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이별 그리고 새로운 동료들 (12/278)

《이별 그리고 새로운 동료들》

 수료 과정을 마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수련생들은 마지막 식사를 하기 전 짐을 챙기기 위해 석 달 동안 머물렀던 기숙사로 돌아왔다.

 다른 수련생들도 그렇지만 하룬에게는 유독 감회가 새로운 곳이었다. 그는 단출한 방을 한참 동안 둘러보다가 결국 처음에 입고 있었던 초라한 옷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오늘 멋졌다. 우리 단장이 왔으면 너를 영입하기 위해 난리 쳤을 거다.”

 때마침 방을 나오던 갈리가 웃으며 다가왔다.

 “형도 멋졌어요. 3서클로 올라선 거 축하해요.”

 “흐흣, 고맙다. 다 네 덕분이야. 너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수련한 덕분이다.”

 갈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기분만은 흡족한 하룬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마법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수련복을 입고 있었던 것과 다르게 마법사 특유의 로브와 지팡이, 완드를 찬 동료 수련생들의 모습은 멋있었다.

 “나중에 시간 되면 꼭 들러라. 내가 제대로 한번 쏠 테니까.”

 “하하하, 너 때문에 즐겁게 수련했어.”

 “내가 워낙 몸치라서 여기에서는 너에게 한심한 모습만 보였지만 나중에 만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보여 줄게. 내가 우리 용병단에서는 잘나가는 편이거든.”

 “너 때문에 정말 즐거웠어. 그리고 내 경지도 한 단계 올라갔고. 몸조심하고 잘 지내.”

 갈리를 비롯한 마법사 동기들은 하룬을 껴안거나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사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수련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렇게 과분한 정을 받고 있는 줄은 몰랐다.

 거의 다 하룬보다 나이가 많기에 수련생들은 그를 따듯하게 격려해 주었다.

 ‘네미온은 결국…….’

 네미온과 몇 명의 마법사 동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와 나이가 거의 비슷해서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하룬은 묘한 배신감을 느끼는 한편 자책했다. 그가 좀 더 일찍 싸가지의 존재를 보여 주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그들의 신뢰를 시험한 것처럼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식당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엘저와 함께 광장 구석의 나무 아래로 온 하룬은 그녀가 손수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야, 이것도 좀 먹어 봐.”

 하룬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엘저가 새벽부터 손수 마련했다는 음식들을 먹는 중이었는데 그 맛이란 것이 너무 오묘해서 그의 혀와 입이 감히 품평하지 못할 정도였다.

 -음식이기를 포기한 이상 물질들을 섭취하여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그녀의 성의를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먹던 하룬의 귀에 급기야 능력치 하락을 알리는 안내음까지 들려왔지만, 먹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이 약간이라도 변하면 잽싸게 다른 음식을 집어 주는 엘저의 얼굴이 너무 기대에 차 있어서 현재 느끼는 감각을 감히 말할 수 없는 하룬이었다.

 “맛있지? 맛있지?”

 그녀의 기대 어린 눈길을 감히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하룬은 눈물을 머금고 웃었다.

 “우응. 마, 맛있어.”

 “호호호, 내가 얼마나 노력해서 만든 건데, 당연히 맛있지. 그동안 나도 이렇게 남자를 위해 요리하고 싶었다고.”

 하룬의 맛있따는 말에 얼굴이 활짝 펴지는 엘저였다. 어디 한 구석 여성미를 찾아볼 수 없었던 그녀에게도 여성의 본능은 숨을 쉬고 있었나 보다.

 ‘이 음실들은 내가 감히 논할 수 있는 맛이 아니야.’

 하룬은 차라리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저 때문에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짜고 맵고 달고 신 맛이 어쩌면 이렇게 부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그 점만은 정말 감탄스러웠다. 원래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입안에 들어가면 다 음식이라는 지론을 가진 하룬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초인적인 인내로 상당한 양의 음식을 먹고 나서야 엘저의 그 천진하면서도 무서운 눈길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하룬이 수석 수료한 덕분에 받은 방어구 세트와 4급 용병패를 구경하던 그녀는 패를 잡고 잠시 뭔가를 했다. 그리고 그가 먹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다가 엘저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문제를 물어봤다.

 “그런데 어떻게 정령을 부리게 된 거야? 우리가 만났을 때만 해도 너한테 그런 능력은 없었잖아.”

 “그게…….”

 하룬은 그동안 자신이 재수 4인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령 마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하수구에서 우연히 정령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구나. 네가 정말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 그렇지 않아도 매킨과 나도 그 문제 때문에 속을 무척 끓였거든.”

 말을 하던 엘저의 눈매가 갑자기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 재수 없는 연놈들이 누구라고?”

 엘저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룬이 정말 운 좋게 정령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자신과 매킨은 물론 아버지의 명예까지 욕보일 뻔했다.

