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하룬은 해독약을 충분히 확보한 이후로는 틈나는 대로 싸가지를 소환했다.
그가 중점적으로 수련하는 것은 싸가지의 능력을 이용한 비수 날리기였다. 정령의 힘과 자아를 가진 존재인 싸가지에게 비수의 궤도와 빠르기를 조정하게 만드는 수련이었다.
하지만 그 수련은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세한 조정을 하기에는 중독 때문에 수시로 소환을 해제해야 하는 것과 아직 미약한 친화력이 문제였다.
“야, 에센셜 정령이라는 녀석이 그것도 못 해?”
“칫! 내가 문제가 아니라 마나가 형편없는 주인이 문제라고.”
싸가지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놈의 저 기분 나쁜 눈초리를 볼 때마다 이전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폭력 성향이 폭발하곤 했다.
“이게 또 까부네. 또 한 번 맞아 볼래?”
그 말에 싸가지가 잽싸게 뒤로 날아갔다.
“헤엥. 어떻게 된 게 툭하면 폭력이야. 무슨 주인이 이래?”
“빨리 안 와!”
“히잉!”
싸가지는 하룬의 폭언에 못 이겨, 손을 떠나는 비도에 달라붙어 궤도를 수정했다. 그리고 잽싸게 돌아와 다시 날아가는 비도에 달라붙었다.
하룬은 싸가지가 궤도와 힘을 조정할 수 있는 시차를 두고 비도를 날리는 수련을 계속했다.
푹!
“그렇지. 이제야 명중하기 시작하네.”
조금만 틈을 주면 늘어지는 싸가지를 때리고 위협한 끝에 결국 생각한 대로 비도가 날아가는 궤도와 힘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냥 던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야.”
싸가지는 인벤토리로 돌아가면서 징징거렸지만 하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놈의 말을 한번 받아 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하룬은 밤이 깊을 때까지 암기 수련장에서 해독약을 수없이 먹어 가며 싸가지와 함께 비도 던지기를 수련했다.
이제 수료식까지는 겨우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싸가지를 더 괴롭혀야만 했다. 녀석의 능력은 쓰면 쓸수록 향상되었다.
“어이, 페이크.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호호, 얼굴은 저래도 속으로는 엄청 떨고 있을걸.”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도망칠지도 모르니 우리가 잘 감시해야 해.”
“너무 그러지 마. 안 그래도 죽을 지경일 텐데 너무하잖아.”
오늘도 역시 재수 4인방이 식당 앞에서 하룬을 씹고 있었다. 이제 놈들뿐 아니라 다른 수련생들도 그들의 과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하룬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은 완전히 차갑게 바뀌었다.
꿀릴 것이 없다면 저런 조소를 듣고도 하룬처럼 당하기만 할 수 없다는 것이 A동 수련생들의 일부와 B, C동 수련생들의 중론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하룬의 입장이라면 참기가 힘들 정도로 녀석들의 패악은 극에 달해있었다.
하룬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들의 말이 맞기에 무조건 참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기에 손을 좀 봐 줄까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룬,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제까지도 잘 참았는데, 뭘. 며칠만 더 기다려.”
갈리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래, 네가 참아. 그러게 왜 함부로 마나의 맹서는 해 가지고…… 쯔쯧!”
이름도 잘 모르는 마법사였다.
그래도 마법사들은 하룬의 편이었다.
갈리를 통해 그가 마법에 대한 비밀과 수련 기간 중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누군가와 ‘마나의 맹서’를 했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최근 태도가 바뀐 네미온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는 하룬을 강하게 불신했다. 비교적 젊은 그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는 하룬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룬이 마법사를 모욕시킨다고 생각했다. 마법사가 되어 가지고 놈들의 말도 안 되는 조소와 수모를 참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마나를 억제하고 있던 팔찌를 벗고 나서 은밀하게 몇 명이 하룬을 스캔했는데 그의 마나량이 정상인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하룬이 마법사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후유,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모르겠군.’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더구나 나름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네미온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큰 상처가 되었다.
‘아무튼 친화력이나 높이자.’
하룬은 재수 4인방을 중심으로 많은 수련생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는 식당의 바깥으로 나가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가 펫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령이라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이런 흉악한 몰골을 한 정령의 출현에 난리가 날 것이다.
