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
검술 수련이 시작된 지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 오후.
“이제 기초 검술 수련을 종료한다.”
레니 교관은 착잡한 얼굴로 수련생들의 얼굴을 쭉 돌아보았다. 다들 뭔가 얻은 것들이 있는 듯 그의 시선을 대하는 눈빛들에서 힘이 느껴졌다.
“검술을 가르치는 교관으로서 이제까지 여러분 같은 수련생들을 본 적이 없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여러분들을 제대로 검의 길로 인도했다는 뿌듯한 보람과 동시에 더 이상 여러분과 같이할 수 없음에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그동안 본 교관과 함께한 조교들 역시 같은 기분일 것이다.”
뒤에 도열한 조교들의 얼굴이 그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여러분의 수련 과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성공적으로 검술 수련을 끝낸 여러분들은 오늘 오후는 푹 쉬고 내일부터 새로운 수련을 받게 될 것이다. 남은 한 달 동안 여러분들은 용병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여러 가지 지식들은 물론 검술 이외의 무기술과 각종 지식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수련 내용은 가장 많지만 개인적인 선택이 가능하므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러분에게 수련 과정 중 가장 여유가 많이 나는 시간이다.”
그의 말에 수련생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열심히 수련했고 나름 얻은 것도 많았던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쳤기 때문이다.
바로 곁에서 수련에 매진했던 동기들에게 본능적으로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벌써 손을 놓았을지도 모르는 치열한 검술 수련이었다.
“마법사들은 그동안 마나를 제어해왔던 팔찌를 벗게 된다. 이제 남은 기간은 한 달. 자신이 필요한 지식들은 마음껏 흡수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잘할 수 있는 부분은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현명하게 시간을 써야 한다. 앞으로 특수 용병이 되거나 혹은 용병대나 용병단을 비롯한 용병 단체의 수장이 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교육이 없으니 최대한 이 기회를 활용하기 바란다. 그동안 여러분들과 같이 생활해서 기뻤다.”
박수 소리가 수련장을 진동했다.
더 이상 검술 수련이 없을 거라는 시원함과, 열정을 푹 쏟았던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수련생들의 우렁찬 박수 소리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레니 교관과 조교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할 수련에 대한 소개가 남아 있어 아직 수련생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수련생들과 좀 떨어진 외곽에 하룬이 있었다. 오늘까지 마저 수련을 더 하려는 그를 이젠 쉬어야 한다고 조교들과 네미온이 설득해서 겨우 끌고 온 것이다.
“그런데 너 정말 끝까지 말하지 않을 거야? 무슨 마법을 익혔는데? 궁금해서 미치겠어. 난 궁금한 건 절대로 못 참거든.”
하룬은 볼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되풀이되는 네미온의 은근한 질문에 난처한 얼굴이 되어 아무 말도 못 했다.
“꼭 그렇게 신비주의로 나갈 거니?”
“나중에 말해 줄게.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그래.”
“피이! 꼭 마나의 맹서라도 한 것처럼 그러네.”
표시 나게 난처한 얼굴이 된 하룬이 안됐다고 느꼈는지 네미온은 포기하는 듯했다.
하룬은 얼른 화제를 돌려야 할 간절한 필요를 느꼈다. 그녀가 아주 집요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그동안 깨칠 것이다.
마침 그 순간에 갈 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하룬보다는 네미온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네미야, 그런데 정령사는 어떻게 되는 거니? 뭐,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으음…… 그것은 비밀이라고.”
네미온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는 이상한 눈길로 갈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당신은 같은 사승이 아니면 절대 자신이 익힌 마법을 남에게 발설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마법사가 아니냐는 듯이.
정령 이야기가 나오자 하룬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안 그래도 재수 4인방을 중심으로 일단의 무리가 그는 마법사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말이 동기들 간에 퍼지고 있다는 것에 점점 더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검술 수련에 미치기는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가 수련하는 곳에서도 공공연하게 회자되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속성으로, 일회성으로라도 마법을 익히고 싶은 하룬이기에 정령 마법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 것이다.
“상세한 것이 아니라 대충이라도 알고 싶어서 그래. 명색이 내 동기 중에 유명한 정령사가 있고, 나름 친하게 지냈으니 대충이라도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
뜨끔한 나머지 얼른 둘러댄 갈리의 말이 용케 네미온을 이해시켰는지 그녀의 얼굴에서 의아한 기색이 사라지고 자부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호호!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나중에 어디 가서 내가 네 동기라고 말하려면 정령사에 대해서 남들보다는 더 알아야겠지.”
