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기상과 함께 시작되는 아침의 수련장 구보, 뒤이어 성 밖 수련장까지의 행군, 등산, 각종 장애물 통과하기 등 체력 강화 일정이 한 달 동안 동일한 시간에 동일하게 계속되었다.
이제 A동 마법사들도 제법 체력이 붙었고 근성도 올라 낙오자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항상 낙오하는 수련생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평가를 받기에 큰 불이익은 없었다.
이 기초 수련 과정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체력을 올리기 위한 과정이었고, 수석 수료생을 정하는 것을 빼면 개인의 수련 성적을 매기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모인 곳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경쟁이라는 것이 생기는 법이다. 물론 마법사들이야 원래 마법을 익힌 이들이고 용병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대접받는 축이니 예외였다.
하지만 각 용병단이나 용병대 혹은 길드 단위에서 회계나 행정, 정보 분야의 인재로 키우려고 하는 수련생들 간에는 피 튀기는 경쟁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테론 제국 용병 길드 총본부가 이 과정을 정규 용병 양성 교육과정에 넣은 지난 백여 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아무 연고가 없는 수련생들이 아니라 기존 용병 단체에 소속되었거나 추천권을 가진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이 교육에 들어왔으니 그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기초 수련 과정이라 할지라도 수석 수료생이 나온 용병 단체의 이름은 한동안 큰 화제가 되고, 그 위상도 높아지는 것이다. 덩달아 의뢰 수준도 올라가고 건수도 증가하니 각급 용병 단체에서는 이 과정의 수련생들에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수련생들도 들어오기 전부터 나름대로 수석에 대한 압박과 기대를 받아왔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는 판이니 해가 거듭될수록 수석 수료생의 자질은 우수해지고, 이들은 차후 용병계에서 제법 인정받는 용병으로 성장해 갔다.
"이번에는 이변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마법사 계열에서 수석 수료생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건 힘들지 않을까? 222번, 228번, 231번, 303번과 323번 수련생들은 용병단들이 작심하고 보냈고, 251번과 301번, 421번 수련생들은 모두 원로들의 추천을 받은 인재들이잖아."
"아니야,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동안 123번 수련생이 보여 준 발전 속도와 그 독기라면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 같아. 수련 외에도 근로까지 하면서 벌써 체력 면에서는 선두권에 들어갔잖아."
하룬은 어느새 교관들 사이에서 화제의 대상 중 한 명이 되었다.
그가 한 달 동안 보여 준 육체적인 발전과 독기 어린 태도는 정말 놀라웠다. 특히 그가 약골인 것이 당연한 마법사 계열이라는 점과 소속 없이 추천으로 들어온 것 그리고 근로 수련생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룬은 남들이 뭐라 말하고 어떤 식으로 자신을 보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수련과 근로를 동시에 해야 하기에 매순간 이를 악물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의 수련은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서야 개인 수련을 마치는 생활이 지속되었지만 그는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 이 시간이 행복했다.
땀으 흘리면 그만큼 육체적인 능력이 올라가는 것을 정보창에 나타난 수치로 확인한 하룬은 벨의 자동 영양 주입 시스템으로 필요한 영양분과 약초 성분을 제때 공급받으며 비약적인 신체적 발전을 보였다.
지난 한 달 동안의 수련으로 하룬의 레벨은 벌써 7을 넘어가고 있었다. 스텟의 수치도 이미 레벨의 평균적인 수치를 상당한 폭으로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게 다 요령을 부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무식하게 수련한 덕분이었다.
반드시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항상 콤플렉스였던 나약한 육체를 바꾸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벨의 존재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슐츠를 비롯한 교관들 덕분이었다.
───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
레벨: 7
칭호: 용병 수련생
생명력: 340
마나: 400
힘: 15 체력: 24
지식: 9 지혜: 30
행운: 19 민첩: 12
지구력: 16 S.P.: 0
───
힘들어 쓰러지고 싶어도 매일 변해 가는 정보 창을 떠올리면 없던 힘도 솟아나니 그가 무섭게 발전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체력과 함께 의지력이 크게 작용하는 지혜 스텟은 가장 많이 올라갔고, 지구력 스텟도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워낙 몸을 극악한 수준으로 혹사시킨 탓에 생각만 할 뿐 로그아웃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우면 바로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 주 만에 로그아웃하고 벨이 모은 정보를 확인해 본 하룬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극악하다고 악명이 자자 한 비욘드에서 그가 올리는 레벨 업 속도는 비공개를 선택한 유저들을 고려해도 상당히 높은 축에 속했다.
비욘드가 출시되고 게임 시간으로 한 달이 지난 지금, 벨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비욘드의 현재 공식 랭킹 1위가 레벨 9였다. 전직을 코앞에 둔 것이다.
그의 성장은 스텟 면에서 보면 더욱 고무적이었다. 현재까지 유저들이 올린 정보를 통합해서 벨이 정리한 것에 따르면 레벨 7의 유저가 가진 평균 스텟치는 70~80이었다.
물론 리얼리티를 강조한 비욘드에서는 다른 게임들보다 개인별 편차가 훨씬 더 클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그의 스텟치는 총 125이니 거의 1.5배 정도에 가까웠다.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올인했던 행운 스텟도 벌써 19나 되었다. 힘이나 지구력 스텟을 올릴까도 했지만 행운이란 스텟은 일부러 올리지 않으면 상승하지 않는 스텟이고, 다른 스텟들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그렇게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행운 스텟이 올라서 그런지 소소한 것들에서 운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배식받을 때, 자신의 수프나 국에서 큼직한 고깃덩이가 발견된다든가 아니면 산을 탈 때 남들이 다 빠지는 작은 구덩이를 운 좋게 피해 간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법사 출신이지만 수련비가 없어 근로 수련생으로 참여하면서도 눈부신 성장을 하는 그를 시기하는 수련생들이 생겨났다.
