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바쁘게, 더 바쁘게 (3)
“여기까지가 주로 다니는 곳이고, 여기 바로 위층은 대표실인데 아마 갈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네!”
안혜지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내게 보내며 노트에 필기했다.
새롭게 입사한 안혜지에게 회사 내부를 안내하는 중이었다.
근데 이 상황이 조금 억울했다.
나는 이런 대접 못 받았는데.
안혜지를 소개받고 무슨 일을 시킬까 고민하던 찰나에 남진수가 나보고 회사 내부를 알려주라며 오늘 하루 플랜을 짜주고 사라졌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완전 방치 그 자체였다.
아무리 이 바닥이 여자가 귀하다지만 이 온도 차는 무엇인가.
“그리고… 뭐, 궁금한 거 있어요?”
“일이 많이 힘든가요…?”
안혜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이 힘드냐니, 모르고 매니저를 지원한 건가?
불안했다.
며칠 있다가 힘들다고 퇴사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매니저 힘들죠. 알고 입사하신 거 아니에요?”
“아, 알고는 있었는데… 얼마나 힘든지는 몰라서요. 항상 궁금했거든요.”
“뭘 생각하든 그 이상일 거예요. 각오하시는 게 좋아요.”
안혜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나이가 스물넷이라고 했던가.
“다른 거 궁금한 건 없으세요?”
“어… 실장님 이야기로는 진급을 무척 빠르게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비결이 있으신가요?”
안혜지의 질문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처음엔 일이 힘든지를 묻고는 그다음 질문은 진급을 빨리하는 비결이라.
종잡을 수 없는 친구네.
“비결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그냥 내 연예인을 우선하자는 마인드로 하니까 빨리 승진하게 된 것 같아요. 왜요?”
“아, 제 꿈이 정인수 대표님처럼 아티스트를 키워 대표를 해보는 거여서요.”
“모든 매니저라면 그게 꿈이죠. 그걸 바라보고 박봉에 일이 힘들어도 꿋꿋이 참고 하는 거고요.”
눈을 빛내는 안혜지를 보며 매니저는 다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 손으로 스타를 키운다는 짜릿함.
매니저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다른 질문은 더 없으신가요?”
“네. 또 생기면 여쭤볼게요. 근데 팀장님.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 그건 좀 편해지고 나면 그렇게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도망치지 않을 것 같은 싹이 보이면 그때나 말을 놔야겠다.
괜히 먼저 말 놓고 편하게 대했다가 도망간다면 그만큼 허탈한 일이 또 있을까.
벌써 도망간다는 가정을 세우는 게 우습지만 그만큼 자주 바뀌었다.
저번에 애들과 같이 음악방송 활동할 때는 주마다 매니저가 바뀐 그룹도 있었다.
“그럼 이제 애들 만나러 가볼까요? 운동 끝나고, 지금쯤이면 연습실에 있을 거예요.”
“네!”
“조금 긴장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애들이 좀 별나거든요.”
애들을 만나고 나서 안혜지의 두 눈 가득한 기대감이 어떻게 바뀔지 사뭇 기대되었다.
* * *
“드디어 우리의 고충을 들어줄 사람이!”
“진짜 너무너무 기다렸다구요! 왜 이제 오셨어요!”
안혜지가 애들의 친화력에 당황했다.
특히 서지영과 유미소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안혜지와 어울렸다.
물론 어울린다는 건 철저하게 유미소와 서지영의 입장이고 안혜지는 지금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애들과 처음 만나는 스태프들의 대부분은 안혜지와 반응이 비슷했다.
나야 애들이 스태프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 상황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우리 스태프들이 입을 모아 애들을 평하길, 친화력이 너무 좋아 여동생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서 스태프 중에 애들을 싫어하는 스태프는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스태프에게 이렇게 친밀하게 대하는 건 또 아니었다.
애들이 남자 스태프와 여자 스태프를 대하는 태도에는 온도 차가 조금 심한 편이었다.
나와 남진수는 애들과 자주 보고 친해져서 그런지 별다른 차이는 없었지만, 남자 스태프들에게는 꽤 조심스러워서 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앞으로는 매일 볼 텐데 그만 괴롭혀.”
그래도 애들의 친화력에 안혜지가 곤란해하는 것 같기에 구해줄 요량으로 애들을 제지했다.
“괴롭히다뇨! 친해지는 중인데요!”
“너로서나 친해지는 거지 남들이 보면 괴롭히는 거야, 그거.”
내 말에 서지영이 전생에 나라 잃은 듯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쟤는 전생에 여우가 분명했다.
이런 생활 연기는 신희진 뺨 때릴 정도로 잘했다.
“언니, 진짜 그래요? 싫으세요?”
“아뇨. 이렇게 환대해 주시는데 싫을 리가 있을까요?”
안혜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지영이 의기양양하게 내게 소리쳤다.
“봐요!”
“어휴, 그래. 그래.”
나는 서지영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질투 나서 그렇죠?”
“뭔 질투?”
이번엔 유미소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다른 언니들이랑 이렇게 놀 때는 뭐라 안 했잖아요.”
“그야 혜지 씨는 직속 식구고, 거긴 직속이 아니잖아.”
“흐응. 후배가 들어왔다~ 이거네요?”
“뭐… 그렇지.”
어느새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내게 다가와 말하는 신희진의 태도에 움찔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바로 밑인데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겠나.
“오늘 애들 스케줄은 딱히 없으니 애들이랑 이야기 좀 더 나눠보세요. 업무는 내일부터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스케줄이 있는데 스케줄 정리해서 연락드릴게요. 스케줄 톡방은 초대받으셨죠?”
“네!”
“그리고 당분간은 저도 애들 픽업을 같이하겠지만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인계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안혜지가 일 이야기가 나오자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그리고 안혜지가 오면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바로 애들의 픽업이었다.
