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Fantasy (3)
“어째 잠잠하다. 했는데, 빌미를 줘버렸나?”
“그런 거 같습니다.”
임진석 본부장의 말에 이진성 실장이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우리 덩치가 조금만 더 컸어도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아쉬워. 아쉬워.”
임진석 본부장이 지금 놓인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차며 말했다.
“다행히 음악 방송은 터치하지 않는 게 그나마….”
“그것도 막으면 전쟁이지. 그리고 음방은 막을 명분이 없어. 예능이야 우리가 까서 빌미를 줬다지만.”
“솔직히 빌미를 줬다고 하는 것도 억울하지 않습니까?”
다소 격앙된 말투로 이진성 실장이 말했다.
“어쩌겠어. 그게 생린데. 하는 꼬라지들 보니까 이미 뜬 그룹 가지고도 이러는데 후속 그룹 내놓았을 때는 더 감당이 안 되겠구먼.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자본을 투자한 그룹은 아니라 급할 건 없다는 점 정도인가.”
이진성 실장의 말에 임진석 본부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점에서는 좋긴 하네요. 그래도 마냥 놀 수도 없고 케이블은 뚫려 있으니 활로는 케이블로 잡겠습니다.”
“종편 쪽은 어때?”
“종편은 지금 TO가 다 찼다고 합니다. 아이돌 패널로 쓸 만한 프로그램도 없고요.”
“흐음.”
임진석 본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이진성 실장은 조용히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커피 한잔 먹을 시간 정도가 지나자, 생각에 잠겨 있던 임진석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자체제작은 어떤가? 저번 리얼리티 프로그램 만들었을 때처럼. 왜, 반응도 좋았다며?”
“자체제작… 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합니다. 방금 말씀하셨듯, 리얼리티 프로그램 반응도 괜찮았으니까요. 그럼 외주 맡기시렵니까?”
“대표님에게 이야기하면 K.net 채널 편성 받아오는 건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아니, 잠깐만.”
이진성 실장의 말에 임진석 본부장이 손을 들고는 말을 끊었다.
“굳이 우리가 이렇게 애들 푸시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어차피 걔네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모양새가 좋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계약상으로나 자존심으로나. 본부장님은 이렇게 물러나실 겁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그래, 아는 PD 있으면 알아봐봐. 편성은 대표님에게 이야기해 볼 테니까.”
임진석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아보고, 회사 내부에서도 좋은 기획안 나오면 그걸로 제작해서 돌리자고. 아니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놈한테 맡겨보던가. 기세가 좋다며?”
“현진이요?”
이진성 실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 걔 말이야. 걔. 당돌한 놈. 어디서 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는데. 아주 당돌해, 그리고 거슬려.”
“그래도 전 좋게 보고 있습니다.”
“같은 식구 감싸긴가?”
“그런 건 아닙니다. 황당할 때도 있긴 한데 무엇보다 결과는 좋으니까요.”
이진성 실장의 말에 임진석 본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결과가 거지같았으면 거슬리는 거로 안 끝났지. 이만 가봐.”
“네. 고생하십쇼.”
이진성 실장이 임진석 본부장에게 짧게 묵례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내 홀로 남은 임진석 본부장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형님. 일이 생겼어.”
* *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개가 있는데 뭐 먼저 들으래?”
“두 개의 선택지가 굉장히 극단적이네요.”
이진성 실장이 내 말에 피식 웃었다.
“아주는 안 붙었잖아?”
“매는 일찍 맞는 게 더 낫다는 말이 있으니 나쁜 소식부터 듣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 나쁜 소식은… 애들 이번 활동에서는 방송 프로그램 올스탑 상태로 활동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중파 한정해서. 그나마 조금 다행인 건 방송 노출도를 줄이면서 활동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타격은 아니라는 거?”
이진성의 말한 나쁜 소식에 나는 담담했다. 어제 남진수에게 들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남진수도 두어 번 고개를 끄떡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진성 실장의 말처럼 아무리 스타즈가 이미지 소모 때문에 대중 노출도를 줄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지만, 타의로 완전히 올스탑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안 놀라네?”
“어제 팀장님이랑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거라 막 놀랍지는 않네요. 좋은 소식은요?”
“그래도 우리가 힘이 없는 건 아니라서 저번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제작해서 돌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 정도?”
“공중파는 지금 다 막혔고, 그러면 K.net에서 편성 받아서 하나요?”
이진성 실장의 말에 옆에 있던 남진수가 끼어들어 말했다.
“어. 제작하면 거기에 편성 들어갈 거고, 예능은 뭐 공중파 예능 말고 종편도 있으니까.”
“근데 프로그램 들어갈 만한 게… 있나요? 지금? 종편은 지금 스케줄 꽉 차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제작 이야기가 나온 거야.”
잠자코 듣다보니 이진성 실장의 말에는 함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해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과 편성을 따낼 수가 있느냐는 것.
“근데 제작에 들어가도 편성 따내긴 힘들지 않나요? 남는 시간대가 없을 텐데요. 더군다나 지금 찍고 있는 K.net 저녁 예능은 애들 들어갈 자리가 딱히 없는 예능들이잖아요. 아, 아니구나. 토요일 예능은 되겠네.”
남진수가 내가 가졌던 의문을 이진성 실장에게 물어봤다.
“인마. 우리는 자체제작 만들 수가 있어.”
“흠. 그럼 문제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 넣느냐겠네요.”
“그렇지.”
“K.net에서 기획하는 거에 껴 들어갑니까? 아니구나. 껴 들어가면 자체제작 이야기가 안 나왔겠네요.”
“어. 맞아. 껴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힘들고, 기획해서 제작해야 해.”