이번 기수의 수석 수료를 목표로 경쟁하는 수련생들은 대놓고 그를 씹지는 않았지만 근로 작업을 하는 하룬을 쳐다보는 눈길에는 경멸과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점잖은 편이었다. 더 질이 나쁜 인간들도 있었다. 근로 수련생들이 마치 자신들의 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일명 재수 4인방의 존재는 매일 하룬의 참을성을 시험하게 만들었다.
"야, 근로! 물 좀 떠 와."
휴식 시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런 명령 아닌 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대놓고 무시하지만 들을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우, 냄새! 저리 떨어져서 먹어."
식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때문에 다른 수련생들도 그들의 곁에서 식사하는 것을 꺼려 언제부턴가 근로 수련생들은 주방 안에서 서서 식사해야만 했다.
"야, 힘만 센 근로 놈! 이리 와서 다리 좀 주물러 봐."
수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교관들의 관심을 끌면서 하룬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들었다.
처음에 그들이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하룬은 무섭게 분노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연놈들은 전부 용병 길드 실세들의 자식이야. 저놈들을 잘못 건드리면 여기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네가 참아."
"싸우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퇴소 조치 당한다는 규정도 있어. 저 녀석들은 일부러 그걸 노리고 저렇게 하는 걸지도 몰라."
"그냥 무시해. 저치들 질 나쁜 걸로 소문났으니까."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발작하려는 하룬을 말렸다. 그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는 하룬이었다.
"야, 하룬! 또 추가하는 거니?"
"응, 벌써 무게에 적응한 거 같아서."
"너 정말 마법사가 맞긴 맞는 거니? 어떻게 일반 전사 용병들도 힘들어하는 무게를 견디는 거야?"
"후훗! 그냥."
아침 식사를 마치고 행군을 준비하는 시간, 주머니를 하나 더 차는 하룬에게 혀를 차는 네미온이었다.
그녀는 평균적으로 나이가 많은 마법사동에서 그와 동갑인 유일한 수련생이었다.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니지만 마음씨가 따듯하고 배려심이 많아 수련생들에게 인기 절정인 정령사였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훨씬 희귀한 존재다. 깊은 이해와 수없는 수련은 필요한 마법 주문 없이 정령을 통해 마법과 동일한 효과를 낼 뿐 아니라 마법에 비해 무한한 자유도를 가지는 정령 마법을 쓰는 정령사의 존재는 극히 희소했다.
사실 정령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엘프족이고, 인간의 경우 하급 정령사를 벗어난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헤엥! 괴물."
"후훗!"
괴물이라고 놀려대는 그녀의 모습에도 하룬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한 달 전 엘저의 선의로 이 과정에 들어오기 전에는 자신이 지금처럼 변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과정에서 탈락하거나 낙오하지만 말자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철검을 제외하고도 추가적으로 온몸에 찬 주머니가 서른 개나 되었다. 총 35킬로그램의 무게를 더 든 것이다.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힘이나 체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의 실험을 통해 깨달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쥐어짜 수련하고 나면 스텟이 늘었다. 수련을 마친 후 조금이라도 몸이 가볍거나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스텟을 올라가지 않았다.
"아무튼 너한테 기대가 크니까 열심히 해!"
"알았어. 근데 오늘은 드디어 검술 수련이 시작되는 건가?"
"그렇다네. 히잉! 난 검을 보는 것만으로 토악질이 나오는데 어떡하지?"
그녀는 생각만 해도 넘어오는 것처럼 검 소리에 얼굴이 차백해졌다. 영락없아 가녀리고 약한 아가씨의 모습이지만 하룬은 속지 않았다. 그녀가 폭주하는 모습을 몇 번 보았던 것이다. 물론 마나는 물론 정령력까지 금제하는 마나 봉쇄 팔찌를 낀 탓에 무사했지만 말이다.
"그러게 왜 용병이 됐니?"
"다 아빠 때문이지. 내 의사가 아니었다고 말했잖아."
하긴 그녀의 엄마는 잘 알려진 치료사라고 했다. 외눈 칼츠란 이름의 유명한 1급 용병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자식인 네미온은 치료사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마나에 민감한 체질을 타고나 어릴 때는 마법사가 되려고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스스로 정령을 느끼고는 능력을 각성해서 정령사가 되었다.
그녀가 부릴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불의 하급 정령인 실프와 살라만더였다. 비록 하급 정령사이긴 해도 친화력이 높아서 의사소통이 극히 어려운 하급 정령들과 상당히 수준 높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급 정령의 능력은 2서클 마법사의 그것에 비근한 만큼 용병계에서는 아주 주목받는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부모, 특히 아버지인 칼츠의 강권으로 이곳에 거의 강제로 오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칼츠는 '용병이 아닌 사내는 사내가 아니다'라는 신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 말이 '용병이 아닌 사람은 진짜 사람이 아니다'라는 신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네 정체가 뭐야? 아무도 널 아는 사람이 없고, 하는 행동을 보면 딱 전사 용병인데……."
"후후, 나중에 알려 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요즘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하룬이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과정부터 정상적인 루트를 거친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 A동에 들어온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마법사이면서 괴물 같은 능력-이 과적으로 보면-을 보이는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점점 더 강하게 의식되었다.
그들이 막 수련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수련생 넷이 길을 막았다.
"어어, 페이크 123! 오늘부터 검술 수련에 들어가는데 이번에도 처음에는 못하는 척하다가 나중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제 실력을 보일 거냐?"
이죽거리는 말투로만 따지면 가히 군계일학인 놈, 필립이었다.
"에이, 그건 아니겠지. 굳이 숨길 일도 없잖아, 이젠."
은근히 말로 속을 뒤집는 데 일가견이 있는 년, 라트리나였다.
"또 모르지. 그렇게 해야 교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테니 말이야."
거대한 근육질의 잘 단련된 몸을 가졌지만 한눈에도 단순무식한 영 마땅찮은 놈, 지탄이었다.
"정말 가증스러워. 어쩜 저렇게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요염한 매력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미모와 색감이 느껴지는 환상적인 몸매 그리고 비음이 섞인 유혹적인 목소리를 가졌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마다 가시가 박혀 있는 년, 시린느였다.
