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선물》
성인이 되는 날이고 그 누구도 축하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정민의 기분만은 최고였다.
500만 원이라면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가 복지 보조금과 공공근로로 받은 돈은 한 달에 50만 원이 조금 넘었다.
한 달 지출은 낡고 허름한 건물의 작은 방 월세와 최하급질의 식료품 그리고 각종 세금과 공과금을 합해 40만 원이 조금 넘었다.
그래서 약 10만 원의 여유 자금이 남지만 그것도 옷이나 작은 전자 제품 같은 제대로 된 물건 하나를 사면 금세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름 절약하고 살았지만 현재 그의 예금액은 달랑 52만 원뿐이었다.
정민은 한낮으로 향할수록 더욱 거세지는 먼지바람을 뚫고 자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큰돈이 생겨서인지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난 2년 동안 거주한 건물에 사는 이웃들은 생존에 급급하거나 혹은 생존의 이유 자체를 상실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힘겨워했기에 누구에게 기대거나 관심을 주는 법이 없었다.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다가 유니온 복지과의 도움을 받아 이 낡은 건물의 작은 방 하나를 배정받았던 그는 한동안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정이 그립고, 사람들이 그리웠다. 심지어는 자존심을 버리고 부양 가정에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뭐, 이제는 습관이 됐으니까."
숫기가 별로 없는 그로서는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생각 따위는 아예 없었기에 이제는 타인의 관심이나 사랑 따위는 어느 정도 포기했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거주환경도 좋지 않은데 우울증까지 생겨 버리면 차라리 하르크에게 잡아먹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는 정도 별로 없고 꿈도 희망도 없이 사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만 갔다.
대낮인데도 건물은 어두컴컴했다. 외벽을 칠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골조가 군데군데 보일 정도로 낡은 건물이지만 그래도 먼지 바람을 피할 거처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범법 행위를 저지른 자들이나 자신의 거처를 팔아 버린 자들은 거리에서 생활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하르크에게 잡아먹히거나 범죄에 연루되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에 이런 낡은 집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 낡고 허름한 건물에서 정민이 거주하는 18층에는 총 열 집이 있었다. 물론 다 조그만 원룸이지만 가족들이 거주하는 집들도 여섯 집이나 되었다. 늘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내는 반갑지 않은 이웃들이었다.
자신 같으면 이렇게 대물림되는 신분 사회에서 그것도 가장 하층민으로 사느니 차라리 자식들을 낳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작은 공간에서나마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그 같은 외톨이들보다는 행복하리라.
이제는 잊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 중 하나가 갑자기 느껴졌다.
그것은 쓸쓸함.
'진수 형이 집에 있으려나? 아니, 이 시간이면 있을 리가 없지.'
옆집에 사는 진수는 이 건물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몇 안 되는 이웃이었다. 그와 비슷한 케이스로 보더러가 된 진수와는 가끔 거리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사이였다.
스물여섯 살이 된 진수는 요즘 유니온 직영 농장에 막일을 하러 다닌다.
'이제 혼자 뭘 하면서 살아가나?'
무능력과 가출 때문에 낙오자로 분류되어 이곳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정민이 생계를 위해 한 일은 시체 화장장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서 날마다 거리를 가득 메우는 먼지와 모래를 치우는 공공근로였다.
체력이 약해 그나마 보수가 높은 공사장 인부나 건물 청소 또는 식당 같은 데서 일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막상 성인이 되고 보니 앞으로 살아갈 일이 아득했다. 이젠 그나마 육체적으로 큰 부담이 가지 않았던 공공근로자리도 끊겨 버렸다. 어제부로 잘린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오늘로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툭툭!
터번을 두른 천을 벗어 외투에 치니 모래 섞인 먼지들이 현관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동안은 청소도 자주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라는 것을 배운 정민은 먼지로 가득한 신발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모래나 먼지에는 백 년도 훨씬 전 과거에 터졌던 수천 발의 핵무기에서 나온 방사능이 함유되어서 실내에 들어오면 반드시 씻어 내야만 했다.