 그녀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 분명한 하룬을 생각하면 가만 놔둘 수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해. 이제 끝났는데 들춰 봐야 무슨 소용있어?”

 하룬은 그동안 스트레스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엘저를 이용해서 또 혼내줄까도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앞으로도 더 치를 것이고.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NPC, 하룬은 유저다. 그들만의 세계에 들어온 그가 잘못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큰 문제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은 못 넘어가지. 용병의 신조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알아?”

 용병의 신조라니. 하룬은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것은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야.”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현실에서야 법이란 것이 있어 개인 간의 복수는 허용하지 않지만 아직 법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이 비욘드의 세상에는 개인 간의 율법이 존재하고 있으리라.

 “어서 말해 봐. 이건 비단 네 문제만이 아니야. 나와 매키느이 자존심도 걸려 있는 일이라고.”

 “그만해. 내가 충분히 혼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이미 녀석들을 손봐 주었단 말이야?”

 “그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열 배 이상으로 갚았으니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그녀는 계속 이야기를 하라며 방방 뛰었지만 하룬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싸가지를 이용해 복수했던 것을 모두 다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통쾌했지만 엘저는 그런 자신을 사악한 인간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엘저와 하룬이 작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껏 길드 본부 관계자들에게 잡혀 있던 엘저의 아버지 피엘과 매킨이었다.

 “아버지, 여기는 어떻게……?”

 피엘은 엘저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오자마자 대뜸 하룬을 빤히 보았다. 매킨은 불안한 듯 연방 눈을 굴리며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네가 하룬이라는 빌어먹을 놈이냐?”

 “네에? 아! 네, 그렇습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매섭고 무서운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는 초로의 피엘에게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포시가 흘러나왔다.

 하룬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화살처럼 눈을 파고드는 피엘의 존재를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려워 시선을 땅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것도 잠시, 수련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었던 그의 성격이 깨어나고 있었다.

 오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사람을 겁박하는지 몰라도 그는 꿀릴 것이 전혀 없었다. 혹시 엘저와 매킨이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피엘과는 직접적으로 얽힌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엘저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는데 왜 그가 두려워 떨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땅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당당하게 피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비록 그 눈빛이 마치 검처럼 자신을 난도질하는 느낌이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잠시 소름끼치는 적막이 흐르고 하룬의 눈빛은 점점 더 강해져 갔다. 그것은 바로 의지와 힘이 더해진 까닭이었다.

 “그렇게 사나운 눈으로 꼬나보면 어쩔 건데, 이놈아!”

 갑자기 터진 피엘의 말에 하룬의 몸이 휘청거렸다. 불쾌한 감정을 담아 노려보기는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 오히려 강짜를 부리는 것이 너무나 황당했던 것이다.

 그런 하룬을 향해 피엘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이구나.”

 하룬은 그제야 그가 자신을 시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어떻게 시험했는지 몰라도 나름 잘 대처한 것 같았다.

 “나한테 가르침을 받아 볼 생각이 있느냐?”

 “네?”

 다정한 피엘의 말에 하룬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런 하룬을 지켜보며 엘저와 매킨은 웃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가르칠 만한 녀석들을 찾기가 힘들지. 너무 쉬운 방법만 찾으려고 해. 실력이라는 것은 오로지 땀과 처절한 노력 그리고 생명을 건 실전을 통해 올라가는 것을 모르고 있어. 하지만 너라면 내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냐?”

 하룬은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좋은 기회다!’

 칠흑의 용자 피엘을 스승으로 모시면 일단 전직 문제가 가볍게 해결된다. 물론 소울 포인트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라도 실전을 가지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구속이라는 것이 생긴다. 하나의 관계를 맺는 것은 당사자들을 둘러싼 인맥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것은 자유로운 그의 행동을 구속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들과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벨이라는 최상급 캡슐 덕분에 한동안 로그아웃하지 않고 수련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게임이 현실 같다고는 하지만 그의 생활 기반은 결국 현실이다.

 비욘드는 또 하나의 현실에 가까운 세계지만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NPC들이 아무리 현실감있는 존재라지만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시스템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던 하룬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를 잘 보아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마운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군요.”

 “왜?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그런 하룬의 말에 엘저가 격하게 반응했다. 내심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짐작했던 피엘은 물론 말없이 서 있던 매킨도 얼굴색이 변했다.

 “엘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전 사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그, 그럼 자네가 바로 그 이방인이란 말인가?”

 이방인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는 엘저와 매킨과 달리 피엘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방인이라면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조건하에 우리 세계의 일원으로 잠시 머물다가 가는, 신에게 허락받은 존재가 아닌가. 그들은 자네처럼 계속해서 우리 세계에 머무를 수는 없다고 하던데?”

