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눈 감고 눈 뜨면 내일 (3)
“드라마도 생각보다 재밌는 거 같아요.”
“드라마?”
“네.”
연습실에서 안재성이 신희진과 대본 리딩이 끝나자 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드라마도 드라마만의 매력이 있다.
게다가 시장성도 꽤 확대되는 중이었다.
“드라마… 요즘 드라마 추세가 나쁘진 않지. 영화 시장보다 더 활발해졌으니까.”
“근데 드라마 촬영이 그렇게 힘들다면서요?”
“아무래도 실시간 라이브로 달리다 보면 좀 그렇지?”
드라마 촬영장은 전쟁터다.
방송 전날 찍고 편집하고 내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요즘은 반 사전제작을 하는 추세여서 조금 숨통은 트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드라마가 시작되면 금방 따라잡혀 실시간 라이브로 바뀌지만 말이다.
그 예로 마녀 촬영장을 들 수 있다.
마녀도 촬영장 또한 반 사전제작으로 4화를 정도를 찍고 시작했었다.
그러나 점차 좁아지더니 막바지에는 결국 마지막 화 방영 3일 전에 밤샘으로 마지막 화를 마무리하고 내보냈다고 들었다.
“영화는 좀 여유롭잖아요.”
“여유는 무슨. 너 Finder 촬영 때 기억 안 나? 시간 엄청 타이트했었잖아.”
“그건 그렇죠. 근데 영화는 보통 촬영 스케줄을 좀 여유롭게 짜잖아요.”
“그건 그렇긴 해.”
아무래도 영화는 드라마처럼 찍고 바로 방영하는 게 아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촬영이나 편집이 밀리면 개봉을 미루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봉을 미루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편집이 덜 된 상태로 내보내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는 하도 스케줄이 타이트 하다 보니 간혹 편집이 덜 된 상태로 방영이 되기도 했다.
“드라마도 그냥 다 찍으면 안 돼요?”
신희진이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드라마는 시청자들 반응에 따라 또 확확 바뀌어서 그래. 반응에 따라 결말도 바뀌는 게 드라마니까.”
“아하.”
나도 신희진처럼 그냥 영화처럼 한 번에 다 찍고 내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와 다르게 드라마는 시청률이 존재했고, 그 시청률로 인해 광고가 붙어야 했다.
영화와 드라마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그건 그렇고 오늘 어땠어요?”
나는 신희진의 말에 말없이 엄지를 들었다.
“좋았어.”
“이 정도면 통과?”
신희진이 생긋 웃었다.
“난 통과인데 PD랑 작가는 또 모르지.”
“오빠 눈에 통과됐으면 되겠죠, 뭐.”
“뭐라는 거야. 내가 PD나 작가도 아닌데.”
내 말이 끝나자 신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 오빠가 연기 평가할 때 얼마나 깐깐한지 모르죠?”
“내가?”
“이건 저도 희진이 말에 동의. 형이 좀 깐깐하긴 해요.”
안재성도 신희진에 말에 끄덕이며 말하길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습실에서만 리딩하는게 아니라 숙소에서 연습할 때도 있었는데 멤버들은 괜찮다고 하는 장면이어도 오빠 앞에서 하면 또 달랐거든요. 대부분 혹평이었고.”
“저도 Finder 할 때 느꼈어요. 근데 도움은 되더라고요. 짚어주시는 게 캐릭터 잡는데 꽤 참고는 되더라고요.”
“그쵸? 신기하다니까요.”
신희진과 안재성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가.
아무래도 내가 짬밥이 있다 보니 눈이 높아진 듯했다.
그래도 배운 게 헛된 건 아닌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이제 노래만 잘 부르면 되겠네?”
“저 노래 잘하거든요?”
“그럼 안무만 잘하면 되겠어.”
“저 춤도 잘 추거든요?”
오디션 준비하면서 신희진과 부쩍 친해진 안재성이 신희진을 놀렸다.
안재성이 놀리는 걸 보며 생각난 게 오늘은 스타즈의 타이틀곡 점검이 있는 날이었다.
