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바쁘게, 더 바쁘게 (1)
“김현진 팀장. 생각해둔 컨셉은 있습니까?”
전략기획실 팀장이 내게 물었다.
콘서트가 끝나자마자 앨범 기획 회의라니.
새로운 명함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일이 생겨버렸다.
콘서트가 끝난 직후 내 직급은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남진수도 실장이 되었고, 이진성 실장도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둔 컨셉은 있습니다. 근데 곡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또 다를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더는 묻지 않는 걸 보니 내게서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던 듯했다.
이내 전략기획실 팀장이 민서희 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A&R팀에서는 곡 선정이 다 완료되었던가요?”
“네. 일차적으로는 걸렀습니다. 근데 이번에도 김현진 팀장이 메인 키를 잡나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표님께서 별말씀 없으셔서요.”
나도 궁금했던 질문이었는데 민서희 팀장이 대신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다행이다. 아직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해야 할 말은 정해졌다.
조용히 손을 들자 회의를 주도하고 있던 전략기획 팀장이 나를 보았다.
“네, 할 말 있으신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은… 민서희 팀장님이 맡았으면 합니다.”
“네? 저요?”
“네.”
내 말에 민서희 팀장이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민서희 팀장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생각해둔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다른 게 아니었다.
노래에 대한 퀄리티와 방향성은 전문가가 맡는 게 맞다.
내가 지금까지 성공했던 이유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들이 이제는 너무 불확실해졌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은 내가 감으로만 키를 잡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그렇다면 나 말고 누군가가 필요했다.
난 그 사람을 민서희 팀장이라 생각했다.
특히 바로 전 앨범인 Fairy 작업을 했을 때 그녀의 지식과 감각은 확실히 돋보였었다.
어비스의 성공 지분에 자기가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한 건 괜한 게 아니었다.
전략기획 팀장이 나와 민서희 팀장을 한번 보더니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팀별 진행 상황 저에게 매일 보내 주시고, 김현진 팀장은 오늘 대표님이랑 미팅 잡혀 있죠?”
“네.”
“대표님 오더 나온 대로 저한테 알려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겠습니다.”
전략기획 팀장의 말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실에는 나에게 용건이 있는지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민서희 팀장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민서희 팀장이었다.
“김 팀장님? 현진 씨? 뭐라고 불러야죠?”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냥 현진 씨라고 부를게요. 아무래도 이게 편해서.”
“네.”
민서희 팀장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하더니 다시 냉철한 커리어우먼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왜 그러셨죠?”
“왜라뇨?”
“현진 씨가 컨트롤해도 되잖아요.”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순전히 운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흐응, 그래요?”
“네.”
내 대답에 민서희 팀장이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운도 실력이라면서요? 믿어보라면서요?”
“하하, 그랬죠. 저는 저번처럼 작업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번엔 제가 주가 아닌 민서희 팀장님이 메인으로요.”
“뭐가 다르죠? 저번이랑 다른 게 없는 거 같은데.”
“전에는 민 팀장님이 관망했다면 이번에는 제가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의견만 제시하겠다?”
“네. 맞아요.”
민서희 팀장이 팔짱을 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네. 근데 그에 더해서 애들 의견 참고를 많이 했으면 합니다.”
“그거 위험한 건 아시죠?”
“네. 압니다. 근데 저랑 민 팀장님이 컨트롤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애들의 의욕도 더 생길 거고요. 지금은 항상 회사에서 정해주고 통보했잖아요. 이거 해! 하면서.”
“흐음….”
잠깐의 생각 정리가 필요한지 민서희 팀장이 눈을 감았다.
나는 차분히 민서희 팀장을 기다렸다.
“그건 이야기 된 거예요? 애들도 알아요?”
“아뇨. 애들 휴가 복귀하고 나면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요.”
“대표님 승인은요?”
“그것도 아직요.”
“근데 뭘 믿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민서희 팀장이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 자신감의 근원?
간단했다.
“절 믿고요.”
“네?”
민서희 팀장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니까 조금 부끄럽긴 하네.
“매니저의 기본 덕목이 뭡니까? 영업 아니겠습니까? 제가 대표님 대상으로 영업 한번 해보겠습니다.”
“푸핫, 말씀하시는 게 참 웃기시네요? 개그맨 하지 그랬어요?”
내 말이 끝나자 민서희 팀장이 까르륵 웃었다.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있자 민서희 팀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내게 말했다.
“정인수 대표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데….”
“대표님은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쉽게 뚫릴 사람이 아닌데….”
민서희 팀장이 재차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 민서희 팀장에게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영업의 기본은 웃음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나.
“그건 지금 부딪혀 보고 올게요.”
* * *
“자신 있나?”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잘만 뱉는 거 같은데.
예상보다 정인수 대표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특히, 애들에게 앨범을 맡긴다는 생각 자체를 반대했다.
어비스도 애들 자체적으로 앨범에 손대서 그게 터진 그룹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관망하겠다면 팀장을 달아준 이유가 없는데….”
정인수 대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모든 걸 다 컨트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서희 팀장의 능력은 대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서희. 능력 좋지. 좋아. 근데 가만 보면 너무 예술을 하려고 해. 그게 문제야.”
“그건 제가 컨트롤 하겠습니다.”
정인수 대표가 왜 민서희 팀장에게 맡기지 않는지 조금 이해가 됐다.
예술이라. 상업에 예술은 사치다.
상업에 예술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예로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영화라는 매체다.
상업영화에 예술 섞는다고 망한 영화가 한둘인가.
영화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로 괜히 구분되는 게 아니었다.
