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인공지능 캡슐 '벨' (4/278)

《인공지능 캡슐 '벨'》

 양부의 메시지를 듣고 캡슐 밖으로 나온 정민은 그 외관에 바뀐 것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경 5센티 정도의 구멍이 하나 보였다. 분명 아까만 해도 없었는데 홀연히 나타난 구멍이었다.

 "이게 투입구란 말이지."

 양부의 말대로 예사로운 캡슐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착잡한 심경이었지만 게임 캡슐에 대한 호기심은 정민에게 메시지대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은 알갱이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분말이었지만 일부는 액체 상태로 되어 유리병에 밀봉된 것들도 있었다. 워낙 수가 많이 투입구에 그것들을 넣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보기보다 안에 빈 공간이 많은 모양이지?"

 캡슐 안을 꽉 채울 만큼 내용물이 다 들어갔는데도 투입구가 막히지 않았으니 신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가상현실 게임 비욘드를 향한 강한 열망이 캡슐을 둘러싼 모든 의혹들과 의문을 눌러 버렸다.

 내용물을 모두 투입구에 주입하고 드디어 캡슐 안에 가지런히 누웠을 때 뚜껑이 저절로 닫히며 실내는 어둠으로 바뀌었다.

 그때 그의 귀에 들리는 음성.

 -구동을 시작합니다. 숨을 최대한 천천히 쉬면서 긴장을 풀어주세요.

 기계음이긴 하지만 가늘고 부드러운 것이 어리게 느껴졌고 달콤한 느낌까지 들게 만드는 왠지 마음에 드는 목소리였다.

 그를 비욘드로 데려다 줄 안내 음성이었기에 기대에 부푼 정민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눈을 감고 호흡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사이 캡슐이 서서히 자동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암흑으로 변한 캡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그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보이지도 않거니와 아무런 소리도 동반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캡슐의 내부는 서서히 그 공간이 확장되었다. 외견상의 변화는 전혀 없었지만 실내 공간은 제법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 크기가 커진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캡슐의 변화가 멈추었다.

 바깥 체적의 변화 없이 내부의 체적이 바깥보다 더 넓어지는, 상식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생긴 것을 정민은 알 도리가 없었다.

 크기의 변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캡슐의 외면에 미세한 크기의 구멍들이 생기더니 실내는 물론 미세한 벽의 공극을 통해 외계의 공기와 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실내의 변화 역시 소리 없이 계속되었다.

 캡슐 내부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전자기파들이 지속적으로 쏘아져 나와 머리며 팔다리를 비롯한 그의 온몸에 부딪쳐 마치 전선을 꼳은 것처럼 그와 캡슐이 연결되었다.

 우우웅.

 작은 진동음과 함께 그의 몸이 부드럽고 느리게, 넓어진 캡슐 내부 공간의 정중앙으로 떠올랐다.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있는 것 같았지만 떠있는 몸은 아주 안정되었고, 심신이 편안해서 정민은 이런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최초 구동이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벨이 각성합니다. 이제 캡틴의 육체를 스캔합니다. 고유 유전자 정보를 확인하겠습니다. 3……2……1! 확인되었습니다.

 정민은 당황스러웠다.

 누가 벨이고 캡틴인지? 더구나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이야기는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졌다.

 정확한 운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삭이는 듯한 그 음성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정감과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모습이 있다면 아마도 상당한 미인일 것이다.

 "뭐, 뭐야? 벨이 누군데?"

 -벨은 캡틴이 탑승하고 있는 바이오 메탈체이며 캡틴과 미래를 함께할 이 캡슐형 자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캡슐이 벨, 너라고?"

 -네.

 정민은 잠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메시지의 내용으로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ㅈ기접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더욱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별 볼일 없는 보더러이긴 해도 허약한 몸 때문에 움직이는 것 대신 인터넷 서핑과 독서가 취미인 정민이었다.

 배리어를 유지하고, 유니온 내의 인프라를 전담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들이 한 유니온에 몇 개 정도 존재하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렇게 작으면서 캡슐형인 인공지능 컴퓨터의 존재는 직접 경험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물론 실내 전부를 관장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홈컴Home Com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상용화되었다. 일단 설정만 하면 어느 정도의 판단력을 가지고 요리, 세탁, 청소 같은 집안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유용한 인공지능 컴퓨터가 C구역 정도만 해도 어느 집이든 다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아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리고 바이오 메탈체라니? 이름대로라면 생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자아의식까지 가진 금속체라는 소리인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까지도 없었지만 미래에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였던 것이다.

