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눈 감고 눈 뜨면 내일 (2)
“떨리냐?”
“네.”
평소와 다르게 침착한 안재성을 보고 한마디 했다.
“그럴 땐 안 떨린다고 해야죠.”
“첫 방송 출연인데 어떻게 안 떨려. 넌 안 떨렸어?”
“당연하죠.”
신희진이 어깨를 펴며 안재성에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백미러로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어이가 없었다.
“웃기시네. 너 ‘너아누’ 때 본인 모습 못 봤지?”
“아뇨. 봤는데요? 그때도 안 떨었는데?”
능청스럽게 내게 대꾸하는 신희진의 모습이 준비하고 있던 캐릭터인 미호와 겹쳐 보였다.
신희진이 미호 캐릭터를 준비하고 나서부터 표현이 평소보다 더 다채로워졌다.
안재성이나 홍승기처럼 배역의 성격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걸까.
활기찬 신희진을 보니 조금 놀리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Chandelier나 들을까? 추억도 되새길 겸.”
“오빠!”
이때 불렀던 노래가 신희진의 방송 초창기 때였는데 이때만 해도 참 순둥한 모습이었다.
그때의 영상을 보면 박혜연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움츠러들었었다.
안재성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내게 물었다.
“어땠는데요?”
“무대 직캠 한번 찾아서 봐봐. 되게 웃겨.”
“방금 말씀하신 노래가 그 무대에요?”
“어.”
“아, 진짜!”
개구리 올챙이 때 생각 못 한다고 방송물 좀 먹었다고 어깨를 으쓱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심술이 났다.
내 심보가 고약한가.
안재성이 나랑 같이 킥킥 웃다가 오늘 방송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영화는 무슨 영화가 나올까요?”
“고전 영화는 안 나올 거 같고… 최신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드라마는 자신 있는데….”
신희진이 내 대답에 자신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안재성이 신희진에게 말했다.
“영화는 잘 안 봐?”
“보긴 보는데 숙소에서는 드라마를 많이 봐서요. 멤버들이 드라마를 좋아하거든요.”
“아, 그래?”
“어제도 연습 끝나고 드라마 보다가 잤어요.”
잠깐만. 어제?
요즘 들어 애들이 아침에 골골거리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요즘 맨날 피곤해하더니 드라마 보느라 늦게 잔 거였어?”
“아, 망했다…. 이건 비밀이에요!”
“어쩐지 혜지가 나한테 너희 깨우는 노하우 묻더라.”
일주일 정도 같이 안혜지와 애들 픽업을 같이하다가 아예 안혜지에게 넘겼다.
생각보다 운전을 잘했다.
“그 정도까진 아닌데… 그래도 언니가 깨우면 바로 일어나요.”
“깨우면 일어나야 하는 게 아니라 나와 있어야지.”
“아, 또 잔소리한다.”
“잔소리 안 하게 좀 해줄래?”
애들이 이제 2년 차 그룹이지만 인지도가 높고, 안혜지에 비해 짬이 있다 보니 안혜지가 애들을 쉽게 못 대했다.
애들도 안혜지를 배려한답시고 존댓말 하며 거리를 두다 보니 서로 어색한 것 같았다.
그냥 동생 다루듯 하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두 사람 가만 보면 친남매 같아요.”
“내가?”
“그래요?”
뜬금없이 끼어든 안재성의 말에 나와 신희진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진짜 친해 보이거든요.”
“뭐… 만난 지 1년 넘기도 했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얼굴 봤으니까.”
“데뷔하고 나서부터는 가족보다 얼굴을 더 많이 봤으니까요.”
신희진과 내 말을 들은 안재성이 어울리지 않게 뚱한 표정을 지었다.
쟤가 미쳤나.
“왜 저는 그렇게 많이 안 만나요? 이거 차별 대우 같은데요?”
“배우랑 아이돌이랑 같냐. 그리고 징그러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푸하하.”
내가 찡그리며 투덜대자 신희진이 힘껏 웃었다.
안재성이 원래 장난기 많은 성격이라고 듣긴 했어도, 막상 겪으니 적응이 안 됐다.
마치 서지영 남자 버전이 이러할 듯싶었다.
근데 방송에 있어서는 서지영만큼 훌륭한 캐릭터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녹화가 기대됐다.
* * *
“불타는 금요일 저녁!”
“영화에 퐁당!”
“빠질 시간입니다!”