 놀라서 묻는 매킨의 말을 통해 하룬은 이들 비욘드의 NPC들에게 이방인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전 좀 특별한 이방인입니다. 그렇기에 엘저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룬은 자신의 상태를 뭐라고 규정지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럼 자네는 이 세상에서는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고 지속적으로 생활할 수도 없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특별하기는 해도 이방인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매킨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저를 보자 어느새 그녀는 놀랐던 감정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었구나. 어째 처음 널 보았을 때 말하는 것이나 맑은 눈빛이 세상에 너무 무지하다는 느낌을 받았어.”

 다행히도 엘저는 그렇게 많이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해, 엘저. 너에게는 거짓말을 했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순간적으로 실수를 했어.”

 하룬은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엘저와 매킨을 속인 것에 강한 가책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야, 그 정도라면 거짓말 축에도 못 들지. 사실 그 때 난 수련과 지도 때문에 신전에서 발표한 이방인들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상관없어. 그렇다고 네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뭐. 안 그래?”

 “그래, 넌 내 영원한 친구야. 첫 친구!”

 하룬은 생각보다 훨씬 더 편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엘저가 고마웠다. 첫 느낌 그대로 화통하고 밝은 성격의 엘저가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안타깝구나. 너 정도라면 저 고집쟁이 매킨이 거부한 대륙 용병단의 꿈을 이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할 수 없이 엘저에게 맡겨야겠구나.”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피엘이 시선을 하룬에게 돌렸다.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도 약속드리겠습니다. 늘 같이할 수는 없지만 엘저를 도와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하룬의 말에 피엘의 눈이 빛났다.

 “네, 엘저는 제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자 은인입니다.”

 피엘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이 걷혔따.

 “그래, 좋아! 비록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들로 알려진 이방인이지만 자네는 다른 것 같아. 엘저를 많이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하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한 번에 불과하지만 그가 경험한 엘저나 매킨도 그랬고 피엘도 진실한 사람들이었다. 현실에서도 이런 진솔한 느낌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제 곧 대륙 전체가 요동칠 것이네. 비록 이방인이지만 자네도 서서히 준비를 하게. 지금처럼 고여서 썩어 가는 세상이 아닌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야. 새로운 통일 제국이 생기든 아니면 전국 시대가 도래하든 우리 용병들에게는 기회가 올 거야.”

 무슨 말인지 하룬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피엘의 말과 태도에서 비욘드의 세상에 무언가 큰 변혁의 기운을 읽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자네의 암기술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제국 시대가 도래하기 전 대륙을 떠돌며 자네처럼 신기에 가까운 암기 실력을 가지고 숱한 강자들을 쓰러뜨린 사람이 있었다고 들었네. 실존했던 인물인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비수 한 자루로 당시 대륙 최강의 소드 마스터를 쓰러뜨렸다고 전해지네.”

 “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었습니까?”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 멋졌다. 비수 한 자루로 대륙을 호령하다니.

 “칠흑의 숲에서 내 생명을 구해 주었던 엘프족의 장로에게 직접 들은 말이네. 그들은 거짓말을 모르는 종족이니 사실일 거야. 실제로 후크란 산맥 일대에는 아직도 그 영웅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기도 하지. 기회가 되면 그 부근을 여행해 보게. 뭔가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의 말에 하룬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지금 당장은 전직이 목표지만 그것이 끝나면 반드시 그 전설의 흔적을 쫓아가 보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일 년 후면 길드와 맺었던 계약이 모두 끝나네. 황실에서도 전에 없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네. 혼란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거지. 혼란기를 이용해서 우리는 향후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용병단의 초석을 세우게 될 걸세. 그때가 되면 자네가 한 손 거들어 주게. 갈수록 이방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 능력이 놀라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으니 일 년 후라면 이방인인 자네가 큰 힘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라면 저도 꽤 많이 변해 있을 겁니다.”

 하룬은 이제야 그가 꿈꾸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피엘과 엘저는 거대한 용병 집단을 꿈꾸고 있었다. 난세를 이용해 지금처럼 제국에 머무르는 수준을 벗어나 대륙 전체를 종횡하는 강력하고 거대한 용병단을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그 꿈의 내용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

 그저 강해지고자 하는 목표만을 생각해 온 하룬이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 강함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실전과 경험이 필요하고, 그를 도와줄 동료들과 친구들이 필요하다.

 ‘이들과 같은 꿈을 꾸어도 좋겠지.’

 용병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목표는 레벨 업으로 랭커가 되어 유명해지거나 엄청난 아이템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그들과는 출발부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강해지는 것이다.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이들과 같은 꿈을 꾸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이미 많은 수련생들이 떠난 숙소는 얼마 전과 달리 조용했다. 몇 개 되지 않는 짐을 낱낱이 챙기고 나서도 하룬은 한동안 방을 떠나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 좀 해야겠다. 다른 유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좀 알아보고.’