“왜 자꾸 부르고 지랄…… 주, 주인.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자꾸 자신을 소환하는 것에 짜증을 내려던 싸가지가 웬일로 삐딱한 말을 중간에 멈추고 하룬의 눈치를 보았다. 그만큼 그의 얼굴은 찡그려져 있었다. 잘못하면 또 뒈지게 맞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한 것이다.
“응, 조금.”
“왜 그러는데?”
“저기에 있는, 너보다 조금 더 싸가지없는 놈들 때문에.”
하룬은 마음속으로 시간을 재며 대답해 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녀석을 소환한 덕분에 정령력은 높아졌지만 워낙 생명력이 낮아 주의해야만 했다.
“흐음, 정말 개념 없게 생겼네.”
녀석은 인상을 찡그리며 재수 4인방을 노려보았다. 싸가지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이때만은 귀여워 보였다.
“저것들을 왜 그냥 놔두는데? 난 그렇게 죽일 듯이 패면서.”
하긴 싸가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교육과정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저들을 팼다가는 이제까지 쌓아 올린 공이 헛수고가 된다는 걸 말이다.
“그냥 상황이 그래. 나중에 여기서 나가면 제대로 갚아 줄 생각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놈들과 만날 기회가 올지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흐흐. 그럼 저 무개념 덩어리들에게 내 독을 퍼 먹이면 어떨까, 주인?”
“안 돼! 저놈들이 지금 죽어 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복수하라고?”
“흐흐흐. 내가 흡수한 것들 중에는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마법이나 치료제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오염 물질들도 있거든. 독이 아니라 약이 되는 성분들도 있는데 그 양이 과다하면 어떤 치료로도 고칠 수가 없지. 독이 아니니까 치료법이 있을 리 없는 거지. 저 개념 상실한 놈들에게 그거나 먹여 보자, 주인. 배를 잡고 뒹굴며 설사를 쫙쫙 해대면서 반성 좀 하라고.”
귀가 솔깃했다.
안 그래도 갈수록 더해 가는 놈들의 패악질을 견디기 힘들었는데 싸가지의 제안은 무척 사악하면서도 맘에 쏙 들었다.
“괜찮을까? 아니, 다른 수련생들은 어쩌고. 네가 저놈들에게 가까이 가는 순간 중독될 텐데.”
“흐흐. 나한테 맡겨 두라고. 이 좁은 공간을 나오는 즉시 독 기운을 내 마나로 봉인하면 잠시 스쳐 간 것만으로는 저 젖비린내 나는 어린놈들은 중독되지 않을 테니까.”
녀석의 말은 자신이 마나로 독 기운을 봉인해도 소환되고 봉인하는 그 짧은 순간에 새어나온 독 기운에 다른 이들은 몰라도 소환자는 중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갔다 와.”
싸가지는 이제 소환을 유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지 재빨리 움직였다. 녀석은 모든 속성을 가진 정령답게 흔적도 없이 날아가 웃고 떠드는 연놈들의 식사에 뭔가를 한 줌 뿌리고는 되돌아왔다.
그것만으로 이제 생명력이 간당간당했다. 그렇지만 물어볼 것이 더 있었다.
“물론 네가 치료할 수 있는 거겠지?”
“흐흐흐. 당연하지. 내 능력을 아직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내 주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거야. 이거, 실력을 더 키워야 하는 거 아니야.”
“꺼져!”
싸가지는 또 인상을 잔뜩 구기며 인벤토리로 돌아갔다.
그사이 팔뚝까지 검게 변색된 것으로 보아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룬은 급하게 해독약을 먹었다.
‘그나저나 수료하기 전에 이 해독약을 만드는 조제법도 꼭 알아내야겠구나.’
할 일이 태산이었다.
남들은 장기시연을 위해 연습하고 있는데 그는 각종 수련에 근로에, 매일 수십 번씩 중독되어 가면서 싸가지를 소환해서 암기를 조종하는 수련까지 해야만 했다.
“하룬,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어, 형!”
식사를 마친 세 근로 동기생들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이고, 배야!”
“나, 나 죽어요.”
“사람 살려!”
“흐윽! 끄윽!”
