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그들의 마지막 앨범 (4)
“어… 제가 뭐라고 이렇게 송별회를 열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요. 감사합니다.”
“재미없어요!”
“재미없어도 좀 참아.”
“우우!”
하하하.
서지영 덕분에 송별회의 시작이 무척 밝았다.
물론 처음부터 슬픈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가 업계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서를 이동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송별회라고 슬픔이 가득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송별회에 참석한 인원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꽤 많은 인원이 송별회에 참석해 줬는데 의외로 내가 인복이 있었던 것 같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역시 스타즈 애들이었다. 애들과는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건 우리 매니저팀이었다.
지금은 기획 부서로 옮긴 이진성 실장과 신입 개발부서로 옮긴 남진수 실장, 마지막으로 안혜지까지.
이외에도 평소 친분이 있던 코디 둘과 의상 팀 한 명. 그리고 민서희 팀장과 김동현 작곡가도 참석해줬다.
도합 열다섯 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오늘 송별회는 법인 카드로 긁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 내 개인 카드였다면 얼마가 나왔을까.
“먼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제 개인적인 욕심이 더 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할 거면 가질 말았어야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옳소!”
이나라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스타즈 애들도 이나라의 말에 웃으며 동조했다.
갑자기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음… 그럼, 말을 바꾸겠습니다. 저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합니다. 응원해주실 거죠?”
싫어요!
하하하.
눈앞에 있는 민서희 팀장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차라리 그게 낫네요.”
“그런가요? 그럼 더 뻔뻔해져야겠네요. 말이 길었죠? 모쪼록 오늘 즐겁게 먹다가 헤어집시다. 이만 마칠게요. 여러분들 덕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우!
짝짝짝!
박수 소리와 야유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야유는 스타즈 애들이었고 스태프들은 웃으며 박수를 쳐줬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스타즈 애들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활동하는 내내,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내 의사를 존중해줬고 응원해줬다.
섭섭한 티는 지속해서 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건배사나 한번 해라. 현진아.”
“건배사요?”
“그래.”
여기 있는 인원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이진성 실장이 내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김동현 작곡가가 제일 높지만, 위치상으로는 이진성 실장이 제일 위였다.
이진성 실장이 송별회에 참석하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연 건데, 그건 오늘의 주인공은 나였기에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있는 상태였다.
이진성 실장에게 대답하려는 찰나에 유미소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거 제가 하면 안 돼요?”
“네가?”
“네! 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유미소가 이진성 실장에게 열렬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음흉하게 나를 쳐다보는 걸 보니 조금 불길한데.
이진성 실장이 잠깐 고민하다가 내게 물었다.
“그래? 현진아. 어떻게 할래?”
“건배사가 뭐라고요. 미소가 해.”
“네!”
유미소가 밝게 대답한 뒤에 자신의 앞에 있던 잔을 들었다.
“아아, 흠흠. 모두 잔을 들어주시고요.”
유미소의 말에 모두가 잔을 들었다.
린을 제외하고는 전에 든 액체는 다 술이었다.
린이 혼자 술이 아닌 걸 매우 아쉬워했으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는 말이 있듯 여긴 한국이니까 미성년자는 어쩔 수 없었다.
뭐, 아마 언니들이 몰래몰래 주지 않을까 싶기도….
“다들 긴 거 싫어하니 짧고 굵게 가겠습니다.”
유미소가 말을 하면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망하고 다시 오면 안 받아줘! 하지만 망했으면 좋겠어! 망해라, 김현진!”
푸하하.
그럼 그렇지.
유미소의 말에 모두 박장대소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모호한 표정을 유지했다.
나만 빼고 즐거운 송별회네.
오히려 이런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내게는 훨씬 좋고 마음 편했다.
아마 애들이 이런 분위기를 주도 해주는 건 나를 배려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유미소의 말에 어이없고 벙찐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유미소가 벙찐 나를 뒤로하고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망해라!’라고 외치면 ‘김현진!’이라고 외쳐주세요!”
유미소가 말을 끝내고 잔을 번쩍 들었다.
“망해라!”
“김현진!”
참 다이나믹한 송별회가 될 것 같다.