 혼란에 빠진 정민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 벨은 이 캡슐 형상을 한 자아 금속 생명체이고 내가 너의 캡틴이란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역시 양아버지가 널 나에게 보낸 건가?"

 -그건 홀로그램을 통해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전 캡틴과 함께 지내며 명령을 받아 캡틴의 발전을 도우라는 절대명령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절대명령이라고? 누가 너에게 내린 명령인데?"

 '절대명령'이라는 말은 사이보그, 즉 기계 인간들을 만들 때 악용되지 않도록 프로그램 전체에 걸쳐 심는 명령어였다. 주인을 절대 배반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램 전반에 심어놓는 명령인 것이다. 갑자기 그 용어가 왜 나온단 말인가?

 -청일 님입니다.

 역시 생각대로 양아버지였다. 하지만 캡슐 기술 공학자였던 그가 이런 엄청난 존재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절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널 만든 거지? 그 사람의 이름도 청일인가?"

 -아닙니다. 제게 생명을 주신 존재는 어머니 '가이아'입니다. 청일 님은 저에게 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정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만든 존재는 가이아이고 주인은 양아버지라니.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해 양아들의 부양비며 국가 지원금을 착복했던 그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존재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 사정이 궁금했지만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설마 그 가이아는 아니겠지?'

 '가이아'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를 하나 알고 있긴 했다. 다른 이름은 에인션트 마더 컴퓨터 가이아. 이전 인류와는 다른 기반으로 시작한 휴먼들의 새로운 과학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세 존재 중 하나였다.

 그들 덕분에 휴먼들은 배리어를 만들 수 있었고, 비록 많은 부분이 상실된 기형적인 모습이지만 휴먼만의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다.

 '가이아'는 현재 WGC(전지구위원회) 본부에 소속되어 있다.

 많은 환난을 겪으며 이제는 기존 능력의 10%도 채 남지 않았다는 가이아지만 그 능력만으로 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능력을 가진 삼십여 대의 슈퍼컴 중 하나였다.

 정민이 풀리지 않는 문제로 온갖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벨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한 시간 후면 비욘드가 정식으로 서비스됩니다. 미리 정보를 검색하시겠습니까?

 "아, 비욘드!"

 정민은 비욘드라는 말에 정신을 뺏기고 말았다. 고민해 봐야 이해할 수 없는 일보다는 평소에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가상현실 게임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던 것이다.

 -참고로 비욘드에 대한 인터넷 자료는 총 400,332건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출시도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많은 자료가 올라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주의와 관심이 순식간에 비욘드로 쏠렸다.

 "그럼 검색 좀 해줘. 아, 그런데 어떻게 접속하면 되지?"

 팔찌형이든 반지형이든 하드가 있어야 하고, 모니터가 있어야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아무리 벨의 인공지능이 신God급이라고 해도 매개물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었다.

 -머릿속으로 비욘드라는 글자를 떠올리고 정면을 응시하면 화면이 보일 겁니다. 캡틴과 저는 고유한 채널의 뇌파를 통해 이미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아무런 매개물도 없이 순수하게 뇌파를 이용한 접속이란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기를 통하지 않고 단지 뇌파만을 이용해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대단한 영적 능력자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능력이 판명된 그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연속해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정민은 그런 점을 떠올리지 못했다.

 '비욘드 검색.'

 그가 마음속으로 외치자마자 홀연 눈앞에 비욘드에 대한 정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ID 머털도사: 이 게임에 대해서는 미리 배포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성장 진화형 게임이라고 하던데…….

 ID 텡구리: 전문가들 말로는 랭커가 되려면 히든 잡이 필수라고 하더군요. 근데 이 게임은 특정 직업이 정해져 있지 않대요.

 ID 반하르크: 그래도 캐릭과의 동화율은 최고 수준이어서 모든 행동이 생각대로 움직인다고 하니 정말 대단할 거 같아요.

 ID 에델: 극비 정보에 따르면 이 게임은 리얼 타입이랍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무튼 전신 슈트형 고급 캡슐로 게임을 하면 게임에서 몸으로 습득한 능력을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쓸 수 있다고 하네요.

 ID 아방가르: 나도 그렇게 들었어요. 넥컴월은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했고, 그 속에서 유저들이 새로운 삶을 경험해 보길 기대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은 액티브 스킬 따위는 없다는 뜻이지 않을까요?

