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발리에서 생긴 일 (5)
“하반기 스타즈 플랜입니다.”
“흠.”
정인수 대표가 기획 실장이 건네준 자료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던 자료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기획 실장을 보며 말했다.
“결론은 이제 확장하기 위해서는 외국을 돌아야 한다는 거네.”
“네. 어비스도 국내에서 팽창할 만큼 하고 외국으로 돌았으니까요. 스타즈도 외국 반응이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 쪽이요.”
“일본 쪽 반응이 괜찮다는 거면 일본 멤버 때문이겠지?”
“네. 유코의 인기가 꽤 대단합니다.”
정인수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은?”
“중국도 괜찮긴 합니다만… 건드리기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거긴 잘못 건드리면 그룹 자체가 묶여버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린이 속한 소속사가 큰 회사가 아니어서 중국 머니로 흔들릴 위험이 있습니다.”
기획 실장의 말에 정인수 대표가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위험은 무슨. 벌써 입질 넣고 있다고 하는 거 같던데.”
“그렇습니까?”
“어. 돈에 안 넘어갈 사람 몇 없지.”
기획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중국으로 빼낼 생각인가 보군요.”
“아직 그건 모르지. 그럴 가능성은 크겠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그렇게 흔든 뒤 중국으로 간 애들만 해도 한 트럭 아닙니까?”
“그렇긴 해. 중국이 문제야. 중국이. 쯧쯧… 아니 돈이 문제지.”
정인수 대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정인수 대표는 중국 회사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잘 가꿔 상품화시키면 홀라당 가져가는 게 중국이었다.
양아치도 이런 양아치가 없었다.
“그래서 콘서트 계획을 당기려고 합니다. 최대한 뽑아내야 하니까요. 콘서트 계약이 성사되면 위약금 때문에 빼내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정인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럼 이번에 미니 앨범 하나 진행하고… 내년에 정규 앨범 하나 정도 내고 마무리하겠군.”
“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렇게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똑똑.
기획 실장의 용건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남진수 실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획 실장이 나가고 남진수 실장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정인수 대표가 남진수 실장을 보며 말했다.
“넌 또 무슨 일이야?”
“발리로 간 김현진 팀장이랑 신희진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인수 대표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남진수 실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 *
“언니! 잘 들어가세요! 한국에서 봐요!”
“그래~ 우리 동생 한국에서 다시 보자~.”
“네!”
김지선 작가를 마중하는 신희진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일 사이에 언니 동생처럼 친해지라고는 했지만 진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내 김지선 작가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신희진이 열심히 손을 흔드는 걸 멈췄다.
“너도 대단하다 대단해.”
“가요.”
신희진이 나를 째려보더니 휙 하고 돌아섰다.
오늘 날씨는 햇볕이 짱짱해 뜨거운 날씨인데 왜 나는 추위를 느껴야 하는 걸까.
“안 오고 뭐 해요!”
“어? 갈게!”
내가 가만히 있자 먼저 성큼성큼 갔던 신희진이 내게 빽하고 소리쳤다.
신희진이 지금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 자기 전 신희진의 물음에 내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게 그 이유였다.
한창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물어왔기에 제대로 답변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신희진이 내게 물은 ‘언제까지 저희랑 함께할 거죠?’란 말에 ‘언제까지 애들을 보모처럼 졸졸 따라다닐 건가?’라는 정인수 대표의 말과 ‘너희 둘, 뭔가 있지?’라고 말한 장승훈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답변을 못 하고 흐지부지했는데 거기에 감정이 상한 신희진이 오늘 아침부터 줄곧 저 상태로 내게 시위를 했다.
어쩔 수 있나. 오늘 하루는 신희진에게 맞춰 주는 수밖에.
먼저 간 신희진을 따라잡은 후 보폭을 맞추면서 말을 걸었다.
“점심은 뭐 먹을래? 어제 내가 로컬 맛집 찾아봤는데.”
“그….”
신희진이 말을 하다 움찔하며 멈췄다.
좀 더 긁으면 될 거 같은데.
가면서 나를 곁눈질하는 게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귀엽네.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 어때? 촉감이 장난 아니래. 찐득찐득하면서도 달달하고 입에서 녹는다던데?”
“흐어….”
내가 음식을 묘사하면서 말하자 신희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딘데요?”
컴플리트!
아이스크림에 무너졌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스타즈 애들을 봐온 게 회귀 포함 3년 정도 되니 애들에 대한 건 이미 베테랑이었다.
“공항에서 얼마 안 걸려. 아이스크림부터 먹으러 갈래?”
“후식은 당연한 거고요! 밥부터 먹어야죠! 로컬 맛집이 어딘데요?”
“거기? 잠시만.”
신희진이 부끄러운지 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나는 핸드폰에 메모해둔 음식점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흥. 이런다고 제가 달라지지는 않아요.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 그래.”
내가 찾고 있는 와중에 신희진이 툴툴대며 말했다.
핸드폰을 보느라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의 상태를 보아하니 얼굴이 붉어져 있을 것 같았다.
이내 나는 음식점의 정보를 확인하고 신희진에게 말했다.
“차 타고 10분? 정도 가면 되겠다.”
“빨리 가죠. 배고파요.”
내 말이 끝나자 신희진이 먼저 움직였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희진아! 거기로 가면 안 돼. 차 타는 곳 거기 아니야.”
내가 소리쳐서 말하자 휙 돌아서서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빨리 말해 주셨어야죠.”
“네가 먼저 움직인 거잖아.”
“진짜!”
