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엘저와의 만남 (5/278)

《엘저와의 만남》

 "어엇!"

 눈을 감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경한 주변 사물들이 나타나자 눈이 휘둥그레지는 하룬이었다.

 그가 서있는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광장이었다. 사방으로 몇 킬로미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광장에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중세?"

 그랬다.

 벽돌이나 반듯한 석재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과 그 건축양식은 역사 시간에 배웠던 것과 비슷했다.

 가상현실 게임의 무대가 거의 이전 인류의 문명 시대 중에서도 특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예상은 했지만 막상 중세 시대 특유의 거대한 광장에 서 있는 느낌은 그야말로 경이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굉장하잖아!"

 놀란 하룬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건물 풍경에 좀 적응이 되자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무척이나 혼잡한 상태였다.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은 물론 햇빛을 즐기는 노부부, 친구들로 보이는 아이들, 먼 대륙에서 건너온 듯 지친 여행자들과 간이음식점, 모자를 앞에 놓고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가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그 누구도 난데없이 나타난 하룬의 존재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넓게 벌려 새로운 세계를 온몸으로 느껴 보려 했다.

 배리어로 쳐진 도시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햇살의 그 솜털 같은 감촉과, 사람 사이를 유영하며 알 수 없는 대화들을 실어 나르는 바람이 손에 잡힐 듯 바로 곁에서 그를 감쌌다.

 바닥의 석재들은 물론 건물 벽의 느낌까지 실제와 똑같았다. 그 단단함과 차가운 감촉은 이것이 가상의 세계임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전에 몇 번 경험했던 가상현실이 절대 구현하지 못했던 현실감이 거의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다.

 이 정도라면 배리어의 그 먼지바람이 부는 F구역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모든 편의가 제공되는 A나 심지어 S구역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나는 정민이 아니라 하룬이야!"

 그렇게 미친놈처럼 외치자 정말 인생이 바뀐 듯 새로운 느낌으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열린 가슴이 되었다.

 하룬은 넋을 놓고 광장을 홀린 듯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과 음식 냄새, 그들의 대화와 다양한 몸짓들을 구경했다.

 애초에 게임을 하는 목표 자체가 다른 탓에 남들처럼 빨리 레벨 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었다. 신선하고 환상적인 비욘드의 세계는 그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었기에 자신이 지금 가상현실에 접속하고 있다는 자각마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지고 있었다.

 황제가 사는 거대한 궁궐의 높은 탑들 사이로 벌겋게 달아올랐던 해가 그 모습을 감추려 했다. 그는 이런 일몰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먼지로 가려져 흐릿했던 태양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연의 위대함에 그는 경탄하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말할 수 없는 흥취가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졌다. 그의 가슴은 감동으로 꽉 차있었다.

 마침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광장 이곳저곳에 가로등이 켜졌을 때가 돼서야 하룬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 상태부터 확인해야지."

 아름답고 위대하기까지 한 대자연에 넋이 빠져 있던 사이 꽤 시간이 흘러버렸다. 비욘드의 환경 구현이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했으니 이제 게임에 집중해야 한다.

 "상태 창 오픈!"

 명령어와 함께 그의 눈앞에 자신의 기본 정보가 보였다.

───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

레벨: 1

칭호: -

생명력: 150

마나: 150

힘: 5    체력: 5

지식: 9   지혜: 5

행운: 7   민첩: 5

S.P.: 0   공복도: 98/100

───

 역시 스텟의 수치는 기대한 것보다 많이 낮았다.

 이 비욘드는 실제 능력을 상당히 많이 반영한다고 해서 내심 걱정했는데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최대 10까지 주어지는 스텟 수치는 지식과 행운을 빼면 상당히 낮았다.

 소울 포인트(S.P.) 항목은 비어 있었고, 스텟 항목은 여섯 개였다. 몇 개까지 스텟 항목이 붙을지 그것이 궁금했다. 게임에서 스텟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는 거의 경험이 없는 하룬도 잘 알고 있었다.

 떠도는 정보에 따르면 비욘드는 여는 게임보다 현실의 육체적 능력을 많이 반영한다고 했다.

 '그나마 집에 틀어박혀 독서를 많이 했다고 지식이 좀 높은 편이고, 나머지는 중간이나 될까? 나중에 확인해보면 알겠지. 뭐, 다른 유저보다 높을 리는 절대 없겠지만, 비욘드에서는 레벨에 따라 스텟이 올라가는 걸까 아니면 반복되는 행동으로 올라가는 걸까?'

 사실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캐릭터의 능력이 수치화된 것이 스텟이니 말이다. 공복도 시스템이 있으니 주기적으로 먹는 것도 신경 써야만 했다. 아까 튜토리얼에서 공복도가 10% 이하로 떨어지면 생명력도 급격히 하락할 뿐더러 기아로 사망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이번엔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차례였다.

 "인벤 창 오픈!"

