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정령 ‘싸가지’》
세 달째의 수련 과정은 다양했다.
체력 수련과 검술 수련과 달리 이번 한 달 동안은 용병들에게 꼭 필요한 강좌들을 개설해 놓고 수련생의 자유의지에 따라 수련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한데 수련생들의 거의 모두가 기존의 용병 단체에 소속되어 나름의 교육을 받은 상태라 굳이 들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정보 취합 요령이라든지 간단한 회계는 해당하는 수련생들에게는 필요가 없었고, 수색이나 트랩 설치 및 해체 방법 등 전투 용병들에게 필요한 강좌 역시 인기가 없었다.
그들에게 인기가 있는 강좌는 의뢰의 수준을 구별하는 방법이라든가 좋은 조건으로 의뢰받는 방법론 같은, 소위 돈 되는 정보를 알려주는 강좌였다.
‘난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해.’
하룬은 모든 강좌를 다 신청했다.
근로 작업 대문에 시간을 내기가 곤란했짐나 한 달 내내 하는 강좌가 아닌 것들도 많아서 놓치면 다시 들을 기회가 없었다. 많은 것이 부족한 하룬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그런 하룬의 모습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 자식 교관들에게 인기 끌려고 그러는 거야.”
“혹시 다른 나라 길드에서 이 과정을 염탐하러 보낸거 아니야?”
그런 소리들까지 들렸다. 하지만 하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에게 가해진 재수 4인방과 세보나의 의심, 조소만으로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알려질 때 알려지더라도 이 기회에 최대한 배워야 해.’
배움의 시기를 놓친 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는지 현실에서 겪은 하룬이다. 비록 배움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가 비욘드를 살아 나가는 데 소중한 기반이 되어 줄 것들이었다.
그의 하루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전에는 용병들이 꼭 알아야 하는 필수적인 지식을 배웠다. 간단한 야외 요리법부터 시작해서 회계, 정보, 수색, 함정 설치와 해체 그리고 몬스터나 맹수의 가죽으 벗기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가 수강한 것은 개설된 강좌 전부였다.
그리고 오후에는 간단한 치료법을 비롯한 몇 개의 강좌와 암기술을 배웠다.
암기술의 첫 시간, 암기술 교관인 보투스의 앞에는 무수한 종류의 암기들이 놓여 있었다.
어쌔신들이 많이 쓴다는 수리검부터 시작해서 단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암기들이 요요한 모습으로 절반 넘게 신청한 수련생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암기들이 널려있다. 그 모든 암기들의 용도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다루는 방법 또한 그만큼이나 다양하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암기를 다루는 것은 검술에 필적할 만큼 많은 시간과 땀을 필요로 한다.”
모두들 보투스의 말에 눈을 빛냈다.
다른 수련과 달리 이 기초 과정에 들어온 수련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어쩌면 이 암기술일 수도 있었다.
“암기를 다루는 기초는 암기의 무게중심을 가늠하고, 그 진행 방향과 회전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각 조별로 조교의 설명과 함께 실습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배울 암기는 여섯 개의 날을 가진 표창과 비갑에 착용하는 비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검이다. 혹자는 검술에 비하면 쉽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암기술도 경지에 이르려면 수없이 반복되는 수련과 노력 그리고 집중이 필요하다. 과정이 짧은 만큼 각 수련생들은 일단 모든 암기를 던져보고 나머지 기간에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암기를 선택해서 수련한다. 알겠나?”
“네!”
다른 수련과 달리 대답하는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는 수련생들이었다.
사실 일반 전투 용병들에 비해 전투력이 달리는 그들로서는 오래 수련해야만 하는 검술을 비롯한 각종 무기술보다는 암기술이 구명줄이니 수련에 앞선 각오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교의 설명과 시범을 본 후 각자 암기를 던져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룬은 퇴역 용병 출신인 보투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경우는 무게중심이 가운데 잡혀 있어야만 안정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반면 암기들은 무게중심에 따라 그 회전속도나 회전 반경 그리고 비행 궤도가 달라졌다. 검술에 비해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암기마다 그 특성이 다르고, 조금 던지다 보니 같은 암기라도 무게중심이 미세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뛰어난 집중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점을 파악해낸 것이다.
어쩐지 비수의 자루가 손에 짝짝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암기술을 수련한 하룬은 슐츠 총교관의 허락을 얻어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마법 인형을 대상으로 검술을 수련했다. 식사는 점심때 미리 얻어 둔 것으로 해결했다.
저녁 식사 후의 근로 작업은 모글과 메넌 그리고 로즈에게 맡겼다. 대신 그는 아침과 점심을 먹은 후의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것을 혼자서 감당했다.
이제 수련생들의 식사량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만큼 잔반도 줄어서 처음처럼 쓰레기의 양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할 만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료식을 열흘 앞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오늘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아침부터 굵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도저히 야외 수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일정을 마친 강의도 많았기에 수련생들은 간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룬은 그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근로 작업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냄새가 심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사체가 썩어가고 있거나 막힌 곳이 있다. 그동안은 내가 최대한 배려해서 하수구 청소를 시키지 않았지만 워낙 악취가 심해 내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다.”
슐츠는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작업 지시를 내렸다.
“아닙니다, 교관님. 그동안 배려해주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립니다.”
모글이 대표로 슐츠 교관의 말을 받았다.
“몸에 좋지 않은 공기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서 작업해라.”
네 사람은 슐츠의 방을 나와 도구실로 갔다.
그곳에는 청소하기 위해 입는 고무 재질의 방수 작업복과 썩어 가는 물체를 끄집어내기 위한 도구들이 있었다.
“로즈, 혹시 모르니까 해독제 좀 넉넉하게 챙겨라.”
“알았어요.”
모글의 말에 로즈는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치료사의 길을 걷는 수련생답게 각종 해독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네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하수구의 입구로 향했다.