신희진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계속 삐지던가 삐진 걸 풀던가 하나만 하지.
근데 이번에도 가는 방향이 틀렸다.
“희진아! 거기도 아냐!”
그런 신희진을 웃으며 따라갔다.
* * *
촤아악. 촤아악.
절벽 아래에서부터 파도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오늘은 정말 발리에서 있던 날 중에 진짜 휴가라고 부를 만한 날이었다.
신희진만 정상적인 기분이었다면 나도 편하게 즐길 하루였었겠지만 말이다.
신희진도 마지막 남은 휴가 하루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는지 중간에 나와 타협을 봤다.
일단 오늘 하루 즐길 거 다 즐기고 마지막에 이야기하자는 거였다.
그렇게 합의 본 이후로는 꽤 즐겁게 다녔다.
로컬 맛집 탐방부터 해서 관광 필수 코스 몇 곳 들려서 구경시켜 주고 쇼핑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이곳이 오늘의 마지막 명소였다.
“구경 다 했으면 갈까?”
푸른 바다를 멍하니 구경하는 신희진에게 은근슬쩍 말했다.
“어딜 가요. 아직 오늘 할 얘기 남았잖아요.”
아쉽네. 물 흐르듯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해봐요. 계속 같이 못할 거 같다는 이유가 뭔데요.”
어제에 이은 2차전이 시작되었다.
“음….”
촤아악. 촤아악.
나와 신희진 사이로 파도 소리만 떠다녔다.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걸까.
“나도 이렇게 빨리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생각보다 욕심이 많더라고.”
“욕심 많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너네한테 해줄 게 없더라.”
“그게 이유가 돼요?”
“나한테는.”
“…….”
올해 초. 애들이 재계약에 성공하고 내가 팀장으로 직급이 올라갔을 때만 해도 얘네랑은 평생 가겠구나 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내가 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유지만 할 뿐이었다.
이래서 다들 일정 연차가 쌓이면 옮기고 또 옮기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애들이 가수가 아닌 배우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고 만들어 간다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노래로 들어가면 내 전문 분야도 아니거니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전이야 내가 이것저것 알고 있는 걸 섞어서 만들었다지만 이번 Hurricane은 아니었다. 민서희 팀장에게 부탁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처음엔 너희가 자리 잡기만을 바랐는데 막상 자리를 잡아 버리니까 내가 할 게 없네?”
“할 거 없으면 같이 놀면 되잖아요.”
“너희야 지금 위치에서는 놀아도 괜찮겠지만… 난 아니야. 난 더 위가 욕심이 나더라.”
“으응….”
신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몸을 꼬았다.
“게다가 너희 콘서트 투어 일정이 잡히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어져.”
애들도 콘서트 준비를 해봐서 알 거다.
저번 콘서트야 어쩌다 보니 나도 참여하게 됐었지만, 애들이 콘서트 준비할 동안 그리고 진행할 동안 매니저는 할 일이 없다.
정말 애들을 간단히 보조해주는 일뿐이다.
굳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해도 될 법한 일들.
그러나 그것보다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건 이번 발리에서의 일이 결정적이었다.
이제는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감정 조절이 안 됐다.
그리고 서로 그 티가 나기 시작한 모양이었고.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아마 배우 파트 쪽으로 옮길 거 같아.”
“배우… 배우란 말이죠?”
“응.”
우린 아무 말 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촤아악. 촤아악. 촤아악.
말이 없어지자 파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왔다.
“그래요. 욕심으로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겠죠… 오빠도 오빠 나름의 길이 소중할 테니까요.”
“이해해주니 고맙다.”
씁쓸하게 말하는 신희진에게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최근 들어 심각한 표정 지으면서 고민하던 게 이거였어요?”
“어… 응.”
“그랬구나….”
신희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발로 애꿎은 땅을 찼다.
그렇게 몇 번 발길질하다가 고개를 들고는 내게 말했다.
“저도 요새 고민 있었는데 좀 들어 주실래요?”
“그래. 뭔데? 말해봐.”
“사실 제가 지금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어요.”
“어? 어….”
꿀꺽.
신희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이건… 조금 당황스럽네.
이런 내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희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아이돌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당장 표현을 못 하겠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묻어둬야 할까요? 묻는다면 언제까지 묻어둬야 할까요?”
나를 쳐다보는 신희진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건… 네가 하기 나름 아닐까?”
“…어떻게요?”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넌 어떤데?”
내 물음에 신희진이 천천히 답하기 시작했다.
“저는… 오픈하고 도란도란 연애하고 싶죠. 근데 안 걸릴 거라고 확신을 못 하겠어요. 그리고 일차적으로 팬들한테도 미안하구…. 또 연애하다 걸리면 멤버들 볼 낯도 없구요… 사실 멤버들도 활동하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서로 참았거든요. 어렵게 데뷔했는데… 서로 조금만 더 참자고 이야기했거든요.”
하기야 활동하는 그 기간에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 발견 못 했을 리가 없었다.
한창 활활 타오를 20대 아닌가.
“근데 연애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연애를 못 하는 거에 대한 반발 심리 같은 건 아닐까? 아니면…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감정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신희진이 안색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차라리 그런 것 같다고 했다면 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그럼 상대방은 네 마음 알아?”
“글쎄요…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눈치가 더럽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신희진이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서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어렵네, 어려워.
“그럼 은근하게 떠 봐. 기다려 줄 수 있냐고.”
“그럴…까요? 그 사람은 기다려 줄까요?”
“아마도 기다려 주지 않을까?”
내가 신희진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여기까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