달라졌나요? 난 별로 모르겠는데.”

     진수의 반응이 너무 격렬해서 하룬은 웃음기를 거두고 의혹에 찬 눈길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체중도 늘었고, 살이 오른 얼굴의 선도 달라지기는 했지만 진수까지 몰라볼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맞구나. 너 정민이가 맞아!”

     한참 얼굴을 살피던 진수는 하룬의 이마 한쪽에 난 별 모양의 상처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이 F구역에 온 첫날 못된 녀석들에게 돈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집단 폭행을 당하던 하룬을 구해주었던 때 생긴 상처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죽어라고 운동만 했어요. 왜 그날 있잖아요, 마지막으로 본 날부터 잘 먹고 쉬면서 운동만 했어요.”

     “그랬구나! 너무 달라져서 정말 몰라볼 뻔했다.”

     진수는 달라진 하룬이 신기한지 그에게 다가와 불룩 솟아오른 가슴 근육이며 단단한 팔 근육들을 만져 보았다.

     “아무리 잘 먹고 운동만 했다고 해도 그렇지, 한 달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정말 근사한 근육을 만들었구나.”

     “후훗!”

     하룬은 기분이 좋았다. 지난 한 달간 수련에만 몰두했던 성과를 진수에게 제대로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 시간에 들어와요? 퇴근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은데요.”

     “휴우, 그게 사정이 좀 있어.”

     하룬의 질문에 진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형, 시간 있으면 저랑 시장 보러 마트에 가지 않을래요? 안 그래도 양이 제법 될 거 같아서 난감했는데 같이 가서 점심도 먹고 밀린 얘기도 좀 해요.”

     “그럴까? 그래, 그러자. 답답해서 나갔다 오는 길인데 아무도 없으니 더 답답하더라.”

     진수는 흔쾌히 하룬을 따라나섰다.

     마트들은 D구역과의 경계에 있었기에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금방 도착한 것이다.

     “야, 왜 이렇게 많이 사는 거냐?”

     하룬이 카트를 가득 채우는 것을 보고 진수는 놀라워했다.

     “다 쓸데가 있어서요.”

     하룬은 자신이 최고급 캡슐을 가지고 있어서 자동 영양 공급을 위해 재료를 산다고 말하기가 좀 껄끄러웠다. 진수는 보급형 캡슐도 감지덕지해하는 상황이니 공연히 염장 지를 필요는 없었다.

     진수는 하룬이 사는 식품류가 거의 다 분말 형태나 액체 형태를 가진 것에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같이 장을 보면서도 시시각각 뭔가를 떠올리는 듯 얼굴색이 변했다.

     비록 식품류였지만 벨이 적어 준 목록에 있는 양을 모두 사니 총액이 1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몸에 삽입된 칩을 통해 연결된 은행 계좌의 예금으로 대금을 결제한 하룬은 돈 걱정에 한숨을 쉬었지만 네 자루나 되는 엄청난 양의 짐을 두 자루씩 양손에 가볍게 들고 1층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적어도 이 F구역에서는 큰 사치였다. F구역에서 살아온 두 사람은 이왕 돈을 쓸 거면 배가 불러야 잘 쓰는 것이란 공감대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먹는 고기 면은 맛있었다. 두 사람은 시장하던 차에 졸깃한 면발을 한동안 말없이 즐겼다.

     “형, 직장은 어떻게 된 거예요?”

     천천히 국물을 마시면서 하룬이 물었다. 사실 그것을 계속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연이 좀 길어. 그나저나 너 비욘드 한번 안 할래?”

     “네? 비욘드요?”

     “그래.”

     난데없이 비욘드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하룬은 눈만 껌벅거렸다.

     “좀 혼내주고 싶은 놈들이 있는데 내 주위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야.”

     “게임상에서 말이에요?”

     하룬은 그를 만난 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진수의 거친 목소리와 매서운 눈길을 보며 약간 의아했다. 하룬이 알기로는 진수 같은 순둥이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뿌드득!

     진수는 즉답 대신 이를 갈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강렬해지는 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 새끼들!”

     하룬은 말없이 진수를 응시했다. 누가 이 성격 좋고 착한 진수를 이토록 격렬한 감정에 싸이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내가 양자로 들어가 B구역에 살 때 학교를 같이 다닌 놈들이 있었어. 너한테 한번 이야기한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민석이라는 놈 이야기하지 않았니?”

     “아, 기억나요!”

     하룬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진수는 무척이나 분노한 목소리로 그 친구를 성토했었다. 순한 성격을 가진 진수가 화내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내가 양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무능력 판정을 받아 결국 이곳으로 쫓겨 올 때까지 난 그놈과 계속 학교를 같이 다녔어. 그놈 패거리로부터 성장기 내내 괴롭힘을 당하면서 말이야. 아주 지긋지긋한 악연이지.”

     인공수정을 한 탓에 친부모를 전혀 알 수 없는 하룬과 달리 진수는 고아원에 있다가 양부모에게 입양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능력을 이유로 바로 파양되었지만 말이다.