여기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처음부터 눈이 맞아 몰려다니더니 이제는 대다수 수련생들의 의견을 이끄는 선도적인 역할까지 하게 되자, 약자들은 물론 하룬 같은 경쟁자들에게 못된 짓거리를 하는 재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하룬은 그들의 말을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했다. 생각은 자유니까.
나름대로는 자신들이 받아야 하는 관심을 하룬에게 빼앗긴 것 같아서 하는 유치한 짓들이지만 진짜 실력자는 되지도 못하는 어린것(?)에 불과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어쩜 하는 짓들하고는…… 쯧쯧!"
어릴 때부터 부모인 용병들과 함께 지내서 말투가 영락없는 애늙은이인 네미온이 혀를 찼다.
"그렇게 부러우면 니들도 노력하면 될 거 아냐. 그게 다 남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연극한 거라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들이 있을까?"
"그거야 모르지. 원래 연극 배우였는지."
네미온의 말에 움찔거리면서도 끝내 한 소리 더 하는 가시박힌 년, 라트리나의 말이었다.
나름 유명한 용병대 대장의 딸내미라는데 하는 짓을 보면 그 용병대가 용병단으로 크지 못한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 틀림없는 덜떨어진 인물이었다.
"꼭 똑같은 것들끼리 어울려 다녀요. 니들 한번 혼나 볼래? 이것들이 감히 누구를……!"
넷은 찔끔한 표정으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
평소에는 이해심 많고 따듯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그녀지만 한번 화가 나면 완전히 성격이 바뀌어 아버지 칼츠도 도망갈 정도인 네미온의 악명(?)은 이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암튼 저 재수 4인방, 내 손에 걸리면 아주 작살을 내고 말 거야."
하룬은 방방 뛰는 그녀를 데리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2킬로그램이 더 늘었다고 벌써 무게감이 어제와는 달라졌다. 오늘 행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련을 앞두면 늘 마음이 설레었다.
이 수련을 마치고 나면 얼마나 더 스텟이 올라갈까? 혹시 레벨도 오르지 않을까?
그런 마음 때문에 그 이떤 수련도 두렵기는커녕 손꼽아 기다려지는 하룬이었다.
오늘도 하룬은 행군에서 선두권으로 들어왔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시간으로 보면 첫날보다 네 배 정도 빨라진 속도였다. 나날이 갱신되는 경이적인 발전이며 발군의 속력이었기에 그는 교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아직도 선두에는 서 보지 못했지만 교관들이 그를 주시하는 이유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그의 성장 속도 때문이었다.
"수고했다, 123 수련생. 일단 주머니를 모두 풀고 쉬어도 좋다."
다른 수련생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그를 대할 때면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슐츠의 말에 하룬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는 언젠가부터 늘 하던 대로 숲 속에 들어갔다.
"허헛! 저런. 저 고집하고는……."
슐츠는 혀를 차면서도 따듯한 눈길로, 사라져 가는 하룬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 친구가 그 유명한 123 수련생이군요."
오늘부터 검술 수련이 잡혀 있어 새로 가세한 검술 부교관 레니가 흥미로운 눈길로 하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최근 용병 아카데미에서 교관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는 소문을 들은 듯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래, 아주 멋진 놈이지. 딸이라도 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평소 슐츠가 누굴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레니는 기이한 얼굴이 되었다. 딸 가진 아버지가 사위 삼고 싶다는 것은 용병계에서 최고의 칭찬이었던 것이다.
"대단하긴 하네요. 아직 도착한 조교들은 한 명도 없는데 벌써 들어오다니. 그나저나 어딜 가는 겁니까?"
"체력 단련을 하러 간다네."
"체력 단련요?"
"응, 근성도 좋고 발전 속도도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놀라워. 하긴 저렇게 독기를 품고 수련하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말이야."
레니는 슐츠의 말에서 어쩐지 다시 못 올 세월을 그리는 듯 아쉬움을 느끼고는 말을 멈추었다.
어쩌면 '아이언 스네이크'라는 별명을 가진 독종 중의 독종 슐츠가 과거를 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저 수련생의 수련이 독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 볼까?"
아직 조교들도 그렇고 수련생들이 도착하려면 한참 걸릴 테니 하룬이 어떻게 수련하는지 구경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슬슬 숲 속으로 향하는 레니였다.
그를 만류할까 잠시 고민하던 슐츠는 이내 몸을 돌려 검술 수련에 쓸 마법 인형을 설치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하룬의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성한 풀과 관목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작은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그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었다.
"어디까지 간 거야?"
벌써 10분 정도는 걸었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우웃! 후우!
그때 레니의 귀에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수련이기에 저런 소리가나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걷는 속도를 올리자 마침내 하룬이 있는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긴 채석장?"
그의 생각대로 채석장이 맞았다. 온갖 크기의 바위며 돌들이 다듬어지지 않을 채로 이곳저곳에 널린, 버려진 채석장이었다. 그가 쫓던 하룬이 거기에 있었다.
"우웃! 하압!"
하룬이 자신의 상체만 한 바위를 들어올렸다. 머리에 비해 기형적으로 발달한 팔을 감싼 그의 수련복이 찢어질 듯 울룩불룩 부풀어올랐다.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어깨 근육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솟아오르고 있으리라.
굵은 땀방울이 솟아오르고 얼마나 힘을 주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뭘 저 정도 가지고."
힘을 쓰는 것이 특기인 용병치고 저런 크기의 바위를 들지 못하는 약골은 없다. 저 정도 무게를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하룬의 모습에 실망한 레니가 코웃음 치며 돌아서려던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뭔가가 있었다.
'저, 저건?'
그것은 하룬의 팔다리에 착용한 쇠구슬 주머니들이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보인 거구나.'
비정상으로 발달했다고 생각한 그의 팔을 감싼 것은 쇳덩어리가 들어간 주머니들이었다. 한눈에도 서른 개 정도는 되는 주머니들의 그의 팔을 완전히 감고 있었다.