 ID episode: 에이, 말도 안 돼요. 액티브 스킬이 없다니, 그런 게임이 어디 있어요?

───

 그 뒤를 이어 계속 검색해 보았지만 게임 공략이나 캐릭터를 키우는 특별하고 눈에 띄는 고급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정보를 올린 사람들도 대부분 학생들로 보였고 정보 등급 역시 무척 낮았다. 그러나 정민은 실제로 게임한 경험이 별로 없는 만큼 작은 정보들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다만 리얼 타입이니 진화 성장형 게임이니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단순히 스킬의 이름을 외치는 것만으로 단숨에 액티브 스킬이 활성화되는 그런 종류의 게임은 아닌 게 확실했다.

 -캡틴의 1차적인 목표는 육체적 능력을 계발시키는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그런가? 근데 어째 목소리만 들으니 네가 마치 유령 같아. 혹시 네 인간형 모습도 존재하는 거니?"

 -당연히 있습니다. 보여 드릴까요?

 "그래."

 현재 자신이 벨의 내부에 있으니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영상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왠지 벨이 여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르르.

 '허엇!'

 민망하다.

 "뭐야, 이 녀석!"

 -네?

 은근히 기대했던 정민의 눈앞에 나타난 영상은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였다. 무지 귀여운 얼굴의 여자애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고, 밝은 색상의 원피스를 입었다.

 "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제 첫 가동을 했다는 벨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완벽하게 벨의 승리였다. 물론 그의 눈앞에 나타난 벨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왜 웃어요, 캡틴?

 벨의 목소리에서 왠지 심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 화가 난 것일까? 그래도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성숙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상상했던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벨이었기에 화내는 모습과 목소리가 인간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톤도 올라가고 말투까지 바뀌었는데.'

 "하하! 네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귀여워서 그래. 오해하지 말라고."

 -아닌 것 같은데요. 흥! 분명 뭔가 다른 것이 있어요.

 정말 화가 난 듯 양손을 허리에 걸치고 그를 째려보는 벨의 모습이 왠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말이야, 정말!"

 마치 사람에게 하듯 손사래를 쳤지만 벨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지 심통이 잔뜩 난 얼굴로 픽 사라져버렸다.

 "하하하하!"

 정말 시원하게 웃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마음껏 웃어 본 적은 처음인 듯했다.

 부양 가정을 잘못 만난 탓에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감정 표현이 무척이나 미숙했다. 그래서 대인관계에서도 손해를 많이 보았고, 결국 사람들과의 교류를 자신이 알아서 피하고 살았다.

 "벨."

 -…….

 "벨."

 -무슨 일이시죠, 캡틴?

 "화내지 마, 벨! 벨이 이상하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 단지 벨의 모습이 이러이러할 거라고 혼자 마음대로 상상했던 내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져서 웃은 거야. 그러니까 화 풀어."

 -……벨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크음. 그럼 화 풀린 것으로 받아들일게."

 벨은 정말 화가 풀렸는지 다시 영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어째 표정이 아까와 달리 냉랭한 것이 완전히 다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호오. 정말 인간과 똑같은 걸. 희로애락을 거의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존재란 말이지?'

 속으로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정민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내 능력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건 저도 몰라요. 비욘드에 대한 것은 정식으로 서비스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거든요.

 "그래도 넌 인공지능 컴퓨터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무런 암시나 자료도 없이 정보를 추출할 능련은 없어요.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아 삐친 말투로 겨우 대답하는 벨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실체가 존재한다면 껴안고 얼굴을 비비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처음의 딱딱한 말투가 어느새 그 나이의 여자애에 가깝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제껏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슬프지 않았는데 이런 여자애라면 동생이 한 명쯤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마음이 훈훈해졌다.

 "뭐, 그렇다면야. 쩌업, 이러면 별로 유리한 것도 없잖아."

 -아니, 아니에요. 캡틴은 저로 인해서 캐릭터와의 동화율 한계가 다른 사람들이 최대 40%를 넘을 수 없는 것에 반해 노력 여하에 따라 99.99%까지 올릴 수 있어요. 동화율이 높다는 것은 캡틴이 게임 안에서 어떤 수련을 하거나 학습을 하면 현실에서 그것이 반영된다는 말이에요. 사망하는 순간에는 위험 요소를 제거한 상태에서 가능하지요. 물론 캐릭터가 사망하는 경우에는 정신상의 데미지는 어느 정도 입을 수 있지만 육체적인 데미지는 전혀 받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어요. 엄청나게 다르다고요.