“그, 그거야, 바로. 내 말이.”
“오빠도 마법사니까 잘 알겠지만 선천적으로 마나에 민감해야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정령사도 마찬가지야. 속성 정령으로 분류되는 네 가지 정령의 성질에 선천적으로 민감해야만 정령사가 될 수 있어.”
“불과 바람, 물 그리고 대지의 성질에 민감하다는 건 무슨 의미인데?”
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마나에 민감하다는 말은 그래도 이해가 가는데 성질에 민감하다는 말은 마법에는 문외한인 하룬에게는 난해한 말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오빠. 그냥 자연을 잘 이해하고 쉽게 느끼고 자연과 친구가 되면 되니까.”
쉬운 것처럼 말하는 그녀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인 천 명 중 한두 명만이 마나에 민감한 체질로 태어난다고 한다. 정령사는 일반인 십만 명 중 한두 명 정도의 확률이니 절대로 쉬울 리가 없었다.
“자연이라고?”
“그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그중 가장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바로 네 가지 속성이야. 그걸 이해하고 친숙하게 느낄 때 정령사가 되는 거지.”
“네 말을 들으니 더 어렵다.”
그들은 쉬는 시간 내내 정령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고 하룬은 눈길을 땅으로 향한 채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정령력 혹은 정령 친화력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확인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중 하나는 대표적인 네 정령의 속성을 가진 대상물을 앞에 두고 그 성질을 느끼는 것인데, 만약 정령 친화력이 있다면 마나와는 다른 정령의 기운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녀처럼 높은 정령 친화력이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마법진을 그려 직접 정령을 소환해서 계약하는 방법인데, 이 경우 친화력이 없으면 정령이 계약을 거부한다고 한다.
‘좋은 것을 알았네.’
마법에 문외한인 하룬에게는 두 사람의 대화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중한 정보였다.
갑자기 그들이 앉아 있던 곳으로 한 여자 수련생이 다가왔다.
눈에 익숙한 그녀는 자신이 대상인지도 모르고 주변을 둘러보는 하룬을 향해 묘한 눈길을 던지며 이죽거렸다.
“야, 123! 아니, 정체가 페이크라고 했던가. 너 이제 큰일나지 않았냐?”
“무슨 소리야, 그게?”
페이크라는 말에 발끈한 네미온이 하룬 대신 그녀에게 표독하게 반문했다.
“팔찌가 풀리는 내일이면, 아니 네가 끝내 숨긴다고 해도 수료하는 날에는 네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텐데 그렇게 태평하게 있다니 대단하네. 누군지 모르지만 네 녀석을 이 과정에 추천한 가증스러운 인물도 처벌받을 텐데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네미온은 코로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며 삿대질을 했다. 평소 온화한 갈리도 성이 잔뜩 난 얼굴이었다.
“이젠 별 같잖은 말까지……. 세보나, 너도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겠구나.”
“이거, 왜 이래. 만약 모든 것이 다 사실로 밝혀지면 네미온 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난 너까지 망가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고.”
세보나라는 여자 수련생의 말을 듣는 순간 네미온은 마땅히 응대할 수 없었다. 여태껏 줄기차게 하룬에게 물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기에 그녀는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하룬이 이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일단 수련생들 간의 싸움은 금지되었지만 명분만 있다면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세보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의 기세는 실로 위압적이었다.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이런 기세가 나올 수 없었다.
네미온은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섰다.
하룬은 세보나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낯익은 얼굴. 언제나 꽉 다문 입과 강한 눈빛이 인상적인 수련생이었다. 그의 기억에는 지독하게 수련하는 수련생 중 한 명이었다. 구보나 행군 그리고 각종 수련에서 항상 선두권에 있었다.
하지만 그간 인사는 물론 말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사이인데 갑자기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이가 없어 순간 할 말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하룬의 태도가 불쾌했는지 세보나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교관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니 이제는 동기들이 우습니? 아니면 내 말이 말 같지 않니? 너 왜 대답을 안 해?”
“허어, 참.”
하룬은 헛웃음만 나올 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때, 맞지? 틀림없다니까.”