"미……친……."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30킬로그램을 더 들고 말지 자신의 몸에 저 무게를 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몸 전체도 아니고 팔에 저 정도 무게의 주머니를 착용하면 팔을 제대로 들기도 힘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힘이란 해당하는 부위, 즉 물건을 드는 팔 근육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물론 팔 근육에서도 힘이 나오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안정된 하체와 허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검술 교관인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괴물 같은 수련생은 순수한 팔의 근력을 올리기 위해 양팔 전체에 무려 서른 개의 주머니를 착용한 것이다. 당연히 힘이 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 상태에서 저 정도의 바위를 든다면 자신이라 해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는 사이 시간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하룬의 수련 내용이 달라졌다. 이제 용을 쓰며 바위를 머리 위까지 들었다가 바로 아래까지 천천히 내렸다가 다시 올리는 동장을 되풀이했다.
드러난 목에는 굵은 핏줄이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고, 주머니를 밀어내는 팔 근육들이 금방이라도 파열될 것처럼 푸들거리는데도 하룬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반복했을까. 이번에는 바위를 머리 위에 인 상태로 걷기 시작했다. 재석장의 작업장이라 쪼개지고 깨진 돌 조각들이 지천이라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든 바닥이었다. 그곳을 그 엄청난 무게를 가진 바위를 들고 걷는 것이다.
'미……친…….'
다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저놈은 미친놈이라는 생각밖에는. 누가 있어 저렇게 무식하게 수련한단 말인가.
물론 그 무게를 들고 고르지 않은 바닥을 걷다 보면 당연히 무서울 정도의 균형 감각이 형성되고 하체의 무게중심은 어떤 상황에서든 안정될 테지만 너무나 위험하고 무식한 수련이었다.
이어지는 수련은 머리통만한 바위를 들어 공중으로 올렸다가 받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해 왔는지 쉴 새 없이 머리통을 향해 떨어지는 바위를 받아 다시 위로 던져 올리는 하룬의 모습은 정말 위태위태해서 보는 레니의 가슴이 다 벌렁거릴 정도였다.
한동안 입조차 다물지 못하고 하룬의 수련을 지켜보던 레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고 말았다. 뭐라고 할 말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이전까지 자신이 해 왔던 그 모든 수련은 저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자괴감과 한창 물오를 시기에 저렇게 온몸을 내던져 가며 수련했더라면 지금은 꿈에 바라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밖에 없었다.
레니는 이제야 슐츠가 하룬의 뒷모습을 왜 그렇게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미친놈은 미친놈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자리를 뜨는 레니였다.
"검은 단순히 철로 만든 살상무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무기에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의 무기에 마음이 실리고 의지가 실려야만 무기가 가진 본연의 위력과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레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난 한 달 동안의 기초 체력 수련을 통해 조금은 수련할 준비가 된 수련생들을 훑어보았다.
"용병이란 언제 어떤 상황과 맞닥뜨릴지 모르는 위험한 직업이다. 물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말이지. 본 교육과정에 참여한 여러분 중 상당수는 검술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에게는 별 소용 없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
"맞다! 맞는 말이다. 그대가 적어도 5서클 마도사라면 당연히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
"여러분은 5서클 마도사가 아니다. 공격 마법을 두세 번 펼치고 나면 마나가 소진되어 버리는 수준에 불과하단 말이다. 마나가 다 소진되면 그냥 목을 적에게 내주고 말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용병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법사든 행정 요원이든 회계 요원이든 정보 요원이든 간에 그 순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사용해서 적을 끝장내 버릴 독기와 기본 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각종 무기의 기본적인 사용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레니의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어서 수련생들을 자극했다. 누구도 아닌 그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초 검술 수련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검술을 못하는 것은 전혀 창피한 것이 아니다. 대신 여러분들은 나름대로 미래를 향해 다른 분야를 수련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테니까. 이 과정에서는 아무도 여러분들에게 고급 경지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장 기초적인 무기의 사용법, 그 중에서도 가장 효용 가치가 큰 검을 사용하는 기초적인 방법을 익히기만 하면 된다. 물론 평생 검술을 수련하며 살아도 좋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사항.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검을 만나 땀으로 검과 대화하기 바란다."
수련생들은 그의 말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이제껏 들고 다니기만 했지 한 번도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한 애물단지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그 철검을 쓸 때는 오지 않았다. 수련에 앞서 그들에게는 단단한 목검이 주어진 것이다.
어느 정도 교육 분위기가 잡혔다고 생각한 검술 교관 레니는 조를 나누어 선 수련생들을 미리 준비한 마법 인형과 마주 보게 했다.
"검술의 기초는 찌르기, 수직 베기, 수평 베기다. 세상의 모든 검술은 다 이 세 가지 기초 스킬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여러분 중 상당수는 검술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레니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난 한 달간의 기초 체력 과정을 마치고 검술 수련장에 빼곡하게 들어서 힘이 들어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련생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장차 용병으로 혹은 용병단의 일원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한다. 위험은 미리 경고하고 오지 않는 법이다. 용병의 최대 목표는 적으로부터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용병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수련생들이기에 이 검술 수련의 중요성이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 과정에서 흘린 땀방울의 양이 미래에 여러분들의 목숨을 구해 줄 구명줄이 될 것이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은 오로지 이 세 가지 기초 스킬만 수련한다. 조별로 조교의 시범을 본 후 각자 자신의 번호가 쓰인 목각 인형 앞으로 가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수련한다."
'엘저가 검술 부교관이라고 했지.'
하룬은 수련 과정 동안 그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흉터와 근육으로 험상궂을 뿐 아니라 여성미가 전혀 없는 것 같은 외모지만 하룬은 그녀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꼈다. 어쨌든 그녀는 이 비욘드에서 하룬에게 살아남는 길을 가르쳐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각 조 앞에 선 조교의 시범은 아주 상세하게 진행되었다.