───

목검 1개

평상복 1벌

빵 10개

신분패

10실버

───

 "에이, 이게 뭐야?"

 절로 탄식이 나왔다.

 정말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인벤토리는 총 서른두 칸이었는데 그중 달랑 다섯 칸만 차 있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초보자의 주머니 속 그 자체였다.

 얇은 티셔츠와 면바지 그리고 샌들을 신은 그의 모습은 광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 가장 허름했다. 하긴 이제 비욘드에서 생을 처음 시작하는 레벨 1짜리의 차림이 좋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흠, 목검이 있는 것을 보면 사냥으로 레벨을 올리는 것은 다른 게임과 비슷하네.'

 일단 유일한 무기의 정보를 아는 것이 순서였다.

 하룬은 인벤토리에서 목검을 꺼내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정보 확인!"

───

목검

등급: 일반

공격도: 2~5

내구도: 15/15

제한: 없음

설명: 성의 없이 만든 목검이다. 그러나 쓰는 이에 따라서 살상력의 차이가 나며 상당히 단단한 편이다.

───

 '먼저 정보부터 모아야겠지? 그나저나 유저들은 어디에 모여 있을까?'

 상당히 큰 광장이었고,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와 같은 차림을 한 이계인(유저)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NPC들의 경우 머리 위쪽에 이름과 신분이 나타나는 것에 반해 아무런 표시가 없었기에 더욱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눈에도 NPC들과 구별되는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모여들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유저들끼리 뭉치는 것이 안전할 듯했던 것이다.

 "이봐! 뭐 알아낸 정보 없어?"

 전혀 안면이 없는 사내 하나가 그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꽤 아팠기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하룬은 성질도 내지 못하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숫기가 없는 것은 현실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유저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름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리, 정말 레벨 업하는 방법 못 찾은 거야?"

 "휴우, 그래."

 "어나더 월드의 랭커에 육박했던 네가 못 찾으면 우린 어떻게 하냐?"

 "이거 아무래도 스타트 장소를 잘못 지정한 것 같아. 수도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넓어서 사냥터로 가려고 해도 한참 걸어야 하는데 너무 불편해."

 유저들 간에는 사냥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며 유심히 들었지만 아직 사냥터를 찾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사냥터를 찾았으면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다. 열심히 사냥하고 있겠지.

 그때 그들에게 다가오던 한 사람이 인상을 쓰며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성문을 나갈 수가 없어. 산야하러 간다고 아무리 애원해 봐도 실력이 약해서 나가면 바로 죽는다고 수문병사들이 내보내 주지를 않아!"

 "제기랄!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냥하란 말이야!"

 "혹시 사냥을 가려면 퀘스트나 수련장을 통해 일정 수준까지 레벨을 올려야 하는 거 아니야?"

 "돌아다니면서 물어보았는데 수련장이란 것을 아는 NPC는 하나도 없던데. 수련장이 있긴 한 거야?"

 "무슨 게임이 사전 정보를 하나도 주지 않고 하라는 거야? 도대체 베타테스트는 한 거야?"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게임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정보마저 없으니 다른 게임들의 일반적인 패턴과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퀘스트는 누가 주는 거야?"

 "그러게. 아무리 돌아다녀도 퀘스트를 주는 NPC를 만날 수가 없어. 여기의 NPC들은 NPC가 아니라 그냥 유저와 동일한 존재같이 느껴져. 도대체 어떻게 게임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로그아웃하고 다른 장소에서 스타트한 유저들의 정보를 검색해 봐야겠어. 이대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래, 그게 낫겠어."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게임이 서비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서기 좋아하고,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작은 정보라도 게시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저들 중 상당수가 로그아웃하기 시작했지만 하룬은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광장의 밤풍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현실과 너무나 다른 주위 풍경 하며 환경 때문에 게임에 접속한 것은 분명한데 현실보다 더 지독한 현실감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정말 너무 생생해. 현실보다 훨씬 더.'

 그의 생각대로 이 비욘드의 NPC들은 유저들에 비해 그 행동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유저들이 사라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태도는 한가하게 밤풍경을 즐기는 일반 시민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급 더 돌아보자. 나야 레벨 업이 급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경하며 능력을 올릴 방법을 찾는 것이 1차적인 목표이니.'

 하룬은 편한 마음으로 광장을 나왔다. 광장 앞에는 네 갈래의 큰 대로가 있었다. 그중 두 곳은 밤인데도 환하게 밝은 것으로 보아 상가가 형성되어 있지 싶었다.

 그는 한가한 발걸음으로 둘 중 한 거리로 향했다.

 "화아! 대단하다!"

 거의 마차 서너 대가 동시에 지날 정도의 넓은 폭을 가진 대로의 양옆은 각종 물품들을 파는 상점들로 가득했다. 대로는 물론 그 사이사이에 난 소로에까지 상점들이 이어져 있어 얼마나 넓은지 감히 추측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현실에서는 이제 볼 수 없는 품목들을 취급하는 가게들도 많았다.