한밤중에 터져 나온 때 아닌 비명이 거의 붙어있는 B동과 C동 수련생들을 깨운 것은 그날 밤이었다.
필립을 위시한 재수 4인방은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마구 구르며 화장실을 연방 들락거렸지만 갈수록 배는 점점 더 심하게 아팠고, 설사는 그칠 줄 몰랐다.
장이 꼬였는지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고, 밑으로는 계속 설사를 하는데도 일어설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배출했지만 배는 더욱더 아파 왔다.
한창 곤하게 잠잘 시간이었기에 수련생들은 처음에는 잠시 안됐다는 시선을 던졌지만 비명이 계속되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사감이 치료사를 불러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녀석들의 비명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마법사까지 왔다. 녀석들의 배경이 그만큼 막강한 덕분이었지만 마법사의 치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밤중에 불려 온 것 때문에 화가 잔뜩 났던 마법사도 전혀 차도가 없자 머쓱한 얼굴로 소리 없이 되돌아갔다.
재수 4인방의 비명이 새벽까지 이어지자 그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수련생들의 불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미친 녀석들. 배 좀 아프다고 이렇게 방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다니. 정말 한심해서, 원. 저래 가지고 무슨 용병을 하겠다고…… 쯔쯧!”
“그러게 말이야. 지들 수련은 신경도 안 쓰고 요즘은 아예 123만 쫓아다니며 갖은 험담을 하고 다니더니 벌 받은 거 아니야?”
“맞아, 벌 받은 게 틀림없어. 사실 걔가 점잖으니 망정이지 나 같았음 벌써 요절을 내고 말았을 거야.”
어느 수련생은 점심 식사 때 아는 수련생에게 들은 것을 말하기도 했다.
“아는 마법사 동기에게 들었는데 123 말이야. 걔 마나의 맹서인가 뭔가 때문에 수련이 끝나는 날까지 마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마법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한 거래.”
“그래? 맞아, 나도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나를 걸고 맹세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수련생 수련비도 없어서 근로 수련생으로 들어왔잖아. 그게 조건이었는지도 모르지. 추천한 사람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며.”
“내 생각에는 뭔가 확실히 있어. 저런 어린애 같은 놈들의 말을 믿느니 그 지독하게 수련하던 123의 침묵을 믿겠다.”
분위기라는 것이 참 묘했다.
이제까지 재수 4인방의 일관된 주장과 하룬의 침묵 그리고 마법사라고 볼 수 없는 경이적인 발전 속도에 대한 시기와 질투 등으로 하룬을 성토하던 수련생들은 설사가 난 것에 불과한데 저 난리를 쳐서 자신들을 못 자게 만드는 재수 4인방에 불쾌한 감정을 품었다.
재수 4인방의 비명은 새벽녘이 돼서야 좀 가라앉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목이 쉬어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그들의 배경 때문에 신관까지 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신성력이 전혀 듣지 않는 그들에게 신관이 오히려 화를 내기까지 했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 평소에 착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룬은 싸가지를 소환 대기시켰다.
-어떻게 된 거야?
-흐흐. 일반 사제의 신성력이 먹히면 그게 이상하지. 내가 쓴 것은 독이 아니라 내가 흡수한 그 무수한 세월 동안 물질계에서 빨아들인 오염 물질 중 하나거든. 원래는 장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약 성분이야. 단지 그 양이 너무 많아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그 본질이 약 성분이니 신성력으로는 애초에 상대할 수 없다고.
-어떻게 치료하면 되는 거야?
-주인이 날 소환하면 내가 그냥 빨아들이기만 하면 돼. 보아하니 뭔가 재미있는 것을 하려나 본데 내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후유, 나 같은 대단한 정령이 어쩌다가 능력 없는 주인을 만나 가지고…….
-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아도 그 버릇을 못 고치지? 또 한 번 맞아 볼래!
-아니, 아니! 잘못했어, 주인아!
하룬은 녀석을 소환해서 또 폭력을 행사하려다가 억지로 참으며 소환 대기를 해제시켰다.
‘전직하고 나면 제일 먼저 독이 통하지 않는 아이템부터 구하고 만다.’