세 가지 기초 스킬에 맞는 파지법과 단조로울 정도로 간단한 세 가지 동작이 다지만 레니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것을 어떻게 몸에 붙이느냐에 따라 향후 검사로서의 발전 속도가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휴우, 난 정말 검만 봐도 지겨워."
"난 검만 봐도 질리는 걸. 히잉, 싫어!"
인간형으로 조각된 목각 인형 앞으로 향하며 양옆에 있던 갈리와 네미온이 투덜거렸다. 조는 다르지만 그의 앞쪽에 자리한 모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그들로서는 이런 기초 과정의 수련보다는 3서클의 벽을 깰 수 있는 마법 수련과 정령 친화력을 올리는 것이 더 급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수련이 맘에 들 리 없었다.
"하룬, 넌 재미있냐?"
"네, 생각보다 재미있네요."
목검을 들고 빙긋 웃는 하룬의 모습에 기분이라도 상했는지 갈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참 이해를 못 하겠어. 네가 검사나 전사였다면 모르겠지만 마나의 길을 걷는 녀석이 목검 따위를 잡고 그렇게 설레는 눈빛이라니……."
"후후."
하룬의 사정을 모르는 갈리와 네미온은 절대로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각자 찌르기를 천 번 실시합니다. 찌르는 순간에는 숨을 멈추고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인형의 급소에 표시된 붉은 점을 적당한 힘으로 가격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가격되면 옆에 있는 숫자판이 넘어갈 겁니다. 천 회가 되지 않으면 점심은 아예 없으니 적당히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각 조를 나누어 지도하는 조교들이 수련생들에게 경고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기랄, 치사하게 꼭 먹는 거 가지고 사람을 못살게 굴어요."
"그러게. 이제 좀 편해졌다 싶었는데……."
하룬은 동료 수련생들의 불만을 듣지 않았다. 그 시간에 이미 앞에 서 있는 목각 인형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소는 이마, 인중, 목, 양 가슴, 하복부 중앙의 여섯 군데였다. 그 부위에는 동전만 한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하룬은 이마를 첫 목표점으로 잠았다. 조교가 설명해 준대로 파지해서 목검을 쥐고 숨을 멈추었다.
휘익! 탁!
실패였다. 자신은 제대로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붉은 점을 정확하게 찌르지 못했나 보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고 말았다. 나름 집중했는데 자꾸 어긋나자 마음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이!"
"제기랄!"
"왜 이래? 이거 고장난 거 아니야?"
이곳저곳에서 욕설과 투덜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아까 조교가 시범을 보인 대로 한 것 같은데…….'
하룬은 잠시 찌르는 것을 멈추고는 멍하니 목각 인형을 응시했다. 그 순간 뒤에서 조교의 말이 들려왔다.
"123 수련생, 검 끝이 흔들린다. 몸부터 안정시켜! 하체가 안정되어야 검이 제 길을 간다."
그 말에 하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목표를 찌르는 데만 너무 신경 썼구나.'
그가 무얼 잘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교의 말대로라면 검을 뻗는 순간 몸이 흔들리기 때문에 검 끝이 자꾸 급소에서 어긋난 것이다. 이젠 모굪를 보기 이전에 먼저 집중해야 했다.
"후우우우……."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멈춘다. 먼저 몸이 단단히 안정되었는지 확인했다. 다리와 허리 그리고 목검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찌르기를 하면 목표를 벗어날 것이 틀림없다.
하룬은 찌르기를 시도하는 대신 호흡을 반복하며 자세를 안정시켰다. 가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게 숨을 내쉰 후 천천히 들이쉰다. 그리고 아랫배 깊숙이 숨을 집어넣고 멈추는 순간 흔들리던 몸이 안정을 찾았다. 지금이라면 정확하게 마음먹은 곳을 찌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그 순간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움직이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느낀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하룬은 다시 호흡에 정신을 집중했다.
'됐어. 이제 흔들리지 않아.'
몸이 안정되었다는 확식이 드는 순간 목각 인형의 이마에 있는 급소를 노려보았다.
내부로 향했던 집중력을 순간적으로 목각 인형의 급소로 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수련생들이 연방 검을 찌르는 동안에도 그는 검조차 뻗지 못했다.
하지만 하룬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방법을 안 이상 그 길에 발을 내딛는 것은 이제 시간과 노력의 문제일 뿐이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눈을 반개한 상태로 목각 인형처럼 서 있던 하룬은 어느 순간 미동도 없던 어깨를 강하게 앞으로 뻗어 목검을 내질렀다.
빠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번호표가 뒤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한 것이다. 하룬은 가격의 충격으로 떨리는 손 때문에 목검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제대로 된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기본 검술을 익혔습니다.
기본 검술이라면 스킬이 아닌가?
하룬은 벅찬 마음에 스킬 창을 열어보았다. 이제까지 단 하나의 스킬도 없어 생성 자체가 되지 않았던 스킬 창이었다.
───
기본 검술(패시브): Lv1(15.00%)/Lv5
모든 유저들이 공통으로 배우는 기본적인 검술이다. 이 기본 검술을 5레벨까지 마스터하면 유저에게 맞는 새로운 진화형 검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자체 레벨이 5까지 있는 기본 검술을 극성으로 익히면 노력 여하에 따라 스킬 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검술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마 다른 유저들이 수련장에서 배운다는 기본 검술과 같은 것일 것이다.
하룬은 벅찬 가슴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여기저기서 성공했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바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 그는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무력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오직 자신을 상대로 수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진도는 한참 늦었을지 몰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심안 스텟이 생성되었습니다.
-집중 스텟이 생성되었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이제까지와 달리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집중하고, 그 집중력을 다른 사물에 옮기고 마침내는 정확하고 흔들림 없는 찌르기에 성공한 결과 레벨 업은 물론 새로운 스텟까지 생성되었다.