 "99.99%?"

 -네, 물론 당분간 그 수치는 불가능하지만요. 처음에는 다른 유저들처럼 30%부터 시작하지만 육체적인 능력이 올라가면 그 수치가 조금씩 상승할 거예요. 그리고 몸 상태에 따라 필요한 영양분과 약성분을 자동으로 보충하는 시스템과 숙면 시스템으로 로그아웃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게임이 가능하도록 만든다고요.

 '역시 대단한 물건이군.'

 팔짱을 끼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민 것이 이만하면 어떠냐고 뻐기는 것 같았다. 뻐길 만했다. 그 모습이 조금은 건방졌지만 말이다.

 "흐음.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혜택을 받는 셈이었다. 게임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동화율 99.99%라는 것은 아예 실현 가능성이 없는 수치였다.

 왜냐하면 주로 뇌파만을 이용하는 보급형 캡슐이나 전신형 슈트를 입고 접속하는 최고급 스페셜 캡슐이라고 해도 캐릭터라는 매개체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동화율은 그 정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 동화율을 높이면 가상현실에서 데미지를 입을 시 현실 세계의 육체에 거의 똑같은 데미지를 입기 때문에 그 어떤 가상현실 게임도 동화율이최대 60%를 넘는 경우는 아예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상현실에서의 데미지 때문에 현실의 존재가 사망하는 경우까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양부의 마지막 양심 때문에 운 좋게 이 캡슐을 받았지만 그가 이 캡슐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제일의 목표는 신체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바로 허약하고 부실한 육체였고,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도 강인한 육체와 힘이었다.

 '음, 역시 다들 레벨 업이 목표겠지? 아니지, 다크 게이머들은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겠지. 뭐, 그것도 레벨이 높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결국은 레벨 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겠지.'

 하지만 그는 남들과 목표가 달랐다. 물론 랭커가 되면 좋겠지만 이성적인 그의 판단으로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날고 뛰는 게이머들이 있고, 그들은 이제까지 수많은 게임을 해오면서 쌓아 온 노하우가 있을 터였다.

 그들에 비하면 그는 게임에는 거의 초보자였다. 이전까지 다른 가상현실 게임을 해온 경험이나 노하우가 적고, 더구나 신체적인 능력 역시 바닥을 기는 형편이 아닌가.

 그렇다면 레벨 업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비욘드를 플레이하면서 일단 육체적인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한편 각종 지식과 현실에서도 쓸 수 있는 패시브 스킬들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배워야만 했다.

 "육체적인 수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캡틴이 알아서 하셔야지 저 같은 어린애가 뭘 알겠어요?

 제길, 삐친 것이 확실했다.

 대인관계가 약한 그가 말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아는데 모른다고 할 벨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성장하는 존재라면 자신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일부러 알려주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 모든 것은 우선 게임에 접속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거네?"

 -맞아요, 캡틴. 지금은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에 제가 조언해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일단 서비스가 되면 저보를 모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차라리 나중에 접속할까?"

 그러는 것이 나을 지도 몰랐다.

 게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접속했다가 캐릭터를 잘못 키우면 나중에 삭제하고 다시 키우거나 레벨 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들었다.

 "아냐, 그래도 접속은 해 봐야지. 벨이 정보를 수집할 때까지 그냥 비욘드의 세상을 구경만 하지,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우선 넥컴월로 계정비를 송급해 줘."

 -알았어요, 캡틴.

 벨도 정민의 말에 동의했다. 어떤 세계인지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그냥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인공지능 컴퓨터답게 은행과 접속해 일을 처리하는 벨을 신경쓰지 않고 비욘드에 접속했다.

 그 순간 구름 혹은 거품으로 보이는 벽으로 둘러싸인 한 공간에 그가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울리는 음성.

 -비욘드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가상 세계는 신비롭고 몽환적이면서 실제의 삶이 펼쳐질 판타지의 땅입니다. 계정을 확인하겠습니다.

 정민은 이미 입금 처리가 된 계정을 불러주었다.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아이디를 생성합니다. 원하시는 아이디를 말씀해 주세요.

 "래프."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늘 큰 소리로 웃고 싶어 언젠가부터 쓰고 있는 '래프'를 아이디로 정했다.