흐, 드디어 픽업 지옥에서 해방이다.
“오빠 근데, 내일 스케줄 있어요?”
“엉? 내가 이야기 안 했나?”
이나라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내게 말했다.
“네.”
“내일 재성이랑 희진이랑 둘이 인터뷰하나 잡혔어. 영화 관련해서 잡지에 실릴 인터뷰.”
“아, 우리 스케줄은 아니네요. 희진이 개인 스케줄이구나.”
“응, 너네는 당분간 큰 스케줄은 없을 거야. 앨범 준비도 있고, 콘서트 준비하느라 너희 쉴 시간이 없었잖아? 그러니 2월은 조금 쉬엄쉬엄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많은 기획사가 아이돌을 기계처럼 쉴 틈 없이 굴리는 경향이 컸다.
수명이 정해져 있기에 빠르게 수익을 뽑아내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이돌은 망가져 간다.
아이돌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헥사곤이 여유가 없는 회사라면 쉴 틈 없이 굴렸겠지만, 헥사곤은 여유가 있는 회사였다.
그리고 기존 스타즈의 전략 노선의 재점검도 필요했다.
기존 스타즈의 전략 노선은 노출 최소화한 약간의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해체를 염두에 둔 전략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가 한창이었다.
“오빠, 제가 뭐 준비해야 할 거 있어요?”
신희진이 내게 다가와 내일 스케줄 준비를 물었다.
“딱히 준비할 건 없어. 영화 잡지에 실을 인터뷰인데, 별건 없을 거야. 질문지는 내일 인터뷰 장소 가면서 뽑아서 줄게.”
“네!”
자, 다시 일할 시간이다.
오늘 출근할 때만 해도 업무 생각에 컨디션이 최악이었는데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 * *
“여, 충무로의 샛별 이진철 씨. 뭐 하시나.”
- 뭐하긴 집에 박혀 있지.
“인터뷰도 좀 하고, 뭐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충무로의 샛별이면 뭔가 좀 바쁜 줄 알았는데.”
- 내가 무슨 연예인이냐?
전화기 너머로 이진철의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안재성과 신희진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진철이 생각나 잠깐 나왔다.
영화가 개봉한 후로 연락을 한 번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기분은 좀 어때?”
- 잘 모르겠어. 그냥 덤덤해.
“아무튼, 성공적인 데뷔 축하한다.”
- 고맙다.
신나서 들뜰 법한데도 이진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돈은 좀 만졌냐?”
- 정산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뭘. 그리고 나보단 제작사가 돈방석에 앉겠지. 따지고 보면 투자자가 너희 회사니까 저투자로 크게 당기겠네.
“뭐야, 러닝개런티 계약 아니었어?”
- 러닝개런티는 무슨. 내가 이신형 감독님이냐?
“하긴….”
러닝개런티로 계약했다면 돈방석에 앉았을 텐데.
지금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박스 스코어는 팔십만이 조금 넘은 정도였다.
수십억 박아 개봉하는 상업 영화 기준으로 팔십만은 망한 영화다.
그러나 2억짜리 영화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 안재성과 신희진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기도 했다.
- 근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
- 싱겁긴.
담담하게 말하는 이진철의 목소리에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차기작은 준비 중이고?”
- 준비는 하고 있지. 언제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 알았다. 조만간 얼굴이나 보자.”
- 그래.
흥행에 성공해 기뻐서 자랑하거나 어깨라도 으쓱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진철은 여전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안에서는 인터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안혜지에게 다가가 내가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물었다.
“별일 없었지?”
“네.”
안혜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뒤 인터뷰 내용에 집중했다.
“드라마나 영화 생각하고 계신 게 있나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죠. 영화 찍을 때 연기가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본업인 가수에 집중하려고 해요. 제가 솔로 가수면 모를까 그룹으로 활동 중이고 컴백 준비 중이거든요.”
“아! 연기가 너무 좋아서 자꾸 깜박깜박하네요. 그럼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시는 거군요.”
“네.”
인터뷰어가 립서비스가 좋네.
인터뷰어가 신희진에게 한차례 웃은 뒤 이번엔 안재성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성재원 감독님의 Finder도 찍으셨죠? 현장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판성식 배우님이 안재성 배우님을 그렇게 챙긴다고 하던데요?”
“절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Finder를 통해 선배님에게는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많이 배웠다고 하시는데 어떤 점을 배우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진철 감독님의 영화에선 아무래도 신인 위주의 배우들만 있어서 조금 어려웠거든요. 저도 신인이었고요. 판성식 선배님을 통해서 현장에서 배우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안재성의 답변을 들은 인터뷰어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마지막으로 두 분은 어떻게 이 영화에 참여하시게 됐나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신희진과 안재성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안재성이 먼저 입을 뗐다.
“저는 이진철 감독님과 예전 이신형 감독님 현장에서 만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영화 이야기가 나왔고 그때부터 영화를 차근차근 준비했었습니다.”
안재성이 말을 끝낸 뒤 신희진에게 눈치를 줬다.
“저는 지금 팀장님이 연기 한번 해보지 않을래? 하고 저에게 물어봤던 게 시작이었어요. 그다음에 이거 한번 해보자. 하시길래 알겠다고 했죠.”
둘의 답변은 능숙했다.
인터뷰어도 딱히 추가 질문할 게 없었는지 둘의 답변에 환하게 웃으며 클로징 멘트를 했다.
“마지막으로 시네마일레븐을 보는 구독자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아이돌의 신희진도 사랑해 주시고 배우로서의 신희진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앞으로 더 기대되는 배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 쭉쭉 커가는 둘을 보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인터뷰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드라마라….
뭔가 없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