 사람이 직접 만들어 낸 수공품들이 그들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제 현실에서는 수공예품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정교한 수공예품이라 할지라도 컴퓨터를 이용한 정밀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목재나 철재, 광석, 종이, 풀, 가죽 등 수많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낸 수공품들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 물건들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조금 더 상가를 돌아보던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가게마다 꽉 채워져 있고, 그것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거리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이런 세상이라면 정말 살고 싶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만 있으면, 아니 돈을 벌 직업이 있으면 정말 살고 싶은 세상이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거의 찾을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꿈만 같은 곳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게임들과는 달리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냥터가 없는 도시라면 당연히 사냥에 갈음할 수 있는 수련장이나 퀘스트가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수련장으로 안내하거나 퀘스트를 주는 특정 상황이나 NPC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전혀 아니었다.

 왜 넥컴월은 이런 가상현실을 만들어 냈을까. 게임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을 구현했다는 그들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원론적인 것을 생각하던 하룬의 눈이 한순간 빛났다.

 '직업을 찾아야 해. 아니, 이곳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해. 마치 다른 생을 살듯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현실처럼 이 속에 녹아들어야 해.'

 그가 원하는 것은 허약한 신체를 단련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제대로 받지 못했던 교육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배워야 해.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아, 학교! 제길,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가 필요해.'

 하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워낙 사람들이 바빠 보여 뭘 묻기가 애매했다. 물론 숫기가 없는 탓에 남과 이야기하는 것이 서투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한참 사람들을 바라보던 하룬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뭐랄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여자치고는 상당히 큰 키에 풍성해 보이는 몸매를 가진 그녀는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걸쳤고, 등에는 길이가 긴 검이 비스듬히 메여 있었다. 기사는 분명 아닌 것 같은데 마치 백수건달처럼 여유 있는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한가하게 걷고 있었다.

 '설마 유저는 아닐 테고…… 검을 가진 것을 보면 검사인가?'

 하룬은 한 번 본 후로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와 분위기가 워낙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곁에는 사람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졌기에 그 존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단추를 푼 외투형 방어구 안에 풍성한 블라우스와 움직이기 편한 가죽 바지를 입었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폭이 넓은 요대를 했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고 대화를 했다. 과일 가게에서는 파란 과일 하나를 집어 먹기도 했고, 장신구 상점에서는 팔찌 하나를 집어 팔에 차기도 했다. 물론 돈을 지불하지도 않고.

 '뭐지, 저 여자? 설마 이 거리를 지배하는 깡패?'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상점 주인들과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와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꽤 많았던 것이다. 그 시간이 매우 짧은 것으로 보아 물론 안부 정도겠지만.

 거침없이 상가를 돌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하룬은 문득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어쌔신?'

 어쌔신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라면 이렇게 환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테니까. 더구나 이런 개방적인 곳에서 상대방에게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상점 앞에 높이 진열된 물건 뒤에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하룬은 그중 한 명의 허리춤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틀림없이 무기가 발하는 빛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음에도 그녀를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강렬한 살의가 느껴졌다. 건너편의 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하룬은 단정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다.

 '안 되겠어. 그녀에게 말해 주어야 해.'

 어느 쪽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몰라도 위험은 알려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걸음을 떼는 순간 세 명이 마침 거리를 건너는 한 떼의 사람들 뒤로 은밀하게 따라붙는 모습이 보였다.

 하룬은 급하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한 손이 어느새 품속이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급습하려는 듯했다.

 그녀는 막 무리 지어 길을 건넌 그들과 조우하던 참이었지만 아는 사람을 만난 듯 손을 맞잡고 반갑게 말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그녀의 등 뒤에 도달했을 때 하룬은 그들의 품 속을 나온 손에 날카로운 날을 가진 검이 쥐여 있음을 보았고 급하게 그들 중 한 명을 덮치며 소리쳤다.

 "조심해!"

 "흐억!"

 머리를 황금색 끝으로 묶은 사내의 등을 들이받았다가 제 힘에 넘어지던 하룬이 놀란 사내가 휘두른 검에 앞머리가 베였을 때 그녀는 셋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차압!"

 채앵! 챙!

 비록 넘어지는 바람에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금속성 소리로 추축건대 그들의 공격을 무사히 막은 것 같았다.

 "튀어!"

 "씨벌! 뭐, 이런 거지 같은 새끼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일을 망쳐!"

 "바보야! 저 마녀의 눈이 돌아갔어!"

 단 한차례의 공격을 끝으로 세 사내는 무서운 속도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고, 막 그들을 쫓으려던 그녀는 도로에 넘어진 하룬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이내 멈추었다.

 바닥에 부딪쳐 코가 깨진 하룬이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은 물론 깨진 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서리치면서도 하룬은 그녀가 안전한지 확인했다.

 "네, 덕분에."

