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그들의 마지막 앨범 (3)
내가 꺼내든 동화라는 컨셉에 다들 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주제와 컨셉이 정해지자 앨범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고맙게도 다들 의욕적으로 따라와 줬다.
초기와 다르게 매뉴얼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서 이제는 착착 알아서 진행되었다.
게다가 더 고무적인 건 서지영과 박혜연의 작곡 실력이 예상외로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둘이 그간의 공부가 헛된 게 아닌지 작업실에서 완성된 곡을 들었을 때 꽤 충격을 받았다.
생각보다 퀄리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동화 속 환상’ 앨범은 AR팀에서 고르고 고른 곡 3개와 서지영과 박혜연 자작곡 각 1개씩이 수록되게 되었다.
지금은 그 정해진 곡들을 녹음하는 중이었다.
- 다시 또다시 만나.
유코가 노래를 끝내고 부스 너머에서 우리를 쳐다봤다.
수록곡인 Rewind에서 유코가 자신이 부른 파트가 조금 아쉽다고 해서 다시 녹음하는 중이었다.
“어떠세요? 저는 지금이 더 좋은 거 같은데.”
“저도 지금 느낌이 딱 좋은 거 같아요.”
김동현 작곡가가 우리를 보며 묻자 민서희 팀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내 우리의 긍정적인 의사를 본 김동현 작곡가가 마이크를 쥐고 부스 안에 있는 유코에게 말했다.
“유코야. 우리는 이게 더 나은 거 같은데. 너는 어때?”
- 저도 이게 더 나은 거 가타요.
“그래? 그럼 나와도 돼.”
- 네.
김동현 작곡가의 말에 유코가 밝은 얼굴로 부스에서 나왔다.
“그럼 이제 야수와 일곱 공주님만 남았네요?”
“네. 그러네요.”
민서희 팀장의 말에 오늘 녹음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애들과의 작업도 작업이었지만 이들과의 작업도 꽤 즐거웠다.
오늘 녹음하기 전까지만 해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괜찮게 녹음 작업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민서희 팀장이 언급한 야수와 일곱 공주님의 경우엔 수록곡이었는데,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와 스타즈에 관한 거였다.
타이틀 곡도 이미 녹음을 끝냈고, 이제 남은 건 이거 단 하나뿐이다.
“오빠! 삼촌! 언니! 밥 좀 먹고 하면 안 돼요? 저 진짜 배고픈데.”
신희진이 울상인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저녁 먹고 들어오면 시간이 조금 애매해질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곡 하나 남아서 마저 하는 게 낫지 않겠니?”
김동현 작곡가도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민되는 표정으로 애들에게 말했다.
“배고파서 노래 부를 기력이 없어요….”
“저두요.”
신희진만 배고픈 게 아니었는지 유미소와 린도 힘든 티를 팍팍 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민서희 팀장이 우리에게 말했다.
“오늘 할 만큼 한 거 같은데 나중에 날짜 다시 한번 잡죠.”
“음… 그럴까요? 너네도 그게 낫겠어?”
“네!”
오늘 녹음이 종료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애들이 기운이 확 살아났다.
직장인에게 최고의 보약은 퇴근이라더니.
그래도 표정에 피로감이 짙은 건 여전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계속 녹음을 했으니 오늘 여덟 시간을 넘게 녹음을 한 거였다. 그러니 애들이 피로를 호소하는 게 이해가 됐다.
나도 오늘 녹음이 끝이라는 말에 긴장이 풀렸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진 걸 보니 많이 긴장했었나 싶었다.
그렇게 조금씩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 * *
“비결이 뭐예요?”
“그냥 의욕적으로 일하니까 되더라고요.”
와이드 매니저 박형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스타즈의 음악 방송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매니저 몇몇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중이었다.
인연을 맺었던 매니저 중 다시 만난 매니저는 몇 안 됐는데 박형배는 그중 하나였다.
“실장님이 더러워도 팀장까지는 꾹 참으라는데… 미치겠네요. 저도 김 팀장님처럼 빨리 올라갔으면… 하긴. 제 능력 부족이죠.”