그동안 미성년 상태였기에 그나마 계절별로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지급했던 바지와 티 그리고 속옷을 벗어 세탁기에 돌리고 욕실로 향했다. 갈비뼈는 물론 전신의 뼈들이 다 드러나 보이는 해골 같은 몰골이 거울에 비쳤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차라리 처음부터 이 F구역에서 태어났다면 학교에서나 이웃들을 통해 앞으로 살아 나갈 때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배울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곳 학교들은 그래도 직업교육을 시키니 말이다.
그때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회의로 방황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더라도 미래를 위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는 그것마저 놓쳐 버렸다.
누군가 미래에 대해, 인생에 대해 조언해 줄 존재가 간절히 필요했지만 그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곁에 아무도 없었다. 이럴 때면 숫기가 없는 것이 더욱더 못마땅했지만 한숨으로 아쉬움을 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민은 여느 쉬는 날처럼 배리어를 누렇게 물들이는 먼지바람을 작은 창의 지저분한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선물 때문인지 아니면 성인으로 살아 나가야 할 암담한 미래 때문인지 유일한 취미인 컴퓨터 게임도 오늘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선물 상자는 점심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배달되었다.
정민은 흐릿한 태양빛에 반사되는 상자를 한참 홀린 듯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그 외양을 보니 S구역에 거주하는 노블맨들이나 사용하는 관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에게 이 물건을 선물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상념 혹은 상상이 질문에 대답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흠, 설마 내 관은 아니겠지. 원수진 일도 없거니와 흙에 매장할 귀한 신분은 당연히 아니니 일부러 친절하게 관을 보내줄 리도 없을 테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뇌까리며 정민은 손으로 상자를 만지기 시작했다. 가로 1미터 50센티, 세로 3미터로 어림되는 상자의 재질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금속이었다. 확실한 것은 쇠나 알루미늄 같은 금속은 절대 아니었다.
한참 동안 상자를 세밀하게 관찰하던 정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금속 상자의 옆면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버튼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위이잉!
버튼을 누르자 소음과 함께 상자의 덮개가 열렸다. 그렇게 열린 상자 안으로 꽂히는 정민의 시선에 가득 들어온 것은 무수히 많은 자루였다. 그 크기가 다양한 자루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담겨 있었다.
"뭐지? 어디 꺼내 볼까!"
정민은 자루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백 개까지는 수를 셀 수 있었지만 그 후로는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재질과 거기에 쓰인 글자였다. 하긴 재질이야 천이 아닌 이상 알아볼 재주가 없었지만 글자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밀가루, 쌀가루, 갈근, 생황, 감초, 해태, 홍해삼, 전복, 미역, 인삼, 감태, 하수오, 음양곽, 봉밀, 백석……. 도대체 이것들이 다 뭐야?"
그 이름은 끝이 없었고 아는 것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이름을 아는 것들 중에도 지금은 역사책에서나 그 존재를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현재 유니온의 수백 층 높이의 인공 농장에서 대량 재배하는 작물들은 휴먼력 이전처럼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다.
곡물류는 그 크기가 크고 무거웠지만 나머지는 크기도 작고 부피도 작았다.
그 중에는 다양한 과일의 이름도 있었고, 이제는 배리어 때문에 아예 구할 길이 없는 희귀한 약초나 해양 생물 그리고 해초류는 물론 광물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해를 못 하겠네. 누가 이런 것들을 나한테……."
누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보낸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은 이 상자의 가치가 생각 외로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사실을 깨닫자 강렬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모르긴 해도 이중 상당수는 자신이 사는 배리어 안은 물론 온갖 위험이 가득한 외부 세계에서도 찾기 힘들지 모른다. 그것은 그가 들고 있는 작은 자루 중 하나에 적힌 이름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전설로 알려진 이름까지 있었다.
산삼!