 그녀는 은혜 입은 사람의 그것과는 다른 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예상과는 다르게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건 꼭 힘써 놓고도 욕을 먹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보답을 바란 것도 아니고 거창한 정의를 실현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서운한 마음을 달랬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하룬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서 흐르는 코피가 멎기를 기다렸다.

 "엘저라고 해요. 덕분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네요."

 "전…… 하룬이라고 합니다. 마침 저들이 당……신을 노리는 것을 보게 되어서……. 아는 사람들인가요?"

 "저놈들은 틀림없이 다크머천트 길드에서 보냈을 거예요."

 "암흑 상인 길드?"

 처음 들어본 듯 의아해하며 그 이름을 되뇌는 하룬을 향해 엘저는 다시 예의 그 무서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눈빛이 강렬해졌고, 하룬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아까 그놈들하고 내가 같은 무리가 아닌지 의심하는 건가?'

 순간 하룬은 빨리 자리를 떠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어쨌든 자신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하게 된 사람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이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섬뜩한 눈길도 매우 불편했다.

 급기야는 화가 나려고 했다.

 워낙 상황이 급해서 그렇지 칼까지 본 그가 이성적이었다면 절대로 그녀를 돕기 위해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룬은 오기가 나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굵게 웨이브진 은색 머리칼을 질끈 묶은 모습이 투박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격식이 없어서 좋았다. 얼굴과 목을 비롯한 몸의 몇 군데에 거슬리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강렬한 그녀의 시선에 자세하게 볼 여유도 없이 금방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구석구석 날카롭게 주시하던 엘저는 의심을 풀기라도 했는지 이윽고 묘한 감정이 실린 눈길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하마터면 영문도 모르고 칼침을 맞을 뻔했네요."

 "아니, 별말씀을요. 그냥 걱정이 돼서……."

 그녀는 도망친 사람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한 것 같았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 역시 당당한 모습에서 드러났다.

 하룬은 어쩌면 자신이 나선 것이 아무 소용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행자신가 봐요?"

 "네? 아, 맞습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유저는 여행자 신분이다.

 엘저가 한눈에 그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그의 보잘것없는 옷차림과 초라한 행색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제 목숨을 구해 준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답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이제는 태도가 돌변해서 화사하게 웃는ㄴ 그녀의 모습에서 이상한 한기가 느껴진 하룬은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런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에 막 도착한 초보 여행자 같은데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 드릴게요."

 그 말에 한순간 그녀의 인상까지 바뀌었다.

 첫인상보다는 그래도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아가씨일지도 모른다. 마음씨도 고운 것 같고. 뭐, 얼굴이야 자세히 볼 용기가 없어서 예쁜지 여부는 아직도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럼 제가 여기서 처음이어서 그런데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푸훗!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엘저가 그를 보고 웃었다. 자신이 충분히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몇 가지 물어보는 것으로 끝낼 심산인 이 초보 여행자가 마음에 든 것이다.

 "난 이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 건데 거기 가서 이야기할까요?"

 "네, 그럼 더 좋고요. 근데 돈이 별로 없어서……."

 이 도시, 아니 이 세상에 관해 듣고 싶은 것이 많은 하룬으로서는 그녀의 제안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벤토리에는 달랑 10실버 밖에 없었다. 이곳의 물가가 어떤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좀 불안했다.

 "후훗! 은혜를 입었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격은 얼마 되지 않아요."

 "그럴 수는 없지요. 처음 대하는 사이에, 그것도 도움을 받는 처지에 당연히 제가 내야죠."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미 하룬이 그녀를 도왔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엘저는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는데 상대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 같았다.

 "저에게는 이곳에 대한 정보를 아는 일이 아주 절실하거든요."

 하룬은 이곳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와 더불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볼 심산이었다. 물론 벨이 알아낼 수도 있지만 그런 정보가 벌써 인터넷에 뜰 리는 없었다.

 "누가 내든 어서 가요. 마침 오늘은 일 때문에 늦게 성에 들어왔더니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가 데이트하러 나가버려서 혼자 심심했거든요."

 엘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룬은 주저했지만 결국 그녀의 손을 힘들게 잡았다.

 정말 보기보다 활달한 아가씨였다. 마주 잡은 손바닥의 감촉이 울퉁불퉁하고 거칠지 않았다면 평범한 아가씨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성격도 화통하리라.

 "하룬이라는 이름이 약간 특이하네요. 나도 이곳 태생은 아니에요. 아주 어릴 때 용병인 부모님을 따라 보트니스 영지에서 왔어요."

 보트니스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리 없는 하룬이었다. 그래도 대화를 하려면 공통 주제를 찾아야 하는데 초장부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엘저는 성격이 쾌활했다. 그녀는 상대방의 반응을 봐 가면서 대화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여행을 한다면서 와인 생산지로 손꼽히는 보트니스 영지도 모르나 보네요."

 "아…… 처음으로 여행을 나선 참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제국도 그렇고……."

 "어머, 그럼 완전히 여행 초보네요?"

 "네."