과연 슐츠 교관의 말은 틀리지 않아서 가까이 갈수록 코를 마비시키는 강력한 악취가 진동했다.
“코가 썩어 버리겠어.”
“우왕, 어지러워요.”
메넌과 로즈는 악취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에 비해 모글은 잘 버텼지만 하수구의 넓은 입구에 도착하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비 때문에 악취가 넓게 퍼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수구의 그 넓은 입구에서는 살인적인 냄새와 맡는 순간 어지러울 정도의 나쁜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글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형, 형!”
메넌이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글의 몸을 흔들었다. 분명히 정신은 있는 것 같은데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일어나질 못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로즈는 어느새 소매로 코를 감싸고 있었다.
“안 되겠어. 하룬, 내가 형을 옮기고 올 테니까 여기 대기하든지 아니면 로즈와 함께 먼저 들어가 보든지 해.”
하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글은 하수구에 들어가기 싫어 꾀병을 부릴 사람이 아니었다. 저 정도라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모글을 부축한 메넌의 뒷모습이 멀어졌을 때 하룬은 하수구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현실에서 한동안 화장장 알바를 해서 그런지 나름 견딜 만했다. 메넌이 오기 전에 대충 하수구 상황이라도 살펴볼 요량이었다.
“로즈, 견딜 만하면 같이 들어가 보자. 뭐, 달리 필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상황만 보고 오자.”
“네엥, 알았어용.”
물에 젖은 소매로 코를 감싼 탓에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는 로즈였다.
하룬은 혹시 몰라 가져온 철검을 손에 들고 앞장섰다.
철벅! 철벅!
넓은 하수구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그 규모가 거대했다. 현실에서도 보기 힘든 잘 만들어진 하수구였다.
천장에는 희미한 빛을 내는 돌이 박혀 있었는데 그리 비싼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 돌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어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일단 뭐든 시야에 보이기만 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룬은 화장장에서 하르크에게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들이며 사고로 짓뭉개진 시체도 본 적이 있었다.
찌익! 찌이익!
두 사람의 출현에 놀란 쥐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수구에 사는 시궁쥐들이 썩은 물에 젖은 갈색 털을 세우고 도망쳤다.
“엄마!”
로즈는 그 모습만으로도 혐오스러운지 아니면 정말로 무서운지 하룬의 등에 달라붙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통해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강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로즈, 넌 입구에 가 있어. 내가 안쪽을 보고 올 테니까.”
“네네. 알았어요, 오빠.”
로즈는 기다렸다는 듯 황급히 입구 쪽으로 달려 나갔다.
하룬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악취가 심해지는 것을 보면 안쪽에 뭔가 있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동물의 사체가 썩어 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시큼하면서도 매캐한 썩은 물 냄새가 악취와 함께 느껴졌다. 나타난 것은 작은 광장이었다.
몇 개의 하수구가 모이고 나가는 길목인 그곳은 잡다한 쓰레기들이 작은 댐을 이루어 제법 큰 웅덩이가 된 상태였다. 그곳에서 악취와 함께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하룬은 미리 들고 온 쇠몽둥이로 댐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 구멍을 냈다.
고여 있던 썩은 물들이 새로이 난 물길을 따라 통로로 향해 세차게 내려갔다. 쓰레기들 대부분도 썩은 물과 함께 떠내려가자 광장에서 나던 냄새가 한결 가셨다. 하지만 아직 그 살인적인 악취는 없어지지 않았다.
하룬은 더 안쪽에 있는 하수구로 들어섰다.
찌익! 찍! 찍!
적당히 흐르는 썩은 물과 오물 사이로 쥐들이 갈라진 벽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이 하수구 통로 역시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데다 음식물 쓰레기장과 가까운 관계로 쥐들이 번식하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강렬한 악취가 흘러나오는 통로 앞에 도착했을 때 희미한 빛마저 감추고 있던 구석에서 뭔가 나타났다.
갈색의 거친 털과 고양이만 한 덩치, 하룬을 쏘아보는 붉은 눈을 가진 거대한 쥐는 긴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놈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영역임을 경고하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찌익 찍! 찍찍!
“정말 크네. 이건 완전히 고양이를 닮은 쥐 몬스터라고 해야겠다.”
쥐는 덩치가 커도 쥐일 뿐이라는 생각에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쥐들은 철벅거리고 물을 튕기며 앞으로 나가는 하룬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도 전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을 준비하는 듯 작은 눈이 벌겋게 변했다.
“아무래도 오늘 쥐들을 잡아야겠구나.”
하룬은 길어서 거추장스러운 철봉을 내려놓고 늘 들고 다니는 철검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비록 상대는 쥐들이지만 덩치가 고양이만 하니 어쩌면 마법 인형을 상대로 수련했던 검술의 위력을 시험할 좋은 대상이 될 것이다.
전면에 있는 쥐들의 숫자는 스무 마리가 넘었다. 아무리 쥐라고 해도 저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라면 자칫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에 하룬은 내심 긴장했다.
찍! 찌직!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한 마리가 그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뛰어올랐다.
하룬의 검이 지체없이 쥐의 머리통을 향해 떨어지고, 쥐의 몸이 절반으로 갈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머지 쥐들은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흉성이 터진 듯 일제히 하룬을 향해 덤벼들었다.
‘한 번에 한 마리씩.’
하룬은 검을 휘둘러 전방을 향해 덮쳐 오는 쥐 두 마리를 베며 몸을 틀어 방향을 돌렸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베는 순간 묵직한 감각이 전해지고, 실제로 뭔가를 베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사방에서 쥐들이 공격해오는 긴박한 상황이다.
하룬은 이미 머리까지 뛰어오른 쥐 한 마리를 왼손 주먹으로 쳐 내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파악.
쥐의 몸이 쪼개지면서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윽!”
갑자기 왼쪽 어깨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쥐의 머리통이 보였다. 놈의 이빨에는 붉은 그의 피가 묻어 있었다.