MC인 강진석의 멘트를 시작으로 고정 출연진인 1세대 아이돌 유정인, 7년 차 배우 김현석이 멘트를 이어 말했다.
“오늘은 좀 맞추고 싶어요.”
“2주째 못 맞추니까 죽겠어요.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오늘은 꼭 먹어야죠. 그래서! 제작진이 오늘은 특별히 배우 두 분을 초청했다고 합니다.”
“진짜요?”
“와, 오늘은 드디어 먹겠네.”
MC인 강진석의 말에 가만히 옆에 있던 모델 이소정과 방송인 황원일이 맞장구를 쳐줬다.
‘영화에 빠져 버렸다’는 다섯 명의 고정 출연진에, 두세 명의 게스트를 초대하여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나와 주세요!”
강진석의 진행에 맞춰 무대 뒤편에서 개폐 장치가 열리고 안재성과 신희진이 걸어 들어왔다.
“어? 아이돌이잖아요!”
황원일이 신희진을 보며 소리쳤다.
이미 녹화 전에 출연진들과는 인사를 나눴기에 놀라는 건 다 연기였다.
“아닙니다. 이번 1월에 개봉한 화제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주연인 안재성, 신희진 씨입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짝짝짝.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안재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이돌이 아닌 배우 신희진입니다!”
“죄송한데 제가 안재성 씨?는 제가 잘 모르는 분인데 혹시 다른 영화에도 나온 게 있으신가요?”
둘의 소개를 들은 이소정이 도도한 말투로 안재성에게 말했다.
“소정아, 소개할 때 뭐 들었어. 신인 배우라고 하셨잖아.”
“다른 작품이 더 있을 수도 있죠!”
김현석의 타박에 이소정이 투덜댔다.
모든 프로그램이 출연진들에게 캐릭터 성을 부여하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티키타카 하는 역할을 맡은 건 김현석과 이소정이었다.
“이번 영화가 데뷔작입니다. 차기작으로 성재원 감독님의 Finder에 조연으로 나왔습니다.”
“오! 성 감독님! 성식이 형이 주연인 그거 맞죠?”
“네, 선배님.”
“성식이 형도 한번 초대해야 하는데 말이야.”
김현석이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회를 보고 있던 이소정이 김현석에게 태클을 걸었다.
“오빠, 판성식 선배님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나 성식이 형이랑 영화 같이 찍었잖아.”
이번엔 유정인이 김현석의 말에 끼어들었다.
“무슨 영화요?”
“말하면 알아?”
“저 문화인이거든요?”
여성 패널들과 티키타카 하는 김현석의 모습에 신희진과 안재성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에 맞춰 황원일도 진행을 거들었다.
“우리 신희진 씨도 좀 챙겨 줍시다.”
“저 팬입니다! 희진 씨! 제 1픽이었어요!”
“감사합니다.”
황원일이 귀가 빨개진 채로 신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대기실에 있을 때부터 황원일은 같은 연예인이라기보다는 팬 같은 느낌이었다.
딱 팬 미팅 온 삼촌 팬이 저랬다.
생각보다 오프닝이 정말 왁자지껄 풍요로웠다.
그리고 어디서 끊어서 편집해야 할지 모를 만큼 꽉 찬 진행이었다.
확실히 자리 잡힌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진행이 능숙했다.
“재성 씨는 직업이 배우니까 그렇다고 치고 희진 씨는 아이돌이잖아요. 평소에 영화 볼 시간이 있으세요? 아이돌만큼 바쁜 연예인이 없다면서요?”
“아이돌도 사람이에요. 연습 끝나고 숙소에서 멤버들이랑 드라마 진짜 많이 봤는데….”
이소정의 말에 유정인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듯 신희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 시선에 신희진은 화사하게 웃었다.
“네! 정인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숙소에서 자주 봐요. 다시 보기가 있잖아요.”
“요즘 진짜 좋아졌다니까. 우리 때는 다시 보기 같은 게 없어서 채널 외워서 드라마 봤었거든요.”
아이돌 선후배의 모습이 훈훈해 보기 좋았다.
이런 분위기에 짓궂게 초를 치는 인물이 있었다.
“정인이 너 그렇게 말하니까 새삼 나이 많아 보인다.”
“오빠! 저 이제 막 서른 됐거든요!”
“가끔 나는 네가 아이돌이었다는 걸 망각한다니까.”
“하. 저 아직 현역이거든요?”
김현석이 유정인을 짓궂게 놀리자 유정인이 김현석에게 투정 부렸다.
