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물결은 흘러가고 (1)
“삼촌! 이건 어때요?”
“한번 들어볼까?”
“네!”
녹음실에 들어가자마자 김동현을 귀찮게 하는 서지영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내가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김동현 작곡가님.”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그때야 둘이 나를 인지했다.
“지영이가 많이 괴롭히고 있죠?”
“하하, 아닙니다. 요새 하릴없이 작곡하면서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요, 뭘.”
내가 옆에 있던 서지영을 흘깃 보고 웃으며 말하자 김동현이 특유의 신선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김동현이 말이 끝나자 서지영이 훅 끼어들었다.
“동현 삼촌 완전 날백수예요.”
“날백수가 뭐야, 날백수가.”
“틀린 말도 아닙니다. 하하하.”
서지영의 말에 김동현이 불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무라는 어투로 서지영에게 말했는데, 김동현은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귀여운 조카 보듯 서지영을 바라봤다.
둘의 친분이 내 생각보다도 깊은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옆에서 틱틱대는 서지영을 보며 김동현에게서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고생은 안 하고 있어요. 오히려 지영이랑 이야기하면서 더 영감 받고 있기도 하고요. 저는 너무 스타일이 굳어져 있어서….”
“맞아요. 솔직히 삼촌 스타일이 좀 올드해요.”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아직 햇병아리면서.”
서지영이 나를 대하듯 김동현을 대하는 것 같길래 조금 위험해 보여 다시 한번 주의를 시켰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김동현과 나는 위치가 아주 달랐다.
내가 일개 매니저라면 김동현은 이미 업계에서 알아주는 작곡가였으니까.
“아니에요. 지영이 말이 맞아요. 제 스타일이 조금 올드한 편이기도 해요. 지금은 제 스타일이 잘 먹혀서 다행이지만 트렌드는 하루아침에 바뀌기도 하니까요.”
김동현이 사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둘 사이가 친밀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영이랑 같이 놀면서 작업하다 보면 좋은 게 종종 튀어나오기도 하고요. 작곡 레슨 끝나거나 없을 때도 혜연이 데리고 녹음실로 왔거든요. 오늘은 혼자 온 모양이지만.”
김동현의 말에 조금 놀랐다.
다른 사람이 서지영과 박혜연에게 작곡 레슨을 해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김동현이 하고 있었던 듯했다.
“레슨을 작곡가님이 하셨었나요?”
“네. 예전에 작업할 때 생각나서 제가 하겠다고 했었죠. 잘 배우더라고요.”
김동현의 칭찬에 서지영이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뿌듯해했다.
“간혹 오늘처럼 뜬금없이 쳐들어오기도 하고요.”
“삼촌이 할 거 없을 때마다 놀러 오라면서요!”
“그랬나?”
김동현이 서지영을 보며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근데 어쩐 일로 여기 오셨어요?”
“아, 지영이랑 이야기 좀 할 게 있어서요.”
“저요?”
“응. 너.”
서지영이 자신을 왜 찾냐는 듯 의아해했다.
다른 게 아니라 여행에서 있었던 일의 연장선이었다.
김동현이 녹음실 시계를 슬쩍 보더니 내게 말했다.
“지영이 찾아서 오셨구나. 마침 제가 지금 회의하러 가야 해서. 여기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김동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지영도 그에 맞춰 같이 일어났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여기만큼 방음이 잘 되는 곳도 없습니다. 하하,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삼촌! 있다 봬요!”
내가 무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김도현이 손사래를 치고는 바로 녹음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 김동현에게 서지영이 인사를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할 말이 뭐예요?”
“궁금했구나?”
“당연하죠. 대뜸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하면 궁금한 게 정상 아니겠어요? 근데 이상한 이야기 하려는 건 아니시죠? 아니면 설마…?”
말을 하다가 나를 흘끔 보면서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눈초리였다.
“생각하는 거하고는.”