“놈!”
하룬은 왼손으로 쥐의 머리통을 붙잡고 떼어내려 했지만 얼마나 이빨을 단단히 박았는지 어깨가 통째로 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이크!”
어깨를 문 놈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벌써 다른 쥐가 오른쪽 허벅지를 물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룬은 거칠게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 궤적에 걸린 쥐 세 마리가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죽었지만 어깨를 문 놈은 그대로였다.
“이 쥐새끼들! 다 죽었어.”
하룬은 피를 보자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피뿐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조금씩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건 뭐지?’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하룬은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러 쥐들과 거리를 벌린 다음 그동안 무음으로 해 놓았던 안내음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얼마나 반복된 것인지 몰라도 금방 안내음이 들렸다.
-상태 이상에 빠졌습니다. 강력한 쥐독에 중독되었습니다. 10초당 15의 데미지를 받습니다.
쥐의 이빨에 독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안내음을 들은 이상 어깨를 물고 있는 쥐를 이대로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하룬은 검을 왼손으로 옯기고 오른손으로 쥐의 머리통을 잡고 있는 힘껏 떼어냈다.
파앗!
어깨를 불로 지지는 듯 강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쥐의 이빨에는 살덩이가 물려 있었다.
“지독한…….”
하룬은 번들거리는 쥐의 눈알과 살로 피로 범벅이 된 주둥이를 보자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미물인 쥐에게 이렇게 먹잇감이 된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에잇, 죽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쥐를 하수구 벽에 던졌다.
퍼억!
얼마나 강한 힘이 들어갔는지 벽에 부딪친 쥐의 머리통이 아예 짓뭉개지며 그 아래 더러운 시궁창 물에 피가 번졌다.
‘이놈들은 단순한 쥐가 아니라 몬스터야.’
쥐라고 해도 봐줄 마음은 없었지만 인육을 먹는 마당에야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하룬은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않고 검을 곧추세웠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파앗!
강하게 물을 걷어차며 그의 검이 가공할 속도로 날아갔다.
이미 그를 향해 뛰어오르는 쥐를 향해서 날아간 검은 쥐의 머리통을 뚫고 나와 옆의 쥐를 향해 날아갔다.
‘보통 놈들이 아니야.’
쥐들은 하룬이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인지한 듯 사방을 둘러싸고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공격을 해왔다. 이미 상당한 전투 경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룬의 몸이 신들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궤적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상황이라 주로 찌르기와 베기 동시에 방향을 트는 하룬의 검로에 걸린 쥐들이 뾰족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헉헉!”
마침내 이십여 마리의 쥐들을 모두 쓰러뜨린 하룬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일정한 경로를 가진 마법 인형의 검로에 익숙해진 탓인지 공격이 불규칙하게 감행된 쥐들을 상대로 너무 많은 힘을 쓴 것이다.
“으윽, 너무 아파.”
어깨에서는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살이 크게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독 기운이 있었는지 어깨 주변의 옷이 검게 변색되었다.
하룬은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독 때문인지 아니면 짧은 시간에 너무 격렬하게 움직인 탓인지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생명력이 많이 깎인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하수구 밖으로 나왔지만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어지러움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도 그것을 인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 이걸 어째.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다행히 로즈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나 보다.
“잠깐만요.”
로즈는 치료사답게 익숙한 솜씨로 그를 치료했다.
어깨 부위의 옷을 찢어 환부를 드러낸 후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 내용물을 조금 뿌렸다.
“으으윽.”
상처 부위가 불에 타는 듯 머리칼이 곤두서는 강렬한 통증에 하룬은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파도 참아요. 상처를 해독하는 거예요.”
이를 악문 하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화율을 좀 낮추는 건데 현재 몸 상태에 최대인 55%를 자동 세팅한 탓에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매를 찢은 천으로 상처 부위를 몇 번이나 닦아낸 로즈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이제 맑은 피가 나와요. 해독은 확실하게 됐어요. 그리고 이건 무지 좋은 치료약이니까 며칠이면 흔적도 없이 나을 거예요.”
자신의 다른 쪽 옷소매를 찢어 정체 모를 약을 바른 상처부위를 단단히 맨 로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룬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붙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피를 흘렸는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유혹했지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를 깨웠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혹시 그 쥐들이?”
“맞아, 놈들이 날 공격했어.”
“세상에? 쥐가 사람을 공격하다니…….”
로즈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부르르 떨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까 고양이만 한 덩치를 가진 쥐들이 나타났어. 하지만 그놈들은 단순하게 덩치만 큰 쥐들이 아니라 일종의 몬스터들이었어. 사람의 피와 살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놈들이야.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덤벼들 리가 없어.”
“으으으.”
로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진저리를 쳤다.
잠시 시간이 흐르지 몸이 원 상태로 돌아왔다. 좋은 약이라더니 상처 부위가 화끈거리고 간간이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왼손을 쓰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이제 쇼 타임이다.”
하룬은 검을 검대에 꽂고는 아까는 미처 쓸 생각도 하지 못했던 암기대를 점검했다. 수련하려고 준비했다가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어깨를 가로질러 차고 있는 암기대에는 이십 자루의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것들을 보자 마음이 든든했다.
“오빠, 혼자서는 위험해요.”
다시 하수구로 가려는 그를 로즈가 말렸다.
“아니, 아까는 내가 방심했어. 아무리 덩치가 커도 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어.”
“나중에…… 나중에 다 같이 와요. 아니, 교육 본부에 알려요. 그럼 우리보고 하수구 청소하라는 소리는 더 이상 안 할 거예요.”
“그것은 나중에. 일단 다시 들어가 보고 혼자서 영 못 견디겠으면 돌아 나올게. 보고하는 것은 그때 하자고.”
하룬은 이를 갈았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변하기로, 강해지기로 작정했으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필요하거나 불리한 싸움까지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웬만하면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놈들은 감히 내 살을 씹고 피를 먹었단 말이야.’