 그나마 운 좋게 엘저를 만나 용병 기초 과정에 들어온 덕분에 같이 게임을 시작한 유저들 중에서는 스텟 면에서 조금은 더 나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S구역이나 A구역에 사는 노블맨들이 최상급 캡슐을 사용해서 24시간 로그인하고, 돈이나 권력으로 수많은 하수인을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게임을 공략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것도 심드렁해졌다.

 현실에서의 부와 권력이 게임에서도 통하는 세상이 아닌가. 쓸데없는 기대로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이런! 전직!”

 한동안 수련에 빠졌고, 최근에는 싸가지 때문에 자신이 게임하고 있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하룬이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며 황급히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

레벨: 10

칭호: 용병 기초 과정 수석 수료자(외 2개)

생명력: 480

마나: 490

정령력: 200

힘: 32        체력: 38

지식: 21      지혜: 39

행운: 26      민첩: 32(+2)

지구력: 22    심안: 7

집중: 24      S.P.: 40

명성: 100』

 새로 생긴 칭호의 효과로 소울 포인트가 10이나 올랐고, 명성도 100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들보다는 스텟의 수치들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강해지기 위해 피땀 흘려 올린 수치들이니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캣랫들을 해치우고 칭호를 받았을 때는 전 스텟이 올랐는데 이번 칭호는 그런 효과가 없구나. 칭호마다 다르다는 거군. 이번에는 그냥 S.P.만 올랐어. 근데 이 정도 스텟이면 높은 건가?’

 특별히 아는 유저가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로그아웃도 몇 번 하지 않았던 하룬이라 누구하고 비교할 수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싸가지라는 펫을 가지면서 정령력이라는 것이 생긴 것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그 수치는 있으나마나 한 정도였다.

 칭호도 달라졌다. 용병 기초 과정 수석 수료자로 변한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칭호에 대한 것도 알아봐야겠다.

 마지막 한 달 동안 용병이 갖추어야 할 지식을 닥치는 대로 배운 덕에 낮았던 지식도 다른 스텟들과 비슷할 정도가 되었고, 새로 생성된 스텟 중에서는 심안을 뺀 지구력과 집중 스텟이 상당한 폭으로 올랐다. 어떻게 올리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행운 스텟마저 3이나 올라 있었다.

 하룬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레벨 업으로 얻은 스텟을 모두 행운에 넣었다. 오염된 정령이긴 하지만 싸가지라는 펫을 가지게 된 것도 행운 스텟이 높아서가 아닐까 하고 믿는 하룬이었기에 후회나 갈등은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스킬 창을 열었다.

『[패시브 스킬]

N 정령 유도 암기술: Lv.1(7.23%)/Lv.5

자아를 가진 특별한 정령의 힘을 이용해서 암기를 조종할 수 있는 스킬이다. 레벨이 올라가면서 그 위력이 강해진다. 마나 소비는 초당 5.

센스 소드: Lv.1(20.00%)/Lv.5

응급 치료: Lv.1(2.50%)/Lv.3

치료약 조제: Lv.1(2.30%).Lv.5

함정 설치 및 해체: Lv.1(3.00%)/Lv.3』

 새로 생긴 정령 유도 암기술을 비롯한 스킬들을 보니 빨리 전직을 위한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직은 모두 하급에 불과하지만 그가 석 달간 강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잊고 수련했던 결과로 만든 소중한 스킬들이었다. 중급이 되기 위해 필요한 수치들이 스킬 창을 닫고도 한동안 아른거릴 정도였다.

 ‘일단 전직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벨에게 알아보고 직업을 결정하자.’

 하룬은 비로소 마음을 정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용병 아카데미를 퇴소한 시간, 하룬은 다른 세 근로 수련생들과 함께 마지막 일을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끙차!”

 이제는 다들 힘이 제대로 붙어, 다른 때보다 배는 더 많이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쉽게 날랐다. 그렇게 가녀렸던 로즈마저 양쪽에 든 양동이 안이 꽉 찼지만 팔뚝보다 굵은 철봉을 한 번도 쉬지 않고 하치장까지 들고 갈 정도였다.

 “그래도 무지 서운하네.”

 모글이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닦으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너무나 끔찍해서 자진 퇴소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군요.”

 메넌도 감회가 새로운지 지독한 냄새가 나는 쓰레기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후훗, 이게 모두 하룬 오빠 덕분이지요.”

 로즈가 방긋 웃었다. 사실 그들 근로 수련생들이 힘들 때마다 힘이 되었던 것은 하룬이었다. 그가 격려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보며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이를 악물었고 그렇게 견디어 냈던 순간이 쌓여 무사히 퇴소하게 된 것이다.

 “그건 맞아!”

 “아 무렵. 하룬 아니었으면 난 그 재수 없는 놈들이 괴롭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무슨 일을 벌였을 거야. 그랬으면 중도에 퇴소되었겠지. 사실 우리 선배들 중에도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차별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어.”