 대답하는 하룬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지만 엘저는 그의 태도에 별 상관하지 않았다.

 막상 카페에 오니 엘저와의 대화보다는 가격이 더 신경 쓰였다. 소심한 그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관심이었다.

 '다행이다!'

 아이스크림은 하나에 80브론즈였다. 1실버의 가치가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화폐 가치상으로 보면 적어도 100브론즈는 될 것이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생겨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살이에요?"

 갑자기 왜 그게 궁금한지 모르겠다.

 "열아홉 살인데요. 왜……요?"

 "푸훗! 나랑 동갑이네. 어째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럼 말 놔도 되겠네요?"

 "네? 그럼…… 아, 그래요."

 "푸후! 정말 바보 같아."

 "네에?"

 물어볼 상대를 잘못 선택한 것일까. 도대체가 정신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아가씨였다. 그와 동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숙하면서도 이상한 분위기를 가진 아가씨가 정신을 쏙 빼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너무 정신없게 굴었나? 네가 이해해. 남자가 말을 걸어온 게 처음이라 좋아서 그랬어. 이 동네에서는 나한테 말을 걸 남자가 없거든."

 "그건……."

 동갑이라고 대뜸 말을 트는 그녀였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거는 남자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엘저는 어둠에 속한 대단한 신분일지도…….'

 "게다가 내가 위험한 순간에 몸을 던져 습격을 알려 주었어. 넌 내 생명을 구해 준 거야."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 엘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분히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사실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태도를 보면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믿기는 힘들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같았다.

 그의 예상이 맞을 것이다. 관찰력 하나는 자신 있는 하룬이었다.

 "내가 이 황도에서는 좀 거친 편에 들어가는 사람이거든. 인상이 험한 데다 하도 사고를 쳐서 지금은 나한테 말을 건네는 것조차 시도하려는 남자가 없어. 수도 경비대 놈들을 제외하고는. 걔들이야 이제 친구처럼 지내니까 남자도 아니지만."

 하룬은 연방 고개만 끄덕였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인상이 험하다고?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그때 종업원이 와서 마법 등으로 보이는 작은 등을 켰다. 환한 빛으로 하룬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흥미로운 눈길로 하룬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보기보다 제법이네. 내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밝혔는데도…… 괜찮아? 넌 괜찮은 거야?"

 "그럼 괜찮지."

 무덤덤한 하룬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답에 엘저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얼굴 자체는 그리 예쁜 편이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이글거리듯 빛나는 눈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뭐지?'

 자세히 보자 그녀의 왼쪽 얼굴이 왠지 부자연스러웠다. 환한 대낮이나 불빛 아래에서 보지 않으면 잘 모를 긴 흉터가 있었던 것이다. 이마에서 입술 바로 위까지. 턱과 귀밑에도 큰 흉터가 있었다.

 그녀가 웃고 있으니 그 흉터들이 꿈틀거렸다.

 흉터는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짝 드러난 깊은 쇄골을 따라서 난 것도 있고, 목덜미에도 보였다.

 왜 남자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장에서 일하며 험한 시체를 많이 본 탓인지 그녀의 얼굴 정도는 그를 놀라게 할 수 없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 그런 흉터들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것이 좀 안쓰러울 뿐이었다.

 '놀라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건가?'

 그 많은 흉터들과 맹수의 그것처럼 매서운 그녀의 눈길을 보면 담담한 자신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 나한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고 했지?"

 "응! 나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거든. 뭐라도 좋으니 이곳에 대한 것을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어."

 "흠, 알고 보니 너 완전 촌놈이었구나. 물어볼 것이 겨우 그거였어? 그 정도라면…… 아니지, 네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거야. 내가 이 황도는 꽉 잡고 있거든."

 "기왕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내, 내가 워낙 벽촌에서 살아와서 말이야."

 원래 소심한 성격이라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그의 말투에 엘저는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하룬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이 사는 마을 인근을 제외한 외부 세계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세상에는 허다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상당한 폭으로 제한된 봉건 영주 제도의 영향과 세상에 널린 몬스터들 때문에 군인들과 상인 그리고 용병들을 보기 힘든 곳이라면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려 줄게."

 그녀의 자신있는 태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갑자기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룬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엘저의 말에 주의를 집중했다.

 이 가상현실의 무대가 되는 행성은 세 대륙과 네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있는 곳은 시러스 대륙이고, 뮤로 대륙과 타이레스 대륙이 동쪽고 ㅏ서쪽에 있지만 대륙의 두 배에 해당하는 넓은 바다는 항해하기에는 너무 험하기 때문에 극소수의 상인들만이 오갈 뿐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러스 대륙에는 세 개의 제국과 서른한 개의 왕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엘저와 그가 있는 곳은 테론 제국이었다. 제국이 형성된 것은 801년 전. 다른 두 제국과는 상황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며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였다.