벨이 알아온 정보에 따르면 비욘드에서는 레벨 사이의 경험치가 레벨이 오를수록 엄청나게 증가한다. 그런데 특별한 육체적인 수련도 없이 찌르기 기술이 한 번 성공한 것으로 레벨이 오른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집중이라는 스텟도 있었나? 그리고 심안 스텟은 궁사나 상인 전용 스킬 아니었나?'
레벨이 올랐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것도 잠시, 새로운 생각에 빠지는 하룬이었다.
이 비욘드의 체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직업 고유의 스텟을 가지게 된 것을 보면 직업의 고유성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직업 선택의 이점 또한 사라진다.
'아니야, 그런 것은 나중에 선택해도 돼. 지금은 오직 찌르기에만 집중하자.'
일단 방법을 터득하자 그 이후에는 걸리는 것이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몇 번 더 실패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룬의 찌르기는 정교해지고 정확해졌다.
또한 타격의 순간 그 충격 때문에 목검을 다시 추스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아지고 있었다. 타격 시에 가해지는 힘을 조절하는 것은 물론 그 탄력까지 순간적으로 손목을 틀어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번호판은 점차 빠르게 뒤로 넘어갔다.
그의 조와 연접한 조에서 수련생들 사이를 오가며 자세를 지도하던 조교들이 어느새 하룬의 언저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의 성공 횟수는 빠르게 늘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레니 교관은 목각 인형의 곁에 서서 성공한 순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표적에 집중하는 하룬의 눈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은 타고났어! 찌르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몸에 붙이고 있어. 이런 상태라면 옆에서 벼락이 친다 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아까 본 체력 수련으로 하체가 몇 년 동안 수련한 검사들만큼이나 단단하게 안정되어 있어.'
주변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한 하룬도 어느새 상태가 바뀌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과 검, 목각 인형 그리고 찌르기에 집중한 상태는 맞지만 이제는 이상하게 그 상태를 느끼고 볼 수 있었다.
'뭐지?'
마치 또 하나의 자신이 찌르기에 집중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듯 신선하고 기이한 감각이었다. 정말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상태였다. 그는 찌르기가 빗나가는 순간 왜 그랬는지 명확하게 느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조교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친 것이다. 순식간에 사라진 또 하나의 의식. 하룬은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123 수련생, 그만하고 식사하러 가자."
"네? 아, 식사!"
하룬은 어느새 텅 빈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찌르기는 그렇게 어려운 수련이 아니었는지 거의 모든 수련생들이 자리를 떠나 야외 식당으로 가 버린 것이다.
"대단하던데."
"네?"
하룬은 조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살면서 그 정도 집중력과 발전 속도를 보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자네는 아마 검사나 전사가 되어도 충분히 성공할 거야."
"아, 감사합니다."
검술 교관과 조교들은 오늘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익숙했던 자가 아닌 처음 보는 조교가 그에게 친근한 웃음을 보이며 서둘러 식당으로 향하자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하룬은 멍청히 목각 인형을 바라보았다.
'응? 원래 저랬나?'
목각 인형의 이마 부분에 있던 붉은 점이 어느새 희미해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점이 있떤 부위에는 한눈에도 알아볼 정도의 작은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번호판의 숫자가 보였다.
2,930.
'저건 성공 횟수? 그럼 내가 저 정도나 성공했다는 거야?'
찌르는 것에만 집중한 터라 주변 상황은 전혀 몰랐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번호판을 잘못 넘겨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룬은 그것이 그가 성공한 횟수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 보았다.
오후에는 수직 베기와 수평 베기 수련이 있었다. 찌르기와 달리 근육의 폭발적인 힘보다는 지속력도 필요했기에 더욱 힘든 수련이었다. 이번의 급소는 정수리와 옆구리였다.
하룬은 서서히 자신의 호흡에 정신을 집중했다.
조교의 존재도, 곁에서 수련하는 동료들의 존재도 서서히 의식 밖으로 사라지고 그의 시야에는 오로지 자신과 목각 인형만이 남았다. 그의 목검이 아주 조용히 머리 위로 올라갔다.
해가 넘어가는 시각, 자신이 지도하던 수련생들을 모두 숙소로 돌려보낸 검술 조교 매콕스는 친한 친구 질리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수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질리언은 한 수련생의 옆을 석상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곳에 어기 전 체력 과정 조교들이 말했던 그 유명한 수련생이었다.
"이봐, 질리언. 저 친구 괴물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검술은 아닌가 보네?"
이미 하룬은 조교들 간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체력 단련 과정 동안 그가 보여준 엄청난 인내력과 발전 속도도 그렇고, 교육에 있어서는 엄하다고 소문난 슐츠 총교관까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교관들과 조교들 사이에 쫙 퍼진 것이다.
"이 친구, 이미 목표치는 다 채웠어."
"근데 왜 그러고 있지?"
매콕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련을 멈추게 하면 되는 일이었따. 설마 이 수련생이 무서워서는 아닐 테고…….
"집중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뭐?"
질리언은 부러운 표정으로 매 순간 거의 동일한 궤도와 힘, 빠르기로 급소를 찌르고 베는 하룬을 바라보았다.
"수련생이 어떻게……?"
"그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의 한순간은 평소의 수십 배, 아니 수백 배애 해당하는 가치 있는 시간이니 저 집중 상태를 깨면 안 될 것 같아서 지키고 있는 거야."
매콕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자로 잰 듯 기계적이고 정교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하체는 땅에 고정되었고 중심은 태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다.
찌르기와 수직 베기 그리고 수평 베기를 하는 그의 동작은 약간의 군더더기만 느껴질 뿐 거의 완벽했다. 저렇게 안정되고 정확한 자세는 절대로 검술 초보의 그것이 될 수 없었다.
"여기 오기 전에 검술을 익혔나 보지. 그렇다 해도 대단하기는 하네."
"아니, 절대로. 처음에는 다른 수련생들하고 똑같이 한참 헤매더라고. 목검을 쥐는 것도 어색하고. 한데 내가 몇 마디 조언을 해주었더니 그 순간 마치 명상에 든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한동안 서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저렇게 변했어."