박형배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내게 하소연했다.
가수 음악 방송 활동 기간에는 피로에서 벗어날 매니저는 없었다.
나도 박형배처럼 눈 밑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아니에요. 저는 뭐 운도 따랐죠….”
“에이, 운만 따른다고 되나요. 그럼 이제 가수들은 아예 안 맡고 배우만 맡으시는 건가요?”
“네. 그럴 것 같아요.”
박형배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계속 쭉 하시는 게 낫지 않나요? 제2의 정인수 대표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남돌은 정인수. 여돌은 김현진!”
박형배의 말에 괜히 화끈거려 얼굴이 붉어졌다.
“비교가 안 되죠. 그분은 밑바닥부터 거기까지 올라간 거고 저는 숟가락 얹고 버스 탄 거죠.”
“버스를 타다뇨. 좋은 차에 좋은 운전자가 있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자부심 느끼셔도 된다고 봐요. 계속 그러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나를 좋게 봐주는 박형배에게 괜히 고마웠다.
순수하게 호의에서 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배 씨 애들은 이제 좀 괜찮나요? 예전엔 말 안 듣는다고 엄청 힘들어하셨잖아요.”
“뭐… 시간이 약이란 게 틀린 말이 아닌가 봐요. 1년 정도 지나니까 서로 좀 편해지니 그때는 좀 듣더라고요. 물론 남자 놈들이라 보는 맛은 없어서 힘들긴 해요.”
“하하하.”
박형배의 말에 내가 남자 아이돌을 맡는 걸 생각해봤다.
음, 남돌이었다면 아무래도 지금만큼의 애정을 쏟기엔 힘들지 않았을까….
- 네! 점수 합산하겠습니다. 이번 1위는….
“순위 집계 들어가나 보네요.”
“아.”
박형배의 말에 TV로 시선을 줬다.
긴장된 얼굴의 1위 후보 셋이 화면에 비췄다.
물론 그 셋에는 우리 스타즈 애들도 들어가 있었다.
- 네! 이번 1위는 스타즈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3주 연속이네요.”
“감사합니다.”
박형배가 웃으며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이번 앨범도 잘 나갔다.
3주 연속 1위라는 성적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스타즈는 이제 앨범 초동 15만 장이 기본이 된 그룹이 되었다.
흔히들 말하는 공룡 그룹이다.
이제는 정말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그룹이 아니었다.
“확실히 헥사곤이 노래 퀄리티가 좋네요. 연달아 히트시키는 노래들이 죄다 듣기 좋으니까요. 업계 소문에 의하면 AR팀이 그렇게 빵빵 하다던데… 맞나요?”
“하하. 비밀입니다.”
박형배에게 웃으며 말했다.
업계 비밀까진 아니었지만, 굳이 회사 정보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시선을 돌려 한창 1위 소감을 말하고 있는 스타즈를 봤다.
- 마지막으로…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응원해주었던 김 팀장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근데… 우리 버리고 잘 먹고 잘사나 두고 볼 거야!
- 진짜로!
“어?”
아이고. 이건 방송 사곤데?
활동 내내 얌전하다 싶더니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MC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 게 보였다.
-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영 씨랑 스타즈 분들이 많이 섭섭했나 봐요. 김 팀장님? 그러시면 안 돼요? 자,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오늘도 listen Music! 다음 주에 봐요! 안녕!
서지영의 돌발행동을 MC들이 급히 수습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무대에서 스타즈의 이번 타이틀 곡 ‘동화 속 7공주’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환장하겠네.”
“끅끅… 그러길래 왜 버리고 가셔서….”
“아니에요. 진짜… 에휴….”
남 일이라고 열심히 웃는 박형배가 얄미웠다.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한참을 웃던 박형배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또 웃으면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네. 형배 씨도요. 고생하세요.”
박형배와 악수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잠깐 복도에서 기다리자 어느새 수상 무대가 끝나고 안혜지와 애들이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거기서 웃으면서 들어오는 서지영이 제일 눈에 띄었다.