달이 두 개가 되기 이전, 즉 휴먼력 이전의 먼 과거에도 그 가치를 따질 수 있는 희귀한 식물이었다는 것쯤은 성장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 인삼이나 산삼 같은 영약은 한참 유행하는 가상현실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올려주는 명약의 대명사로 쓰이니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어림잡아 이천 개 가까이 되는 크고 작은 주머니를 다 들어내고 나서야 상자의 내부를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플라튬!"
믿기지가 않아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다.
청자색으로 주기적인 발광을 하는 것을 보면 플라튬이 틀림없었다.
휴먼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물질 플라튬은 방호력은 물론 항상성 유지, 복원성까지 가진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질로, 그 사용처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플라튬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었다. 만드는 조건이 워낙 까다롭고 재료도 구하기 힘들었다. 또한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만 생산할 수 있는데 변수가 너무 많기에 성공률이 낮아 그 어느 유니온도 대량생산은 꿈도 꾸지 못하는 물질이었따.
그런 희귀한 물질로 코팅된 듯 청자색으로 빛났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는 내부 면은 외관의 칙칙함과는 대조적으로 이 상자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려 주었다.
설마 플라튬으로 내부 전체를 만들진 않았을 테니 코팅하거나 도금했을 텐데 그래도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절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아!'
어느새 정민의 눈에는 강렬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이런 것은 이 사회에 아무런 연고도 가지지 못한 보더러 정민에게 속하거나 선물로 주어질 가능성이 단 0.001%도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누군가 보냈을 편지 따위는 없었다. 그 많은 자루를 꼼꼼하게 살폈지만 메시지 비슷한 것조차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금속 상자와 각종 자루들로 가득한 방 안에서 정민은 궁금증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 이건 뭔가 연결하도록 만들어진 구멍인데?"
맞았다!
상자의 외부에는 분명 전기 코드를 꽂을 수 있게 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후다닥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그는 아까 자루들 틈에 있었던 이상한 모양의 코드 하나를 기억해 냈다. 이런 상자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여기에 코드를 연결하는 건가?"
상자의 옆면에 있는 구멍에 코드를 연결했는데 갑자기 진동음이 들렸다. 아직 콘센트에 연결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설마 자체 발전 시스템까지 갖춘 건가? 그렇다면 대단한 물건인데.'
지이잉.
낮은 전기음과 함께 상자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뭔가 구동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상자의 용도는 알 수 없었다.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그 어떤 변화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똑똑!
똑! 똑! 똑!
상자를 보며 온갖 생각을 하느라 넋을 잃었던 정민은 문득 들리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실내는 어두컴컴하게 변해 있었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으응? 벌써 밤이 된 거야?"
상자의 내부에 도금된 플라튬이 빛을 반사시켜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싶어 황급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보니 이웃에 사는 진수가 벌써 자신의 집 앞에까지 가 있었다. 농장에서 일하고 오는 길인지 먼지 가득한 옷과 검게 탄 얼굴에는 진한 피곤이 배어 있었다.
"형!"
"여어! 안에 있었구나."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소리를 못 들었나 봐요."
"네가 성년이 된 걸 축하해 주어야 할 거 같아서 들렀어. 오늘부로 어른이 된 걸 축하한다. 물론 녹록하지는 않겠지만."
오늘날 배리어 안 청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진수는 정민만큼이나 숫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배리어의 하류층을 형성하는 젊은이들은 현실에서 꿈을 잃고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대리 만족과 더불어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형, 저녁 같이 먹어요."
그 말에 진수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미안한데 꼭 할 일이 있어서. 아, 넌 가상현실 게임 안 하냐? 오늘 밤에 넥컴월에서 만든 비욘드BEYOND라는 새 게임이 정신으로 출시되는데……."
"비욘드요?"
"응, 이제까지 나온 가상현실 게임과는 비교를 거부한다는 극도의 리얼리티를 구현한 게임이지."