"그게 가능한 거야?"
매콕스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질리언은 거짓말할 친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검을 처음 잡는 초보가 단 반나절 만에 저런 경지로 올라섰다는 말인데, 이런 무서운 진경進境을 그는 아직 들어보거나 본 적이 없었다.
“후후, 미치겠지? 나도 질투가 나서 죽겠다. 뭐 이런 괴물 같은 친구가 있나 싶다. 처음에는 부럽고 질투가 나서 밉기까지 했는데 이젠 존경스러워. 벌써 여섯 시간이 넘었어. 그런데 한순간도 자세가 흐트러지질 않아. 나도 수련하면서 지독한 독종이란 소리를 들어 왔지만…… 난 비교도 안 돼. 이런 친구를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어. 아마 너도 그럴걸.”
“정말? 한 번도 집중 상태에서 풀어진 적이 없다고? 그럴 리가…….”
가끔 대마법사들이 며칠 동안 집중했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움직임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검술 수련을 하면서 처음 수련하는 초보가 이 정도로 오랫동안 집중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아니, 틀림없어. 내가 계속해서 지켜보았거든. 단 한 번도 없었어. 우리 어쩌면 미래의 전설이 될 인물을 지도하고 있는지도 몰라.”
질리언과 매콕스는 빨리 돌아가 식당 문이 닫히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하룬의 곁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두 조교의 눈에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강렬한 열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황야를 헤매다가 빛을 발견했을 때 여행자의 눈빛이었다.
노을이 지고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하룬의 수련은 겨우 끝이 났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수련복 때문에 끈끈했지만 기분만은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고 수련장은 고요했다.
‘다들 숙소로 돌아간 건가? 왜 날 그냥 두고 갔지?’
이제야 혼자 남았다는 것을 깨달은 하룬은 자신과 좀 떨어진 곳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두 조교의 모습을 그제야 보고 놀라 물었다.
“어! 조교님들은 거기서 뭐하세요?”
“흐음, 이제 수련이 끝난 건가?”
하룬은 그들이 자신의 수련 때문에 이제까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아니야, 우리도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네?”
영문을 몰랐지만 흰 이를 드러내가며 기분 좋게 웃는 두 조교의 얼굴을 본 하룬도 미소 지었다. 그들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신세를 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제 식사하러 가자. 레니 교관님이 특별히 주방에 부탁해 놓았다니 가서 먹을 수 있을 거야.”
“다들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룬은 두 조교와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련장을 나오자 수레 옆에서 하룬을 기다리는 세 수련생을 보고 조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123 수련생이 근로 수련생이라는 걸 깜빡했군. 힘든 상황인데도 그런 열정이라니 정말 존경스러워.”
“미안한데 우린 먼저 가야겠어. 식당에는 우리가 말해 놓을 테니 부지런히 오라고.”
“네, 감사합니다.”
하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며칠 전부터 하룬의 부탁으로 세 사람은 더 이상 뒤에서 수레를 밀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룬의 힘이 강해졌기에 네 사람은 오늘 일과를 도란도란 얘기하며 길을 재촉했다.
검술 수련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이 과정에 들어오기 전 기초 검술을 수련한 수련생들도 있고, 노력과 끈기 그리고 집중력으로 벌써 어느 정도 마스터한 놀라운 수련생도 나왔다. 따라서 이후의 수련은 개인의 실력에 따라 다른 코스로 진행될 것이다.”
레니 교관의 말에 수련생들의 눈길은 어느새 한 수련생에게로 향했다. 바로 하룬이었다. 레니가 말한 놀라운 수련생이 바로 그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교관은 검술에 흥미가 없거나 아직 부족한 수련생들은 이제까지의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는 한편 기초 검술을 어느 정도 수련했다고 인정되는 수련생들은 독립된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사실 마법 인형을 상대로 검술을 수련하는 것은 이 과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위 수련이다. 하지만 이번 기수는 검술에 훌륭한 재질을 가진 수련생들이 여러 명 있어서 그들의 발전을 위해 과정을 좀 변경했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수련생들도 재질이나 정신 자세는 그 어느 기수보다 뛰어나다. 앞으로도 이런 마음 자세로 수련해 주길 바란다. 이상!”
교관에게 칭찬을 받자 수련생들은 기분이 좋았다. 더욱이 일부이기는 해도 자신의 기수가 이전 기수들은 감히 생각도 못 했던 상위 수련을 한다는 것이 뿌듯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하룬에게 심한 열등감을 품은 몇몇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시간이 갈수록 결속력이 더 강해졌다.
용병 단체들 간의 열띤 경쟁으로 이 기초 수련 과정에 점점 더 재질이 뛰어난 수련생들이 입소하는 상황이지만 이번 기수는 아주 특별했다. 수련에 임하는 태도나 그 과정에서 이들의 성실함은 교관들을 감동시켜 타성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할 정도였다.
레니 교관을 비롯한 교관들은 왜 이번 기수 수련생들의 질이 높아졌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 분명히 수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다른 기수의 수련생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한 명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하룬의 존재였다.
하룬의 비약적인 발전을 지켜본 수련생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와 같은 동의 마법사 출신 수련생들은 하룬의 존재로 인해 마법사로서의 자긍심을 느꼈다. 일면 부러움과 기대를, 다른 일면으로는 같은 마법사인데 자신들은 수련에 임하는 자세가 너무 나약하다는 것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B동과 C동의 비마법사 출신 수련생들은 마법사 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엄청난 발전을 보이는 하룬에게 심각한 질투심과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그간 보고 들은 마법사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깨뜨리고 언젠가부터 쉽게 따라잡을 수도 없이 달려 나가는 하룬을 보면서 질투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자기반성을 통해 수련에 매진했다.
어느 단체든 일단 분위기를 타면 그 일원으로, 비록 자신은 싫다는 느낌이 있어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분위기를 타고 동참하는데 이번 기수가 그랬다.