“우리가 인맥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추천인도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마법사라면서 스캔해 보니 마나도 거의 없었어.”
“호호호, 거기에 세보나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확실하네, 뭐.”
“우리가 하는 말은 잘도 씹더니 그래도 세보나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오는 녀석들은 바로 재수 4인방이었다.
이 연놈들이 자신들 말은 아예 무시하는 하룬과 네미온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실력과 유명세를 동시에 가진 세보나를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다.
세보나는 ‘붉은달’ 용병단주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용병단은 제국 10대용병단 중 하나였다. 재수 4인방도 길드에서 강한 입김을 가진 실세들의 자녀들이지만 그녀는 차원이 달랐다.
결국 힘겨웠던 검술 수련 과정 동안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하룬을 향한 일부 수련생들의 시기와 질투가 수련이 끝나며 다시 부상한 것이다. 이게 다 하룬이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탓이었다.
수련생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출신에 따라 패가 갈리고 서로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몸이 부실한 마법사들이 묵는 A동 기숙사 출신들이야 워낙 육체적인 단점을 인정하는 무리였으니 하룬에게 기대와 성원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다른 동 출신들은 아주 많이 달랐다.
비록 수련과 근로 작업에만 매진하기는 했지만 하룬은 이제는 이곳과 용병계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해가고 있었다. 비록 대화는 하지 않더라도 습관처럼 남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곤 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마법사가 아니란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질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의 선의를 생각해서라도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했다.
“네가 왜 그게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네 말대로 나중에 다 밝혀질 텐데 지금 시점에서 왜 그렇게 궁금한 거지?”
“이익!”
“이럴 시간 있으면 앞으로 한 달 동안 더 열심히 수련해서 날 제쳐 봐. 그게 당당한 거 아니야?”
세보나는 담담한 태도를 견지하는 하룬의 대응에 분한 듯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하지만 이내 눈매가 묘하게 바뀌었다.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내가 보기에 넌 마법사일 리가 절대로 없어. 일반인 정도의 마나를 가진 마법사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더구나 마법사라면서 그런 능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도대체 누구의 추천을 받고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널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용병 길드는 신분을 속이고 이곳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무리들까지 순순하게 넘길 만큼 만만한 단체가 아니니까.”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무리로 들어갔다. 재수 4인방은 마치 수하라도 된 것처럼 그녀를 가운데 놓고 위세를 부리며 사라져 갔다.
“하룬, 너무 신경 쓰지 마. 네가 하도 월등한 실력을 드러내니까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거야. 하긴 마법사 출신으로 너 같은 능력을 보인 사람은 정말 드무니까. 거기다 교관들이 널 수석 수료생으로 찍었다는 소문이 도니 질투하고 시기하는 녀석들이 나올 수밖에. 그건 그렇고, 너 어디 출신이냐? 왜 그걸 말하지 않는 거야? 나도 궁금하다.”
“그건……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하룬은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매킨과 약속했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말없이 기숙사로 향하는 세보나를 바라보는 네미온과 달리 갈리는 그가 마법사 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아예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 마나의 맹서를 한 거 아니냐?”
“어떻게 그걸…….”
마나의 맹서가 뭔지 모르지만 네미온도 한 번 언급했었기에 하룬은 놀란 듯 평소보다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이런! 맞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소소한 것까지 마나의 맹서를 한 거야. 맹서를 어기면 마나가 모조리 사라지고 마는데. 이런 일은 당연히 고려했어야지.”
“…….”
“그랬구나.”
갈리의 말에 네미온의 얼굴이 약간은 환해졌다. 하룬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미안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 눈을 보며 하룬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갈리가 넘겨짚은 말 때문에 최악의 사태는 막았지만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비록 나이는 많지만 천성이 밝아 순수한 갈리는 물론이고 네미온까지 마음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뭐, 어차피 수료하는 날 장기시연하면서 네 본연의 마법능력을 보여 주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의심에 찬 지들 눈앞에서 떡하니 마법을 보여 주면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기대된다.”
“그, 그렇지요, 뭐.”
그렇게 대답한 하룬의 기분이 최악이었다.
수련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사람이 살고 무리를 짓고 세를 과시하는 집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면 이 과정에 편법으로 넣어준 엘저와 매킨이 당장 피해를 볼 것이다.