이전에 나와 이야기하면서 한번 엎고 조금씩 손을 봤더니 훨씬 좋아진 곡이 나왔다.
“말뿐만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가볼까? 재성이 너도 갈래? 있다가 오후에 확인 있거든.”
신희진을 쳐다보며 말하다 문득 안재성도 같이 가서 피드백을 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곡에 대한 테스트는 끝났다.
단지 지금은 대중에 가까운 안재성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뿐이었다.
“저요? 괜찮을까요?”
“보고 놀라지나 마시라구요.”
“희진이 반응 보니까 괜찮은 거 같은데?”
내 말에 안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들어온 시나리오 줄 테니까 그거 좀 읽다가 보고 가.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알려주고.”
“네, 그럴게요.”
이내 우리는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 * *
짝짝짝!
“와우!”
안재성이 짧게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좋네요.”
“감사합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안재성에게 애들이 우르르 다가와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나를 쳐다보는데, 그 모습이 꼭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 같았다.
그렇다면 기대를 저버릴 순 없지.
“중간에 린이 손 위치 바뀌었더라.”
“그거. 실수.”
“잘했어. 이대로 녹음하고 뮤직비디오 찍으면 될 거 같은데?”
내 대답이 불만인지 유미소가 얼굴을 팍하고 찌푸렸다.
“먼저 잘했다고 하면 어디 덧나요? 꼭 맨날 실수 먼저 집더라.”
“매도 먼저 맞는 게 안 아프다고 너희 배려하는 거야.”
“그게 병 주고 약 주는 거랑 뭐가 달라요?”
“병 주고 약 주는 거 맞는데?”
“진짜 못됐어.”
유미소가 혀를 차면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뮤직비디오 찍는 날이 코 앞인데 칼같이 맞춰야지.”
“그건 맞아.”
이나라가 내 말에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애들이 이나라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악역은 나랑 이나라만 맡는지 모르겠다.
“너희 저번에 Fairy 뮤비 찍을 때 안무 자꾸 틀려서 딜레이 엄청나게 됐잖아. 난 그러지 말라고 잡아주는 거야.”
“한쌤의 폭풍 잔소리만으로도 힘든데 오빠는 저희한테 당근을 주셔야죠. 이 회사에 우리 편은 없는 건가!”
“한지연 안무가님도 너희 잘되라고 하는 거야. 새겨들어.”
“으, 꼰대.”
서지영이 진저리를 냈다.
그 반응에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다 옆에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숨죽여 보던 안재성에게 물었다.
“재성아 너는 어땠어?”
“저야 뭐, 좋았죠. 눈 호강도 하고요.”
“얘네는 쓴소리가 필요해. 뭐 짚어줄 거 없었어?”
“아뇨. 전 정말 좋았는데요? 노래도 흥겹고, 안무도 가사 따라가는 것 같아서 좋았고요.”
아이돌 문화를 모르는 일반인인 안재성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변화는 성공적인 것 같다.
“그래?”
“네.”
나와 안재성의 대화를 듣던 애들이 기세등등해졌다.
안재성이 자신들의 편이라 느껴진 모양이었다.
나도 애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단지 너무 긴장이 풀어지면 안 되니 잡아줄 사람이 나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봐요. 오빠도 좋다잖아요. 괜히 심술은.”
신희진도 불만인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완전 사방이 적이었다.
“심술이 아니래도.”
“심수리 맛는거 가튼데.”
항상 이런 대화에 얌전하던 유코마저 툴툴대는 모습에 조금 움찔했다.
너무 조였나.
“알았어, 알았어. 너희가 최고야. 됐지?”
“완전 엎드려 절 받기야. 엎드려 절 받기.”
신희진의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옆에 있던 박혜연에게 물었다.
“혜지는 너희 보고 뭐라던?”
“언니는 당연히 항상 잘한다 해주시죠. 누구랑 다르게요!”
박혜연도 다른 애들과 다르지 않았다.
본전도 못 찾았네. 칭찬 좀 해줄 걸 그랬나.
애들이 상당히 뿔이 나 있었다.
