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다시 맞이하는 10월의 어느 날 (3)
“고생들 하셨습니다. 정 PD. 크랭크인까지 한 달 정도 남았나?”
제작진들, 배우 그리고 배우에 딸린 매니저까지 다 포용하는 넓은 회의실에서 성재원 감독의 나직한 말이 울려 퍼졌다.
네임밸류가 높은 성재원 감독이라 그런지 리딩 장소도 엄청나게 컸다.
성재원 감독은 어떠한가 싶어 이진철에게 물어봤는데, 성재원 감독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체 리딩 때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확립시키고 촬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 영향일까. 중요한 대사가 있는 인물들은 다 모여서 리딩을 했다.
아직 제대로 현장에서 본 건 아니지만, 리딩 때 느낌만 봐서는 괜찮은 것 같다.
“촬영 날짜는 알아두셔야죠, 감독님.”
“때 되면 찍는 거지, 뭘.”
정성규 PD의 말에 성재원 감독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튼, 오늘 고생들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반말로 진행할 테니 이점은 양해 부탁합니다.”
“크랭크인해서도 지금 같이 성격 죽이고 있으면 좀 좋아? 촬영만 하면 개차반이 되니, 원.”
성재원 감독의 말에 판성식이 끼어들며 말했다.
“성식아, 너는 나랑 몇 년째 찍고 있는데 그렇게 말해?”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겠어. 다들 쉬쉬하니까 그렇지. 너 별명이 아수라잖아.”
하하하.
둘의 모습이 참으로 의좋은 형제 같다.
지금 대화를 나눈 것만 봐도 둘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실제로 둘의 나이도 같았다.
“김희택이. 너는 왜 웃냐?”
“죄송합니다!”
성재원 감독이 인상을 한껏 구긴 채 말하자 김희택이라고 불린 인물이 냅다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을 본 판성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희택아, 얼른 도망가라. 고생이 많아. 너도 이제 그런 대우 받을 군번은 아니잖아.”
“그렇죠? 그래야 할까요?”
“저놈 보소?”
하하하.
나름 분위기는 좋은 것 같은데, 현장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자못 궁금했다.
듣기로는 폭군이 따로 없다는데. 지금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동네 옆집 아저씨 같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사이로 판성식이 홍승기에게 말을 걸었다.
“승기. 오디션 때보다 연기 많이 좋아졌다? 촬영 때 기대해도 되겠어. 내가 널 처음 본 게 아역 때였지?”
“네, 맞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선배님.”
“칭찬은 무슨. 좋아진 걸 좋아졌다고 하지. 그리고 재성이.”
판성식이 홍승기의 대답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하다가 안재성을 보고 말했다.
“네, 선배님.”
“촬영 때도 오늘 한 것만큼만 해.”
“아닙니다. 더 잘해야죠. 김철수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판성식의 말에 안재성이 혈기왕성한 태도로 대답했다.
“김철수가 되면 어떻게 하냐. 그건 좀 무서운데?”
“하하하.”
판성식과 대화를 나누는 안재성의 모습은 ‘Finder’의 김철수의 평소 모습과 흡사했다.
홍승기와 안재성은 배역에 맞춰 색을 바꾸는 게 자기 보호색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다.
“오늘만큼 하면 어떻게 해? 쟤 말처럼 더 잘해야지.”
“말이 그런 거지. 말이.”
성재원 감독의 말에 판성식이 파리 쫓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성재원 감독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식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성식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리딩 일정 이후에 일이 있어서 아쉽게도 시파티는 오늘 못 할 거 같고, 나중에 일정 잡아서 합시다.”
성재원 감독의 말에 판성식의 혀를 찼다.
“안 하겠다는 소리네.”
성재원 감독이 판성식의 말을 무시하고는 정성규 PD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 PD님. 일정 조율 가능하겠습니까?”
“맞춰보도록 해볼게요. 감독님.”
정성규 PD의 말에 성재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해산합시다.”
성재원 감독의 말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되는듯했다.
일곱 시면 딱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퇴근 시간이지.
* * *
“어우, 머리 아파.”
머리를 쥐어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어제 Finder 전체 리딩이 끝나고 홍승기와 안재성 그리고 나까지 총 셋이서 조촐하게 시파티를 했다.
홍승기가 어제 같은 날이 아니면 술 먹을 기회가 없다며 징징대는 통에 결국 새벽 늦게까지 마시고 집에 들어왔더니 아직 숙취가 가시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출근하자마자 남진수가 나보고 냄새난다며 옥상 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오라고 했을까.
옥상에서 본 서울 풍경은 어느덧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다.
작년 이맘때는 내가 뭘 했더라.
돌아온 게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이 안 된 상태에서 애들 데뷔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온 느낌이다. 그리고 아직도 꿈만 같다.
이런 신비한 경험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나중에 죽기 전에 자서전 쓸 기회가 있다면 거기에다가 한번 써봐야겠다.
나는 사실 14개월을 되돌아 왔노라고.
게다가 남들은 모르는 그 14개월 덕에 많은 게 바뀌지 않았나.
“하핫.”
찬바람을 쐬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숙취가 좀 깨는 것 같네.
그러고 보니 가을 동화도 곧 개봉한다.
가을동화가 잘돼야 할 텐데.
그래야 이진철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도 탄력을 받고 희진이도 탄력을 받고,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가을 동화를 떠올리다 보니 문득 이예진이 생각났다. 작품 들어갔다는 소식은 못 들은 것 같고, 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은데.