     “너도 알겠지만 B구역에 있는 학교들은 S와 A 그리고 B구역 출신 아이들이 다니지. 그 빌어먹을 놈에게는 주군이라고 부르는 강혜리라는 노블이 뒤에 있는데 이 미친년 취미가 나처럼 숫기 없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을 놀려먹고 괴롭히는 거였어. 민석이란 놈은 그년의 앞잡이였지.”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S구역에 거주하는 노블 학생은 A나 B구역 출식 학생들의 리더 역할을 해서 패거리를 형성하고 그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되는 것이 유니온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들의 부모를 통해 연결된 상하 관계가 후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만들어진 그 패거리들은 학교 내의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은 물론 아무런 배정이 없는 평범한 학생들을 먹이 삼아 괴롭히곤 했다.

     그 괴롭힘은 그들 무리에 편입되거나 혹은 하위 구역으로 전학을 가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집요하고 잔인했다. 학교장이나 교사들의 권위를 누를 정도의 권력과 다수의 힘이라는 물리적인 힘을 통해 학생들을 괴롭히는 그들의 행동은 어느 유니온을 막론하고 만연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재수 없게 그 연놈들이랑 같은 곳에서 스타트한 것도 처음엔 몰랐어. 전직을 위해 수련장과 살다시피 했거든. 그런데 전직을 위해 거점 도시에 가려고 파티를 하려는데 놈들을 만난 거야.”

     정말 재수가 없었다. 현실에서 그렇게 증오하던 상대를 또 게임에서 만나다니.

     “놀랍게도 연놈들은 왠지 날 친근하게 대하더라고. 벌써 몇 년이나 지난 학창시절이니 잊은 줄 알았지. 원래 그런 것들은 피해자만 생생하게 기억하지 가해자들은 금방 잊어버리거든. 마침 전직 요건인 레벨 10을 채운 유저들도 별로 없어서 놈들과 파티 해서 거점 도시로 향했어.”

     진수는 어지간히 게임에 몰입한 듯했다.

     “성격이 바뀌었는지 연놈들은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었지. 자기네들의 물품들까지 막 줄 정도였으니까. 노블이라서 그런지 여행 물품이나 아이템들은 풍족했어. 그리고 실력들도 나에 비해 처지지 않으니 소수의 오크 무리 정도는 가볍게 해치우며 거점 도시로 여행을 했지.”

     거기까지 말한 진수는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눈에서 불을 뿜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게임 경력이 좀 되는 데다 오래 전부터 레인저나 트레저 헌터를 직업으로 가진 덕분에 거점도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던전까지 찾아내는 개가를 이뤘어.”

     10레벨짜리가 던전까지 찾아내다니 대단했다. 물론 하룬도 우연히 던전 하나를 찾아냈지만 그건 정말 우연일 뿐이었다.

     “스틸을 당한 거예요?”

     “스틸? 훗! 스틸이면 차라리 좋겠다. 그나마 던전히 D급이라 파티 입장 조건이 붙은 덕분에 발견하는 순간 죽지는 않았지만 그게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을…….”

     진수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가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몹시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았다.

     “일단 던전에 입장하자 그 개 같은 강혜리 년이 마각을 드러내더구나. 그 독한 년의 눈짓을 신호로 난 밧줄로 꽁꽁 묶인 상태로 입구 주변에 있는 뱀 굴에 처박혔지. 아주 친절하게도 해독 포션까지 먹인 덕분에 난 죽지도 못하고 정신이상으로 강제 로그아웃당할 때까지 그곳에서 수많은 뱀들에게 물어뜯기며 지옥을 경험했지. 번쩍거리는 아이템들을 얻어가지고 나온 그 연놈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나에게 오줌을 싸고 모욕을 주기까지 했어.”

     으드득!

     하룬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노블들이라지만 그래도 학교 동창이었고 던전을 발견한 일등 공신인 친구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완전히 개념 없는 변태 사디스트들이었다.

     “그렇게 죽은 탓에 사흘간 접속 금지 페널티는 물론 심각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난 제대로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멍한 상태와 극도의 흥분 상태를 반복하던 난 일에 집중하지 못해 결국 농장에서 잘리고, 관리자의 신고로 강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지.”

     하룬은 진수가 너무 안타까웠다. 정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그랬구나. 그럼 앞으로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할 거예요?”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더라도 보수가 센 일도 못 하는 상황이니 살아갈 것도 걱정이었다. 자신은 그래도 예금이 꽤 남아있는 상태지만 진수는 어떨지 모르겠다.

     “6개월 정도는 버틸 예금이 있어. 일단 그걸로 어떻게든 해 봐야지. 돈이 필요하면 던전이라도 찾아야지. 내가 던전 찾는 데 일가견이 있거든. 이제까지 게임을 하면서 쌓은 내공이라면 최소한 같은 조건을 가진 다른 유저에게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도와주는 사람만 있으면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는 좋은 던전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생업을 팽개칠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는 진수지만 나름 방안은 생각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진수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놈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떡하긴, 그 뱀처럼 사악한 연놈들을 잡아서 복수해야지. 현실에서는 몰라도 게임에서까지 당하고 살 수는 없지. 최소한 지금의 캐릭터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주겠어. 그놈들에게 당한 충격으로 정신 치료 이력이 붙은 지금 상태로는 이제 웬만한 직업은 얻을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거든.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연놈들 중 몇 명은 끝장내고 말 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은 다시는 게임을 못 하도록 박살을 내야 해요.”