 모글이 고마움을 담은 시선으로 하룬을 보았다.

 하룬은 그들의 시선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지만 나 역시 세 사람이 없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좋은 동료가 있었기에 힘든 시간을 버티고 정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자신 때문에 자극을 받고 마음에 위안을 받았다면 자신 역시 그랬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더 쉽게 근로 수련 생활을 견뎌 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내가 근사하게 술 한잔 살게.”

 “나도. 넌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용병이 될 거야. 그때 가서 나 모른 척하면 안 돼.”

 모글과 메넌의 얼굴에도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근데 하룬 오빠는 이제부터 뭐할 거야? 우리처럼 용병단에 들어갈 거야 아니면 자유 용병이 될 거야?”

 로즈의 말에 하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용병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엘저의 도움으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좀 생각해 봐야겠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이미 엘저나 피엘에게 혼자만의 길을 걷겠다고 천명한 상황이고, 무엇보다 전직이 급한 상황이라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른 수련생들 말로는 엘저 교관의 아버지인 피엘에게 정신으로 사사할 거라는데 그럼 자유 용병이 되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칠흑의 용자’ 피엘이나 ‘은발의 마녀’ 엘저 역시 어느 용병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까.”

 용병계의 사정을 잘 아는 모글의 말에 두 사람은 부럽다는 듯 하룬을 쳐다보았다. 사실 전설적인 용병인 피엘에게 직접 사사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며 앞날이 보장되는 것이다.

 “아무튼 넌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동기야. 게다가 우린 같은 근로 수련생으로 누구보다 더 힘든 수련 생활을 했으니까.”

 메넌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오전에 보인 환상적인 암기술과 하룬이 정령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존경에 가까운 시선으로 그를 대했다. 물론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 저 녀석들이 여기에 웬일이래?‘

 모글의 말에 시선을 돌려 보니 재수 4인방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 볼일이 남았나?”

 그동안 쌓인 악감정에 불퉁하게 나가는 모글이었다. 수료까지 한 마당이니 제대로 혼내 줄 작정을 한 모글은 어느새 품에서 작은 마법 지팡이를 꺼내고 있었다.

 “하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너희들과는 아무런 볼일이 없다고.”

 이제까지와 달리 비꼼과 건방짐을 버린 필립의 말에 모글의 표정이 약간은 머쓱해졌다.

 “무슨 말? 행여 모든 것이 다 밝혀진 마당인데도 억지를 쓰고 싶은 거야?”

 메넌 역시 인상을 구기며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였다.

 “아니야, 그 일에 대해서 사과도 하고 다른 할 말도 있어서 온 거야.”

 필립의 대답에 메넌 역시 모글처럼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싸우거나 시비를 걸기 위한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존중까지 느껴지는 예의 바른 말에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동안 너희들을 건방지게 대하고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할게. 나름대로 잘났다고 생각하던 우리였기에 하룬에게 밀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했어. 용서해.”

 “나도 미안해.”

 “힘들게 수련하는 너희들을 괴롭힐 의도는 아니었는데 필립의 말처럼 자꾸 밀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잘못된 행동을 했어.”

 “음, 일단 하룬을 제외한 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 유치한 행동으로 너희를 힘들게 한 것 사과할게.”

 네 사람의 말에 모글과 메넌 그리고 로즈는 일순 당황했다. 나름 좋은 배경과 능력까지 있는 녀석들에게 이렇게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실 밖에서 만났다면 감히 말도 붙일 수 없는 신분을 가진 녀석들이 아닌가.

 믿을 수 없는 일에 잠시 말을 잊었던 세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하룬이 고역이었지 자신들은 그리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저들 때문에 다른 수련생들에게 지저분하다는 이미지를 심하게 주어 생활은 좀 힘들었지만 그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역대 수련생들도 예외 없이 겪었던 일들이다.

 “으음, 너희들의 말에 진정이 엿보이니 그 사과 받아들이지.”

 모글이 대표로 말했다. 나머지 세 사람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 팔뚝을 마주 대는 용병식 인사로 남아 있는 마음의 앙금을 털어 버렸다.

 “일단 너희들은 자리를 좀 비켜 줄래? 하룬에게 할 말이 있어.”

 필립의 말에 세 사람은 하룬을 돌아보았다. 미소를 띠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하룬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만나자.”

 “몸 건강하게 지내.”

 “오빠, 다음에 만나면 로즈가 좋은 여자 소개시켜 줄게.”

 세 사람은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몰라서 서운한 마음에 자꾸 미적거렸지만 하룬을 위해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야?”

 하룬은 녀석들이 할 말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정중하게 사과할게. 그동안 널 오해했어. 네가 마나의 맹세를 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그걸 믿지 않고 비리를 통해 이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필립은 그 말과 함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랜 수련으로 균형 잡힌 몸매에 조각 같은 미남이고 익스퍼트급에 근접하는 검술까지 익힌 반듯한 녀석이었다. 다른 기회를 통해 만났으면 하룬이 먼저 친구 하고 싶었을 멋진 녀석이었다.