그의 표정이 너무나 결연해 보였는지 로즈는 힘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돌연 품에서 작은 주머니 두 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오빠, 이건 해독제고 이건 외상 치료약이에요. 구슬 같은 것은 해독약이고 외상 치료약은 가루로 되어 있으니 상처 부위에 뿌리면 돼요. 둘 다 강력한 효능을 가지고 있지만 고통만은 좀 참기 힘들 거예요.”
“고마워, 로즈. 그리고 내가 한 시간 이내에 나오지 않으면 본부에 연락 좀 해줄래? 혹시 모르니 그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려 주고.”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아까는 내가 방심했었어. 불리하면 얼른 도망쳐 나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룬은 다시 쥐들이 득실거리는 하수구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로즈는 손을 비벼 대며 걱정했지만 따라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처벅! 처벅!
하룬의 장화가 물을 튀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가 하수구 안을 울렸다. 이미 한차례 소동을 겪은 터라 쥐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고양이만 한 쥐들과 싸웠던 곳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 번 와 본 길이라 빠르게 걸었던 것이다.
“흐음.”
이상하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치료하고 돌아오는 사이 쥐들의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틀림없이 놈들의 무리가 있거나 다른 청소부 동물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룬은 희미한 빛을 뿌리는 광석을 따라 전진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청소해 본 적이 없는 듯 바닥의 썩은 시커먼 물에서 풍기는 악취가 진동했지만 하룬은 참을 수 있었다.
‘걸리기만 해라.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가 살인적인 악취까지 참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한 5분 정도로 더 걸어 들어가자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어디로 뚫린 하수구들인지 몰라도 이곳이 중심부인 듯했다. 그곳에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는 물론 부글거리며 끓는 썩은 물방울이 터지며 유독가스까지 가득 차있었다.
하룬은 소매를 뜯어 코 밑을 가렸다. 이제는 분노로도 그 악취와 가스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익숙한 안내음이 들려왔다.
-캣랫의 던전을 찾으셨습니다.
‘엉? 캣랫의 던전이라고?’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고, 너무나 어이없게 던전을 찾은 것이다. 던전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하룬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
캣랫의 던전(E급, 임의성 던전)
썩고 오염된 것들을 먹고 사는 캣랫의 던전입니다. 이들은 수가 늘어나면 서로 잡아먹으며 그 수를 조절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조로 개체 수가 증가하면 하수구의 악취가 강해졌다가 서로 잡아먹으면서 다시 악취가 약해집니다. 캣랫은 고양이만 한 크기의 쥐로, 오염물질들을 흡수해서 만든 강력한 생체독을 가진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발톱으로 무장했습니다. 보스 몬스터 ‘오염된 랫캣’을 죽여야만 클리어됩니다.
최초 발견자에게는 보상으로 소울 포인트 20이 주어지며, 아이템 드롭률 두 배 적용과 랜덤의 확률로 미스터리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
-던전을 등록하시면 명성이 100 증가합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우연히 찾기는 했지만 드록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보통의 유저라면 이곳에 찾아 들어오는 동안 악취와 유독가스로 생명력이 다 소모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곳의 가치를 아직 모르는데 함부로 등록시킬 수는 없었다.
‘미발견 던전에 더구나 임의성 던전이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던전이라니 이거 잘하면 땡잡은 것일 수도 있겠는걸. 드디어 처음으로 소울 포인트를 얻겠구나. 더구나 잘하면 미스터리 아이템까지. 흐흐흐!’
뜻밖에 발견한 던전 때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임의성 던전이라는 것은 언제 다시 오픈될지 모르는 던전이다.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던전이 오픈되는 것이다. 단기간 내에 다른 유저들이 다시 입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하룬은 미소 지으며 한 걸음을 더 내디뎌 완전히 광장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뭔가 그의 주위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감지되었다. 썩은 물을 가르고 움직이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하룬은 들려오는 소리에 비수를 하나 빼 들고 던질 준비를 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찍! 찍찍!
역시 캣랫이었다.
놈들의 포위 공격을 당해 본 경험이 있는 하룬은 지체 없이 눈에 들어온 캣랫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찌익!
놈의 머리통에 비수가 깊이 꽂히자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썩은 물에 코를 박는 캣랫. 그 뒤와 옆에서 전진해오는 캣랫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 와도 좋아.”
한차례 놈들과 싸운 경험으로 이제 그가 배운 검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 잡은 하룬은 자신있었다. 비록 숫자가 많다지만 놈들에게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이외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었다.
정형화된 검술이 아니라 빈틈을 찾아 급소를 찌르고 베는 본능적인 검술을 깨달은 하룬이 조심만 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포위당하는 것은 위협을 자초하는 일.
하룬은 한쪽 벽을 등지고 빠르게 비수를 날렸다. 이제 삼면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 그의 미천한 실전 경험으로 후방까지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순식간에 열댓 마리의 캣랫이 비수에 맞아 죽자 놈들은 흉성이 터진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벼들었다.
“그래, 그거야!”
이성을 잃은 캣랫들은 처음처럼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 번 상대해 본 경험이 하룬을 침착하게 만들어주었다. 너무나 정직한 공격을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고양이만 한 덩치는 오히려 좋은 목표였다.
쉬익!
싸악!
하룬의 검은 찌르기와 베기의 단순한 조합에 불과했지만 캣랫들의 사체는 벌써 그의 주변에 작은 담처럼 쌓여 가고 있었다.
‘두려움을 버리면 되는 거였어. 놈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여.’
작은 깨달음이었다. 두려움을 버리고 냉철한 눈으로 상황을 보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깨달음에는 보상이 따른다.
-심안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아마 ‘심안’은 동체 시력과도 관계가 있는 듯했다. 스텟이 상승하며 흐릿한 빛 속에서도캣랫의 움직임이 더 또렷이 보였고, 아까보다 훨씬 느리게 느껴졌다.