넥컴월의 이름은 들어봤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가상현실 게임 업체이면서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초거대기업이다. 당연히 유니온 따위를 초월할 정도의 자금력과 권력을 쥔 기업이었다.
비욘드라는 이름 역시 생소하지 않았다. 인터넷이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벌써 오래전부터 회자되는 새로운 게임의 이름이었다.
8년 전 모하비 사막의 지하에서 종말 시대에 만들어진 수천 대의 슈퍼컴이 발견되었다. 비록 유니온과의 인적 교류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이 일로 지구의 거의 모든 유니온에 거주하는 과학자들이 총동원되어 공동 연구를 한 바 있었다.
넥컴월은 그 엄청난 수의 슈퍼컴들을 사용하는 권리를 따냈고, 각 유니온들과 공동으로 투자하여 새로운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비욘드라는 게임이었다.
"물론 하고는 싶지만 돈이……."
"에휴! 그래, 돈이 문제지. 어지간히 비싸야지. 한 달 계정비만 해도 30만 원이나 하고, 캡슐은 보급형이 300만 원이나 하니……."
게임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은 피로함을 벗어버리고 밝게 빛났다. 게임이 현재의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한데 난 미리 정보를 찾아야 하거든. 아직 알려진 거라고는 현실과 거의 똑같다는 점밖에 없지만 그래도 작은 정보라도 찾아봐야지. 대신 이번 주말에 시간 되면 그때 잠깐 보자."
말은 이렇게 해도 주말에 그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꿈은 대다수의 젊은이들처럼 게임을 통해 돈을 벌거나 랭커가 되는 것이니 생활을 위해 일하러 가는 것을 제외한 시간은 게임에 매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비록 섭섭했지만 정민은 밝게 웃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몸이 좀 건강해져서 괜찮은 일자리만 찾는다면 진수와 마찬가지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네, 알았어요."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진수는 손을 한번 흔들고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젊은 그의 등이 유난히 굽어 보였다. 벌써부터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그 모습이 머지않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게임이 아니면 사회에서 아무런 존재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런 무기력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가기엔 너무 젊으니까. 그래서 몇 년을 모아야만 간신히 살 수 있는 그 비싼 가상현실 게임기를 사는 것이리라.
"비욘드라……!"
당장에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그를 자극했다. 휴먼 시대는 독자적인 기술로 자신만의 문명을 구축한 것이 아니다. 전 인류의 유산인 전자기술과 컴퓨터기술들을 바탕으로 그쪽 분야만 발달한 기형적인 문명이다.
다행히 3차 대전 전에 무선으로 전 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연결하는 기술이 개발된 이후였기에 전란을 피해 가장 안전한 장소에 보관되었던 인공지능 컴퓨터들의 도움을 받아 불안하게 일어선 문명인 것이다.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속칭 종말 시대로 불리는 서기 21세기 말에 의료 치료, 군사상의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알려진 가상현실 게임은 전쟁으로 한동안의 공백 기간-이 기간을 역사적으로 암흑 시간이라고 부른다-을 거쳐 휴먼력 15년경에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해 이미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다.
현실과 달리 누구든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싲가하는 가상현실 게임은 이동의 자유와 신분상승의 기회가 제한된 배리어에서 거의 평생을 생활해야 하는 인간들에게는 일종의 탈출구와 다름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고착화되는 유니온의 정체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그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런 이유로 유니온들은 가상현실 게임을 장려했고,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을 유니온에 환원하는 법과, 세금을 내고도 높은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들 때문에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오염된 환경 때문에 좁은 배리어 안에서 평생을 생활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경우 모든 것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현실의 폐쇄적인 체제와 배리어 밖의 위협 때문에 이전의 인류가 누렸던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인간 특유의 투쟁심, 권력욕, 명예욕, 성취욕 같은 수많은 욕망을 가상현실 게임에서 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구나 가상현실 게임에서 랭커가 되면 평범한 시민이라도 거주 지역이 바뀔 정도의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 유니온에서 가장 인기있는 방송이 바로 게임 관련 채널들이었다.