 “잘못했어. 아버지가 꼭 수석으로 수료하라고 했는데 네가 너무 튀기까 질투가 나서 그랬어. 게다가 인맥을 통해 조사했는데 신원도 수상하고 그래서…… 정말 미안해.”

 거대한 체구에 강력한 검술을 익힌 지탄 역시 바닥에 무릎을 댔다. 그를 괴롭힐 때는 흉측하게 보이더니 이렇게 보니 순박한 얼굴을 가진 녀석이었다.

 “난 분위기 때문에 그랬어. 처음에는 너에게 남자로서 호감까지 가졌는데 애들이 널 가짜 마법사라고 그래서…… 미안해.”

 처연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는 시린느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누가 보아도 손을 잡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청순한 얼굴이지만 하룬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눈물이 고인 눈동자가 영악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나도 미안해. 내가 원래 성격이 좀 급하고 생각이 짧은 편이라 널 오해했어. 하지만 너도 잘한 것은 아니야. 마나의 맹세를 했다고 이야기만 해 주었어도 난 너와 친구가 되었을 거야. 나도, 우리도 잘못했지만 너도 약간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해.”

 사과를 하면서도 당찬 기세를 잃지 않는 라트리나였다. 약하고 가녀린 척하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시린느보다는 훨씬 더 호감이 갔다.

 “일어나. 너희들이 복통과 설사로 괴로워하는 것을 본 것으로 이미 미움과 원망은 털어 버렸으니까. 이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일어난 네 사람의 표정은 한결 가벼웠다.

 하룬은 홀가분한 표정이 된 필립과 지탄의 얼굴을 보며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여자라서 그런지 아직도 완전히 승복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사과까지 받았으니 이걸로 모든 것을 털어 버리자.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보자. 그럼.”

 하룬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네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이다.

 “이대로 가면 어떡해?”

 “그래, 우리를 완전히 고쳐 주고 가야지.”

 네 사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미 치료약을 다 써서 없는데 무슨 수로? 거기다 난 내일 당장 여행을 떠날 건데.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해 봐. 이 넓은 황도에 나보다 더 용한 치료법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난 경험도 없는 너희들을 끌고 여행을 떠나긴 싫어.”

 차가운 하룬의 말에 필립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안 돼! 한번 손을 썼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네가 아니면 우린 또다시 똥싸개가 되고 말 거야. 이 필립 일생에 다시 그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

 필립은 이를 악물었다. 평생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용병단에서도 그렇지만 아카데미를 다니면서도 모든 이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군림했던 자신이다. 그런데 마음을 한번 잘못 쓴 탓에 몹쓸 병에 걸려 남들에게 설사 냄새 나는 녀석이라고 손가락질당해야 했던 치욕수러운 순간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그래, 차라리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낫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바닥을 뒹굴며 아래위로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는 건 절대 안 돼.”

 지탄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흑흑, 살려 줘. 난 또다시 그런 신세가 되는 건 죽기보다 싫다고. 나 같은 미모의 레이디가 아무 때나 배를 움켜쥐고 뒹굴다가 냄새나는 오물로 속옷을 더럽히는 것을 생각해 봐. 제발…….”

 시린느는 아예 울고 있었다. 아까 사과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진심이라는 것이 팍팍 느껴졌다.

 “제발, 도와줘. 네 마누라가 아니라 하녀라도 될 테니까. 이렇게 평생 어떻게 살라는 거야. 이 꼴로는 절대로 고향으로 갈 수 없다고. 흑흑흑.”

 라트리나 역시 울음을 터뜨렸다.

 네 사람은 나름대로 여기저기 알아본 거 같았다. 녀석들으 치료할 때 완전히 오염 물질을 빨아들이지 않게 조절한 결과 지금까지도 툭하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화장실을 오갔다.

 ‘하긴 그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좀 그렇긴 하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네 사람은 애걸복걸하며 완벽하게 치료해 달라고 빌었지만 하룬은 애초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후우, 이걸 어쩐다. 난 혼자서라도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가, 같이 가자. 우리가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질게. 치료약을 만드는 비용 역시 내가 낼게. 정령사인 너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 그리고 검술도 내가 너보다는 낫고.”

 필립은 다급했는지 하룬이 원하는 말을 술술 내뱉기 시작했다. 하룬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고여 있었다.

 하룬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필립에게 말했다.

 “좋아, 성가시긴 하지만 그 정도 조건이라면 너는 데리고 가지. 너희들을 치료하는 약의 조제법이 워낙 어려워 실패할 확률도 높고 약재도 비싸서 내가 힘은 좀 들겠지만 너와 함께 여행하면 최소한 심심하지는 않겠지.”