* * *
“나는. 이럴 줄. 알았어.”
“언제부터?”
“나한테. 연기. 가르쳐줄 때부터.”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자 애들이 하나둘 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테이블의 주제가 ‘김현진은 왜 떠나게 되었는가’였는데 그 주제에 린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린의 말에 박혜연이 생각을 되짚어보는 듯 허공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때가 벌써 1년 전인가? 그치?”
“아니. 더 됐어. 1년 반.”
“벌써 그렇게 됐네… 그러고 보니 그때 김민재 선배님 표절 터졌을 때 아닌가?”
잠자코 린과 박혜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영이 끼어들었다.
“선배님은 무슨. 은퇴했잖아.”
“그래도….”
박혜연의 태도에 서지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조금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너는 그렇게 당해놓고 선배님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와!? 정신 안 차릴래!?”
“아, 알았어! 그 새끼! 됐지!”
박혜연이 박력 있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이게 술의 힘인가.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신선했다.
아직 내숭이 남아 있던 거였구나.
“오올. 우리 혜연이 많이 컸네. 술 좀 들어가서 그런가?”
“시끄럿!”
서지영의 말에 박혜연이 나를 힐끔 보더니 화를 냈다. 귀가 빨개진 모습을 보니 부끄러운 듯했다.
하하 호호 웃으면서 지난 과거를 추억하는 모습에 나도 아련해졌다.
서지영은 이게 끝이 아닌 듯 다시 또 예전 일을 들춰냈다.
“가만… 우리 또 사건 사고 뭐 있었지?”
“미소 스캔들?”
“아, 맞아! 너 연락해?”
서지영의 혼잣말에 신희진이 툭 던지자 나라가 유미소에게 물었다.
“안 한다고! 그 오빠랑 그때 엮이고 활동하면서 말 한번 다신 안 섞는구먼! 억울해! 억울하다고!”
유미소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미소가 그때 참 힘들어했었다.
그리고 나도 그때 참 많이 당황했었다.
예정에 없던 스캔들이었으니까.
“희진이도 애먹었잖아. 그때 루머 유포자가 동기라고 했지?”
“응. 좀 지나고 나서 개인적으로 연락 왔었어. 루머 유포자가 아니구 사진 유포자.”
“그게 그거 아냐?”
“그때 글 내용에는 루머는 없었어. 안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문제였지.”
“아아….”
신희진의 루머는 크게 터질 일이 아니었는데 사건이 커졌던 케이스였다.
어떻게 수습이 잘 되어서 반등의 기회가 됐었지만, 그때를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었다.
연예인들은 진짜 말도 안 되게 루머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우리 뭐 있을 때마다 오빠가 중심에 있었던 거 같아. 그래서 오빠가 리더로서 참 고마워.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도 신세졌었지.”
“무슨 일 있었어?”
이나라가 아련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하자 신희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애들은 모르는 일인가?
“나 슬럼프일 때 정말 잘 도와줬거든. 진짜 고마워요. 오빠.”
“뭘….”
이나라의 말에 낯이 간지러워 코를 긁었다.
그런데 옆에서 졸고 있던 유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두요!”
“유코는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때 몰라? 우리 첫 콘 직전에 유코 우울증 있었잖아. 같은 멤버에 어쩜 이리 관심이 없을까.”
“엑? 진짜? 난 몰랐는데.”
“으그. 둔하긴.”
“히히….”
술에 취해 반쯤 해롱거리고 있는 유코를 놔두고 서지영과 유미소가 열띤 이야기를 나눴다.
유코가 술이 생각보다 많이 약하네.
애들과 이렇게 다 같이 술자리를 가진 건 처음이라 몰랐다.
“오빠. 근데… 꼭 가야만 해요?”
이번엔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신희진이 울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음… 저런 표정으로 말하니 더욱 착잡했다.
내가 떠나게 된 배경은 욕심도 있지만 신희진이라는 이유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반칙인데.
아무래도 연기를 하는 애라 그런지 표현이 너무 풍부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 숙소에서 이야기했잖아.”
“아쉬우니까 그렇지이…”
이나라가 짐짓 정색한 표정으로 신희진에게 말했다.
