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발리에서 생긴 일 (4)
“놔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잠깐 나온 거예요. 여기에서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내 물음에 장승훈이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보다 신희진의 손목을 잡은 장승훈의 손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막 나가자는 건가.
“희진이 손은 놓고 이야기하시죠.”
“아이, 참. 진짜 사사건건 끼어드시네. 회사는 관계없다면서요?”
장승훈이 내 말에 대답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희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한층 더 험악하게 쓰며 장승훈에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당사자가 불쾌해하고 있잖습니까. 눈이 없어요? 손 좀 놓으시죠?”
나를 보던 장승훈이 신희진을 다시 바라봤다.
신희진은 그 시선에 불쾌한 얼굴로 장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장승훈의 손을 쳐내고 신희진을 내 쪽으로 휙 당겼다.
“어?”
신희진의 손을 놓친 장승훈이 피식 웃었다.
웃어?
“이거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은데요?”
“알고 계시네요. 드라마까지 잘 끝내 놓으시고 뭐 하자는 겁니까?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한 가지만 물읍시다. 당신 미쳤어?”
“당연히 미치지. 마음에 든 여자가 자꾸 튕기는데 안 미치겠어?”
“하….”
어이가 없었다.
휴가 와서 봤던 눈빛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일 줄이야.
미치려면 곱게 미쳐야지,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게다가 입에서 술 냄새도 풍기는 걸 보니 술에 취해 반쯤 정신을 놔버린 상태인 것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던가?
“취한 거 같은데 그만 돌아가세요. 오늘 이러시는 건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당신 말고 희진이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나와 줄래?”
장승훈이 귀찮은 파리 쫓듯 손을 내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뒤에서 내 셔츠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내 나는 나에게 다가온 장승훈의 팔을 낚아채 힘을 준 후 장승훈에게 가까이 갔다.
“곱게 말할 때 가라고. 정신 말짱해지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감당은 내가 하니까 신경 끄시고.”
장승훈이 가까이 온 나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더니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내 눈을 쳐다봤다.
“근데 가만 보니까… 너희 둘 뭔가 이상해.”
“자꾸 개소리하지 마시고 가시죠.”
장승훈의 말에 속으로는 움찔했지만 강하게 말했다.
여기서 틈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매니저가 연예인을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차원이 아닌 거 같아… 쟤도 의지하는 게 좀 이상하고… 너희 둘 뭔가 있지?”
“가관이네. 이제 망상까지 하시나?”
“그렇잖아. 안 그래?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당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장승훈이 내 코앞까지 와서 으르렁거렸다.
“그럼 비켜. 배우끼리 이야기 좀 하겠다는데 왜 자꾸 설쳐대?”
“좋게 말할 때 좀 가라.”
퍽.
“오빠!”
장승훈이 기습적으로 내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피할 겨를이 없었다.
술에 취해 친 것치고는 좀 맵네.
한 대 맞았으니까 정당방위인 거겠지?
나도 한 대 치고 싶었는데 잘됐다.
먼저 치기에는 명분이 안 섰단 말이지.
“진짜 미치려면 곱게 미쳐야지. 이거 정당방위다?”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대응하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 소리치고 있었지만, 감성이 이성을 눌렀다.
모르겠다. 지금은 내 마음대로 하련다.
주먹을 꽉 쥐고 장승훈에게 손을 뻗었다.
퍽.
장승훈의 고개가 돌아갔다.
제대로 꽂은 거 같은데.
이내 장승훈이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맞을 줄 몰랐나 보다.
“쳤어?”
“먼저 쳤으니까 나도 한 대 친 건데?”
“오빠! 왜 그래요!”
“넌 좀 떨어져 있어.”
나한테 붙은 신희진을 떼어냈다.
신희진을 떼어내자 장승훈이 대뜸 내 멱살을 쥐었다.
“형씨. 자꾸 거슬리게 해. 응?”
“지금 이러는 거… 네 커리어에도 치명적일 텐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내 말에 장승훈이 움찔했다.
한 대 맞더니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장승훈!!”
멀리서 권해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개 잡을 조련사가 왔다.
타이밍 좋게 왔네.
* * *
- 당연히 미치지. 마음에 든 여자가 자꾸 튕기는데 안 미치겠어?
핸드폰에서 녹음된 장승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권 팀장님?”
“에휴….”
권해철이 내 눈을 피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애가 완전 망가졌네요.”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일입니까?”
“뒤풀이 이후로 애가 완전히 변해서요.”
“음…”
뒤풀이 날이면 신희진이 대차게 깐 날이었다.
그게 기폭제가 된 듯했다.
근데 그게 내 알 바인가.
“그럼 여기 오는 것도 막으셨어야죠.”
“이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위치가 있는데 이렇게 막 나갈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리고 김 팀장님도 아시겠지만 승훈이처럼 인지도 있는 연예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 아시잖아요? 저희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권해철의 말이 이해는 갔다. 이해는 갔지만 우리가 열 받을 만한 상황인건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죠.”
“이 바닥에서 이것보다 비일비재한 일 많습니다.”
권해철은 그나마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표현이 딱이었다.
“비일비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남자 배우가 상대 여자 배우에게 위협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이러는 게? 언론에 딜 한번 해볼까요? 제 생각이지만 장승훈 씨는 매장당할 거 같은데요?”
“크흠.”
내가 분개하며 말하자 권해철이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할 말이 없을 거다.
언론에 터지면 우리도 이미지 타격은 있겠다만 장승훈은 재기 불능일 테니까.