 “정말? 하하하! 고마워, 하룬. 정말 고마워.”

 필립은 얼마나 좋은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하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지탄의 얼굴이 더욱 다급해졌다.

 “나도 같이 가자.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힘은 끝내주잖아. 모든 잡일을 다 할게. 필립처럼 약값은 물론 경비와 각종 장비까지 책임질게. 나도 데리고 가. 응?”

 덩치는 큰 녀석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 부탁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재미있기까지 한 하룬이었다.

 “좋아. 너도 같이 가자. 경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흐흐, 고마워. 널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살게. 넌 내 은인일 뿐 아니라 하나뿐인 후계자인 우리 아버지에게도 은인이야. 날 치료만 해 준다면 언젠가 네가 원하는 일이 내 힘으로 안 되면 우리 아버지가라도 들어줄 거야.”

 지탄은 아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직도 가끔 창자가 꼬이고 뒤틀리는 고통과 찢어진 항문을 통해 수시로 쏟아지려 하는 배설감에 미칠 것 같았던 것이다.

 “나, 나는? 나도 데려가!”

 역시 영악한 시린느였다. 필립, 지탄과 달리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자신을 데리고 가라며 은근히 볼륨 있는 몸을 하룬에게 밀착하는 시린느의 목소리에는 비음까지 섞여 있었다.

 ‘완전히 요물이구나.’

 아직 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하룬이 묘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색깔을 가진 미모와 타고난 매력을 발산하는 몸짓으로 다가오는 시린느였다.

 하지만 시린느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행태는 현실에서 하룬이 가장 증오하는 S나 A 노블들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돈과 권력을 앞세우거나 미모를 내세우는 것이 증오감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용병단은 이곳에 지부가 없어서 아무것도 준비할 숙 없어. 하지만 네가 데려가 주기만 한다면 원하는 일은 뭐든 다 할게. 빨래하라면 하고, 식사를 준비하라면 할게. 설사 잠자리 시중을 들라고 해도 감수할게.”

 여자답지 않게 급한 성격을 가졌지만 나름 화통하고 솔직한 라트리나는 황도에 아무런 기반이 없어 절망적인 얼굴로 변했다. 그러나 상급 아카데미까지 다닌 머리는 장식이 아니었다. 하룬이 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느새 파악한 것이다. 그러니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허헛! 꼭 내가 여자나 밝히는 인간처럼 말하네.”

 하룬은 너무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헛바람을 토했다. 물론 여자에게 아직도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상황을 이용해서 그녀를 어떻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아니야. 내 마음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야. 제발 나도 데려가 줘. 대신 재가 수결한 증서를 쓸게. 여행을 위해 필요한 돈과 치료약을 만드는 약재 가격을 나중에 지불한다는 것과 네 부탁을 무조건 하나는 들어준다는 약서를 증서로 쓸게. 우리 큰오빠는 내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거야.”

 필립과 지탄의 제안을 선선히 수락한 것에 반해 시린느와 자신의 말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하룬의 태도에 애가 닳았던 라트리나는 급기야 용병이나 상인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증서까지 언급했다.

 하룬은 지금도 그의 몸에 부드러운 가슴의 융기를 비벼 대는 시린느보다는 솔직한 성격의 라트리나에게 더 호감이 갔다.

 “좋아,그럼 너도 같이 가자. 일단 경비가 없어서 모든 것을 외상으로 하는 것이니 네가 식사를 준비하면 되겠네.”

 “끄앗! 좋아, 너무 좋아.”

 마침내 허락받은 라트리나가 아이처럼 깡충거리며 환호를 질렀다.

 “난? 나는? 으응?”

 여전히 콧소리를 내며 기분 좋은 향기를 풍기는 시린느의 말에 하룬은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난 너처럼 날로 먹으려는 사람은 싫어. 경비며 장비 그리고 치료약을 만들 약재까지 준비하는 쟤들이야 내가 수고할 이유가 있지만 넌 나한테 뭘 줄 건데?”

 “그, 그건…… 멋있는 남자라면 아름답고 지혜로운 레이디의 곤란한 상황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 법이잖아.”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부드러운 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긴 목과 귀밑머리를 드러냈다.

 ‘후욱, 예쁘긴 하네.’

 작고 귀여운 귀와 뽀얀 목덜미 그리고 옅은 금발은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날리는 머리칼에서 향긋한 향기까지 날아오니 절로 마음이 동했다.

 필립이나 지탄은 어느새 눈이 풀리고 코를 벌름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하룬은 달랐다.

 “넌 안 돼! 난 그런 멋있는 남자가 아니니까 내게 그런 걸 바라지 마. 그게 멋있는 남자면 난 차라리 나쁜 남자가 되고 말 거니까.”