내 학창시절에 데뷔했던 유정인이 벌써 저렇게 나이를 먹다니.
우리 애들도 언젠가 저렇게 나이를 먹고 방송을 하고 있겠지?
“하하, 오늘은 이렇게 두 분을 모시고 진행해볼 건데요. 두 분의 활약 기대합니다.”
“네. 화이팅 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강진석이 적절한 타이밍에 흐름을 끊었다.
강진석이 본인의 대본을 잠깐 확인하더니 정면에 있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자, 그럼 오늘도 신나게 가볼까요? 준비들 되셨죠? 문제, 주세요!”
강진석의 사인과 함께 다소 소란스러웠던 오프닝이 끝이 나고 본 녹화가 시작되었다.
* * *
“재성 씨. 기억 안 나요? 봤다면서요.”
유정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안재성에게 말했다.
어느덧 퀴즈 마지막 라운드였다.
1라운드 참패.
2라운드 참패.
3라운드 진행 중.
영화 속에 나온 대사를 전부 기억한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명장면, 명대사여도 어떻게 세세하게 그걸 기억하나.
“그게 꽤 오래전 일이라….”
안재성이 머리를 박박 긁으며 답했다.
녹화가 진행되면서 나도 맞춰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인도 영화라니.
영화는 유명한 작품이긴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흥행했던 작품은 아니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 아니고서는 아마 모르지 않을까.
출연진들이 고군분투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이번 문제의 영화를 알고 있었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힌트가 다리랑 서는 법이니까 다리로 서는 법? 그런 거 아닐까요?”
“어? 잠시만.”
신희진의 말에 안재성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서 대사가 잡힐 듯 말 듯 맴도는 것 같았다.
거의 다 왔다.
저 정도면 한번 봤던 영화이니만큼 알 수 있을 거다.
힌트도 꽤 많이 나왔고.
그렇게 안재성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다.
그런 그를 놔두고 출연진끼리 추론하기 시작했다.
이게 맞지 않냐, 이 단어는 어떠냐 하면서.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 기억났어요.”
“오!”
안재성의 갑작스러운 말에 출연진들이 감탄사를 내었다.
그만큼 반가웠던 모양이다.
하긴, 지리멸렬하게 진행이 되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나도 빨리 안재성이 맞췄으면 했다.
녹화 시작한 지 벌써 여섯 시간째였다.
“희진이가 중얼거렸던 게 거의 맞았어요.”
안재성의 말에 황원일이 신희진을 바라봤다.
“뭐라고 했어요?”
“다리로 서는 법?”
신희진의 대답에 안재성이 웃었다.
“이 장면은 그거예요. 자신감에 차서 면접관에게 말하는 장면이잖아요? 왜 기억이 안 났나 모르겠네요.”
“그래서 대사가 뭐였어요?”
김현석이 안재성에게 재촉했다.
“아마 ‘두 다리를 잃고 나서야 서는 법을 배웠습니다.’이었을 거예요.”
“오, 뭔가 그럴싸한데요?”
나이스.
저 대사가 맞았다.
“저 이상으로 좋은 대사는 없는 것 같은데 한번 시도해보죠?”
“그럽시다.”
김현석의 말에 출연진들도 동의하며 안재성에게 정답을 맞춰보라며 떠밀었다.
안재성이 정답을 말하는 자리로 가 영화의 배역과 비슷한 분위기로 대사를 했다.
“두 다리를 잃고 나서야 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안재성의 대사를 들은 서상현 PD가 정답이 적힌 대본을 보며 씩 웃었다.
“땡입니다. 중간에 글자 세 개가 빠졌어요.”
“네?”
서상현 PD의 말에 모두가 벙쪘다.
“정확한 대사는 ‘두 다리를 잃고 나서야 제대로 서는 법을 배웠습니다.’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서상현 PD의 말에 유정인이 항의했다.
그러자 서상현 PD가 씨익 웃었다.
엄청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우리 프로그램은 정확한 대사를 지향한다는 점을 아시는 분들이 우기시면 안 되죠.”
“이런 게 어딨어!”
그렇게 마지막 라운드도 허망하게 패배로 녹화가 끝이 났다.
3라운드 전부 패배하긴 했지만, 방송 적으로는 꽤 알차게 녹화된 것 같다.
분량도 편집 없이 낭낭하게 받을 것 같고.
이제 앞으로의 일정 중 굵직하게 남은 건 스타즈 컴백이랑 신희진의 드라마 오디션뿐인가.
하루하루가 참 빠른 것 같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