‘남는 방이 A동 밖에 없어서 그랬다고 한들 이제는 소용없을 거야.’
유령들이 나오는 방이라고 벌써 몇십 년 동안 소문이 자자했던 구석방만 남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 방이 비지 않았다면 매킨도 아무리 엘저의 부탁이 있었어도 하룬을 이 과정에 넣어주지 않았을 테니까.
“빌어먹을!”
하룬은 근로 작업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로그아웃했다.
마침 시간이 많이 나기에 이 기회에 마법의 전반을 벨을 통해 알아보려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자 양 갈래 머리를 한 벨이 그를 반겼다. 외롭기라도 했는지 귀여운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하긴 무심하긴 했다. 게임 시간이긴 하지만 무려 한 달 동안 현실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벨, 별일 없었지?”
-네, 캡틴!
하긴 별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친구 하나 제대로 없는 하룬을 찾아올 사람은 옆에 사는 진수가 고작일 텐데, 요새 그는 비욘드에 쏙 빠져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형을 찾아가 볼까?’
그래도 다크 게이머를 꿈꾸는 사람이라 벨과는 또 달리 유저만의 정보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창 게임에 열중하는 그를 방해하는 것은 하룬의 소심한 성격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하룬은 다시 게임기로 들어갔다.
“벨, 마법에 대한 자료들을 좀 찾아 봐 줄래?”
-네, 캡틴.
“현재 비욘드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익히는 과정이나 방법을 주로 검색해 줘.”
-네, 그런데…….
웬일인지 벨이 말을 하다가 말았다. 그녀의 얼굴빛이 요상했다.
“왜? 뭐가 이상해?”
-그게…… 캡틴 맞아요? 아니, 그보다 내, 냄새가 너무 심해요.
그의 몸을 아래위로 연방 쓸어 보며 갸웃거리던 벨이 이내 손으로 코를 쥐었다.
“내 몸이 어때서? 그리고 어디서 냄새가 난다고 그래. 난 아무 냄새도 못 맡게…… 크흑! 뭐……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하룬은 몸이 새까만 때로 도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비로소 심각한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지독한 악취는 처음이었다. 냄새를 인식한 순간 절로 얼굴이 찌그러지며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코를 쥐고 말았다.
-빨리 목욕부터 하세요. 그사이에 정보를 찾아 놓을게요.
“그래, 부탁해.”
하룬은 벨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 이제 막 올라가기 시작하는 캡슐 뚜껑 사이로 돌진했다.
“빌어먹을!”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아를 가진 벨 앞에서 이게 웬 망신이란 말인가. 그녀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하룬은 벨이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릴 정신도 없었다.
자신이 맡아도 기절할 정도의 악취를 풍기는 새까만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모습을 보이다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으며 빠르게 물이 채워지는 욕조 안에 앉았다.
그동안 매일 샤워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워낙 수련이 고되고 힘들어 집중력이 풀리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대충 얼굴과 몸에 물을 묻히는 것으로 씻어왔는데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대망신이었다.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구석구석 때를 민 하룬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거울 앞에 섰다. 이제야 겨우 거울을 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어……어? 이게 누구야?”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인물이 서 있었다. 순간 하룬은 정신이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이곳이 어디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릴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멍청한 눈으로 거울 속에 미친 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거울 속의 인물에서 익숙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냉정한 눈매와 한쪽 눈만 쌍꺼풀이 진 것 하며 유난히 높은 코……. 순간 하룬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나다!”
그랬다.
거울 속에 있는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해골을 연상시켰던 그의 외모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도 광대뼈가 드러났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살이 올라 이제는 제법 잘생겼다는 평을 들을 만한 얼굴은 물론 자잘한 근육으로 만들어진 육체까지, 생경하게 보였지만 바로 자신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키만 컸지 해골같이 말랐던 그가 게임 시간으로 두 달 만에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다. 외모에는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밤낮으로 수련한 결과였다.
“후후후, 제법 근사한데.”
하룬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외모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그거야 워낙 그의 몰골이 그래서 아예 다른 사람의 시선은 포기하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자신이 봐도 근사하게 보였다.
‘게임에서의 내 변화가 현실에서 통한단 말이지. 그럼 힘은 어떨까?’