그 채널들을 통해 게임의 랭커들은 종말 시대의 연예인들에 갈음하는 존재이기에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들은 단번에 A나 S구역으로 거주지를 이동할 정도였다.
또한 가상현실 게임의 순기능 중 하나가 바로 유니온의 일관적이고 평준화된 교육의 틀에서 놓칠 수 있는 개인의 비밀스러운 능력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들로 유니온에서 장려하고 사람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것이다.
"제기랄!"
가상현실 게임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얼굴이 있다. 바로 그의 네 번째 양부모였다.
정민은 다섯 번이나 부양 가정이 바뀌었는데 그중 네 번째 가정을 얻은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부양가정의 양부가 바로 가상현실 게임기를 생산하던 세계적인 회사의 연구원이었다. 나름 천재적인 발상과 기술력을 가진 그는 젊은 나이에 수석 연구원이 될 정도로 전도가 양양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술에 너무나 자신했던 그는 승승장구했지만 대형 연구비가 들어간 몇 개의 연구 과제를 연속으로 실패해서 결국 권고사직을 강요받았다.
몇 번의 치명적인 연구 실패 경력 때문에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더 이상 돈벌이가 없어 거주 지역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생활 대책으로 정민의 부양을 맡았던 것이다.
정민은 삼 년 정도 그와 같이 살았지만 정작 그를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연구와 실험으로 바빠 지하 실험실에서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부부, 특히 양부는 자신의 개인적인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양비 외에도 정민 앞으로 나오는 식비 같은 국가 보조금을 상당 부분 횡령했다.
부부간에도 사이가 부척 나빠서 양모는 정민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을 물론 폭언과 폭력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기에 그 집에서 생활하는 것은 정말 지옥과도 같았다.
다행히 복지과 직원이 이런 정황을 눈치채고 정민을 다른 부양 가정으로 보냈지만 그 기억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한참 예민할 나이의 정민에게는 출생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부양 가정에 대한 불신감과 악감정을 만들어 결국 마지막 부양 가정에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가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가상현실 게임과 캡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알맞은 선물 상자의 내부 크기가 마치 전신형 캡슐과 비슷했던 것이다.
"설마……."
하지만 그 생각은 아무래도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실내를 자세하게 살펴보아도 전선과 연결되는 부분이 없었던 것이다.
머리와 연결되는 헤드기어 부분은 물론 제대로 누울 수 있는 장치도 없는데 무슨 게임 캡슐이란 말인가.
캡슐의 실내는 대부분 최대한 편안하도록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침대와, 뇌와 전기적으로 연결되는 접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뭐, 듣기로는 최상급의 경우 동화율을 높이기 위해 슈트로 된 것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형이었다.
그래도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그 형태와 크기만큼은 딱 캡슐이었다. 단지 실내가 바람이 부는 것처럼 텅 비어서 그렇지.
"후후, 그래도 한번 들어가서 누워볼까?"
어차피 용도를 모르니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정민은 상자의 실내로 들어가 반듯이 누웠다.
위이잉.
그 순간 뭔가 구동되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자동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일순 겁이 났지만 등에 닿은 플라튬 바닥에서 온기가 전해지는 것이 기분은 제법 근사했다.
편안하고 따듯한 무언가가 불안정한 그의 감정 상태를 안정시켜 주었다.
지이잉.
상자의 덮개가 완전히 덮이자 내부는 칠흑과 같은 어둠이 장악했다.
치익. 징.
알 수 없는 희미한 소음들이 연속해서 들렸다.
'최소한 그냥 상자는 아니란 얘기네.'
이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정민은 죽는 것 자체를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물론 하르크 따위에게 먹혀 참혹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긴 그가 잘못되어 당장 죽는다 해도 뭐, 특별히 아쉬운 것은 없었다. 어차피 그의 미래는 매일 보는 이웃들이 간 길을 카피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파밧!