“내가 졌다. 졌어. 사과의 의미로 내가 아이스크림 쏜다. 재성이 데려다주고 오면서 사 올게.”
내 말이 끝나자 화가 잔뜩 나 있던 애들의 텐션이 바뀌었다.
“민초!”
“슈팅 스타!”
“저 망고요!”
뿔난 스타즈를 달랠 때는 이게 직방이다.
보아하니 이번 미니 앨범 퀄리티는 문제없을 것 같고, 남은 건 희진이 드라마 오디션 정도인가.
* * *
“우리 미호 캐릭터 어떤 점이 끌렸어요?”
김지선 작가가 신희진을 보며 말했다.
“대본을 읽는데 캐릭터가 머릿속에서 바로 그려지더라고요. 그래서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요?”
“미호가 남자 주인공인 상진을 만날 때 하는 행동도 그렇고 남들을 대할 때의 행동과 말투가 눈에 그려졌었습니다. 엄청 귀엽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런 캐릭터를 하면 어떨까 상상해봤는데 재밌을 거 같았어요.”
신희진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네 명의 인물 중 김지선 작가와 이정수 PD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신희진을 응시했다.
특히 김지선 작가의 표정은 무척 상기되어있었다.
“그리고 드라마의 전체적인 내용도 재미있었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악한 영혼인 상진을 홀려야 선한 영혼으로 돌려놔야 천상계로 갈 수가 있다는 설정이 신선하기도 했구요.”
김지선 작가가 신희진의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쓴 글이 좋다고 하는데 기분 나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미호 역으로 희진 씨 말고도 후보가 더 있어요. 자신 있어요?”
“네.”
이정수 PD의 기습적인 말에 신희진이 머뭇거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진 이정수 PD의 말에 김지선 작가가 얼굴을 찌푸렸다.
“심수혜, 김가은, 정다인 보다 자기가 낫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준비를 잘 해왔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미호 캐릭터를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바로 대답을 드린 거였습니다.”
신희진이 이정수 PD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차분하게 말한 것과 달리 심장은 쿵쿵 뛰었다.
이정수 PD가 말한 세 명의 여배우들은 활발히 드라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배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비교할만한 배우들이 아니었다.
그녀들보다 자신이 나은 무기는 나이 정도였다.
셋 모두 나이가 20대 후반에 걸쳐있는 배우들이었다.
“이 PD님! 왜 초장부터 그렇게 기를 죽이고 그래요.”
“기를 죽인 게 아니라 어디서 오는 자신감인지 궁금해서 그랬어요.”
이정수 PD가 김지선 작가의 볼멘소리에 그녀와 대화를 하고는 이내 신희진을 바라봤다.
“요즘 애들은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재미가 없었는데 희진 씨는 조금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은 아니고….”
신희진이 밝게 대답하자 이정수 PD가 무안한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었다.
이정수 PD의 의도는 신희진을 긁어 흔들려는 목적이었다.
흔들려서 연기를 개떡같이 한다면 바로 자르면 되니까.
김지선 작가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지만, 자신은 검증되지 않은 배우인 신희진을 쓴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배우가 아닌 아이돌이다, 아이돌.
드라마에 아이돌을 쓰고 시청률이 잘 나온 드라마보다 망한 드라마가 훨씬 많았다.
직접 만나본 신희진의 모습에 조금은 흔들리긴 했지만 중요한 건 연기였다.
“곧 복귀죠? 활동이랑 촬영이 겹치면 괜찮겠어요?”
“조금 겹치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회사도 그 부분에 있어서 배려해준다고 했습니다.”
이정수 PD가 대답을 듣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희진 씨가 준비한 미호를 봐볼까요?”
“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희진에게 이정수 PD가 웃으며 말했다.
“따로 신호 드려요?”
“아니요. 바로 하겠습니다!”
신희진이 심사위원들에게 말을 하고는 몸을 뒤로 돌았다.
그런 신희진을 심사위원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때에 신희진이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다시 몸을 뒤로 돌렸다.
“안녕? 내 이름은 미호야. 반가워.”
신희진이 천진난만한 미소로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