     하룬 역시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로 흥분했다. 약한 몸과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성장기 동안 무수한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니 진수가 당황할 정도로 무서운 살기까지 뿜어내는 하룬이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내가 좀 더 밝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면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럴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너도 알다시피 난 인간관계의 폭이 워낙 좁아서 도와줄 사람이 별로 없구나.”

     그것은 진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몇 차례나 전학을 한 이력을 가진 하룬은 그보다 더한 상황이었다.

     “현실에서 복수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는 일이니 반드시 게임 안에서 끝장을 내야 해. 도와줄 거지?”

     “도울게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하룬의 반응에 진수는 힘을 얻은 듯 얼굴색이 밝아졌다.

     “힘들게 전직했으니 일단 친구들과 만나야지. 현실 친구들과 게임을 통해 만난 세 명이 요른 백작성으로 합류할 거야. 녀석들은 나와 같은 신세지만 각자 장점들을 가진 친구들이니 만나면 무슨 방법이 나올 거야. 그리고 이제는 너도 있잖아. 네가 이제부터 게임을 하면 늦겠지만 그래도 힘이 되겠지. 내가 캐릭터를 빨리 키우는 방법을 전수해 줄 테니 서둘러 합류해 줘.”

     요른 백작성이라면 들어 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일단 전직하고 나면 행보가 자유로운 만큼 갈 수 있었다.

     “사실 비욘드는 이미 시작했어요.”

     “그래? 언제부터 했는데?”

     하룬은 비욘드를 하게 된 사연을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우연히 예전 양부에게 성인이 된 기념으로 게임기와 계정비를 받았다는 것만 말했다.

     굳이 상세하게 설명하기에는 개인적인 것들이고 보급형을 쓰는 진수에게 벨이라는 최상급 캡슐 이야기를 하기가 곤란해서였다. 더욱이 용병이 된 사실은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플레이를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자존심이 상해서 말을 못 했다.

     진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놀랐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고는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후후! 지금 전직하러 가고 있거든요. 전직하고 바로 그쪽으로 움직일게요. 참, 이제부터는 하룬이라고 불러줘요. 왠지 그 이름이 좋아요.”

     “좋아. 네가 합류해 준다니 나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구나. 구체적인 계획은 내 친구 마론이 짜고 있으니 네가 합류하면 다시 의논해 보자.”

     진수의 목소리는 어느새 들떴다. 지금 그에게는 한 손이라도 눈물 나게 고마운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비욘드를 주제로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점원의 사나은 눈총에 쫓겨나고 말았지만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진수를 통해 일반적인 유저들에 대한 정보를 들은 하룬은 벨이 수집한 정보와는 미세한 차이를 느끼며 충분한 간접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

     “뭐가요?”

     “이렇게 무거운 자루를 네 개씩이나 들고도 가뿐한 것을 보니 체격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힘도 무척 세진 것 같아.”

     진수는 정말 감탄했다. 자신은 하나도 얼마 들고 가지 못하고 결국 내려놓고 말 정도로 무거운 자루를 하룬은 너무나 가볍게 들고 그 먼 거리를 걸어온 것이다.

     이 정도의 근력이면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배리어 수비군은 지원해도 가볍게 통과할 것이다. 자신도 한때 수비군에 자원해서 테스트했던 관계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양아버지가 보내준 약초와 규칙적인 운동 덕분이지요.”

     대체적인 이야기는 했지만 진수는 게임에서 한 수련이 현실에 상당한 비율로 반영되는 벨의 놀라운 성능을 몰랐다. 아직 그런 놀라운 기능을 가진 캡슐의 존재는 출현한 적이 없으니 말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옷을 벗은 하룬의 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저 게임과 더불어 현실에서도 엄청난 운동량을 소화했기에 일어난 변화라고 인식할 뿐이었다.

     “그래, 네가 어려서 고생한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보상받으니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질투라도 할 법한 상황이지만 순후하고 진솔한 성정을 가진 진수는 하룬의 행운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집 앞에서 진수와 헤어진 하룬은 무거운 자루들에 든 식료품들을 모두 벨의 측변에 나있는 투입구에 넣었다. 워낙 양이 많아 그것을 넣는 데 한참이나 걸렸지만 다 채우고 나니 기분은 뿌듯했다.

     “이제 한 달 이상은 버티겠지.”

     마치 동면을 준비하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약초만 구하면 된다. 피 같은 예금을 찾은 터라 속은 좀 쓰렸지만 최소한의 필수품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것보다는 약초가 문제였다.

     전직이 끝날 때면 경매가 지금보다 더 활성화될 테니 그때쯤 운 좋게 구한 아이템들을 팔아야 할 터였다. 그때까지 환시세가 지금만 같으면 좋을 텐데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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