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꽃은 핀다 (1)
“뭐해? 안 갈 거야?”
남진수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 네. 곧 정리하고 갈 거예요.”
“일 있다고 일찍 가겠다고 한 녀석이 왜 이리 태평해? 급한 거 아니었어? 오늘 누구 만나길래 그래?”
“누구를 만난다기보단 만남을 기대하는 쪽에 가까워서요.”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요.”
어리둥절한 내 말에 남진수가 황당하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오늘은 내게 있어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이 바로 회귀의 매체라고 생각했던 할머니를 만났던 날이기 때문이다.
1월 16일.
오늘 아침에 회사에 왔을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긴장됐다.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올지, 아니면 다시 돌아갈지 말이다.
내 짐작으로는 아무 일 없이 흘러갈 것 같지만,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일 보고 가서 푹 쉬어라. 내일 Finder 촬영이 일찍 잡힌 거만 아니었어도 일 있다고 일찍 보내주는 건 어림도 없었는데.”
“하하….”
남진수의 거들먹거리는 말에 움찔했다.
안 보내줬다면 무단으로 도망갔을 거다.
오늘은 회귀 전처럼 같은 시간에 그 거리에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Finder 촬영은 내일로 끝이지?”
“재성이 촬영은 내일로 끝나고, 나머지 분들은 일주일 정도 더 찍는다고 해요. 보충 촬영으로 몇 신 더 찍으면 판성식 선배님 촬영만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성재원 감독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몇 장면을 다시 찍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안재성이 참가하는 장면은 없었다.
“그럼 재성 씨 촬영은 사실상 종료네.”
“네. 재성이는 촬영 끝나고도 계속 촬영장 나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번 촬영에 안재성은 자신의 촬영이 끝나도 촬영장에 출근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소리를 현장에서 들은 판성식이 뭐 그리 사서 고생하냐면서 껄껄 웃은 건 덤이었다.
“네가 보는 눈은 있나 봐. 난 다 하는 베테랑들도 이뻐 하는 거 보면. 난 솔직히 신인 배우 물어왔다길래 딱히 기대는 안 했었거든.”
“하하, 느낌 좋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성장 괜찮은 배우를 먼저 주워 담은 게 다였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내 사람이 인정받는 건 항상 즐겁다.
“이 바닥에 느낌 좋은 사람이 한둘이냐? 느낌 좋다고 다 뜨게. 어쨌든 아까 시킨 건 마무리하고 퇴근해라.”
“네, 알겠습니다.”
남진수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사라졌다.
남진수가 시킨 일은 이미 끝냈다.
단지 지금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나갔던 시간은 대충 4시 30분.
그리고 지금 시간은 4시 12분이었다.
혹시 모르니 지금 정리하고 나가볼까.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생했어. 내일 고생하고.”
“네. 고생하세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업무를 보고 있는 남진수에게 인사를 하고 회사 정문으로 나왔다.
으슬으슬 떨리는 게 제법 추웠다.
그때도 이렇게 추웠나 싶다.
초조하게 핸드폰 시간을 바라보며 시간을 축였다.
1분, 2분, 3분….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내가 기억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4시 30분.
과연 할머니는 다시 오늘 이 자리에서 모습을 보일까?
그때 봤던 여자는 그대로 여기를 걸어갈까?
궁금했다.
이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던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내 기억 속에 또렷이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두꺼운 패딩에 털모자를 쓴 아담한 키를 가진 여성.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있는 여성만 보였고, 이리저리 돈을 구걸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차 여성이 가까이 오자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말을 걸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성이 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때까지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허탈하고 묘했다.
이대로 끝인 건가?
그렇게 다섯 시까지 하염없이 멍하니 거리만 바라봤다.
뭔가 꿈만 같았다.
* * *
아무 일도 없이 집에 돌아왔다.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샤워를 한 뒤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열어 연예 뉴스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무슨 기사를 봤었더라.
[연장에 성공한 스타즈. 올해의 기대되는 그룹 No. 1]
[롤모델은 스타즈. 일곱 명의 소녀들. 아이틴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아니,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게 풍성했다.]
[어비스는 어떻게 해외에서 성공했을까_E.Trend]
회귀 전에는 오늘 스타즈의 해체 기사를 보며 안타까움을 흘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대되는 그룹이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기사들은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스타즈를 롤모델로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새로 데뷔한 그룹의 기사, 어비스의 시장 성공을 분석한 기사, 그리고 이진철의 데뷔작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을 다룬 내용의 기사였다.
예전에도 이진철의 영화로 이맘때 즈음 꽤 시끄러웠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컴퓨터를 끄고 책상 속 깊숙이 넣어두었던 노트를 찾아 꺼냈다.
회귀하고 나서 내가 알던 1년을 부랴부랴 적어두었던 일명 회귀 노트.
요긴하게 쓸 줄 알았던 이 노트의 효용성은 얼마 가지 않았다.
회귀 후의 흐름은 5, 6월까지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스타즈의 Love Up&Down 성공 이후로는 죄다 틀어졌기 때문에 볼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내가 알던 흐름과 내용도 몇몇 있기에 도움을 아예 못 받은 건 아니었지만.
돌아온 1년 새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애들에게 악재가 되었던 스캔들을 하나둘 막아내고, 또 괜찮은 소스였던 걸 미리 가져와 활용하는 등,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스타즈의 마지막 콘서트가 아닌 첫 콘서트가 코앞에 다가왔다.