싸악! 슈욱!
찍! 찌익!
캣랫들의 비명이 이젠 구슬프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덤벼드는 캣랫들의 공격이지만 하룬은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검을 찌르거나 휘두르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신이 난 하룬은 앞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방에서 캣랫들이 덤벼드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스킬을 익혀서 그런지 후방의 공격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검은 점점 더 유려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는 동선 주변에 캣랫들의 사체가 점점 쌓여 길을 만들 정도가 되어서야 놈들의 공격이 멈추었다. 마침내 그 많던 캣랫이 모두 죽은 것일까.
-검술 스킬 ‘센스 소드’를 익혔습니다.
───
센스 소드(패시브)
단계: Lv.1(20.00%)/Lv.5
센스 소드는 초급 검술로, 5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한 집중력과 제3의 눈인 심안으로 적의 공격을 본능적으로 막거나 피하면서 빈틈을 찾아 공격하는 검술입니다. 이 스킬을 마스터하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중급 검술로 진화합니다.
───
안내음을 듣고 스킬 창을 확인한 하룬은 마침내 미친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비록 패시브 스킬이지만 아직 전직도 못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검술을 익힌 것이다. 마법 인형과 대련하는 동안 교관들이 말해 준 것처럼 마법 인형의 검술을 따라 배우려고 했었더라면 절대로 배우지 못했을 검술이었다.
찌-이-익!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광장을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광장의 한 면이 열렸다.
“오우!”
드디어 보스 몬스터의 등장이었다.
하룬의 앞에 나타난 캣랫 보스의 덩치와 기세는 정말이지 굉장했다.
거의 호랑이 정도 되는 엄청난 덩치를 가진 거대한 캣랫이 주먹만큼 큰 노란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보았다. 강력한 뒷발로 똑바로 선 놈은 부하들의 죽음에 분노했는지 코를 벌름거리며 연방 위협적인 소리를 질렀다.
“네가 보스 몹이냐? 어서 와라!”
하룬은 검지를 까닥거리며 캣랫 보스는 도발했다. 놈은 오염된 캣랫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악취와 더불어 맡는 순간 중독될 정도의 오염 물질을 풍기고 있었다.
코와 입을 진작 가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하룬은 가능한 숨을 참았다. 비록 도발은 했지만 가린 천을 통해 몇 번 호흡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걸 알게 된 것은 역시 안내음 때문이었다.
-강력한 오염 물질에 호흡기와 피부가 오염되었습니다. 중독되었습니다. 10초당 20씩 생명력이 줄어듭니다.
오래 상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원래 생명력 수치가 낮은 데다 이전의 싸움으로 남은 생명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슈욱!
놈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비수부터 날렸다. 활짝 열린 놈의 가슴이 목표였다.
찌이-익!
녀석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연한 몸놀림으로 비수를 피하고는 하룬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먼저 공격하려던 참이었는데 놈이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과 강력한 악취를 풍기며 하룬에게 달려들었다.
“타앗!”
참았던 공기를 기합과 함께 내뱉으며 놈의 눈을 찔러갔다.
채앵!
놈의 눈을 노리고 찌른 검이 발톱과 부딪치며 금속성과 함께 튕겨 나갔다. 하룬은 검이 튕기는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켜 놈의 공격을 피했다.
파밧!
놈의 발톱이 얼마나 강하고 날카로운지 썩은 물은 물론 바닥에 깊게 파인 흔적이 남을 정도였다.
꿀꺽.
긴장한 하룬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놈의 발톱에 걸리는 날이면 그 부위가 어디든지 무참하게 뜯겨 나갈 것이다.
하지만 투기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바닥을 강하게 차고 도약한 하룬은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 아쉬운 눈빛을 보내는 놈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채앵!
다시 놈의 발톱과 검이 부딪치며 금속성이 났다. 캣랫 보스의 강력한 괴력에 뒤로 튕긴 하룬의 몸이 착지하고 놈이 도약하는 순간 검을 왼손으로 옮겨 쥔 그의 오른손에서 비수가 전광석화처럼 쏘아졌다.
찍! 찌이익!
막 도약하던 캣랫 보스의 오른쪽 눈에 비수가 깊이 박혔다. 놈은 고통스러운지 귀가 먹먹할 정도의 비명을 질렀다.
슈욱!
또 한 자루의 비수가 날아갔다. 다른 데와 달리 약해 보이는 곳이었다. 피가 철철 후르는 눈을 보여잡은 양 앞발 사이가 바로 그곳이었다.
푸욱!
경쾌한 파육음破肉音과 함께 캣랫의 거대한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두 앞발을 내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성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캣랫의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악취가 풍기는 입 안에서 비수의 자루가 보였다.
“이젠 가랏!”
하룬은 뒷다리로 선 채 비틀거리는 캣랫 보스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흉악하게 생긴 녀석의 머리통이 멀리 날아갔다.
털썩.
팟!
결국 목을 잃은 캣랫 보스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썩은 물을 튀겼다.
-캣랫의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기분 좋은 안내음이 들려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칭호 ‘캣랫 슬레이어’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소울 포인트 5점을 획득하고, 모든 스텟이 1씩 상승합니다.
-보상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미스터리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소울 포인트를 5 얻었습니다.
-심안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힘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이미 제대로 된 검술 스킬을 얻은 것에 더해 전투와 스킬에 관련된 스텟들이 모두 1씩 올랐다. 그동안 수련만 했지 실전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짜릿한 흥분과 자극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보상 아이템은 물론이고 랜덤 확률이라던 미스터리 아이템까지 받은 것이다.
“좋았어!”
이제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자신만의 검술 스킬이 생긴 것이다. 비록 지금의 경지는 하급이지만 전투를 치르다 보면 그가 원하는 대로 강해질 것이다.
뿌듯했다.
‘앞으로는 심안과 집중 스텟에 신경 써야겠구나.’