그러자 신희진이 귀엽게 칭얼거렸다.
정말 이나라가 아니었으면 애들이랑 아마 이렇게 좋게 송별회를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아마도 싸우지 않았을까?
“그건 인제 그만 이야기하자. 불편해지잖아.”
“힝.”
이나라의 단호함에 신희진의 표정이 이내 시무룩하게 변했다.
감정변화가 꽤 잦은 걸 보니 술기운이 좀 올라온 듯했다.
신희진과 아무래도 활동하는 시간이 가장 많았고, 회식 자리 또한 같이 가장 많이 참석해서 그런지 얘의 술버릇이나 습관 행동을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간의 경험상 지금 상태는 딱 맛이 가기 직전 상태였다.
이럴 땐 잠깐 놔두면 알아서 회복하고는 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네~”
애들에게 말하고는 잠깐 바깥으로 나왔다.
사실 화장실이 급한 건 아니었다.
단지 신희진의 말이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고 다시 들어가야겠다.
갑자기 담배가 생각나는데 담배나 사러 갈까.
“얍!”
“어?”
“여기서 쭈그려 앉아 뭐해요?”
딴 생각하느라 인기척을 못 느꼈다.
어느새 내 등 뒤로 이나라가 다가와 있었다.
* * *
“왜 나왔어?”
“그냥요.”
“정말?”
“아니요. 할 말 있어서 나왔죠.”
이나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금 취한 애들과 달리 이나라는 멀쩡한 것 같았다.
미래의 주당이 여기 있네.
“근데 내가 나가니까 바로 따라 나온 거 보니까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나 본데….”
“당연하죠. 늦게 들어가면 구박할 애가 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응?”
이나라의 말을 들으면서 뭔가 이상했다.
뭐지?
그러나 그게 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이나라가 내게 질문해왔다.
“오빠 마음 바뀔 일은 없죠?”
“…응.”
“그럼 다음 질문.”
“음.”
아까부터 계속 나왔던 질문이니 이걸 물으러 온 건 아닐 거고.
“희진이… 알고 있죠?”
“으응?”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에 당황했다.
이게 본론이었구나.
“알고 있었네. 그럼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것도 희진이 생각해서예요? 발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으음….”
내 표정을 읽고는 이나라가 훅훅 들어왔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얘도 쓸데없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니까.
“흐응… 그렇구나. 그럼 쫌 납득 되네. 오케이, 오케이.”
내가 아무 말 않자 이나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다.
“할 말은 다 끝났어? 들어갈래?”
“네.”
이나라가 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티가 난다니까.
이나라와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서지영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디 갔었어요?”
“잠깐 바람 쐬러 나갔다 왔어.”
“이거 이거… 둘이 같이 들어온 게 수상한데….”
서지영이 눈을 흘기며 나를 쳐다봤다.
나랑 같이 들어온 이나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어어? 진짜 뭐 있나?”
“망상도 그쯤이면 병이야.”
정작 나랑 뭐가 있는 분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어느새 술은 좀 깼나 보다.
“자자! 아까 말했던 것처럼 다들 해롱해롱되기 전에 사진이나 한 장 남기죠!”
“뭔 말이야?”
“정신 좀 말짱해 있을 때 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요. 나중에는 이런 거 못 찍잖아요.”
서지영이 내 팔을 붙잡고 끌고 갔다.
“희연 언니! 사진 좀 하나 찍어주세요!”
“어~”
서지영이 근처에 있던 코디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애들도 내 주위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좀 가까이 좀 와봐요. 언제 걸 그룹이랑 이렇게 가까이서 찍어 봐요? 영광인 줄 아세요. 이런 기회 흔치 않다구요.”
“응? 영화나 드라마 현장 가면 여배우들이랑 이런 사진 찍기 쉬울 거 같은데….”
서지영의 말에 내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좀 더 밀착하려던 찰나에.
“억.”
양옆에서 내 옆구리를 찔러와 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내 오른쪽은 신희진이었고 왼쪽은 이나라였다.
“맞을 짓을 골라 해요. 꼭.”
내 뒤에 있던 유미소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던 코디가 웃으며 카메라를 들었다.
“자,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찰칵!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