“서지영!”
“메롱!”
서지영의 행동에 모두가 웃었다.
아이고, 머리야.
* * *
“큭큭… 잘 먹고 잘살아야겠어. 김 팀장.”
“대표님…”
“왜? 나쁜 표현은 아니지 않나.”
정인수 대표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백번은 내쉬었다.
서지영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기사도 대문짝만 하게 났다.
그녀들의 ‘김 팀장은 누구?’라는 타이틀이었는데 지금 떠올려 봐도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래. 생각은 변함이 없고?”
“네.”
내 대답을 들은 정인수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과 같이 활동하면 할수록 진해지는 감정. 그리고 나의 존재의의가 희미해져 가는 걸 물씬 느꼈기에 생각은 확고했다.
“그래. 그럼 송별회는 언제 하기로 했나?”
“오늘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
정인수 대표가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확실히 서두른 감도 없잖아 있었다.
당장 어제부로 음악 방송 활동이 끝났는데 다음 날 바로 송별회를 여는 거였으니까.
“빠르게 하는 게 서로를 위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야무야 조금씩 미루면 저도 계속 흔들릴 거고요.”
“그렇게 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면 뭐….”
정인수 대표가 피식 웃었다.
“근데… 이제 전 바로 부서 이동 후 지금 있는 배우들 위주로 활동하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선구안이 좋으니까 일단 쉬고 있는 배우들 작품부터 선택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음… 알겠습니다.”
정인수 대표의 말에 대답하면서 잠시 생각해봤다.
우리 회사 배우라고 해봤자 세 명이다.
근데 그 세 명 다 지금… 쉬고 있구나.
“예진이는 네가 살살 꼬시면 넘어갈 거고… 승기도 잔뜩 겁먹고 작품 선정 안 하고 있고… 안재성도 쉬고 있다며?”
“네.”
“다시 또 일거리 폭탄이겠지만 잘 해봐.”
“알겠습니다.”
정인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바라봤다. 내게 더 말할 게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배우 영입도 이제 네가 할 수 있으면 적극적으로 해보고.”
“제가요?”
“그래. F/A로 풀리는 배우들 있잖아. 평소 이 사람은 내가 메이킹 잘하면 될 것 같다 하는 사람은 없었나?”
“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배우 영입이라. 누가 좋을까.
근데 정말 내 입맛대로 해도 되는 건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정인수 대표의 과도한 신뢰가 부담됐다.
“그… 대표님.”
“뭐?”
내가 어물쩍거리며 부르자 정인수 대표가 표리부동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를 이렇게 믿고 밀어주시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말 안 했나?”
“재밌어서…라고 하셨죠.”
내 대답에 정인수 대표가 유쾌한 표정을 짓더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게 다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무어라 더 말하려 하자 정인수 대표가 손을 들더니 내 말을 끊었다.
“이래 봬도 난 지금, 이 업계에서 이룰 거 다 이뤘어. 정상을 한번 밟으니까 삶이 조금 무미건조해지더라고.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물론 네가 지금 정상을 밟은 건 아니지. 내가 에베레스트면 너는 한라산 정도라고 할까?”
정인수 대표가 웃으며 비유했다.
확실히 나와 그의 차이는 그만큼의 차이다.
“근데 살펴보니까 너는 다른 쪽에 더 재능이 있는 거 같아. 그럼 그 재능을 내가 키워주면 얘가 내 눈높이까지 올라올까? 궁금하더라고. 처음엔 무슨 깡으로 그러는지 궁금해서 지켜봤지. 그런데 성과도 괜찮잖아? 그래서 더 키워 보는 거지.”
“…….”
지금 이런 자리까지 오게 된 건 회귀로 인한 정보가 가장 컸겠지만 내 태도를 바꾼 것도 한몫한 것 같다.
예전과 다르게 지금의 나는 도전, 또 도전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내게 정인수 대표가 싱긋 웃었다.
“이제 답변이 됐나? 지금처럼만 해. 계속 밀어줄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