본능 검술은 빠른 동체 시력과 쾌속한 움직임이 필수였다. 전투 경험과 함께 두 스텟을 올리면 본능 검술이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이번에는 아이템을 볼 차례였다.
하룬은 캣랫 보스를 처치하고 인벤토리로 들어온 두 개의 아이템을 꺼냈다.
“이게 바로 아이템이란 말이지.”
너무 신기했다.
하나는 한눈에 보아도 캣랫 보스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였다. 놈의 가죽은 가까운 거리에서 던진 비수도 뚫지 못했으니 엄청나게 질기고 강할 것이다.
“정보 창.”
───
캣랫의 발톱 비수
등급: 매직
공격력: 200
내구도: 없음
극심하게 오염된 지역에만 거주하는 캣랫 보스의 발톱으로 만든 비수이다.
강철보다 더 강하고 날카로울 뿐 아니라 오염 물질을 품고 있어 상대의 생명력에 10초당 20의 데미지를 지속적으로 입힌다.
제한: 없음
───
“이거 좋은 건가?”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오염 물질을 품고 있어 강력한 데미지를 지속적으로 준다는 점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아직 비욘드의 아이템을 구경해본 적이 거의 없으니 얼마만큼 좋은 아이템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등급이 노멀이 아니라 매직이니 흔한 물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단 보관해두자.’
하룬은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공처럼 둥글게 생긴 그것은 이상한 냄새가 나고 색깔은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것이 영 마뜩찮아 보였다. 코를 막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도 있고 다리도 있는 것이 생물 같아 보였다.
“뭐지?”
얼굴은 늙은이처럼 쭈글쭈글했고 다리는 짧고 타는 듯 붉은색 꼬리까지 있었다. 더 웃긴 것은 그 몸에 네 쌍의 날개까지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물도 있었나?’
현실은 물론 각종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생김새를 가진 구형의 생물은 마치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정보 창.”
───
오염된 정령(미스터리 펫)
레벨: 1
세상이 신계와 마계, 물질계 그리고 정령계로 나뉠 때 모종의 일로 정령계에 가지 못한 에센셜 정령이다. 모종의 일로 힘을 상실한 정령은 이곳에서 잠이 들었다. 그사이 하수구가 건설되고 각종 오염 물질들이 정령을 오염시켰다. 이제 더 이상 정령계로도 가지 못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잘 보살피면서 능력을 키우면 제법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자의식이 강해 쉽게 길들이는 것은 어려울지도…….
능력: 소환자의 능력에 따라 모든 속성의 정령력을 발휘할 수 있다. 주인의 마나량 한도에서 레벨 50까지는 하급 정령의 힘을, 레벨 150까지는 중급 정령의 힘을, 레벨 250까지는 상급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다. 그 이상은 자아를 가진 정령의 선택에 따라 가능하다. 또 펫 자신의 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자신만의 스킬을 사용할 수도 있다.
소환 방법: 소환 대기 상태에서는 마나의 소모 없이 펫과 의지만으로 대화할 수 있다. 소환하려면 초당 1의 마나가 필요하며, 정령 마법을 펼치려면 초당 10의 마나와 초당 10의 정령력이 필요하다. 다만 펫의 능력에 따라 정령력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주의할 점은 소환하면 소환자까지 중독되어 초당 1의 데미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제한: 펫 레벨 10 이전에는 소환자를 제외하고는 펫을 볼 수 없다. 펫 자신의 아공간을 가지기 위해서는 레벨이 10 이상 되어야 하고, 다양한 속성을 가진 아이템들로부터 많은 양의 마나를 섭취해야 한다.
계약 조건: 펫에 대고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면 된다. 방법은 손가락 끝을 펫의 입에 대고 ‘마나 주입’이라고 외치면 된다.
───
“뭐야, 얘가 펫이라고?”
기가 막혔다.
아무리 미약해도 모든 속성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이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펫이라니. 완전 사기 캐릭터가 아닌가.
설명대로라면 정령은 정령인데 이제는 오염된 탓에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였다. 아마 그래서 펫으로 분류가 되었나 보다.
소환하면 자신까지 데미지를 받게 되지만 정령이라는 말에 눈이 확 뜨이는 하룬이었다.
이 녀석을 쓸 수 있다면 그가 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하룬은 자신이 중독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중으로 중독되었습니다. 10초당 30의 생명력이 떨어집니다.
안내음이 없었으면 중독사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몰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하룬은 잽싸게 아이템들을 인벤토리에 넣고 로즈가 준 해독약을 집어 먹었다.
“커억! 컥!”
급하게 넘긴 탓에 목구멍이 아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부러 우물거려 억지로 침을 나오게 하니 조금은 견딜 만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해독되었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하룬은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이 죽인 캣랫 보스와 캣랫의 사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 때문인지 악취도 많이 없어진 것 같았다. 이 하수구의 중앙 부분이 던전이라 언젠가는 리젠될 것이다.
비록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지만 나름 얻은 것이 많았던 하수구였다. 얼른 로그아웃해서 펫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보고 싶었다.
마음이 급하니 하수구를 빠져나가는 그의 걸음이 자연히 빨라졌다.
“오빠? 하룬 오빠야?”
철벅거리며 하수구를 빠져나오는 그를 입구에서 로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밖은 어느새 빗줄기가 거세졌고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
로즈는 그동안 걱정으로 속을 끓였는지 얼굴이 울상이었다.
“오빠 꼴이 엉망이네. 다치진 않았어?”
“응, 네가 걱정해 준 덕분에 괜찮아.”
“후유, 다행이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오빠가 안 나오면 본부로 가려고 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수구 안에서 나는 악취가 줄어들더니 안 나는 거야. 그래서 오빠가 그 징그러운 것들을 다 해치우고 냄새의 근원을 없애버렸다는 것을 알았지. 그런데 그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던 거야?”