 다른 두 제국도 테론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일부 사학자들은 세 제국의 황제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러스 대륙은 평지보다 산지가 더 많고 몬스터들의 대규모 침략이 빈번해서 서로 전쟁을 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오크 같은 일반 몬스터들은 물론 상위 몬스터로 알려진 트롤이나 오우거의 대규모 서식지도 많아 인간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빈번하기에 내전은 몰라도 나라 간의 대규모 전쟁은 별로 없는 편이라고 했다.

 '흠, 이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아직 독보적인 위치에 있지 않구나. 어쩌면 이런 편이 더 나을지도.'

 공동의 적이 존재하는 이상 인간들끼리의 전쟁은 그렇게 심하지 않을 터였다.

 인간들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전쟁으로 같은 인간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였는데, 이곳은 사정이 달랐다. 같은 인간들이 협력해서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청난 몬스터들이 즐비한 것이다.

 그리고 테론 제국의 수도인 이곳 피렌은 수백만이 사는 대도시로, 제국의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이 지대한 곳이었다.

 "근데 넌 이 황도까지 왜 온 거야? 길을 잘못 들어서는 아닐 테고, 지금의 네 상태라면 여행을 할 만한 자격도 능력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NPC가 분명한 엘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긴 NPC로 보기에는 너무 생생한 느낌을 주는 존재라서 대하기가 힘들었다.

 기존 게임에서 만난 NPC들은 표정도 별로 없고, 유저들의 게임 활동을 보조하거나 지켜보는 일종의 도우미였지만 이곳의 NPC들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존재로 다가온 것이다.

 "사실은……."

 하룬은 자신이 이계인임을 밝히려고 하다가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NPC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워낙 현실처럼 느껴지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게임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NPC들이 유저들을 알아보니 굳이 이렇게 거짓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룬은 자신이 고아이며, 얼마 전까지는 이곳과 일주일 거리의 깊은 산속에서 거의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해 왔다고 말했다.

 그곳은 워낙 황량해서 몬스터들도 거의 없어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데 큰 문제가 없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혼자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너무 불쌍하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거구나."

 그녀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먹을 것이 부족한 곳에서 살아서 지금 몸이 이래. 이틀 동안 이곳으로 오면서 느낀 건데,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그럴 만한 곳이 있을까? 참고로 내 전재산은 10실버밖에 없어."

 엘저는 한심하고 불쌍하다는 듯 수시로 표정이 변하더니 이내 마음먹은 듯 남은 주스를 단숨에 마셨다.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거렸다.

 "좋아! 네가 내 외모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어 소개시켜 주는 거야."

 "어, 어딜?"

 "일단 따라오면서 들어. 조금만 더 늦으면 문 닫을 시간이거든."

 하룬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할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그녀 옆에서 걷고 있자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미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그녀의 눈을 피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일부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녀를 흘긋거렸다. 인상이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 그녀를 본 순간 도망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도대체 엘저의 정체가 뭐야?'

 물론 얼굴의 흉터로 보아 평범한 아가씨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나름 매력적인 면이 없지 않은 그녀를 피할 일은 아니었다. 만약 어둠에 속한, 일테면 폭력 조직에 관계되었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좀 과한 듯했다.

 그렇게 의아함을 품은 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이십여 분을 걸은 하룬은 한 거대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벽이 얼마나 긴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두 명의 수문장이 지키고 있는 정문 사이로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윤곽을 가진 여러 동의 큰 건물들이 보였다.

 "잠깐 실례합…… 허업, 조장!"

 "그래, 나야. 문 열어!"

 문을 지키는 이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신호를 보내자 거대한 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야?"

 "응, 내가 주로 거처하는 곳 중 하나야."

 엘저의 설명에도 하룬의 의혹은 가라앉지 않았다.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그녀의 진정한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그녀를 따라 잠시 걷자 희미한 마법 등이 켜진 정면의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이곳은 테론 제국의 용병 길드 총본부야."

 "그렇구나. 그런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네."

 "맞아. 이 안에는 용병 아카데미까지 있지. 너 같은 약한 여행자가 세상을 알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각종 지식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지."

 "왜?"

 "후후, 너한테 필요한 곳이야.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이 용병 아카데미야. 물론 어떤 재수없는 놈들은 용병 훈련소라고도 부르는."

 재수 없는 놈들이 기사라는 것을 짐작하는 하룬이지만 더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데려온 곳이 용병을 양성하는 아카데미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가 네가 지내는 곳이라고?"

 "응, 평소에는 용병단을 돌며 순회 지도를 하느라 돌아다니지만 때때로 시간이 나면 상인 길드 보호조의 조장으로 오늘처럼 바깥일도 가끔 하지."

 "정말?"

 비록 몇 개의 흉터가 있긴 했지만 그녁 ㅏ이곳에서 용병들을 지도하는 교관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제 스물도 안 된 나이에 남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신분이라는 것도 믿기 힘들었다. 첫 만남에서 여자로 인식한 그녀의 그 어느 곳에서도 검술을 익힌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지식도 배울 수 있고 많은 기술들도 익힐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끌려와 버렸기 때문일까, 하룬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보였다. 책상 몇 개와 테이블 몇 개가 정면 끝에 있었다.