'아, 눈부셔.'
어둠으로 가득했던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리고 홀연히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빛무리였다. 빛의 입자들이 모여 영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허억! 이건 홀로그램?'
손을 내밀어 만져보니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 입체 영상 프로그램인 홀로그램이 틀림없었다.
'누가 나에게……?'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선물을 보내며 아무런 메시지가 없어 안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눈의 초점을 홀로그램에 맞추자 그의 앞에 처음 보는 듯하면서도 조금은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칼과 해골처럼 마른 얼굴 그리고 깊은 눈과 강렬한 안광이 아주 인상적으로 보이는 오십 대 사내였다.
그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짓는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떠올라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는 단지 거기에 서서 정민을 향해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연민, 동정, 아니면 미안함.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듯 복잡한 시선으로 정민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왠지 익숙하면서도 거부감마저 함께 드는 묘한 사내의 영상은 이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힘없는 음성이었다.
-벌써 성인이 되었구나! 변명 같지만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 내 평생 살면서 가장 미안한 것이 바로 너였다. 친부모 못지않게 사랑과 관심으로 키워야 할 너를 연구비를 대 주는 존재로 이용하고 만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지.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내 연구를 향한 삐뚤어진 열정은 그 당시 내 양심을 가릴 정도로 뜨거웠단다.
"양아버지?"
이제야 정민은 그가 누군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네 번째 양아버지였던 것이다. 청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직도 증오하는 그 존재가 바로 홀로그램의 주인공이었다니.
-그렇게 너를 빌미로 유니온에서 받은 돈으로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결혼 생활 불성실이란 이유로 모든 재산을 다 뺏기고 이혼까지 당했다. 더구나 예전 연구소에서 플라튬을 불법으로 빼낸 것이 밝혀져 배링 ㅓ밖으로 추방당했지만 난 연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모든 연구 재료들이 남아 있었기에 배리어 바끄이 한 건물 지하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같이 사는 동안에도 늘 연구로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던 그였는데 이혼당하고 배리어 밖으로 쫓겨나서도 연구를 지속했다니 증오심과는 별개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안면이 있던 몇 명의 아우터들에게 도움을 받아 결국 내가 연구하던 최상급의 게임 캡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인륜을 저버린 탓인지 완성을 앞두고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아마도 죽어가면서 이 녹음을 남긴 것 같았다. 그렇게 미워했던 대상이지만 왠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가 살면서 미안했던 사람은 둘이다. 하나는 전 아내. 그녀에게는 많지 않지만 집을 남겨 주었으니 그걸로 미안함을 갚았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인 너에게는 내가 가면서 줄 것이 없구나. 내가 더 살 수 있다면 이 캡슐 제조 기술로 엄청난 돈을 벌어 미안함을 갚을 수 있겠건만, 너무나 아쉽구나.
그의 처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정민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별로 정이 있는 성격도 아닌데 한 사람의 최후를 보는 것은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네게 줄 것은 내가 평생을 다 바쳐 만든 이 캡슐뿐. 너에게 이 캡슐을 남긴다.
"치잇! 그래도 양심은 있었네."
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묘하게 감동한 탓에 눈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이제 정민도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평생 한길로 매진한 양부의 인생과 그 쓸쓸한 최후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 필생의 역작인 이 캡슐의 이름은 벨이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내장한 벨은 다른 캡슐들과 달리 뇌파만을 연결시키는 대신 자장이 흐르는 공간에 몸을 띄워놓고 전신을 전자기파로 연결해 가상현실에서의 움직임과 똑같이 움직이도록 설계했다. 즉, 가상현실에서 몸을 움직여 얻은 능력을 현실에도 어느 정도는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캡슐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뇌파를 이용해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하는 경우 가상현실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든 간에 접속을 해제하고 나서는 현실의 육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뇌파뿐 아니라 전신의 신경은 물론 근육까지 똑같이 움직인다면 가상현실에서 했던 행동이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캡슐의 혁명이라고 할 만했다.