하룬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목표로 했던 하수구 청소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놈들이 다시 리젠될 때까지 악취는 나지 않을 것이다.
하룬이 생각하기에 악취의 근원은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 미스터리 펫이나 캣랫들이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로즈의 말에 일일이 대답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더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일단 피곤해서 좀 쉬었으면 좋겠어.”
피곤한 얼굴의 하룬을 본 로즈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세찬 비를 맞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로그아웃한 하룬은 먼저 캣랫 보스의 발톱 비수를 검색해보았다.
아직 유저들의 레벨이 높지 않아서 넥컴월의 아이템 거래 사이트는 한산했다. 기껏해야 대장간에서 파는 철검류의 조약한 품질의 방어구들만이 거래될 뿐이었다.
그래서 비욘드 홈페이지에 있는 경매장에 접속했다. 그간 비욘드에서 NPC들이 경매한 기록을 열람할 수 있었다.
‘흠. 캣랫의 던전에 들어간 사람은 NPC 중에서도 없었나?’
캣랫 보스나 캣랫 보스의 발톱 비수를 검색해보았지만 테론 제국의 생성 이래 모든 기록이 남아 있는 경매 기록에도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그가 유저와 NPC를 포함해서 캣랫 던전에 들어간 최초의 존재일 가능성이 컸다.
‘하긴 그 냄새나는 곳에 누가 들어가겠어. 들어간다고 해도 캣랫을 감당할 수 없는 일꾼들이 고작이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 그 수가 줄어 악취도 나지 않았을 테니 다시 잊혔겠지. 그렇다고 캣랫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일단 좋은 정보를 얻었다.
비록 사용자까지 오염 물질로 중독시키는 단점은 있지만 공격력이 200이나 되는 무기는 강철검과 몇몇 무기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다.
‘일단 보관하자. 어차피 지금은 팔려고 해도 제값을 받기 힘드니까.’
하룬은 이번에는 펫에 대한 사항을 검색했다.
펫은 거의 모든 게임에 있는 존재였다. 그 종류도 다양해서 글자 그대로 애완용도 있었지만 사령술사나 흑마법사들이 거느린 무시무시한 존재들도 있었다. 소환 계약도 간단해서 자신의 마나를 인증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소환자와 마찬가지로 각종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라서 가능하면 늘 소환해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하필이면 오염된 정령이 뭐야. 소환만 해도 중독되다니. 그런 이상한 펫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소환만 하면 자신까지 오염돼 버리니 함부로 소환할 수 없었다. 생명력이나 빵빵하면 괜찮겠지만 그는 아직 전직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단 소환은 해야 했다.
정령의 힘을 반드시 써야만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자신이 중독사하기 전에 녀석의 힘을 끌어내 정령 마법의 흔적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에 있었다.
‘일단 해보자.’
남은 시간 동안 펫을 이용해 정령 마법을 연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간 꾸준히 행운 스텟을 올린 덕분인지 아니면 유저가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주는 시스템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은 것은 다행이었다.
비욘드로 돌아온 하룬은 인벤토리에서 오염된 정령을 꺼냈다.
-중독되었습니다. 초당 1의 데미지를 받습니다.
여지없이 오염됐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하룬은 잠시 인상을 한 번 쓰고는 그것을 두 손으로 잘 잡았다.
마치 공처럼 생긴 흉한 외형이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 오염돼 버리지만 일단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각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하룬은 손가락 끝에 의식을 집중하고 소리쳤다.
“마나 주입.”
처음에는 그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지만 잠시 후 손가락 끝을 통해 자신의 몸속에 있던 뭔가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오염된 정령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쭈글쭈글한 얼굴이 팽팽하게 펴지면서 눈이 뜨이고 있었다. 원래 시꺼먼 얼굴이라 눈도 구별할 수 없었는데 흰자위 속에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난 네 주인이다. 잘 기억해 둬.”
끔벅, 끔벅.
녀석은 아직 말을 할 수 없는지 눈을 끔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초리가 왠지 기분이 상했다. 마치 네 따위가 나의 주인이냐는 듯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기분이겠지.’
하지만 더 이상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아기가 젖을 먹듯 욕심껏 빧아들이는 바람에 마나 역시 절반 넘게 소비되었다.
하룬은 재빨리 정령을 인벤토리에 넣고 해독약을 복용했다. 자신의 손을 보니 언제 오염되었는지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자루 없는 검을 든 기분이네.’
이 녀석을 부릴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중독되면서까지 소환물을 부려야 하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정령을 소환했다. 이제 정령은 완전히 깨어나 있었다.
“너 누구냐? 왜 귀찮게 깨웠어?”
하룬은 기가 막혔다. 말투도 그렇고 그를 쳐다보는 눈초리도 기분이 나빴다.
“넌 이제 내 펫이다.”
“내가 왜?”
“네 녀석이 내 마나를 쳐, 드, 셨, 으, 니, 까.”
하룬은 이를 갈며 천천히 말했다.
“누가 달래? 난 인정 못 해!”
역시나 이죽거리는 놈이다. 이런 녀석을 다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런 것은 굳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자동적으로 주먹이 튕기듯 녀석을 향해 날아갔다.
“말!”
퍽!
주먹으로 얼굴을 쳤다. 주먹맛이 어떤지 알았을 것이다.
“좀!”
퍽! 퍽!
이번에는 두 대가 연속으로 불룩 나온 배를 쳤다. 주먹맛이 기가 막히지?
“공!”
퍼퍼퍽!
양 주먹으로 번갈아가며 쳤다. 배가 순간적으로 들어갔다.
“손.”
빡!
불손한 눈초리가 싫어 머리통을 쳤다. 주먹맛이 살인적일 것이다.
“하!”
빡!
튀어나온 옆통수가 왠지 얄미웠다. 눈알이 핑그르르 도는 것이 정말 통쾌했다.
“게!”
빡! 빡!
이번에는 양 주먹이었다.