한 일이 기특해 좀 칭찬해주려고 했더니 벌써 기세등등해서 난리를 치니 그 꼴을 봐 줄 수가 없었다.
‘이거 싸가지 때문에 내 성격 버리겠는 걸.’
싸가지를 상대하다 보면 툭하면 손을 들게 되니 정말 성질 많이 더러워졌다. 그래도 예전에는 참을성도 강하고 기본적으로 폭력을 싫어했는데 여기 들어와서 정말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저것들 하루만 더 놔두자. 그러면 버릇이 조금은 고쳐지겠지.’
그래도 회복시켜주긴 해야 할 것이다.
일반 사제의 신성력으로도 고치지 못하면 저 연놈들은 얼마 살지 못할 테니까. 물론 그 정도로 원한이 맺힌 것은 아니었다.
하룬은 오랜만에 통쾌한 기분으로 식사하러 갔다.
“으으으, 제발 저 좀 고쳐주세요.”
“저부터…… 으아!”
재수 4인방은 의무실에서도 변함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여전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만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꼬박 아팠는데도 복통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기다 수시로 느껴지는 배설감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빌어먹을! 뭘 처먹었기에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거야. 다른 수련생들은 괜찮은데 이놈들만 왜 이래.”
녀석들 때문에 잠을 못 잔 슐츠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안 그래도 지들 수련을 내팽개치고 123 수련생 험담하고 다니느라 정신없는 놈들이라 쫓아내려던 참이었는데.”
녀석들을 바라보는 헥터의 눈은 차가웠다. 그는 약초학 강좌를 맡고 있으며 하룬을 자신의 유일한 제자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재수 4인방에 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이 녀석들이 그놈들이야? 그럼 잘됐군. 어차피 사제들도 치료하지 못한다니 그냥 이대로 죽게 놔둬.”
그 소문을 들었는지 슐츠의 노한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하룬은 교관들에게 아주 특별한 수련생이다. 근로 수련생의 신분임에도 그가 수강하는 모든 강좌에서 교관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 성실하고 재능 있는 수련생인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맘에 드는 수련생이란 말하는 바를 금방 알아듣는 영민함과 가르친 것을 우직하게 수련하는 성실성 그리고 마침내는 그것마저 뛰어넘으려는 재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료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하룬은 모든 강좌를 전부 수강한 유일한 수련생인 동시에 그 많은 교관들에게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뛰어난 수련생이었다.
그런 동기를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대신 뒤에서 험담이나 하고 다니는 이들의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는 슐츠의 냉정한 말에 재수 4인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발, 교관님!”
“살려 주세요.”
“이 고통만 없어진다면 무슨 일이든 할게요.”
“한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창자가 다 나오는 것 같아요. 제발 치료해 주세요.”
녀석들의 눈은 하루 만에 이미 퀭해졌다. 우람한 몸매를 자랑하던 지탄은 물론 다른 녀석들도 눈에 띄게 말랐고, 얼굴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네놈들 부모에게 연락했으니 곧 무슨 소식을 보내오겠지. 다른 수련생들은 모두 말짱한데 너희들만 이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은 너희들이 뭘 잘못 먹었거나 혹은 독이 있는 물건을 잘못 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용병 아카데미나 교관들은 책임이 없다.”
“그러기에 마음을 곱게 써야지!”
슐츠와 헥터는 녀석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한번 주고는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재수 4인방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를 힘도 없어 누렇게 뜬 몰골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이제 가능성이 있다면 부모들이 직접 와서 고위 마법사나 고위 신관들을 초빙해서 치료해 주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크윽, 이게 무슨 꼴이냐? 아버지는 내가 이번 기수에서 수석으로 수료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을 텐데.”
필립은 눈이 쑥 들어가 있었다.
“나도 그래. 으으, 도대체 우리가 뭘 먹었기에 이런 거야?”
라트리나는 아직도 자신들만 이렇게 아픈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난 말할 힘도 없어. 이렇게 며칠을 더 살 바에는 차라리 죽고 싶어. 이제 갈아입을 속옷도 없는데 조금만 움직이면 싸 대니…….”
“그래도 넌 남자라 좀 낫지. 나같이 아름다운 레이디가 이렇게 더러운 병에 걸리다니. 흐윽, 흑! 난 너무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어.”