그나마 늦은 밤에 보는 눈이 없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서로 곤란해졌을 문제였다.
“원하는 게 뭡니까?”
“일차적으로는 당장 내일 제작진들과 같이 떠나주시면 좋을 거 같고요. 차후 저희 입장은 회사 통해서 연락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권해철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회사까지 끌고 갈 문….”
“문제가 맞으니 하는 말 아닙니까? 이게 개인 대 개인으로 끝날 문제라고 보십니까?”
권해철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비즈니스 영역이다.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고, 받을 건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뭘 받아야 할지는 솔직히 지금 당장 감이 안 왔다.
그래서 회사에서 회의를 해보려고 다음에 연락 준다고 이야기한 거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 잘못이라고는 말 못 하겠는데요. 김 팀장님이 승훈이 때리지 않았습니까?”
“말은 제대로 해주셔야죠. 전 먼저 맞고 대응한 거뿐입니다. 누가 들으면 제가 먼저 친 줄 알겠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대응을 왜 합니까? 그것도 주먹다짐으로?”
권해철이 눈을 부라리며 내게 말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제가 감정적인 대응을 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술에 취한’ 장승훈 씨가 먼저 저를 ‘선빵’을 쳤고 저도 감정적으로 장승훈 씨를 때렸지만, 정신 차리라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으음….”
내가 ‘술에 취한’과 ‘선빵’을 강조하면서 말하자 권해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꿀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강하게 나갈 수 있던 거였다.
이내 권해철이 한숨을 내쉬더니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연락 주시죠.”
“아까 대답을 못 들었는데… 하루 더 계신다고 하셨죠?”
“아마 내일 제작진들이랑 같이 귀국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권해철이 내게 짧게 고개를 숙인 후 사라졌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한 시.
야밤에 이게 무슨 짓인지.
장승훈은 어느 정도 처리를 했으니 놀라서 쉬고 있는 신희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신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뭐 하고 있었어?”
- 그냥 있었어요.
“괜찮아?”
- …네.
내 물음에 신희진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자. 아니면 내일 한국 갈까?”
- 그건 싫어요. 오빠, 근데 잠깐 여기 와주시면 안 돼요?
“작가님 안 계셔?”
김지선 작가가 지금 시간에 아직 숙소에 없나?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올려 보낸 거였는데.
- 안 계세요. 작가님한테 연락드려 보니까 마지막 날이라고 제작진들이랑 술 마시고 계시대요. 저보고도 오라고 하셨는데 거기에는 대답 안 했거든요. 좀 오래 계실 건가 봐요. 저 혼자 있기 좀 무서워서요.
“으음… 알았어. 올라갈게.”
- 네.
신희진과 통화를 끊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신희진이 있는 숙소로 천천히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다른 것보다 내 머릿속에는 장승훈이 내게 했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너희 둘 뭔가 있지?’
남들도 슬슬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 *
“진짜 내가 딱 그거 고르고 먹으려고 했는데! 좀만 늦게 오지! 아오!”
“넌 지금 상황에서 먹을 거부터 생각하냐?”
“그거 진짜 맛있어 보였단 말이에요.”
어이없어하는 내 태도에 신희진이 울상을 지었다.
그래. 원래 이런 애였지.
“내일 가. 내일.”
“내일은 또 다른 곳 가고 싶었는데….”
신희진의 투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승훈의 행동에 겁을 잔뜩 먹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신희진은 무척 쌩쌩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해 보였다.
“늦었어. 얼른 자라.”
“잠 안 온단 말이에요.”
“그럼 아까 김지선 작가님이 술 마신다고 할 때 가지 그랬어.”
“오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거기에 가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신희진의 말에 아차 싶었다.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신희진이라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다.
“아… 그렇지. 참. 미안.”
“아녜요.”
내가 머쓱해하며 사과하자 신희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팡! 팡!
“오빠 여기 앉아 봐요.”
“어?”
신희진이 본인이 앉아 있는 침대로 나를 불렀다.
“왜?”
“계속 올려다보면서 말하니까 고개 아파서요.”
“으음….”
신희진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옆으로 가 앉았다.
옆으로 가서 앉아 고개를 돌리니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나를 보는 신희진을 볼 수 있었다.
항상 신희진의 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눈이 참 맑았다.
“내일은 어디 가볼까요?”
“그러게. 어디 갈래? 내일이 마지막 날인데. 다음 날 점심 먹고 비행기 타야 하니까 내일 말고는 어디 둘러볼 시간이 없네.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있죠!”
내 말에 신희진이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해둔 사진을 내게 보여줬다.
보여준 사진은 절벽이 있는 해변이었다. 그림이 꽤 훌륭했다.
“여기요.”
“해변이네?”
“네.”
“가까운 곳이야?”
“그럴…걸요?”
내 물음에 신희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웹서핑하며 어디 갈 만한 곳이 없나 찾다가 예뻐 보이니 저장해둔 모양이었다.
“갈 수 있나 내일 내가 찾아볼게.”
“네!”
나와 신희진 사이에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신희진이었다.
수줍은 듯 내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어? 뭐가.”
“그냥요. 오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뭘.”
신희진의 말이 조금 낯간지러워 담담하게 말했다.
가끔 신희진이 이렇게 훅 찔러 들어올 때마다 곤혹이었다.
“어디 가지 않을 거죠?”
“…….”
평소라면 쉽게 대답했을 질문에 왠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신희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디 안 간다고 왜 바로 대답 안 해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