 능력이 없다고, 친부모가 없다고 무시받았던 현실 생활을 통해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능력과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 하룬은 절대로 대가 없이 일해 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 대가를 받고 할 일은 사기를 치는 것이지만, 그거야 녀석들이 애초에 자신을 괴롭혔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일이었다.

 시린느는 절망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자신의 매력을 이렇게 매몰차게 뿌리친 남자는 처음이었다. 모두들 그녀의 배경과 미모에 어쩔 줄 몰라 했는데 하룬은 달랐다.

 “흑흑, 너무해.”

 “너무하면 제대로 대가를 지불하면 되잖아. 너도 큰 용병단의 후계자라며?”

 하룬의 말에 시린느는 큰 상처를 받았다. 여태껏 이런 질 나쁜 놈은 처음 만났다. 대상이 남자, 특히 젊으면 백이면 백 다 통하는 그녀의 특기가 통하지 않으니 달리 떠오르는 방도가 없었다.

 “알았어. 나도 쟤들하고 똑같이 지불할게.”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대신 넌 앞으로 라트리나와 함께 식사와 빨래를 맡아.”

 시린느는 이번에는 진짜로 흘러나오는 눈물 때문에 재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룬을 향한 경외심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레이디의 눈물까지 씹다니 정말 대단한 강심장이다.’

 하룬을 보는 필립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시린느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데 그런 그녀에게 빨래와 식사까지 준비하게 만들다니 대단한 녀석이었다.

 ‘최소한 내 경쟁자는 아니다.’

 단순히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에 지탄은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적어도 늙으면 소용없을 얼굴 따위에 홀리는 멍청한 사내는 아니라 이거지. 흐음, 연구 대상이네.’

 라트리나도 눈길이 묘하게 변했다. 시린느와 같이 어울리기는 하지만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남자들을 농락하는 그녀와 그에 농락당하는 사내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일단 의도대로 상황을 만든 하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뭔데?”

 다들 궁금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하룬이 자신들의 상식을 벗어나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긴장했다.

 “난 이방인이다.”

 “엉? 설마 이방인이라고도 부르는 그……?”

 “맞아.”

 다들 하룬이 이방인이라는 소리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날 우습게 여긴 거군.”

 시린느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전에서 포고해 왔던 신탁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수시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고 하던데?”

 그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하룬은 금방 알았다. 피엘에게 이미 한번 경험한 터였다.

 “좀 특별한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네 사람은 하룬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크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생각보다 이방인에 대한 NPC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다.

 또 하나 해결할 문제가 더 있었다.

 “일단 같이 여행하기로 했으니 서열은 제대로 정해야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하룬의 말에 네 사람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서열이 정해지지 않으면 위험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가장 나이가 어린 시린느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감돌았다.

 “일단 리더는 내가 해야겠지?”

 하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네 사람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들의 몹쓸 병 때문에 하룬에게 의지하는 상황이니 그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럼 난 나이를 떠나 대장이겠네?”

 “그, 그야…… 그렇지.”

 필립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는 다들 날 대장이라고 불러. 우리 다섯으로 용병대는 어림없겠지만 그래도 남들이 볼 때 용병대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지.”

 시린느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의외로 나머지 세 사람은 선선히 동의했다.

 “난 찬성! 어차피 하룬이야 4급이고 우린 5급이니까 당연하지.”

 지탄은 역시 단순했다. 수석 수료생이라 4급 용병이 된 것을 기억하고는 별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나도. 외상으로 내 병까지 고쳐주는데 대장이면 어떻고 오빠면 어때? 난 무조건 찬성이야.”

 지탄과 라트리나의 말에 필립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럼 차라리 용병대 등록을 하자. 숫자고 최소 조건은 채웠으니 의뢰를 받기도 좋을 거야.”

 의견을 낸 필립은 나이로 보면 가장 연장자였다. 스물셋인 그는 황도에 있는 제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용병의 세계는 나이가 아니라 그 능력이 우선하는 세계다. 그 세계를 지척으로 두고 성장한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하룬을 대장으로 받아들였다.

 “필립과 지탄 그리고 시린느는 이 황도에 용병단의 지부가 있으니까 의논해서 여행에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해. 그리고 경비도 알아서 챙겨 오고. 난 치료제를 만들 재료를 구해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 서문 근처의 길드 사무실 앞에서 보기로 하자.”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네 사람이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하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어릴 때부터 용병단에서 자란 네 사람이라면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그럼 내일 만나자. 아, 그리고 너희 세 사람은 약재 값으로 100골드씩 챙겨오는 거 잊지 마. 여행 경비는 한 30골드면 되겠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남는 것은 없으니까.”

 하룬은 황망한 표정인 네 사람을 그 자리에 남겨 두고 유유히 숙소로 향했다. 이제 짐을 챙겨 어디 여관에라도 들러 로그아웃할 생각이었다.

 전직하려면 거점 도시로 가야 할 터,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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