우람한 덩치를 가진 지탄의 넋두리를 듣던 시린느는 얼굴이 노랗게 떴다.
재수 4인방은 그나마 똑같이 고통스러워하는 나머지 세 사람을 보면서 약간은 위안이 되었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복통과 배설감에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들을 찾는 수련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평소 늘 함께 다닌다는 것을 생각해 낸 누군가가 혹시 전영의 우려가 있지 않겠냐고 한 말이 수련생들 사이에 쫙 퍼진 것이다. 그들이 겪는 고통을 같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교관들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
똑! 똑!
“누……구세요?”
오랫동안 검술을 수련한 덕분에 그나마 건강한 필립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어, 재수 4인방. 오랜만이네.”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그들이 씹고 다녔던 하룬이었다.
“네, 네놈이 여길 왜?”
“우리 꼴을 보고 싶어서 왔겠지.”
필립이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희들이 날 씹고 다니는 소리를 못 들으니까 잠이 와야 말이지. 어때, 아직 나올 것이 더 남았나?”
하룬이 이죽거리자 연놈들의 얼굴이 확 바뀌었다. 이제까지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언제나 무표정과 침묵으로 그들을 상대했던 하룬이 이죽거리는 것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재수 4인방이었다. 자신들의 놀림감에 불과했던 하룬이 어느새 자신들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다, 닥쳐! 고블린 같은 새끼! 빨리 가. 가란 말이야!”
라트리나가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폭언을 내뱉었지만 하룬의 얼굴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네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고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이라면 너희들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아니지, 이렇게 못된 놈들에게 무슨 정이 있다고, 나 혼자만 느끼는 동기라는 이유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면서 문고리를 잡았다.
“자, 잠깐만! 방금 뭐라고 그랬어? 우리를 고칠 수 있다고?”
연놈들은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룬을 향해 다가왔다.
“너희들이 앓고 있는 병이 내가 아는 것과 비슷해서 말이야. 그게 맞는다면 내가 고칠 수 있는 치료약을 가지고 있거든.”
그 말에 당장 얼굴색이 변하는 재수 4인방이었다.
“그게 뭐야? 당장 말해!”
“뭐, 뭐냔 말이야!”
녀석들의 태도는 필사적이었다. 네 명은 방금까지 골골거렸던 것이 무색하게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문고리를 돌리는 하룬의 옷자락을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하룬의 태도는 녀석들과 달리 여유로웠다.
“날 동기가 아닌 적으로 대하는 너희들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치료약을 주겠냐? 물론 치료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치료가 안 되면 또 내 탓을 할 텐데. 안 그래?”
“그, 그건…….”
“이제 널 괴롭히지 않을게. 그러면 되지?”
“부탁해! 이러다가 죽을 거 같아.”
“그동안 괴롭힌 거 사과할게. 그럼 되잖아?”
녀석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룬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날 괴롭혔다고? 고작 너희들 능력으로 날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했니? 후후후, 정말 재미있네. 이제까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나를 걸고 맹세한 것이 풀리는 수료식 날이면 내가 원래 마법사라는 것을 모두의 앞에서 밝히면 되는 일인데 너희들 혼자 찧고 까부는 말에 뭐하러 신경을 쓰겠어. 내 태도가 너희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사람 같아 보였나? 난 신경도 안 썼는데.”
하룬의 말에 재수 4인방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는 그간 그들의 의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즉, 하룬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들은 그에게 압박을 가한다고 여기며 통쾌해했다는 허탈한 이야기였다.
“어, 어쨌든 우리가 잘못했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역시 필립 녀석이 가장 똑똑했다. 다른 녀석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정말 마나의 맹서를 했단 말인가? 그래서 마나까지 봉인 당한 거야? 마나 스캔을 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하룬의 자신 있는 말에 그들이 단단하게 믿고 있던 생각에 굵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워낙에 귀한 약재들이 들어갔고, 만드는 기간도 오래 걸려서 나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은 약이라 너희들을 치료하려면 전량을 다 써야 해. 아니, 한 번 먹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 오래 걸리면 일 년 이상 치료해야 할 수도 있는 병이니까. 그런 상황이니 나도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게 확실하다면 돈은 얼마든지 내지.”