하룬은 욕실을 나온 즉시 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찾았다. 그것은 냉장고였다. 휴먼의 신기술로도 냉장고의 크기와 무게는 거의 줄일 수 없었기에 성인 남자가 혼자서는 들 수 없는 무게를 가진 물건이었다.
더구나 포장되어 있을 때와 달리 높이가 2.5미터에 육박하는 냉장고를 양손으로 들어 올린다는 것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룬은 근육질의 팔을 한번 굽혀 보고는 미소 지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체력 단련을 하면서 늘 들곤 했던 바위 중에는 그의 몸체만 한 것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다 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냉장고의 중간 부분을 양손으로 꽉 잡고 힘을 주었다.
“이얍!”
그 무거운 냉장고가 적당한 무게감을 전하며 단숨에 위로 올라갔다.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팔로 전달되는 무게감은 게임을 하기 전과는 너무 많이 달랐다.
“허어…… 허…….”
잠시 말을 잊은 하룬.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집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 하하하!”
직접 몸으로 확인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제 겨우 현실로 이십 일이 지났는데 예전과 감히 비교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룬은 냉장고를 내려놓고 또 다른 무거운 것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벨이었다. 건장한 일꾼 둘이 끙끙거리며 겨우 들고 들어왔던 캡슐이라면 들기 힘들지도 몰랐다.
“이얍.”
낮은 기합과 함께 팔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렇게 많이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꽉 잡은 캡슐의 길쭉한 부분이 들려 올라갔다. 조금 더 힘을 주자 캡슐 전체가 바닥에서 벗어나 완전히 공중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아직 힘이 남았다.
그 증거로 그는 땀을 흘리지 않았고, 목의 힘줄도 불거지지 않았다. 더구나 부피가 커서 그렇지 들고 옮기는 데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아싸아!”
캡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팔을 불끈 위로 쳐드는 하룬의 입에서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휘이-이.
기분이 좋아져 급기야 휘파람까지 불면서 하룬은 서둘러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누구세요?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본 것처럼 깜찍하게 놀란 표정을 짓는 벨이 그를 맞았다.
“하하! 장난하지 마. 아까의 내 모습은 저기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내고 싹 잊으라고.”
-멋지게 변했어요, 캡틴.
기분이 그래서인지 하룬은 자신을 바라보는 벨의 눈이 몽롱해진 것처럼 보였다. 꽃미남에게 뿅 간 여자들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가 없는 동안 인간 세상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겠다더니 너무 드라마를 많이 본 것 같았다.
‘조그마한 녀석이 어디서 저런 것을 배워 가지고…….’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캡틴, 외부체가 어떤 힘에 의해 들리던데 무슨 일이었어요?
녀석,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캡슐 자체가 벨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영악하게도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저렇게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하하하! 이 녀석, 너무 귀여워.”
하룬은 비록 영상에 불과한 벨이지만 강한 정을 느꼈다. 이런 여동생이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이제는 캡틴이나 하룬 님 대신 오빠라고 불러. 알았지, 벨?”
-네에, 오빠요?
아쉬움에 양 볼이 불룩 튀어나온 귀여운 모습이던 벨이 난데없는 소리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내가 고아인 것은 너도 알지? 앞으로는 네가 내 동생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캡틴은…… 캡틴인데…….
“호칭이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앞으로는 오빠라고 불러.”
-알……았어요!
약간 머뭇거렸지만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대답한 벨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정말 놀라운 인공지능이라니까. 전혀 구별을 못 하겠어.’
벨이 하는 짓만 보면 도저히 그녀가 캡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매번 이렇게 혼란을 겪느니 차라리 앞으로 그녀를 엄청난 능력을 가진 그의 여동생으로 여기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리고 모아 놓은 정보를 좀 보여 줘.”
-네, 오빠.
이제는 여동생으로 바뀐 벨의 능력은 외모나 귀여운 행동과 달리 정말 엄청났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수만 건이 넘는 정보를 검색해서 제법 보기 쉽게 정리까지 해놓은 것이다.
그녀가 준비한 정보는 얼핏 보아도 손가락 두께가 넘었다.
‘질린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벨이 실실거리며 물었다.
-오빠, 제가 직접 읽어 드릴까요 아니면 더 축약해서 말해 드릴까요?
“응? 저 방대한 정보를 축약하는 것도 가능한 거야?”
-당연하죠. 벨은 오빠의 눈에는 마냥 어리게 보여도 명색이 초인공 자아체니까요.