이진성 실장의 말에 남진수가 고개를 저었다.
“어렵네요. 회사에 프로그램 기획해서 만들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그래서 말인데. 현진아 뭐 아이디어 없냐? 저번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이번에도 뭐 하나 없어?”
이진성 실장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디어요?”
“어.”
이진성 실장은 내가 만화 캐릭터처럼 주머니에서 뭔가 뚝딱뚝딱 꺼내서 만드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래도 일단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
내가 짧게 토해낸 감탄사에 이진성 실장도, 남진수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치 ‘얘가 또?’ 라는 표정으로.
물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프로그램이 머릿속에서 번개 스치듯 번쩍 떠올랐다.
애들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
* * *
“뭐요!”
“또 앨범 사인해야 돼요?”
“스케줄 땡겨졌어요?”
“한 사람씩 천천히 말해. 머리 울린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영화관에 온 것처럼 애들의 목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와 한마디 했다.
그러자 애들이 조용히 나만 바라봤다.
“그렇게까지 뚫어지게 쳐다볼 건 없고.”
내 말에 애들이 이제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지어졌다.
“일단 앨범 사인은 아니야. 음방 쉬는 시간에 안 자고 틈틈이 해줘서 아직 많이 남아 있거든.”
“그럼 새로 스케줄이라도 생겼어요?”
“아니, 스케줄은 오늘 예정대로 저녁에 팬 사인회 하나야.”
재차 묻는 이나라의 물음에 답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요.”
이나라가 빨리 말하라는 듯 재촉했다.
“너희가 메인이 돼서 프로그램 진행한다고 하면 할 수 있겠어? 예능 프로그램.”
“네?”
“저희가요?”
“메인?”
“프로그램?”
내 말에 각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한마디씩 토해냈다. 그리고 버퍼링이 걸린 다른 애들과 달리 이나라가 핵심을 물었다.
“저번에 찍었던 리얼리티 같은 게 아니고요?”
“어.”
내 대답에 애들이 나사 빠진 기계처럼 가만히 앉아 나만 바라봤다.
그런 애들에게서 왠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느꼈다.
“재밌겠는데요?”
“뭔데요?”
“뭐부터 할까요?”
“저 잘할 자신 있어요!”
“MC도. 있어요?”
“우리만?”
“우리가 다 해야 하는 거예요?”
좁은 회의실에 일곱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마디씩 하자 아침에 열리는 시장처럼 무척 시끄러웠다.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 탁자를 두어 번 탕탕 치면서 애들에게 말했다.
“조용! 조용!”
“쉬잇! 쉿!”
“고맙다. 미소야.”
내 말에 유미소가 윙크로 화답했다.
“아직 확정은 아닌데, 일단 의사를 물어보려고.”
“…….”
어서 말하라는 듯 애들이 한결같은 눈빛을 보내왔다.
“요즘 먹방이 대세잖아?”
“네.”
“그리고 힐링도 대세고.”
“그쵸.”
이나라가 내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애들도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했다.
하지만 일곱 명 중에 단연 돋보인 건 신희진이었다.
먹방이라는 단어와 힐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신희진의 눈빛이 달라진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카페를 차려서 직접 만들고 팔아보는 거야. 어때? 간단한 간식이나, 커피 모든 걸.”
“카페를요? 도움 없이 저희가 전부 다?”
“응.”
이나라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더니 신희진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무조건 찬성!”
“저 카페 알바 해보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서지영과 박혜연도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한 애들과 달리 린과 유코는 자기들끼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라 이야기하는지 궁금하네.
일단 프로그램에 대한 애들의 반응은 괜찮은 것 같았다.
이 카페를 다룬 프로그램은 아직 기획 단계에만 있는 예능일 거다.
겨울쯤 해서 나온 프로그램이었으니까.
이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화제성도 괜찮고 그럭저럭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이돌 그룹이 운영하는 카페.
팬들에게 서비스하는 느낌도 들고 취지도 나쁘지 않은 포맷이었다.
이건 분명히 먹히는 프로그램이었다.
“너희는 일단 오케이인 거지?”
“네!”
“두말하면 잔소리죠!”
“오케이. 알았어.”
애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이미 출연이 확정이 난 듯 뭐 할지도 각자 정하고 있었다.
“근데 그건 언제부터 촬영 들어가요? 섭외 온 거예요?”
이나라가 내게 물었다.
이 프로그램은 4개월 뒤에 촬영을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시기로는 아직 기획안도 안 나와 있을 수도 있었다.
“글쎄 언제 들어갈지는 모르겠어. 녹화는 아마도 너희 활동 끝나고 들어갈 거야.”
“진짜 재밌을 거 같은데.”
신희진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좋다. 애들의 동의는 받았다.
이러면 출연진은 정해졌고, 이제 프로그램을 만들어줄 사람을 찾아갈 일만 남았다.
어떻게 보면 이게 최대의 난제였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문상 PD입니다.”
“안녕하세요.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유문상 PD와 인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
주먹코와 푸근한 인상의 유문상 PD가 악수가 끝나자마자 웃으며 내게 말했다.
“프로그램 관련해서 이야기하실 게 있으시다고요?”
“네.”
“혹시 지금 기획하고 계시는 카페 예능… 저희 애들이랑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면서도 원래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던 출연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괜찮은 프로그램을 뺏게 된 거니까.
하지만 미래의 정보를 쓰면서 수십 번 다짐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내 사람만 신경 쓰자.
우리 애들을 위해 잘 쓰겠습니다.
“예?”
내 말에 유문상 PD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유문상 PD를 보며 환하게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같이 갑시다. 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