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1)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울려 퍼진 목소리에 촬영장이 부산스러워졌다.
“으핫, 힘들다.”
쉬었다 가겠다는 조연출의 말에 광고 촬영을 하고 있던 스타즈가 남진수 곁으로 우르르 다가왔다.
“덥지? 물 먹어라.”
남진수가 미리 갖춰둔 생수를 가리키며 스타즈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근처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든 유미소가 손으로 부채질하며 말했다.
“와, 곧 겨울인데 여긴 왜 이렇게 덥지?”
“아마 조명 때문일걸? 오늘 촬영장이 내가 본 촬영장 중에서 조명이 역대급으로 많은 듯.”
“그러네. 확실히 많다.”
유미소의 말에 박혜연이 촬영장을 쓱 훑어보더니 부채질하고 있는 유미소에게 말했다.
“언니! 나도 줘!”
“넌 손이 없어? 네가 와서 가져다 먹어.”
“아,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래. 언니가 더 가깝잖아.”
“언제 철 들을래?”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서지영에게 이나라가 훈계조의 말투로 말했다.
“나라 언니는 진짜 우리 엄마랑 말하는 게 어떻게 똑같아? 그리고 철은 예전에 들었거든~”
남진수가 이런 애들의 투덕거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남진수에게로 신희진이 다가왔다.
“팀장님!”
“왜?”
“심심하시죠?”
“아니? 일하는데 뭐가 심심해. 오히려 너희 혼자서 상대하려니까 죽을 맛이구먼.”
“저희가 뭐요!”
“너희가 하는 짓을 봐라. 어휴, 초딩도 아니고… 새삼 현진이의 빈자리가 크다. 막상 너희 컨트롤하려니까 죽을 맛이야.”
“저희가 좀 감당 안 되기는 하죠.”
신희진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현진 오빠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요?”
“글쎄, 재성 씨 연기하는 거 열심히 구경하고 있지 않을까? 너랑 영화 찍을 때는 어땠는데?”
남진수의 말에 신희진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눈을 뜨고 남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열심히 모니터링하면서 따봉만 날렸던 거 같아요.”
“그럼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겠지.”
남진수가 말하면서 표정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잠깐만. 그럼 걔는 지금 편하게 꿀 빨고 있다는 소리잖아?”
“어, 말이 그렇게 되나요?”
신희진이 남진수의 반응에 당황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모니터링만 하면 얼마나 편한 거냐.”
“하하… 팀장님도 지금 똑같잖아요.”
남진수의 거친 말투에 신희진이 어색하게 웃다 이어 말했다.
하지만 신희진의 말에도 남진수의 구겨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걔는 한 명이고 너희는 일곱 명이잖아.”
“그렇긴 하죠.”
신희진이 남진수의 말에 덤덤히 대답하고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갑자기 바빠지니까 적응이 안 되네요.”
“한동안 엄청 바쁠 테니까 숙소에서 잠 많이 자둬. 차에서 쪽잠 자야 할 수도 있으니까.”
“엑.”
남진수의 말에 곁에 있던 유미소가 짧게 비명을 냈다.
“‘엑’이 아니야. 그만큼 지금 스케줄이 빡빡해. 봐서 알잖아?”
“알아요. 한가한 거보다 바쁜 게 좋죠! 돈 많이 벌 수 있으니까!”
“정산 맛 한번 보니까 정신을 못 차리네.”
남진수의 말에 유미소가 헤실헤실 웃었다.
“촬영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멀리서 들린 외침에 부산스러웠던 촬영장이 다른 의미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으어, 촬영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좀만 더 고생해.”
“네!”
대답하고 촬영 준비하러 가는 스타즈를 보며 남진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휴, 힘들다. 힘들어. 한 명을 더 구하긴 해야겠다. 현진이는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오늘따라 그립네.”
* * *
“나가!”
“감독님, 죄송합니다.”
“나가라고 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한 번만….”
성재원 감독이 윽박지른 대상이 애절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했다.