벨의 목소리에서 우쭐거리는 느낌이 느껴진 것은 하룬만의 환상일까.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아무튼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룬이 잠시 말을 하지 않자 벨은 그렇게 하라는 명령으로 여겼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
-비욘드에서 마법을 익히는 것은 전직 시점인 레벨 10이 되어야만 가능해요. 레벨 10이 되고 소울 포인트가 차면 전직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엘프들을 포함한 NPC 마법사들과 인연을 맺거나 혹은 마법서를 통해서 원하는 마탑의 마법을 익히는 거죠. 특기할 것은 3서클까지는 모두 학파의 마법이 공용이라는 점이에요.
“그럼 나도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거군!”
마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것에 하룬의 목소리가 들떴다. 그럼 엘저와 매킨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능해요. 하지만 오빠의 경우는 지금 수련과정 중이기도 하고, 황도에는 전직소가 없잖아요.
“맞아, 빌어먹을.”
그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전직하려면 전직 도시로 가야만 했다. 가는 동안 이 세계를 위해 몬스터를 잡아 소울 포인트를 쌓으며 충분히 실력을 배양하라는 넥컴월의 친절한(?) 의도에서 나온 규칙이었다.
-뭐, 마법서를 통해 마법을 배우면 되지만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오빠는 지금 외부로 나갈 수도 없고, 설령 누구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마법서를 살 자금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요.
“마법서? 그게 얼마나 하는데?”
-1서클 마법서 한 권에 보통 10골드에서 50골드의 돈이 필요해요.
“지랄!”
마법서가 그렇게 비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현재 환換 시세는 어떻게 되지, 벨?”
비록 가진 돈은 별로 없지만 다급한 상황이라 여차하면 현질까지 고려해보는 하룬이었다.
-어제 골드당 10만 원을 돌파했어요.
“그럼 1실버가 1,000원이라는 거네. 마법서는 싼 것도 100만 원이고?”
-그렇죠. 아니, 사려고 해도 그 정도 골드를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레벨이 어느 정도 되어야 사냥을 통해서 아니면 제대로 된 직업을 얻어서 돈을 벌 텐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럴 것이다. 게임 시간으로 한 달 전 최고 랭커가 레벨 9였다는 것과 전직을 위해 거점 도시까지 가려면 도보로 이삼 주가 걸린다는 공지사항을 생각하면 전직을 무사히 마친 유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전직을 해도 문제는 남아 있어요. 비욘드는 현실성을 최대한 추구했기에 아이템 드롭률이나 퀘스트 성공률 역시 다른 게임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니까요.
하룬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규 유저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몇 달, 아니 몇 년이면 마스터에 다다를 수 있는 게임과 달리 본인이 온갖 노력을 다해야만 겨우 레벨이 올라가는 현실적인 게임이 주는 재미와 성취감은 유저들의 불만을 누를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풀린 아이템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유저들이 시작하는 스타팅 포인트가 작은 시골 마을이기에 이루어지는 경제 규모도 작아요. 따라서 환시세는 1골드는 10만 원, 1실버는 1,000원이지만 현실적으로 살 수 있는 골드나 실버가 부족해서 거래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미치겠네.”
요는 유통되는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NPC 사회를 포함하면 상관없지만 레벨 업이 너무 느린 탓에 아직 대부분의 유저들이 제대로 돈을 벌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환거래는 넥컴월의 정식 환거래 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비욘드의 골드화는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반면 현금을 골드화로 바꾸지는 못한다. 유저들의 현금 유입이 비욘드의 경제를 망칠 수 있음을 고려한 것이다.
아이템 거래의 경우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하긴 아직 평균 레벨이 낮아 아이템을 유저들끼리 거래하기에는 턱도 없는 상황이긴 했다.
문제는 유통되는 돈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른 게임 같으면 이미 다크 게이머들의 활동으로 아이템과 골드의 거래가 활성화되고도 남았을 텐데 비욘드는 그렇지가 않았다. 현실의 돈이 게임 안으로 유입되지 못하는 구조상 능력을 올리기에 바쁜 그들에게 교환할 돈이 없는 것이다.