 -아이디가 생성되었습니다. 패스워드를 말씀해 주세요.

 정민은 늘 쓰던 패스워드를 말해주었다.

 -다음은 캐릭터의 생성입니다. 캐릭터의 외모는 키, 몸무게, 머리 색깔 등 현재 상태에서 10%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일단 거울을 보면서 수정할 부분을 말씀해주세요.

 아무것도 없던 그의 앞에 전신 거울이 나타났다.

 정민은 외모를 특별히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게임과 현실을 착각해서 게임상의 감정을 현실까지 이입해 사고 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적당히 외모를 바꾸었다.

 -캐릭터 설정이 끝났습니다. 이 모습으로 게임을 하시겠습니까?

 "네."

 -계정을 다시 생성할 때까지 이 외모로 유지됩니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머리가 길어진다든지 하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있으니 관리해주셔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외모까지 변화한다니 놀라웠다.

 -캐릭터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잠시 고민했지만 적당한 것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미리 준비할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 테지만 느닷없이 게임에 접속하게 된 정민은 아니었다.

 그때 무심코 튀어나온 이름이 있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고 생각해서 생각해서 떠올린 이름도 아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제까지 불렸던 정민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강렬한 끌림이 있었다.

 "하룬."

 -하룬 님, 이제 본격적인 접속에 앞서 필수적인 기본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비욘드 게임은 타 게임과는 달리 리얼 모드를 강화하였습니다. 하룬 님은 앞으로 이 비욘드에서…….

 도우미는 게임에 대한 내용을 길게 설명했다.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을 하게 되어 들뜬 그의 귀에 내용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첫 번째는 현실과 게임이 1대 3의 시간으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다른 게임들도 미슷했다.

 두 번째로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사고 능력까지 갖춘 NPC들에게 유저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 이계에서 온 이계인들로 인식된다는 점이었다.

 세 번째는 여느 게임과 달리 특정하게 유저와 NPC를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네 번째는 비욘드만의 특별한 것으로, 소울 포인트가 있었다. 소울 포인트는 몬스터를 잡고나 비욘드가 구현한 세상에서 공적을 세울 때 쌓이는 포인트로, 이것이 일정 수준에 달해야만 전직하거나 새로운 스킬을 배울 수 있다.

 몬스터가 끊임없이 리젠되는 사냥터와 던전에서는 소울 포인트를 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유저들이 전직을 하기 위해서는 스타팅 포인트와 일정 거리에 있는 전직 도시들로 여행하면서 몬스터를 없애거나 퀘스트를 해서 소울 포인트를 적립해야만 했다.

 다섯 번째는 NPC들과의 관계였다. 유저와 NPC는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제한이 있었다. 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성적인 행위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과 비욘드의 문명의 근간을 해치는 과학 지식들은 금지된다는 점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여섯 번째는 히든 직업이 아예 없는 대신 기본 직업을 기반으로 제한 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직업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직업에 대한 각종 사항은 유저의 책임이었다.

 하룬이 그런 사항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사이 게임 도우미는 마지막 안내를 하고 있었다.

 -스타팅 포인트는 총 1,200곳입니다. 원하시는 곳을 말씀해 주세요. 작은 마을부터 제국의 수도까지 시작할 수 있는 곳은 다양합니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지도를 보면서 하룬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적한 외곽 마을에서 스타팅해서 레벨을 올린 후 점차 큰 마을과 영지성 그리고 왕궁의 수도, 마지막으로 제국의 수도로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그러나 비욘드는 제국의 수도 역시 스타팅 포인트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었다. 레벨 1의 무능력자가 수도에서 할 일은 아마 거의 없을 텐데 왜 그곳이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게임에 통달한 이들이라면 집작하는 것이 있을 테지만 그로서는 어느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원하시는 곳이 없거나 결정하지 못하고 5분이 경과하면 랜덤으로 시작되니 서둘러주세요. 만약 리스타트를 하거나 스타팅 포인트를 바꾸시려면 스텟치의 하락이나 크게는 계정비의 인상 등 몇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도 하실 생각이면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GM(게임 운영자)를 찾아 주세요.

 "난…… 제국의 수도로 가겠어요."

 일단 벨에게 게임 정보 수집을 맡겼으니 그는 편한 마음으로 비욘드라는 게임이 구현한 세상을 구경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세상 구경을 하려면 역시 수도로 가야만 했다.

 -하룬 님의 스타팅 포인트는 테론 제국의 수도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