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그들의 마지막 앨범 (1)
“이상이 발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굴렀는데 저런 놈은 처음 봤어.”
“그렇습니까?”
“이 바닥에서 여자에 미친놈이 드문 건 아니야. 얘는 좀 너무 나갔네.”
정인수 대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장승훈이 보기 힘든 케이스긴 했다.
신인배우도 아니고 인지도 빵빵한 배우가 저렇게 미친 듯이 행동한다는 건 ‘나 이제 배우 안 하겠다’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녹음한 다음에 쥐고 흔든 건 잘했어. 그런 건 언제나 쓸모가 있거든.”
“네. 감사합니다.”
쥐고 흔들려는 의도보다는 보호 차원에서 했던 행동이었는데 이게 무기가 될 줄은 몰랐다.
이래서 다들 녹음 녹음하는 건가 보다.
“장승훈 소속사에는 내가 따로 연락하지. 배우 소속사라 우리가 크게 양보를 받아야 할 건 없을 거 같은데… 뭐 이런 건 나중에 써먹을 순간이 분명 오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런 게 쌓여서 회사 간 양보를 받아내는 건가.
좋은 걸 배웠다.
정인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 뒤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발리에 가서 생각은 좀 정리해봤나?”
“네.”
“오? 그래? 벌써 정리가 끝났어? 난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내가 바로 대답하자 정인수 대표가 놀라워했다.
이게 놀라워서 할만한 일인가?
하긴, 그간 내가 스타즈에 관한 건 너무 확고하게 말했었으니까.
지금 정인수 대표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그래. 그럼 정리한 생각이 뭔지 들어 볼까?”
“그전에… 회사에서 정한 스타즈 하반기 계획을 알 수 있을까요?”
“뭐 별거 있나. 이제 미니 앨범 하나 들어가고 활동 좀 하고 국내 콘서트 돌리고 내년에 해외 투어 돌려야지.”
정인수 대표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내가 생각한 플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미니 앨범까지만 애들과 같이 활동을 하겠습니다.”
“호오. 그렇게 마음이 변한 이유는?”
“이유는 이전에 정인수 대표님이 저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애들을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를 더 보고 싶었습니다.”
“위?”
정인수 대표 입술이 재밌다는 듯 씰룩거렸다.
처음 1년을 돌아왔을 땐 애들을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생각만 했다.
그렇게 애들을 살리고자 발버둥 치다 보니까 자꾸 변하는 내 위치가 신경 쓰였고, 이제는 그 위가 보고 싶어졌다.
단 1년 만에 팀장 자리까지 올라왔고, 이제는 그 성과로 인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됐다.
욕심이 안 날 수가 있나.
“네. 배우 파트를 늘린다고 저에게 배우 파트를 맡아 볼 생각 없냐고 말씀하셨죠.”
“정말 그게 단가?”
“…네.”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도, 그 아이를 위해서도.
“그래?”
“네.”
정인수 대표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재차 물었다.
“좋아.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애들한테는 말은 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담당이랑 헤어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네….”
막상 헤어진다는 이야기를 남의 입에서 들으니까 뒤숭숭했다.
물론 아예 연락을 안 한 거나 볼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같이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컸다.
“처음엔 조금 뒤숭숭하고 힘들 거야.”
“네. 조언 감사합니다.”
“가봐.”
정인수 대표의 축객령에 고개를 꾸벅 인사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이제 남은 건 애들에게 알리는 것뿐.
늦게 이야기 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기에 속전속결로 가야겠다.
* * *
“안!!!돼!!!”
어우, 귀 아파라.
서지영의 귀 찢는듯한 샤우팅에 귀가 얼얼했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이나라가 징징대는 서지영의 입을 손으로 가리더니 도끼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인지! 육하원칙으로 저희를 설득시켜보세요.”
이나라가 상당히 뿔이 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육하원칙이라…
이나라 옆으로 애들이 줄지어 있는데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나마 먼저 이야기를 들었던 신희진의 표정이 얌전한 게 다행이랄까.
“나 김현진은 이번 미니앨범 이후로 스타즈 활동에 관하여 손을 뗄 것 같습니다.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야.”
“오빠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요?”
박혜연이 팔짱을 낀 채로 불만을 토해냈다.
박혜연의 말은 내게 참 고마운 말이었다.
나를 그만큼 믿어주고 신뢰해주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말해주는 건 정말 고마운데….”
쿵!
유미소가 양손으로 책상을 쿵! 하고 치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 포스에 조금 움찔했다.
“배신자.”
“킁….”
난관을 헤쳐나가기가 쉽지가 않았다.
짝! 짝!
“조용! 조용! 오빠 하는 이야기마저 들어 보자.”
이나라가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해줬다.
“음… 고마워.”
“이게 고마워할 일이에요!?”
서슬 퍼런 이나라의 목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이나라가 화내는 걸 보니까 조금 무서웠다.
평소 화 안 내던 친구가 화내면 무섭다더라니.
애들의 시선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냥 너희가 너무 커버려서 내가 할 게 없다는 게 내 입장이야. 내가 발전할 길이 없는 것 같더라. 더욱이 너희 분야인 가수, 아이돌은 내가 공부했던 분야가 아니기도 해서 더 그렇더라.”
“음….”
내 말에 애들이 침음을 삼켰다.
그 와중에 유미소가 내게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요?”
“지금까지는 솔직히 운이었어. 그래서 저번 Hurricane은 민 팀장님한테 부탁한 거고.”
회귀해서 정보를 잔뜩 얻은 거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으니 운이 맞다.
물론 운이 100%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 내가 공부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가요계에서 전문가의 시선이 아닌 내 시선으로는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너희 담당하면서 드라마나 영화 쪽 일도 종종 하다 보니까 그쪽 일이 내게 더 맞기도 한 것 같다.”