 "여어, 엘저! 일찍 돌아왔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 책상들 중 한 곳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다.

 "오늘은 별로 재미없었어. 세리아가 없으니 허전하기도 하고 상가에서 진 치고 있는 놈들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럴 거야. 지난번에 네가 때려잡은 레드이글 파 놈들 때문에 다들 몸을 사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래도 조심해! 그놈들의 상위 조직인 다크머천트 길드 놈들이 독이 올라 틀림없이 널 노를 테니까. 그 비루먹은 놈들은 독까지 사용하니까 아무리 너라도 한번 찔리면 끝이야."

 "안 그래도 오늘 죽을 뻔했는데 이 친구가 살려 줬어."

 "뭐?"

 그 말에 놀랐는지 사내가 벌떡 일어나 뛰어왔다.

 온몸이 근육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단단한 느낌이 드는 삼십 대 사내였다. 엘저가 위험했다는 소리에 놀라 뛰어오는 것을 보면 대단히 친한 사이일 것이다.

 "그래서?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은 없고?"

 사내는 엘저를 꽤 아끼는 것 같았다. 혹시 연인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영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 친구가 미리 노리고 있는 놈들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했어. 나중에 도망치는 놈들의 검을 보니 날이 파랗게 빛나는 것이 독까지 바르고 왔더라고. 잘못하면 죽을 뻔했다."

 "다행이다. 만약 네가 잘못 되었으면…… 으, 가슴이 다 벌렁거린다."

 "헤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한 관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방금 친구라고 했어?"

 "응! 맞아. 우리 친구하기로 했어."

 "친구라고? 엘저에게 친구가 생겼단 말이야?"

 육중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거한의 흉악한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하룬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왜, 난 친구가 생기면 안 되나?"

 그런 그의 태도가 괘씸하다는 듯 엘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두 손을 흔들며 눈에 힘을 풀었다.

 "아니, 아니야! 네 입에서 친구라는 말을 처음 들어서 그러지. 저 친구가 좀 부실하게는 생겼지만 그래도 남자잖아. 우리 용병계에선 은발의 마녀라고 불리는 천하의 엘저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

 은발의 마녀라고 불린다니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후훗! 우린 남녀가 아니고 친구야. 오해는 하지 마. 그래도 내 얼굴을 보고 떨지 않은 유일한 남자니까 친구 먹은 거지."

 "널 보고 안 떨었다고? 저 비리비리한 친구가?"

 "그래! 내 흉터들을 보면서도 웃던데."

 비록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멍한 눈과 벌어진 입은 '그럴 리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흉터 때문에 여자답지 않게 무서워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녀에게 말을 건넨 남자가 이제까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사내의 반응으로 보아 맞는 것 같았다.

 '엘저가 그 정도로 위험한 여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룬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와 엘저를 번갈아 바라보는 거한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아! 난 용병 아카데미 행정관을 맡고 있는 매킨이야. 생긴 거하고는 영 딴판이네. 어쨌든 용기 있는 남자를 만나서 반가워."

 호기심이 강하게 담긴 묘한 눈길로 연방 하룬의 아래위로 훑어보는 매킨의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엘저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두 사람은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혼자 남은 하룬은 느닷없이 용병 아카데미라는 곳으로 오게 된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에 약간은 멍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정신이 든 하룬은 그들의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기초 수련 과정에 넣자고? 엘저, 진심이야?"

 "그래, 저 친구가 영양히 부실한 식사 떄문에 약한 것 같지만 수련을 받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잖아. 그리고 꼭 육체적인 능력이 있어야만 용병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게로스 같은 분은 몸이 허약해도 일급 용병이잖아."

 "그거야 그분의 경우에는 지혜로우니까 그런 거고, 저 몸이라면 기초 과정도 힘겨워할 것 같은데."

 "몸이야 그렇게 보이지만 내 느낌에 예사롭지 않은 친구야. 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것도 그렇고 독이 발린 검을 든 놈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위험을 경고해 준 것으로 보건대 근성은 대단한 친구야. 사람 보는 내 안목이 쓸 만하다는 것은 매킨도 알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아무리 봐도 기초 수련 과정을 통과할 정도로는 안 보여. 더구나 네가 유명 인사이긴 하지만 네 추천만으로 수련생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 아, 그래! 만약 문제 될 것 같으면 저 친구를 근로 수련생으로 받아들이면 되잖아."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엘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근로 수련생? 아, 그럼 되겠다. 근로 수련생이야 나중에 문제가 될 일은 없겠지. 추천은 받았지만 돈이 없어 일을 하면서 수련하는 거니까. 뭐,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그제야 매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하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엘저는 처음 만난 그를 위해 이 용병 아카데미에서 운영하는 기초 수련 과정에 넣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엘저, 나 때문이라면 무리하지 말아 줘.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하룬은 진심이었다.