“좋아. 서희가 한다고 쳐. 근데 애들 의견도 넣겠다고?”
“네.”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정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는 게 바로 이거였다.
애들의 앨범 참여.
난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정인수 대표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요즘 추세가 프로듀싱을 본인들이 하는 아이돌 그룹도 많지 않습니까?”
“그거는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다 약 치는 거고.”
“저는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틀을 잡으면 앞으로도 그 틀에 맞추면 될 테니까요. 게다가 리스크를 크게 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흠.”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인수 대표가 고민했다.
아마도 어비스를 생각하는 거겠지.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스타즈가 어비스 때보다 훨씬 좋았다.
애들의 참여는 내가 생각 없이 지른 이야기가 아니었다.
콘서트가 마무리되고 난 직후, 애들의 팬덤 결집력이 무척 높아졌다.
다음 앨범이 진짜 개똥으로 나와도 이탈이 크지 않을 거다.
한 번쯤은 말이다.
지금 이 시기는 스타즈가 뭘 해도 되는 시기다.
그럼, 애들에게 맡겨보고 결과를 봐도 되지 않을까.
그 결과가 좋다면 오히려 회사도, 스타즈도 윈윈이다.
어비스처럼 알아서 쑥쑥 클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제가 실망하게 해드린 적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내 태도에 정인수 대표가 피식 웃었다.
“좋아. 한번 해봐.”
“네, 감사합니다.”
20여 분간의 설전 끝에 겨우 허가를 받았다.
이제 뒤는 없다. 앞만 보고 달릴 뿐.
“근데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것도 알지?”
내 다짐과 다르게 정인수 대표가 나직이 말하는 말에 식은땀이 살짝 흘렀다.
* * *
“저번이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노래 들려주면 저희도 의견 제시하고….”
“맞긴 한데, 이번엔 좀 더 너희 의견을 들어준다는 거야.”
이나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서지영이 나를 보며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질문 있습니다!”
“뭔데?”
“자작곡 넣어도 되나요?”
“민 팀장님이랑 김동현 작곡가님이 오케이 하면 되겠지?”
아무거나 넣을 수는 없었다.
애들의 의견을 존중해 앨범을 제작하겠지만 생뚱맞은 곡을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동현 삼촌은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서희 언니는 좀…. 오빠가 도와주면 안 돼요?”
“내가 뭘 도와줘? 일단 만들어봐. 아직 3월까지는 시간 있으니까.”
“노래가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구요!”
“그럼 못 넣는 거지.”
다소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서지영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기편 안 들어준다고 삐진듯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나라가 끼어들었다.
“지영이가 저렇게 말은 해도 자기가 만든 거, 꽤 있을걸요? 숙소에서도 시간 나면 이어폰 끼고 노트북 만지고 있더라고요.”
“그래?”
“네.”
의외다 싶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서지영을 쳐다봤다.
서지영이 쑥스러운 듯 내 눈을 피했다.
꾸준히 연구하고 공부했다면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지영이 의외로 프로듀싱에 능력이 있는 거 같았으니까.
“근데 내일 재성 오빠는 같이 못 가요?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은데.”
신희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스타즈 일곱 명과 같이 신희진의 첫 데뷔작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을 보러 간다.
“그건 마케팅팀에서 하지 말라더라.”
“왜요?”
마케팅팀의 의견으로는 상업영화 스케일이 아니었기도 했고, 몰려가는 것보다 분산하는 게 홍보 효과가 더 생길 수 있다며 언질을 줬다.
“너무 노골적으로 홍보하는 것 같다고. 물론 너희가 단체 관람하는 건 홍보 목적이 맞는데 노골적인 것과 은은하게 노출하는 건 좀 다르니까. 그래서 나중에 따로 가기로 했어.”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너희들이 단체로 관람하는 건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거든. 재성이는 내일 모래 이예진 선배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순차적으로 노출하면서 영화에 대한 홍보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었다.
돈을 왕창 때려 박은 영화였다면 시사회도 잡고 빵빵하게 홍보를 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은 그러지 못했다.
“예진 언니 스케줄이 된대요?”
“응. 따로 빼줬어. 따지고 보면 그 영화에 우리 자본 들어갔지. 짧게 나온다고 하지만 선배님 들어갔지. 꽤 투자한 게 많은 작품이야.”
“어. 그러네요?”
신희진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작게 감탄했다.
안재성이 우리 회사 품으로 들어오면서 회사에서 보는 영화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
게다가 신희진도 우리 회사 품으로 오지 않았나.
그래서 마케팅팀이 붙어 홍보 전략을 짜게 되었다.
아이돌 그룹과 탑 배우가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
둘 다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알리면서 홍보하기 딱 좋았다.
“멤버끼리 단체로 영화 보는 건 처음이라 기대된다. 그게 우리 멤버가 찍은 영화라서 더더욱!”
유미소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기대감을 표출했다.
“난 희진 언니가 어떻게 연기했을지가 제일 궁금해. 얼마나 잘할까!”
그러나 서지영은 악동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지영은 또 놀릴 생각만 그득한 것 같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신희진이 서지영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 건수 잡아서 놀릴 생각 가득한 표정이거든?”
“앗! 들켰나?”
서지영이 신희진에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뻔하지 뭐. 자기 당한 거 있다고 저러니까. 근데 희진 언니는 별 타격 없을 거 같은데.”
서지영에게 줄곧 당한 박혜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주제는 앨범에서 어느덧 신희진의 영화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애들은 내일 개봉하는 영화에 대해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나 또한 애들의 기대만큼 기대하는 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