“그럼 지금처럼 저희도 맡으시면서 번갈아 가면서 하면 안 돼요?”
“너희 콘서트 일정 잡히고 투어 돌면 그럴 수가 없어. 그래서 이번 앨범까지만이라고 말한 거야.”
“으음….”
이번 내 말에는 애들이 섣불리 반발하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말한 게 어떤 의미인지 본인들도 대강 알기 때문이다.
“근데 보통 팀장이나 실장급은 여러 연예인 맡아서 하잖아요.”
“너희 덩치가 안 크면 그렇게 하겠지. 근데 너희 덩치가 너무 커. 어비스도 그래서 따로 꾸려서 활동하잖아? 솔직히 저번에 재성이랑 너희랑 동시에 맡아서 했을 때는 답이 없더라. 난 할 수 있을 거라 봤는데 일반적인 스케줄로 변환하니까 답이 없더라고. 그때 정말 겨우 했던 거야.”
예전에는 애들의 노출은 신비주의 전략이어서 스케줄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스케줄을 항시 빡빡하게 잡아 뒀기에 그게 안 됐다.
안혜지를 뽑은 것도 그 이유였다.
작년엔 나 혼자로도 커버가 됐는데 지금은 혼자서는 커버가 안 됐다.
내 말이 끝나고 회의실이 숙연해지자 서지영이 신희진을 흔들며 말했다.
“희진 언니! 언니도 뭐라 말 좀 해요!”
“했어. 했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라.”
“언제 했어?”
“난 발리에서 먼저 들었어.”
신희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애들의 아우성에 마음이 꽤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애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게 맞았다.
* * *
“휴가 돌아오자마자 사고 친 현진이 아니야?”
“사고라뇨….”
남진수가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자마자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애들과의 격전 이후 몸에 탈력감이 맴돌아 그냥 사무실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사고지. 임마. 넌 왜 잘나가다 꼭 한 번씩 이러냐?”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내가 스타즈를 놓기로 한 게 벌써 회사 내에 소문이 쫘악 퍼진 듯했다.
좁은 회사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는 건지.
“근데 왜 갑자기 애들한테서 손 떼겠다고 한 거야? 발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이전에 정 대표님이 저한테 배우 파트 맡겠냐고 이야기하신 것도 있고… 갈수록 제가 애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서요.”
내 말을 들은 남진수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 그런 이야기도 있었구나.”
“네.”
“그리고 애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건 그게 원래 당연한 거야.”
“그게 당연한 건가요?”
내 되물음에 남진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네가 특이하게 했던 거야. 매니저가 기획까지 도맡아서 진두지휘하는 경우가 흔한 케이스 아니다. 보통은 영업하고 스케줄 짜주는 정도지. 이거하고 저거하고 뭐 물어와서 뭐 해보고… 그러진 않아. 그리고 그걸 해도 팀장이나 실장급이 하지, 너처럼 연차 낮은 매니저가 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지.”
“하하… 제가 많이 나대긴 했네요.”
남진수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이레귤러긴 이레귤러였던 모양이다.
물론 그 선택이 지금의 내 위치에 있게 해준 거였지만.
남진수가 큭큭 웃으며 내게 말했다.
“많이 나댔지. 뭐 그래도 성과는 좋았잖아? 보면서 나도 재밌기도 했어. 이건 뭐 하는 또라인가 하고.”
“하하….”
남진수의 반응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하필 배우야? 아니다. 전공이 연출이랬지. 하긴. 너 보는 눈은 꽤 좋은 편이니까.”
남진수가 내게 뭐라 말하다가 혼자 납득해버렸다.
“애들은 뭐라디?”
“왜 우리를 버리냐. 섭섭한 게 있었냐. 너무한 거 아니냐. 배신자다. 말 많았죠. 겨우 설득하고 오는 길이에요.”
“애들이 네 덕을 많이 봤으니까 그런 말 할 만도 하지.”
애들과 꽤 장기간의 격전 끝에 설득하는데 겨우 성공했다.
물론 애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은 했지만, 내게 상당히 삐져있는 상태였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다.
“애들이 많이 섭섭해하는 거 같아요. 이렇게까지 섭섭해할 줄 몰랐어요.”
“당연히 섭섭하지. 사람 대 사람으로 일하는 건데. 너희는 마음도 꽤 터놓고 일한 편이었잖아? 안 그럴 수 없지. 근데 연예인과 우리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어. 평생 가기는 좀 힘들어. 그래서 그렇게 정주치 말라고 말했건만….”
남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나를 나무랐다.
“그런 의미로 정주치 말라고 하신 거 아니었잖아요.”
“그런 의미도 있었어.”
“이래서 한번 이별을 겪어 봐야 한다니까. 그래야 일정 이상 정을 안 주지.”
“그게 쉽나요….”
“그래. 그건 어렵지. 어려워. 나도 사실 잘 안돼.”
남진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실장님도 이런 경험 있으세요?”
“없겠냐? 당연히 있지. 근데 너처럼 매니저가 먼저 손 뗀 경우는 아니었고 담당 연예인이 먼저 손 뗀 케이스.”
남진수가 그때를 회상하는 듯 눈이 추억에 젖어 들어갔다.
“나도 처음 맡았을 때는 이 사람과 평생 가겠구나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
“처음 담당했다는 그분은 지금 뭐하고 계세요?”
괜히 궁금했다.
“지금? 지금 은퇴하고 애 키우고 있어.”
“네? 은퇴요?”
“응. 잘나가진 못했거든.”
“아….”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뭐, 그래도 가끔 연락하면서 종종 만나.”
남진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 만나고… 그렇게 크는 거야.”
남진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