“해!”
뻑! 뻑!
발로 튀어나온 허리를 찼다. 마치 공처럼 옆으로 날아가는 모습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라!”
퍽! 빡!
주먹과 발이 연속으로 나갔다. 무릎도 가세했다.
드디어 녀석의 얼굴에서 눈이 사라졌고 기분 나쁜 눈초리가 없어졌다. 처음보다 훨씬 더 부은 것 같았다.
-중독 상태가 심각합니다.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30초 내에 사망합니다.
하룬은 급하게 해독약을 복용했다. 때린 것만으로도 중독이 되니 미칠 노릇이었다.
‘어디서 이런 펫이 나타나서…….’
성질이 나니 말이 부드럽게 나갈 리 없었다.
“똑바로 섯!”
어째 몸이 조금 부푼 것 같은 정령이 비틀거리다 황급히 똑바로 서기 위해 휘청거렸다.
“내가 네 주인이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드는 대답이 나왔다. 좀 더 패면 존댓말까지 나올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쨌든 설명대로라면 엄청나게 오래 산 녀석이니까.’
폭력은 생각보다 더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 펫 때문에 앞으로 많이 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이름은 하룬이다.”
“알았다고, 주인……님.”
주름인지 아니면 부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정령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첫 번째 교육은 이걸로 끝내기로 했다.
원래 하룬의 성격은 유한 편이었다.
“네 이름은 뭐냐?”
“없는데. 하나 지어 주지, 예쁜 걸로.”
생긴 것은 꼭 돼지 방광 같은 주제에 예쁜 것은 밝힌다. 그래도 반말이긴 하지만 말투가 공손해졌으니 이름은 지어주자 싶었다.
잠시 머리를 굴렸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리네 어때? 은하수란 뜻이지.”
“싫어, 너무 여성스럽잖아.”
예쁜 것과 여성스러운 것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 하룬은 황당했다.
“로즈. 꽃 이름이야.”
“맘에 안 들어.”
“아이리스. 예쁜 꽃 이름이야.”
“너무 무성의하잖아. 그거 흔한 이름이지?”
하룬은 할 말이 없었다.
대충 만족했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정령은 마치 주인의 지적인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냐는 듯 꼬인 눈길로 바라보는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오기가 나서 몇 가지 여자 이름들을 말해봤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 사이 벌써 중독 상태가 심해지고 있었다. 다시 돌려보내고 해독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싸가지. 이것도 싫으면 넌 불꽃과 함께 타 버릴지도 몰라.”
이제 인내심이 바닥난 하룬의 목소리에서 무시무시한 포스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거부하면 아예 모닥불을 피워 태워버리고 말리라는 생각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그…… 싸가지는 좀…….”
하룬이 인상을 쓰며 정령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던져 버릴 참이었다. 더 이상 손에 잡고 있으면 중독사할 것 같았다.
“으…… 알았다, 주인. 맘에 드, 든다.”
녀석은 하룬이 진짜로 그렇게 할 것을 짐작한 것인지 좀 질린 얼굴이 되어 가까스로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기가 죽은 모습에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쾌감이 치밀었다.
이제 계약을 끝냈으니 녀석의 상태 창을 확인해야 했다.
───
이름: 싸가지
종족: 에센셜 정령
분류: 미스터리 펫
레벨: 1
칭호: 오염된 정령
생명력: 무한
마나: 1,000
정령력: 1,000
[보유 스킬]
포이즌 스킬: 독에 관한 모든 기본적인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다. 독의 살포, 흡수는 물론 조합도 가능하다. 소모 마나는 초당 1.
정령 마법: 모든 속성의 하급 정령 마법 가능(초당 10의 마나 소비와 초당 10의 정령력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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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센셜 정령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레벨 1짜리 펫인 주제에 무한의 생명력과 1,000이라는 엄청난 수치의 마나와 정령력이라니, 부러울 정도였다. 더구나 정령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간절하게 원하던 것이었다.
다만 포이즌에 관련된 스킬은 독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일단은 내 펫이니까 좋은 거겠지.’
하지만 말투나 행동이 영 싸가지없고 소환만 하면 중독되는 페널티가 걸려 있으니 녀석을 펫으로 삼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녀석의 정령 마법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이니 설령 썩은 줄이라도 붙잡는 수밖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네 존재를 알아채게 만들 방법은 있는 거냐?”
“그런 거야 주인이 고민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 에휴, 그래도 내게 세상을 구경시켜 주었으니 대답은 해 주지. 하급 정령들이야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마나의 유동과 현신한 결과인 바람이나 물 그리고 불의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 알아차리지 않을까?”
삐딱한 대답이지만 일리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간단해서 재미없지.’
하룬은 잠시 고민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령을 쓰게 되었으니 그 방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리라. 일단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더러운 인상과 중독까지 시키는 녀석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제 소환 의식은 끝났으니 넌 다시 들어가.”
싸가지 없는 정령 펫 싸가지는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펫이 저따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가슴 깊숙한 곳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시 한 번 불러서 패 버릴까?’
아무튼 하룬은 이제 싸가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만만하게 다루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 오를 것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다른 펫들처럼 예쁘거나 사랑스럽지도 않으면서 저렇게 싸가지가 없으니 정령계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것이리라.
검게 중독된 얼굴로 힘들게 손을 움직여 해독약을 먹은 하룬은 이를 갈았다. 이번만 제대로 쓰면 다신 소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펫이 원래 저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나?’
원래 펫은 알아서 새끼 상태로 가지는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소환자가 모든 것을 알려주며 키워야 한다.
그런데 싸가지는 전혀 달랐다.
‘이미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해왔던 녀석이라 그런가?’
그나마 의사소통이 원활한 녀석이라 다행이기는 했다. 말도 못 알아들으면 그의 계획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것이다.
녀석을 소환하는 것이 정령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기 위해 겸사겸사 상태 창을 확인했다.
───
이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