마녀 이후로 꽤 오래 쉬는 것 같다.
띵.
[나라나라: 회사 옥상에서 잠깐 봐요.]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려 연락 온 걸 확인하니 이나라였다.
내가 옥상에 있는걸 알고 이렇게 연락한 건가 싶었다.
이나라에게 옥상에 있다고 답장했다.
답장한 지 5분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이나라가 내게 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뭐해요?”
간편한 트레이닝 복 차림의 이나라가 내게 와서 말했다.
아직 연습 시작 전에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숙취 깨는 중. 나 옥상에 있는 거 알고 보자고 한 거 아냐?”
“아닌데….”
“뭐야. 그럼 우연이야?”
“네, 우연이네요.”
이나라가 내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따로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하게.”
“음….”
이나라의 웃는 얼굴도 잠시였다. 다시 이어진 내 말에 이나라가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번엔 또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
“있는 모양이네.”
“고민이라기보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뜬금없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말하면 내가 알아듣겠어?”
내 말에 이나라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급히 내게 말했다.
“아, 그렇죠. 저희요. 우리 그룹.”
“응?”
“이제 데뷔 1년이고, 활동 기간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어떻게 될까요?”
“흐음.”
“…….”
이나라가 내 생각보다 민감하고도 큰 문제를 들고 와버렸다.
이 문제는 스타즈에 있어서 아킬레스건이다.
그리고 슬슬 이 문제는 팬덤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지는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예전이라면 해체하고 자기회사로 돌아가 각자 살길 찾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또 몰랐다.
팬덤 파워도 좋고, 매출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어떤 기획사든 아이돌을 이만큼 띄우는 것 자체가 힘들다.
스타즈야 여러 특수한 상황이 겹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놔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중소기획사 대표들은 초기에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때 파생된 그룹처럼 얘네를 쪼개서 더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초창기의 그들의 결과는 안 좋았지만, 자기들은 또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한 거니까.
그래도 쪼갠 후 그룹으로 데뷔해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그룹이 크게 없었기에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편이었다.
이번엔 다르지 않을까. 하고.
“너희 회사에서는 별 이야기 없어?”
“네. 그냥 다 조용해요.”
이건 회사 실무진과 대표들이 이야기하는 문제다 보니 나는 정보가 없었다.
남진수와 이진성 실장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나라에게 슬쩍 떠봤는데 애들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해줄 말이 없는데. 내가 뭘 알겠냐.”
“오빠는 뭔가 알 줄 알았죠. 항상 해결해 줬잖아요.”
이나라의 말에 황당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진짜 얘네는 내가 램프의 요정인 줄 아는 것 같다.
“내가 뭘 해결해.”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애들도 오빠한테 다 한 번씩은 도움 받은 거 같고.”
“그런…가?”
“네.”
이나라의 활기찬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크든 작든 내가 한 번씩은 도와준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 돼요?”
“뭘? 자꾸 주어 생략할래?”
“그룹 연장이요.”
“글쎄, 너희들의 입지를 보여주면 연장 가능성도 커지지 않을까?”
내 말에 이나라의 눈이 커졌다.
“입지요?”
“그래. 너희의 지금 위치를 알려주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대단합니다. 라고.”
내 말에 이나라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여기서 뭐 해요?”
“어?”
들려온 목소리에 나와 이나라가 동시에 대답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밀회 중?”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신희진의 말에 이나라가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신희진은 이나라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흘기며 우리 둘을 바라봤다.
* * *
“오늘은 둘이 따로 안 만나요?”
“헛소리할 거면 저리 가라.”
“내가 틀린 말 했나.”
“틀린 말 했으니까 이러지.”
“네, 네.”
내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런 나와 신희진을 보고는 남진수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저번 주에 나라랑 둘이 옥상에서 이야기 좀 나눴거든요.”
“근데?”
“그거 보고 밀회라느니 아이돌이랑 매니저랑 연애는 안 된다느니 그러잖아요.”
“크핫.”
내 말에 남진수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침을 튀기며 폭소했다.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왜 웃으세요?”
“아니, 애들이 뭐가 아쉽다고 너랑 만나냐? 매니저랑 담당 연예인이랑 연애라니. 드라마를 너무 봤네.”
“그러게요. 근데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왜 기분이 찝찝하죠?”
“뭐 임마?”
내 말에 남진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보다 잘생기고 저런 말을 하면 모를까.
산적같이 생긴 남진수가 말하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아닙니다.”
내 말에 남진수가 싱거운 표정을 짓더니 촬영 준비로 바쁜 촬영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촬영 무사히 끝나야 할 텐데.”
“무사히 끝나고 대박 터져야죠.”
“그래. 무사히 끝나고 잘 돼야지. 넌 인원수 몇 명이나 예상하냐?”
“글쎄요… 몇 명이나 올까요? 말 그대로 게릴라라 몇 명이 모일지 감이 안 오네요.”
홍보도 하지 않은 정말 말 그대로 생 게릴라다.
재미와 방송을 위해 SNS에 홍보는 하지 않기로 했다.
“예상으로 잡아둔 인원이 몇이지?”
“2천인가 3천일걸요.”
“3천? 너무 많이 잡은 거 아냐? 2천도 많다, 야.”
오늘은 다른 날보다도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늘 맺을 열매가 향후 애들의 행보를 결정하게 된다.
“촬영 시작 5분 전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스태프의 힘찬 외침과 함께 촬영장이 촬영 준비를 위해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드디어 ‘Dream fantasy’의 마지막이 막이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