검이 싫다고 징징거리던 네미온도, 갈리와 모글도 검술 수련에 푹 빠져들었는지 요즘은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밤이 깊어 가도 숙소 앞 수련장은 검술을 수련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초 검술을 끝내고 마법진을 새긴 인형을 상대로 검술을 상황에 맞게 쓰는 것을 수련하기 시작한 하룬은 검술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일단 인형의 가슴에 새겨진 마법진이 발동하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상대를 공격했다.
그 공격의 유형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처음에는 인형의 검에 수없이 맞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첫 공격을 피해도 교묘하게 그 자리로 파고들어 오는 검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좀 적응하려고 하면 어느새 바뀌는 검로는 여지없이 몸에 고통스러운 흔적을 남겼다.
헤아릴 수 없이 멍이 들고, 몇 번 기절까지 했다. 순식간에 급소를 파고드는 인형의 공격을 막을 시간도 없었고, 회피하거나 대항할 바업도 몰랐다.
이전처럼 조교들이 조언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서 수련을 주시하기만 했다.
일주일 정도는 온몸이 시퍼렇게 변했다. 눈과 발바닥을 빼면 안 맞은 부위가 없었다. 맞은 곳을 또 맞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체력처럼 늘지 않았던 것이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다섯 번의 빠른 공격을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다른 수련생들처럼 요령을 부려서,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인형이 공격하는 전권에서 물러나면 될 일인데 하룬은 악착같이 맞섰다.
오죽 했으면 레니 교관이 인형과의 대련은 몸으로 검로를 익히고, 같은 검로로 인형을 상대하는 것을 통해 기초 검술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넌지시 조언했지만 하룬은 묵묵부답이었다.
여전히 인형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지옥의 유황불처럼 이글거리는 불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거세게 솟아났다. 수련을 거치며 원래 나약했던 그의 성정이 많이 바뀐 것이다.
물러서고, 피하고, 갖은 변명을 들어 자신을 보호하거나 물러난 사실에 대해 자기 위안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하룬이었다.
‘내 식대로 해보자.’
마음이란, 의지란 한번 협상하거나 또는 옆길로 새 버리면 다음부터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원래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현실에서 깨달았고,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제까지 수련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정보 창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아예 신경 쓰지 않으려고 모든 신호음까지 무음으로 바꾼 하룬이었다.
우직하고 무식한 수련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수련 시간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근로 작업과, 먹고 싸고 씻는 최소한의 행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포기한 힘겨운 시간이 이어졌다.
휘익.
인형의 목검이 하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빗나간 최초의 순간은 개인 수련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레니 교관이 했던 말처럼 맞으면서도 절대로 목검의 궤적에서 눈을 떼지 않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제야 하룬의 미소가 엷게 피어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마법으로 세팅된 검로대로 펼쳐지는 목검의 궤적과 그 이전에 만들어진 발과 어깨의 작은 요동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면서 하룬이 맞는 횟수는 급격하게 줄어갔다. 지근거리에서 날아오는 검날을 피해 빈틈을 파고드는 그의 검이 인형을 찌르거나 베는 횟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남들보다 유일하게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예리한 관찰력과 집중력이 드디어 성과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수련 이 주일이 지났을 때 하룬은 인형의 공세를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피하면서 빈틈을 파고들어 급소에 검을 명중시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인형을 상대로 정직하게 이어졌던 단순한 검로가 진화를 보였다. 본능적으로 인형이 펼치는 검로를 피하면서 틈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빡! 뻐억! 빠악!
탁! 타악! 탁!
삐익, 삐익.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하룬의 검이 갑자기 멈추었다.
아직도 힘을 이기지 못한 검이 부르르 떨렸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영활하게 움직이던 마법 인형이 돌연 멈춰 선 것이다.
“축하하네. 1단계를 통과했군. 인형의 검로와 똑같은 검로를 밟지 않고 그 틈을 노려 표적을 찌르다니 대단하군.”
레니 교관의 목소리였다.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이 마법 인형이 가진 효용은 미리 세팅된 검로를 배우는 것이다. 마법 인형의 검로를 똑같이 따라할 수 있으면 통과하는 것이다.
물론 하룬이 한 대로 그 검로를 뚫어 볼 눈과 기량을 가져 빈틈을 노릴 수 있어도 가능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다.
“1단계라니요?”
“총 다섯 번의 연환 공격을 가진 검로를 기억해서 같은 검로로 인형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1단계의 목표네.”
“그럼 2단계도 있는 건가요?”
“당연히 있지.”
1단계를 성공하고 레니의 예상과 달리 다소 맥이 빠져 있던 하룬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2단계에 도전하겠습니다.”
하룬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 어디에서도 1단계를 통과했다는 자랑스러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니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으로 오게. 혹시 몰라 2단계 검술을 펼칠 마법 인형 하나를 준비하긴 했지. 2단계 수련은 총 열 번의 연환 공격로를 담은 일곱 가지 검술을 격파해야 하네.”
“검술입니까?”
“그래, 용병들이나 기사들이 익히는 하급의 기초 검술이지만 그 위력과 효용은 많은 사람들을 통해 증명된 강력한 검술들이네. 검술 당 적어도 열 개의 변화식을 가졌으니 총 칠십 가지의 검술을 격파해야 하는 거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칠십 가지 검술이 가진 각개의 검로를 파악해서 그 검로와 똑같이 시적해서 마주 싸울 수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네. 참고로 2단계 수련을 통과하면 어디에 가더라도 검사라는 호칭을 쓸 수 있네.”
하룬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도 몸과 마음을 하얗게 태우는 투기와 열정이 식기 전에 다시 2단계를 맞고 싶었다.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무의미하게 지내 온 지난 세월들을 보상받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따라 하지만은 않겠어. 그래서는 남과 똑같을 테니까. 난 나만의 방법으로 가겠어!’
그렇게 또 다른 수련을 맞이하는 하룬의 눈에서 새파란 투기가 뚝뚝 떨어졌다. 검을 쥔 그의 팔 근육이 넘치는 힘으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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