“제가 뭐요!”
“아니다.”
서지영을 한번 쳐다 본 뒤 땅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아무튼, 딴 게 아니라 앨범 컨셉을 어떻게 갈지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대충은 알아야 작곡이나 작사하기에 수월하지. 그때는 그 이야기는 못 했잖아.”
“아.”
서지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짧게 탄식했다.
“생각 안 해봤어?”
“그냥 곡 만든다는 생각만….”
아무리 곡 퀄리티가 좋아도 앨범 컨셉에 맞지 않으면 실리지 않는다.
대체로 앨범에는 각자의 고유 컨셉이 있다.
“이번 정규앨범 컨셉 키워드는 신비주의. 요정. 몽환이야.”
“요저엉?”
내 말에 서지영의 눈썹이 찌푸려지더니 눈에 띄게 기겁했다.
“왜?”
“오글거려서요. 미소 언니는 경기 일으키겠는데.”
“기존 컨셉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는데 뭘.”
“그런가? 생각해보면 그런 거 같기도 하고요. 근데 그건 누구 의견이에요?”
이걸 누구 의견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아직 내가 전체적인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나도 오다 주워들었어.”
“그러니까 그 출처요.”
“주워들었다니까.”
“아, 됐어요. 됐어. 말해주기 싫으면 그렇다고 말하지.”
노골적으로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자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서지영이 더는 캐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동현 작곡가님 졸라서 뭐 좀 나왔어?”
“아뇨. 벌써 뭔가 나왔으면 아이돌 때려치우고 작곡가 하고 있었겠죠. 그냥 이것저것 듣고 시도도 해보고 물어도 보고… 그러고 있어요.”
진행 상황을 보니 꽉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나오면 창작과 예술이 왜 어렵다고 하겠나.
그래서 창작에는 영감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영감은 긍정적인 에너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음… 한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네?”
* * *
넓은 회의실에 다섯 명만 앉아 있어 회의실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오랜만에 보는 게 맞긴 하죠. 3개월 만에 모인 자리니까요.”
정인수 대표의 말에 김동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정인수 대표를 보며 질문했다.
“어비스 시장 진출은 좀 어떠십니까?”
“아주 좋아. 지금 이 자리를 만든 것도 그거랑 연관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
정인수 대표가 김동현의 말에 대답하면서 회의의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에 회의실에 앉아 있는 인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정인수 대표를 쳐다봤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스타즈 정규앨범 건에 관해서 말인데.”
“네.”
“그 앨범 운전대는 내가 잡지는 못할 것 같어. 다른 사람한테 줘버렸거든.”
“예?”
정인수 대표의 말에 여기저기서 의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넓은 회의실에 얼마 없는 인원이었지만 분위기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러나 정인수 대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계약상으로는 내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으니 우리끼리만 알자고.”
“굳이 그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임진석 본부장이 정인수 대표에게 물었다.
“어비스 애들한테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나보다 더 잘할 거 같더라고.”
“운전을 넘겼다는 건 누굽니까? 민 팀장이에요?”
“전 아닌데요?”
정인수 대표의 말에 임진석 본부장이 민지선 팀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민지선 팀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화답했다.
“그럼 운전대 잡을 사람이 없는데? 김동현 작곡가님이 이번에 프로듀싱 하시나?”
김동현 작곡가도 들은 게 없다는 듯 민지선 팀장과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조금만 머리 굴리면 바로 나올 거야. 그래도 여기 있는 인원들은 앨범 관련해서는 핵심 인원이니까 알아두라고 부른 거고.”
모두가 의아한 가운데 민지선 팀장만 침착했다.
정인수 대표가 그런 민지선 팀장을 보며 말했다.
“반응을 보니 민 팀장은 누가 담당하는지 알고 있나 봐?”
“네? 네.”
민지선 팀장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역시 감 좋은 사람끼리는 뭔가 통하나 봐.”