처음 회귀하고 애들을 만났을 때, 콘서트만 올리게 해보자고 생각하고 무작정 직진만 했다.
그런데 막상 콘서트 일이 다가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게다가 내일 아침이 되면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돌아오고 나서부터 눈 감고 눈 뜨면 이 모든 게 꿈일까 걱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그 시달림도 내일로 마무리되겠지.
내일 눈 뜬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1월 17일일까, 아니면 10월 9일일까.
* * *
“액션!”
성재원 감독의 액션 소리와 함께 촬영장이 숨 막히듯 고요해졌다.
오늘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 게 무색하게 오늘이 밝았다.
그리고 안재성과 같이 촬영장에 나와 안재성의 연기를 모니터링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찍는 장면은 안재성과 판성식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판성식과 안재성이 취조실에서 강렬하게 부딪히는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한 장면.
“결국, 이기셨네요. 반장님.”
고요했던 촬영장이 안재성의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깨졌다.
안재성을 판성식이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랬어?”
“이유는 그때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대의…라고 했나? 그때의 개소리가?”
차분했던 판성식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에 반해 안재성은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판성식을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초반에 안재성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열정적이었던 형사였다.
그러나 극이 점차 진행되면 밝혀지는 실상은 자신의 신념을 위한 냉소적인 사이코패스 살인마였는데 이를 잘 표현해내고 있었다.
담담하면서도 신념에 가득 찬 표정과 눈빛의 안재성은 보는 사람들이 극에 몰입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네. 대의죠. 대의를 위해선 소의 희생이 필요한 법입니다.”
“대의? 네가 저지른 게 대의라고?”
안재성의 태도에 판성식의 어투가 황당함을 넘어 거칠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도 경각심을 가지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대의죠.”
“잘못된 신념을 가진 자가 무섭다더니, 그 꼴이 따로 없구나. 사람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질 줄이야.”
“제가 생각한 결말은 공권력의 허점을 여실히 내보여주는 거였는데… 이 점은 아쉽게 되었습니다.”
쿵!
판성식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책상을 내려쳤다.
“네가 원하는 결말은 나지 않아. 심판은 법이 해줄 거다.”
그렇게 판성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재성에게 말했다.
판성식의 말을 들은 안재성의 몸이 들썩였다.
“끅, 끅… 끄하하!”
안재성이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멈추고 판성식을 노려봤다.
안재성의 분위기가 무언가 섬뜩했다.
모니터에서 비치는 안재성의 표정은 광기 그 자체였다.
“언제부터 반장님이 법을 찾으셨는지… 참 우습네요. 누구보다도 나태했고, 법을 우습게 알던 반장님이 말이에요.”
판성식이 안재성을 슬픈 얼굴로 바라봤다.
이 짧은 장면만 해도 판성식의 표정 변화가 다섯 번이 훌쩍 넘었다.
“나태했던 건 인정해. 그러나 법을 우습게 알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안재성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도… 다시는 너 같은 사람이 안 생기도록 노력하마. 벌은 법대로 받아라.”
안재성의 태도에 씁쓸하게 말하는 판성식.
이내 판성식이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내 앞에 있던 성재원 감독이 몸을 들썩이더니 크게 소리쳤다.
“컷!”
성재원 감독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맴도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좋아, 좋아! 이대로만 가자고!”
껄껄 웃으며 말하는 성재원 감독을 보며 오늘 마지막 촬영이 순조롭게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재성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촬영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그런 안재성에게 여러 스태프가 다가와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안재성의 현장 내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모난 거 없이 연기도 제법 잘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그 와중에 성재원 감독이 한차례 안재성을 격려하고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떠나자 판성식이 다가왔다.
“고생했어.”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내가 뭘. 네가 잘했지.”
“아닙니다.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게 봐주니 고맙고.”
둘의 모습은 참으로 훈훈했다.
그렇게 훈훈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판성식이 나를 바라봤다.
“아, 그리고 김 매니저. 저번에 부탁했던 건….”
“아, 여기 있습니다.”
판성식에게 가지고 왔던 스타즈의 콘서트 티켓을 꺼내 건네주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는데 촬영이 끝나 긴장이 풀려 깜빡 잊었었다.
판성식의 자녀들이 스타즈의 팬이라고 콘서트 티켓을 구해달라고 했었다.
판성식이 내게서 티켓을 건네받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고마워. 나중에 꼭 보답하지. 아들이랑 딸 앞에서 체면은 차리겠어.”
“보답은 재성이에게 해주세요. 그게 저에게 보답해 주시는 겁니다.”
내 말에 판성식이 안재성을 바라봤다.
“보답? 그럼 좀 더 갈궈야겠네. 그게 보답 아냐?”
“하하, 선배님이 해주시는 말은 이제는 정겹습니다.”
안재성의 말에 판성식이 활짝 웃었다.
“그래? 수위를 높여야겠어. 오늘 괜히 더 있지 말고 어여 들어가 봐.”
“네, 내일 뵙겠습니다.”
안재성의 인사를 받은 판성식이 손을 휘젓더니 이내 뒤돌아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안재성의 Finder 촬영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게 있어 뜻깊은 17일이 지나갔다.
앞으로 남은 이벤트만 걱정하면 되려나.
스타즈의 콘서트.
그리고 그 후에 있을 이진철의 영화 개봉.
이제 다시 시작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