화색이 도는 얼굴들을 하룬에게 들이미는 녀석들이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내 너희들의 뼛골까지 다 파먹어 주지.’
하룬은 독하게 마음먹었다.
“너희들이 아는지 모르지만 난 오랫동안 산중에서 마법사이자 약초꾼이고 동시에 치료사였던 할아버지와 살아왔기 때문에 금전가치를 잘 몰라. 어디 네가 한번 불러 봐. 널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치료약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그, 그건…….”
필립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해소시켜 주는 치료약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3골드 줄게.”
라트리나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고 있었다.
“흐음. 넌 3골드짜리였구나. 역시 싸군. 그 정도면 참아 봐!”
매몰찬 하룬의 말에 라트리나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괜히 나서는 바람에 싼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10골드면 어때?”
그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았다. 현재 하룬이 가진 돈이 9실버 40브론즈였다. 거기에 비하면 엄청난 돈이었다. 비욘드에서의 가치야 경험이 없는 탓에 아직 확실하게 모르지만 지금 환거래하면 현실에서는 100만 원이라는 거금이었다.
내심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튕겨 볼 일이었다.
“10골드라……. 역시 너도 그 정도의 고통은 참을 수 있겠네.”
하룬의 말에 녀석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혹시 자신들이 안달하는 것을 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아해 하는 눈빛이었다.
“약재 중 하나가 바로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라는 것 정도만 말해주지.”
그 말에 녀석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가 독을 해독하는 데는 최상의 재료라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지는 그들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희귀한 재료였다.
‘흐흐흐! 녀석들아, 그게 내가 싸가지 때문에 먹는 해독제의 주요 재료다. 내게 해독약을 전부 다 주신 헥터 교관을 위해 네 연놈들이 약값을 좀 내야겠다. 알았냐?’
헥터는 하룬과 같이 만든 해독약을 그에게 전부 다 넘겨주었다. 그가 용병 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모든 약재들이 다 들어간 덕분에 훌륭한 약효를 지닌 해독약이 탄생했다. 하지만 하룬은 자신이 가진 귀중한 약재들을 모두 없앤 허탈함에 젖어 있던 헥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룬은 그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알기에 복수를 겸해 이 녀석들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을 한 것이다. 헥터 교관에게 재료비라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이렇게 커지고 있었다.
“그럼, 믿지. 얼마면 돼?”
“네가 생각하는 가치를 말해 보란 말이야.”
하룬은 공을 녀석들에게 돌렸다. 환금하면 현실에서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지만 이 세계의 금전 가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상태이니 자신이 먼저 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 그럼 5, 50골드면 어떨까?”
필립이 신중하게 물었다.
내심 웃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참은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50골드면 현실로는 500만 원이다. 들어가는 것이라고는 싸가지를 소환할 때 먹는 해독약이 전부인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공돈이었다.
더 이상 끌다가는 실수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룬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원래 헥터에게 받은 해독제가 담겨 있던 사슴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둥글게 뭉친 거무튀튀한 알약 하나를 꺼냈다. 거의 엄지 크기의 알약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거래는 정확히 해야지? 돈은?”
“여기 있어. 만약을 위해서 가져온 거야. 50골드가 조금 넘을 테지만 다 주지.”
필립은 품속에서 제법 큰 주머니를 꺼내 하룬에게 주었다. 한시라도 빨리 약을 먹어야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필립이었다.
“우, 우리 것은…… 왜?”
“미친 거 아니야? 난 필립하고만 거래했어.”
세 사람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50골드라면 그들에게도 엄청난 거금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수련 중이니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돈을 주고도 하나 밖에 구할 수 없다니 치가 떨렸다.
하룬은 주머니를 뒤집어 달랑 세 알 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 나도 구할 수 없는 약인데 니들이 날로 먹으려 들어? 이것들이 완전히 개념을 상실했네.”
그 사이 필립은 황급히 알약을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알약을 삼키는 그 순간에도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아팠다.
하룬 역시 해독약을 복용하고 은밀하게 싸가지를 소환 대기했다.
-싸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흐흐흐, 당연하지. 알고 보면 주인은 폭력적일 뿐 아니라 무척 사악하단 마이야. 개똥하고 자기 오줌을 섞어서 만든 것을 약이라고 먹이다니.