정인수 대표가 껄껄 웃으며 말하자 민지선 팀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게 누구냐면….”
* * *
“네, 감사합니다.”
“됐어요?”
“응. 휴식기라 딱히 상관없다네. 사고만 안 치고 온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별다른 게 아니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단순히 시간만 보내는 게 아니라 어디 놀러 가보라고 했다.
처음에 내 이야기를 듣고 좋다고 날뛰던 서지영이, 막상 위에서 승인까지 떨어지자 반응이 이상했다.
“왜?”
“조금 걱정돼서요.”
서지영이 애꿎은 땅만 바라보며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뭐가?”
“좋긴 한데…. 그런 걸 말해본 적이 없어서요.”
“뭘? 여행?”
“네.”
나는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가정마다 다른 거니까.
“그냥 엄마 아빠 오빠 오늘 놀러 가요! 하면 되지, 뭘.”
“그게 어렵다고요….”
서지영 말마따나 어릴 때 힘들게 커왔다면 같이 어디 놀러 나가자고 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흠.”
축 처진 서지영을 보다가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부를 찾고 서지영에게 보여줬다.
“이거 맞지?”
“네?”
핸드폰에 적혀 있는 번호를 확인하더니 서지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서지영의 눈이 이렇게 커진 건 또 처음 본 것 같다.
“어엇, 우리 엄마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고 있어요?”
“혹시 몰라서 다 저장은 해놨거든.”
사실은 서지영에게서 가정사를 듣고 미리 구해놨었다.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지만.
“잠시만.”
“악!”
내가 통화버튼을 누르자 서지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안녕하세요. 지영이 어머니 되시죠?”
- 네, 누구시죠?
“미쳤어, 미쳤어. 미쳤나 봐.”
통화가 시작되자 안절부절못하며 귀를 쫑긋 세우며 통화 내용을 엿들으려 했다.
그런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나는 아예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헥사곤 엔터테인먼트 스타즈 담당 매니저 김현진이라고 합니다.”
- 아….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혹시 지영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사고라도 쳤나요?
“하하하, 아닙니다. 그런 거로 연락드린 게 아니에요.”
- 휴, 너무 놀랐네요. 헥사곤에서 따로 연락 온건 처음이라….
서지영이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입 모양으로 ‘당.장.끊.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서지영을 무시하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다른 게 아니라 방송 때문에 연락을 드렸는데요.”
- 네.
“이번 주 주말에 가족 모두 시간 괜찮으세요?”
- 주말…이요? 가족 모두요? 저만 시간 되면 되나요?
“아뇨. 가족 모두요.”
- 이야기는 해봐야 할 거 같은데…. 아마 될 것 같아요.
자포자기하면서 통화를 듣고 있던 서지영이 핸드폰에서 들려온 시간이 될 것 같다는 말에 화색이 돌았다.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지영이 통해서 다시 들으시면 될 것 같아요.”
- 아, 네. 지영이는 잘하고 있나요?
“그럼요. 누구보다 행복해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들어가세요.”
- 네.
전화를 잠시 끊기를 기다렸다가 끊은 걸 확인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 서지영이 노발대발했다.
“진짜 미쳤어요!?”
“어렵다길래 해결해줬구먼. 뭘.”
“하…. 못 살아….”
서지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통화만으로도 어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겠더라.”
“몰라요.”
서지영이 부끄러운 듯 내 시선을 피했다.
“툴툴대지 말고 이번에 가서 애교도 좀 부리고. 어? 잘 보내다 와.”
“하아.”
웃지도 울지도 못한 표정으로 서지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지랖인 건 알고 있지만, 그냥 놔두면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나섰다.
결과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지잉. 지잉.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려 확인해보니 남진수였다.
“네, 여보세요.”
- 어디야?
“저 지금 지영이 있는 녹음실이요.”
- 임진석 본부장님한테 가봐. 너 부르더라.
“저요?”
- 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