-네게 이 벨을 남겨주기 위해 예전 인맥을 통해 널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았더니 넌 완전히 무능력자로 추방 직전의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구나. 더구나 당시 성장기였던 네게 제대로 먹이질 않아 신체조건이 최악으로 변했다는 말까지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누구를 통해 자신을 알아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쏟은 정성이 마음에 느껴졌다.
-벨로 네가 잃었던 것들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난 한때 코원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유니온에서 최고의 캡슐 연구원이었다. 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캡슐이다. 자동 발전 시스템으로 정전에 대비했고, 자동 공기 순환 장치를 통해 최적의 환경을 만들었다. 거기다 게임하면서 게이머가 식사할 경우 그 상태에서 필요한 영양분들을 자동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갖추었다. 수면할 경우에는 뇌파를 최단 시간 내에 베타파로 만들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정민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너무 놀라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게이머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캡슐 밖을 나올 일이 전혀 없다. 그야말로 24시간 풀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다.
-이번에 넥컴월이 출시하는 비욘드라는 게임이 있다. 다른 게임과 달리 최고 사양의 인공지능 컴퓨터 두 대를 메인으로 하고 수천 대의 슈퍼컴을 서브로 해서 만든 최고의 가상현실 게임이다. 리얼리티를 최상으로 구현한 그곳이라면 우리 부부가 망쳐 놓았던 너를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한 식재료들과 약초 그리고 인공지능을 가진 벨이 너를 도울 것이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제까지 얼마나 그를 증오해 왔던가. 한데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 너무나 귀한 것을 자신에게 남겼다. 그야말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이 아닌가.
-행여나 걱정이 돼서 부언하는 거지만 너에게 강력한 힘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이 캡슐의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 된다. 이 기술이 알려지면 실로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을 제대로 모르는 너로서는 넥컴월 같은 거대 회사들이나 유니온들을 상대로 그 어떤 이득을 얻어 내기는커녕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될 것이 분명하다. 힘없는 자가 가진 보물은 보물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는 흉기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래서 일부러 외부를 볼품없이 만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던 양부는 그를 위해 마지막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정민은 쏟아지는 눈물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 중 하나로 그를 증오했던 마음을 녹여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다. 날 돌봐주고 도와준 아우터들을 네가 힘을 가지게 되면 베리어 안으로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도 보답을 하고 싶은데 내가 아무런 힘이 없구나. 언젠가 내 무덤을 보러 오면서 그들을 챙겨다오. 벨이 위치를 알려 줄 것이다. 널 한 번 보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움직일 힘이 없구나.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사랑한다, 아들아!
점점 약해지던 목소리가 결국 마지막 말에 조금 힘이 들어가더니 다 탄 불꽃처럼 사그라졌다.
정민은 만감이 교차했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몇 년을 품어 온 뿌리 깊은 증오가 한순간에 녹아버리는 근심한 감정 변화를 겪은 것이다.
지금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극심한 감정의 혼란에서 오는 멍한 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물론 이전에 기거했던 부양가정들도 좋지는 않았다. 자세한 것이야 모르겠지만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부양가정이 교체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여서 아무래도 더 크게 느꼈을지 모른다.
정민은 한참 후에야 감정을 가다듬었다.
말끔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왔던 사람에 대한 불신감의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사라진 것이다.
양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왔는지는 정말 몰랐다. 사실 그로서는 얼굴도 몇 번 본 적이 없었고, 이야기를 해 본 적은 더욱 적었다. 그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살아왔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정민은 습관처럼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상자, 아니 캡슐의 뚜껑을 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는데 이 정도로 용서하진 않아. 만약 이 캡슐이 허섭스레기라면 두고두고 증오하겠어. 당신 말대로 비욘드를 통해 내가 이 나약한 모습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때 가서 용서하겠어."
눈물을 닦으며 정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