 이제까지 억지로 끌려온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 확실하게 자리 잡은 NPC인 엘저에게 얼마만큼은 의지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게임과 달리 제대로 된 가이드가 없고 너무 막막했기에 처음 보는 엘저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탁한 것이지 그녀가 자신 때문에 뭔가 책임지는 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이봐, 하룬!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넌 근로 수련생이라 일하면서 수련을 받는 거니까 그렇게 고맙게 여기지 않아도 돼. 아마 상당히 힘들 거야."

 "그래도 네 추천이 아니면 그 과정에는 못 들어가는 거잖아. 정말 고마워."

 "아니,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내 이름을 팔아 도와준 게 뭐가 고마워? 넌 내 목숨을 구하려고 했는데."

 하룬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지만 자신을 친구라고 믿어주니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기초 수련 과정이라니 나약한 육체와 부족한 지식이 전부인 그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연히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엘저가 너무나 고마웠다.

 하룬은 그녀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맙다, 엘저. 너한테는 누가 되지는 않을게."

 "고맙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두 사람은 유저와 NPC를 의식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따듯한 눈길을 보냈다.

 "하하! 우리 엘저에게 첫 친구가 생긴 걸 나도 축하하지. 이봐, 하룬. 이 과정만 잘 수료하게. 나와 엘저가 아주 제대로 잘 달구어 줄 테니."

 매킨이 호탕하게 웃었다.

 나이 차이도 꽤 나는데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엘저를 무척 아끼는 것 같았다. 매킨의 얼굴에 그려진 굵은 흉터가 왠지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받을 기초 수련 과정은 3개월이야. 난 하필 지금 용병단 순회 교육에 교관으로 참가하고 있어서 면회는 힘들겠지만 안면 있는 교관들에게 네 얘기를 해 놓을게. 기초 과정은 특별 교관들 관할이라서 도움을 주기는 어렵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매킨에게 도움을 청해."

 "고마워!"

 고맙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캡슐도 그렇고 엘저의 존재도 그렇고 너무 좋은 일들만 생기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던 불행이 사라진 것 같아 그 감회에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자식! 그러니까 내가 더 이상하잖아. 어쨌든 무사히 과정을 잘 이수하고 바깥 세상에서 보자."

 엘저는 그러면서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매킨은 담당이 아님에도 한참이나 떨어진 기초 수련 과정의 기숙사까지 친히 동행해서 교관으로 보이는 그곳 사람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하고는 하룬이 묵을 방까지 안내해주었다.

 엘저도 교관 신분이긴 하지만 남자 기숙사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지는 것은 서운했지만 하룬은 설레고 기대되었다. 마침 내일부터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니 다행이었다. 중간에 끼어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사실 현실에서 부양 가정이 바뀌어 몇 번 전학한 경험이 있던 하룬은 이미 안정된 무리에 끼어드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리를 이룬 기존 학생들은 나중에 새 멤버가 들어온 것을 환영해 주는 법이 거의 없었다. 내성적인 면이 많은 하룬은 끝내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가 머물게 된 기숙사는 마법사 출신들이 있는 곳이라 마나 억제 팔찌를 차야 했고, 마법사 출신인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 좀 걸렸다.

 '꽤 큰 방이네. 마음에 들어.'

 매킨이 안내해 준 방은 제법 컸다.

 침대와 책상, 의자, 작은 옷장은 물론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있었다. 현실에서 살고 있는 공간보다 훨씬 더 크고 쾌적한 곳이었다.

 '와아! 용병 아카데미는 돈이 많은가? 이런 방을 혼자 쓰게 하다니!'

 입이 쩍 벌어진 하룬이었다.

 본부에 엘저를 남겨 두고 온 터라 매킨은 추가적인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알려 주고는 이내 떠나버렸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야 몇 번 겪은 터라 이내 잊어버릴 수 있었다. 나름 힘들었던 하루의 끝에 그래도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에 도착한 하룬은 피곤함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그래도 운이 참 좋았어. 엘저를 도와주길 정말 잘했어. 덕분에 이렇게 용병 아카데미까지 오게 되었잖아. 도대체 무슨 게임이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생생해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

 정말 또 다른 세상에 사는 기분이었다. 퀘스트도 없고 상점에서 알바를 하지도 않고 학교와 다름없는 과정에 참가하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

 '이런 게 정말 가능한 것인가? 여기서 지내다 보면 나중엔 어느 것이 현실인지 헷갈릴 수도 있겠어.'

 오늘은 왠지 기분 좋게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접속을 해제하고 나가 이 비욘드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굳이 레벨 업을 빨리 해서 랭커가 되려는 욕심 자체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살면서 마음 편하게 자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부양 가정이 몇 번이고 바뀌는 바람에 소심해진 성격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걱정이 많아 늘 잠자리에 누워 한동안 뒤척여야만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