하긴 자신만 해도 돈이 있다면 이 세계에서 무언가를 사서 하루빨리 레벨을 올릴 생각을 하지 구태여 환거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레벨이 될수록 돈이 되는 아이템의 획득이 쉬워질 테니까.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오빠. 비욘드에서는 마법서를 읽는 것만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마법 경험치라는 것이 존재해서 수련을 통해 올리는 경험치가 충분하지 않으면 마법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요. 더구나 중급 이상의 검술 스킬 북 같이 3서클 이상의 마법서는 마탑에서도 구입할 수 없어요. 오직 사냥이나 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거든요. 물론 운 좋게 마도사급의 스승을 모신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요. 참고로 지금까지의 분석으로는 비욘드에서 가장 레벨을 올리기 힘든 직업이 바로 마법사에요. 더구나 모든 유저들은 검술부터 익혀야 하고 전직 도시까지 여행을 하며 소울 포인트를 쌓아야 하기 때문에 마법사는 더욱 힘들지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강력한 현실성을 가진 가상현실 게임이라면 책을 읽거나 전직하는 순간에 마법을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 점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땀과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비욘드는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물론 마법소 없이 익힐 수 있는 마법도 있어요.
“그래? 그게 뭐야?”
하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는 마음껏 현질을 할 자금도 없다. 그렇다고 전직을 위해 수련장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아직 모든 직업들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이 비욘드의 세계관은 어느 정도 윤곽을 보이고 있어요. 바로 판타지 세상이죠. 휴먼력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소설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의 모든 요소들이 비욘드에 구현되어 있어요. 당연히 정령 마법의 존재도 있고요.
“맞아, 그럴 거야.”
멀리서 찾지 않아도 수련 동기인 네미온이 바로 정령 마법사, 즉 정령사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정령 마법을 익히지?”
-그건 어디에서도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공식적으로 유저 중에 정령사로 전직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거든요. 히든 잡이 아니냐는 의견은 있지만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있다면 오빠가 비욘드에서 직접 찾는 수밖에 없어요.
벨의 말에 힘이 더 빠졌다. 로그아웃하기 전에 네미온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지만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일단 세기말에 유행했던 판타지나 퓨전 소설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서 정령 마법에 대한 부분만 정리해서 보여 줘.”
-알았어요.
이 비욘드의 세계관의 기초는 세기말에 유행했던 판타지나 퓨전 소설들이 제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령 마법을 비롯한 다른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단초도 그 소설들 중에 존재할 것이다. 그 중 몇 권을 선택해서 읽어보는 것 이외에는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벨 덕분에 인터넷을 통해 전자책을 사거나 도서관에 가서 모든 내용을 직접 읽는 수고는 덜었다.
세기말에 유행했던 소설들의 존재는 종말 전쟁 동안 많이 소실되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소설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룬이 처음 고른 소설은 2022년에 출판된 ‘여신들의 전쟁 그리고 그 후’라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장르 소설들의 특징은 읽기 편하면서도 독자에게 강한 대리 만족 그리고 심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을 잊을 정도로 세밀하고 매력적인 이세계異世界를 눈으로 보듯 보여 준다는 점이었다.
이미 이런 패턴의 소설은 몇 번 읽은 적이 있었기에 벨과 함께 내용을 뒤져 정령 마법에 관한 부분만 정독했다. 뒤이어 다른 책들의 내용도 살펴보았는데 정령 마법에 대한 부분은 큰 차이가 없었다.
네미온이 했던 말 이상의 상세한 방법을 제시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하룬은 세밀한 부분까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벨이 분석한 내용으로 보면 정령과의 친화력이란 어떤 거지?”
-뭐라고 정의하기 힘들어요. 작가에 따라 정의하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들지만 굳지 말하자면 자연의 모든 요소에 깃들어 있는 정령을 느낄 수 있는 감각 혹은 능력이 바로 친화력이겠죠.
“그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겠지?”
네미온이 한 말이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그래요.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정령사들은 엘프 종족처럼 태생적으로 정령 친화력을 가진 존재들로 묘사되고 있어요.
“휴우, 그럼 정령 마법은 유저인 나랑은 관계가 없을 확률이 높겠네?”
-그,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을까요.
하룬은 벨의 대답에 벨이 꼬이는 것을 느꼈지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또 하나의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다.
그 후로도 몇 권의 책을 더 검색해 보았지만 특별히 얻은 해답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판타지라는 것은 어차피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므로.
하룬은 충분히 잠자기 위해 다시 비욘드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