-네가 먼저 시작한 일이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소환하면 바로 네 마나로 독 기운을 봉인하고 네가 저놈들의 몸 안에 넣은 물질들을 빨아들여.
-알았어. 흐흐흐, 재미있다.
-아! 다 흡수하지 말고 조금은 남겨 놔. 배가 아프고 설사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만.
-아, 이제는 별걸 다 시키네. 알았어.
하룬은 재수 4인방에게 행여 소리가 들릴까 봐 입술만 달싹여 싸가지를 소환했다.
소환된 싸가지는 필립의 목으로 알약이 완전히 넘어가자마자 그의 몸에 주입했던 오염 물질을 적당히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필립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미친 듯이 들끓던 장의 움직임이 소리 없이 진정되면서 복통이 사라져 갔다. 고통과 배설감이 약해지는 것만으로 필립은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때? 약효 하나는 확실하지?”
“응, 정말 신기해. 복통이 사라지면서 쌀 것 같은 느낌도 없어지고 있어.”
등을 돌리고 서둘러 해독약을 복용하는 하룬을 바라보는 필립의 눈에 고마움이 어렸다. 그동안의 미움이나 시기 같은 것들은 한 방에 날려 버릴 정도로 그간 겪은 고통의 크기는 엄청났다.
“그거 정말 귀한 약이라고. 어떤 독이든 전부 다 해독할 수 있는 거였다고.”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필립이 하룬의 손을 잡고 연방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참을 만해 보이니까 난 이만…….”
하룬이 다시 돌아서 문고리를 잡았다.
“안 돼!”
“잠깐만!”
“나 좀 봐!”
세 사람은 동시에 달려들어 하룬의 몸을 붙잡았다. 두 여자들도 행여 하룬이 가 버릴까 두려운 나머지 그의 양팔을 붙잡고 몸을 단단히 붙였다.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강하게 밀착되니 일시적으로 살짝 마음이 흔들렸지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는 하룬이었다.
“도, 돈이 부족해. 어떻게 안 될까?”
“나도. 다른 거로는 안 되겠니?”
역시 라트리나를 비롯한 세 사람은 가진 돈이 얼마 안 되는 거 같았다.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행여 그들을 뿌리치고 갈까 두려워 눈에 핏발까지 섰다.
“그럼 돈 대신 다른 물건이라도 좋은데…… 성의만 있다면 내가 그 정도는 감수하지.”
하룬의 말에 세 사람은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내놓았다. 그는 적절하게 눈치를 보며 제일 좋아 보이는 물건을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현금과 함께 받고 치료약(?)을 넘겨주었다.
이상한 맛에 씹으면서도 야릇한 표정을 짓는 세 녀석을 보니 겉으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지.’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너희들의 병은 완치된 것이 아니야. 그것은 마음을 잘못 써서 생기는 병이라 적어도 열흘에 한 번씩 추가적으로 해독약을 복용해 가면서 최소 일 년 정도는 꾸준히 먹어야만 낫는 병이야. 더불어 마음도 수련해야 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번으로 완치되는 것이 아니란 말에 막 약효를 느끼던 세 녀석들과 필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치료한 영주의 경우 다 나은 줄 알고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무시했다가 결국은 항문이 파열되어 죽었지.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마음까지 치료해야 했는데 워낙 성정이 지랄 같아서 그것을 믿지 못하고 영지민을 또 수탈하고 괴롭히다가 끝내는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 제대로 먹을 수도 없고, 만약 물이라도 먹으면 즉시 아래위로 뿜어내는데 살 도리가 있나. 나중에 가보니 배는 산만 한데 항문이 마치 주둥이처럼 부은 채로 처참하게 파열되어 있더라고.”
“끄으윽!”
그 말을 듣는 순간 라트리나의 눈이 뒤집혔다. 자신이 그런 꼴로 변하는 것을 상상하고는 정신을 잃은 것이다. 급한 성정을 가진 그녀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상이었다.
“그럼 우, 우린…… 우리는 어떡해?”