“그 간단한 거 하나 못 해서 세 번을 끊어 먹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라고 이 새끼야! 우리 집에 있는 개가 더 잘할 거 같은데?”
그러나 상대의 태도에 성재원 감독이 더 위협적이고 살벌한 목소리를 내며 현장을 울렸다.
촬영만 하면 개차반에 폭군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물론 단역 배우가 실수한 게 맞긴 했지만, 고작 3테이크에 저렇게까지 윽박지를 일인가 싶었다.
게다가 인격 비하까지.
그래, 이래야 영화판이지.
내가 너무 좋은 분위기의 촬영장만 다녔다.
“살벌하네요.”
“그러게.”
나와 안재성은 아직 촬영 대기 중이었다.
지금 장면은 판성식과 단역 배우가 나오는 장면이었고, 이다음이 안재성과 판성식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성 감독. 거,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봅시다. 이러다 또 기사 뜨겠어.”
판성식이 너털너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 뜨면 뜨는 거지. 내가 틀린 말 했나?”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성재원 감독이 판성식의 말에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다시 또 봐도 신기했다.
불같이 화내는 성재원 감독의 억제기는 판성식이었다.
지금 같이 성재원 감독이 화내는 경우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판성식이 해결했다.
판성식이 없는 성재원 감독의 촬영장은 어땠을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마지막이야. 희택아! 스탠바이 해!”
다행히 판성식의 호소가 먹혔는지 성재원 감독이 실수한 단역 배우에게 기회를 줬다.
이번엔 진짜 잘해야 할 텐데.
나와 안재성은 아무 말 없이 다시 현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분위기의 핵심인지 빠르게 파악하면 다소 도움이 된다.
이예진의 경우에는 짬이 높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고, 신희진의 경우에는 아는 인맥들이 많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 촬영장은 내게 생소한 촬영장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우리의 위치는 ‘신인’이었다.
처세를 잘못하면 지금 곤혹스러워하는 단역 배우처럼 밟혀 으스러질 게 분명했다.
물론 안재성의 연기력으론 그럴 일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앞으로 있을 안재성과 판성식의 호흡이 어떨지 생각하니 내가 연기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괜히 내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다.
예전에 이예진과 연기할 때의 호흡도 정말 괜찮았는데.
“슛 들어가겠습니다!”
성재원 감독이 희택이라고 불렀던 조연출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다들 분주하게 움직여 바로 촬영 준비를 했다.
이내 슬레이트를 담당하는 연출부 막내가 슬레이트를 가져다 대고 크게 외쳤다.
“7-3-4!”
딱!
“액션!”
우렁찬 성재원 감독의 말과 함께 촬영이 재개되었다.
* * *
두 남성이 봉투를 들고 구석진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야, 철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어떤 거 말입니까, 반장님?”
판성식의 말에 김철수가 의뭉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보여주기식 수사 말이야.”
“이게 어떻게 보여주기식입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아니겠습니까.”
“21세기에 과학수사를 해야지 몸으로 때우는 게 정상이냐?”
열의가 가득한 김철수의 말에 판성식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김철수는 판성식의 말이 다소 신경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과학수사가 안 되니까요.”
“에라, 난 모르겠다. 그래도 야간수당은 나오니까. 뭐 수상한 사람 보이면 깨워라. 난 차에 들어가서 좀 잘 테니까.”
“넵!”
나른하고 만사가 귀찮다는 듯 말하는 판성식.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살피는 김철수.
권태롭고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판성식의 모습과 이에 대조적인 열의에 불타는 신입의 김철수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 장면 하나로 두 캐릭터의 조형이 바로 나왔다.
권태로운 형사와 열혈 형사.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캐릭터 파악이 되는 장면.
이런 구성이 좋은 장면이다.
역시 성재원 감독이었다.
“컷!”
테이크가 끝났다는 의미의 힘찬 외마디가 내 귓가에 꽂혔다.
그리고 이내 성재원 감독의 흡족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좋아, 좋아. 그림이 아주 좋아!”
흡족한 얼굴로 말하던 성재원 감독이 옆에 대기하고 있던 조연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오케이 가자고. 앞에서 딜레이가 좀 걸려서 걱정했는데 아주 좋네. 다음 건 뭐냐?”
“판 선배님 단독입니다!”
조연출의 말에 성재원 감독이 어느새 자기 근처로 다가온 한 인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 감독! 세팅 얼마나 걸리겠어?”
“5분이면 됩니다~”
“오케이! 바로 가자고.”
촬영 감독의 대답에 성재원 감독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판성식이 끼어들었다.
“뭐야, 바로 오케이야?”
“다시 가봤자 이거보다 좋은 거 안 나와. 그대로 가자고.”
“그래. 감독이 그런다면 그런 거겠지.”
판성식이 성재원 감독에게 손을 휘적휘적 내젓다가 멀뚱멀뚱 있는 안재성에게로 다가갔다.
일련의 모습들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촬영장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둘의 호흡은 내 예상보다도 더 괜찮았다.
그래서 그런지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에서 다소 긴장감만 갖춘 분위기로 돌아왔다.
성재원 감독의 성질을 돋은 단역 배우가 마지막 기회를 얻고 간신히 오케이를 받은 이후, 촬영은 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안재성과 판성식이 같이 투입된 지금, 촬영장은 흐름을 탔다.
판성식과 안재성이 웃으면서 잠깐의 기다림을 가진 후 판성식의 단독 컷이 시작됐다.
안재성은 단독 컷을 찍는 판성식에게 맞춰 대사를 쳐줬다.
판성식은 그 호흡에 맞춰 물 만난 고기처럼 열연했다.
조금 전에 찍었던 장면의 어휘와 행동 그대로를 다시 재연하는 모습에 확실히 노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노련한 배우라도 저렇게 기계처럼 똑같이 하기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본 연기자 중에 이예진보다 더 기계 같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판성식은 내가 지금까지 현장에서 본 연기자 중 가장 연차가 오래된 배우다.
그리고 그는 많은 배우의 영원한 롤모델이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기에 기복이 없었고 때로는 친숙하게, 때로는 이질적으로 연기하는 카멜레온 같은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기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존재감도 단연 돋보였다.
아까 같이 성재원 감독을 억제한다거나 지금처럼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하는 것까지.
“다음이 재성이 단독인가? 그냥 기다리는 것보다 맞춰 주는 게 더 낫겠다.”
“선배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나 편하자고 같이 하는 거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안재성과 판성식의 대화를 들어보면 왜 롤모델인지 여실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예전에 안재성과 같이 만났을 때는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또 달랐다.
“성 감독. 세팅 끝났어.”
촬영 감독의 말에 성재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아. 얼마나 걸려?”
“이야기 거의 다 드렸습니다! 잠시만요!”
성재원 감독이 스크립터에게 묻자 지선이라고 불린 스크립터가 급히 대답했다.
“지선이가 이야기 끝내면 바로 들어갑시다.”
성재원 감독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까칠했던 성재원 감독도 촬영이 매끄럽게 흘러가자 많이 누그러들었다.
첫 단추가 이상하게 끼워졌지만, 다시 잘 맞춰 끼운 것 같았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했다.
이 작품을 하는 게 맞는지, 안재성에게 이득이 되는지.
게다가 단역 배우에게 쌍욕을 하는 성재원 감독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조금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작품과 사람들의 능력은 진짜였다.
그래서 불안함 반과 기대감 반을 품게 되었다.
불안함은 성재원 감독의 히스테릭이었고 기대감은 이 작품으로 안재성이 더 도약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오는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에는 내심 안재성이 얼마나 성장할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출의 거장 성재원 감독.
연기의 거장 판성식 배우.
안재성이 이 작품을 통해 얼마나 많이 배우고 흡수할 수 있을까.
담당 연예인이 성장하고 있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보다 짜릿했다.
안재성은 과연 얼마큼 나를 짜릿하게 해줄까.
정말 기대가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