필립의 목소리가 공포로 덜덜 떨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다. 세 녀석의 손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이 실리며 그의 옷자락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거야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세상에 이런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지 않겠니? 너희들 부모의 힘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아내 줄 거야. 힘이 있는 분들일 테니까.”
부모라는 말에 다소 믿는 바가 생겼는지 녀석들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룬은 그 말을 남기고 매몰차게 녀석들을 뿌리치고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흐흐흐, 이것도 재미있는걸.”
당분간 쓸 해독제를 만들었을 때 들어간 재료의 값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벌충했다. 덤으로 아이템까지 챙긴 하룬은 기분 좋게 방으로 돌아왔다.
시린느에게 받은 것은 상의와 하의, 두 개로 나뉜 속옷으로 남녀 공용이었다. 평소에도 여성다움을 유난히 강조하는 그녀다운 아이템이었다. 그녀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선물받았지만 수련 때문에 아까워서 못 입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정보 창.”
───
마법 처리 속옷
등급: 레어
방어력: 35
내구력: 145/150
부드러운 타트리슈 특산 천으로 만든 속옷이다. 마법 처리를 해서 착용자의 몸에 자동으로 맞추어진다. 활동성이 좋으며 때나 얼룩을 타지 않는다. 또한 자동 온도 조절 마법으로 급격한 기온 변화를 막아 준다.
옵션: 민첩 +2
제한: 없음
───
“옵션이 딱 맘에 드네. 이건 바로 입어야겠다.”
하룬은 망설이지 않고 모든 옷을 벗은 다음 마법 처리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처음에는 좀 풍성하다 싶었지만 이내 살에 딱 달라붙는 속옷의 감촉은 엄청나게 부드러웠다.
“횡재했군.”
그 가치야 알 길이 없지만 독 저항력이 있다는 점만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다음은 벨트 같은데 어디 좀 볼까?”
───
다용도 벨트
등급: 매직
방어력: 150
내구력: 220/240
허리 부분의 검대, 어깨와 연결되는 두 개의 암기대로 이루어졌다. 검대와 암기대에 총 100자리의 단검이나 비수를 꽂을 수 있다. 블랙 베어의 가죽과 힘줄로 만들었으며 검과 암기를 뺀 상태에서는 채찍으로도 쓸 수 있다. 일반적인 검으로는 상하게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질기고 튼튼하다.
옵션: 체력 +3
───
역시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비록 옵션이 하나밖에 없지만 검을 꽂을 수 있는 검대와 각종 암기들을 꽂을 수 있는 암기대가 하나로 연결된 이 아이템 역시 효용 가치가 컸다.
하룬은 이 암기대는 자신이 직접 착용하기로 했다.
“이 붉은색 도도 좋아보이는데.”
───
시스투의 화염도
등급: 매직(상)
공격력: 100~120
내구력: 80/100
화염의 장인으로 불리는 시스투의 초기작이다. 화염이 이글거리는 도는 베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몬스터들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안겨준다. 단, 재료가 부족해서 내구력이 약한 것이 흠이다.
옵션: 힘 +3, 불 속성 저항력 30% 증가
제한: 전사 계열 한정
───
“완전 대박이다.”
이 정도 옵션과 공격력이라면 경매에 올리면 적어도 50골드는 넘게 받을 만한 아이템이었다.
하룬은 두 개의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인벤토리에는 가외로 더 받은 돈을 합해 얼추 60골드가 넘는 돈이 주머니 안에 쌓여 있었다. 이 중에 50골드는 헥터 교관에게 재료값으로 가져다 줄 참이었다. 물론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그래도 성의 표시는 해야 했다.
‘흐흐흐,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
녀석들은 이제 적어도 일 년 동안은 하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마법사나 사제 그리고 헥터도 그 원인이나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놈들이 기댈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녀석들이 설마 내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
치료약의 비전을 전수해 준 헥터의 귀에 들어가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헥터의 경우 굳이 보수를 받고 사람을 치료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가 전문적인 치료사도 아니었고 게다가 용병치고는 인정이 많은 탓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녀석들이 아직도 하룬에게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니 그의 말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여태 하룬을 씹고 다녔는데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떠들고 다닐 녀석들이 아니었다.
“이제 수료식 때 보여 줄 것만 수련하면 되는 건가?”
오늘은 기분 좋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