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여행에서 생긴 일 (2)
“여기가 거기래. 몽환적인 숲속 배경 나오는 영화는 다 여기에서 영감 받아서 찍었대.”
“아~ 그래?”
“응, 응.”
박혜연이 말하자 서지영의 눈이 커지면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래봤자 아직 초입이라 볼 건 흔하디흔한 나무밖에 없었다.
어제 고민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급식 팀의 코스가 좋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부터 내려가는 게 좋았다.
내 선택에 남진수가 거품 물며 욕을 하기는 했지만,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았다.
“여러분! 제가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살펴봤는데요. 요정의 숲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곳이래요. 저 정말 와보고 싶었거든요!”
박혜연이 발그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찍고 있던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다.
박혜연이 줄곧 텐션이 올라가 있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 박혜연을 근처 외국인들도 신기하게 우리를 바라봤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놀러 온 한국 사람들이 더 유난이었다.
이건 촬영하면서 느낀 점인데, 카메라가 없이 연예인만 있으면 다가오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카메라로 녹화를 하는 거 같으면 오히려 접근하지를 않는다.
물론 촬영을 하고 있으므로 접근하려는 사람을 제작진이나 매니저들이 막긴 하지만 접근의 빈도수가 달랐다.
참 묘한 현상이다.
걸음을 옮겨 버스를 타고 공원 상단으로 올라왔다.
성수기라 사람이 많긴 했으나 플리트비체 자체가 워낙 넓어서 통행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촬영에 방해가 안 될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급식팀 애들 뒤를 따라갔다.
“우와! 여기 표지판 보세요.”
서지영이 영어 표지판을 보고 영어를 드문드문 읽었다. 그런 서지영을 보고 린이 표지판을 읽고는 짧게 한마디 했다.
“6,000m.”
“뭐가?”
“H코스. 여기서부터. 아래까지. 내려가는 거리.”
린의 말에 서지영이 잠깐의 생각이 필요한 듯 멍하니 있더니 박혜연을 바라봤다.
“6,000m면… 6km지? 혜연아?”
“너 바보야?”
“헷갈려서 그래.”
6km면 거리가 꽤 되는 편이었다.
나도 멀리서 표지판을 읽어보니 4-6시간 정도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거리는 앞에 나와 있었고.
급식팀 애들이 H코스 입구로 들어가 걷기 시작했다.
입구에서부터 약 5분간은 무난했다.
그러나 무난함도 잠시였다. 이색적인 분위기의 환경이 우리를 반겼다.
“와… 폭포다.”
“너무 예쁘다….”
애들이 넋 놓고 자연의 경치에 감탄했다.
나 또한 애들과 똑같은 감정이었다.
이내 서지영이 정신을 차리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우리 사진 찍자!”
기실 서지영뿐만 아니라 주위 관광을 나온 외국인들도, 촬영에 나온 우리를 신경 쓰기보다는 자연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거나 관람하면서 유유자적 힐링하기 바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애들을 바라보다가 나 또한 번뜩 뇌리를 스치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줄곧 내게 고민이었던 정규 앨범. 그리고 애들의 색깔.
신비주의. 요정. 몽환적.
이 모든 걸 포함하는 단어 Fantasy.
애들의 컨셉으로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애들 너머로 보이는 배경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 보였다.
애들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얼추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개안 된 느낌이었다.
여행 리얼리티를 추진한 게 좋은 수가 된 것 같다.
애들에게나, 나에게나.
촬영은 스타즈와 촬영진들이 주위 관광객에게 피해가 안 가는 선에서 자연을 벗 삼아 촬영했다.
그렇다고 촬영진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애들에게 붙은 인원은 나랑 작가 그리고 VJ 세 명, 총 다섯 명이 애들과 함께했다.
애초에 제작비 때문에 정예구성원으로 꾸려왔었는데 플리트비체는 거기서도 추린 인원이었다.
애들은 연신 감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이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이 분위기를 어떻게 애들에게 녹여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어느덧 중간 지점인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다른 팀과 만나기로 했기도 했고, 점심을 해결하려고 정해둔 장소였다.
“언니!”
“왔어?”
우리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이 우리를 반겼다.
“너무 이쁘지 않아요?”
“응. 진짜 진짜 이쁘더라.”
박혜연이 이나라에게 다가가 묻자 이나라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화답했다.
“이런 곳에서 수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팍! 팍! 들더라고요.”
“나도 그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박혜연의 말에 유미소가 대답했다.
만나서 멤버들이 감상을 늘려놓고 있었을 때, 옆에서 코를 킁킁대던 서지영은 다른 것보다 풍겨오는 냄새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점심은 뭐 먹어?”
“여기 선착장에서 통닭구이가 제일 유명하대.”
“엇.”
“우리는 이걸로 점심 통일했는데 너네도 그럴래?”
신희진의 말에 급식팀 셋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으로 평화롭고 넉넉한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인팀에 붙어있던 남진수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별일 없었지?”
“네.”
“위는 어떠냐?”
남진수의 말에 나는 말없이 엄지손가락만 올렸다.
“아래서부터 올라갈 때 기억에 남는 건 폭포밖에 없더라. 그 외에는 그냥 예쁘다. 수준이었는데 위는 좀 다른가?”
“위쪽 경관이 하이라이트라고 하던데요? 전 좋았어요.”
“그래? 알았다. 고생하고. 이따가 보자.”
“네.”
남진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애들은 어느덧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와 남진수는 가게가 협소해 보였기에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깥에서 조용히 바라만 봤다.
잠시 후, 애들이 통닭구이를 받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침이 절로 삼켜졌다.
어차피 애들 식사할 때 우리도 식사를 해야 했다.
촬영은 애들이 먹는 모습을 어느 정도 찍고 잠깐 끊고 다시 갈 거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애들이 어느 정도 먹어가자 PD가 촬영을 끊었다.
“식사하고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PD의 말에 내 발은 어느새 통닭구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오늘 10km는 걸은 듯.”
“으어, 진 빠진다….”
플리트비체를 본 후 자그레브 시내 관광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2일 차 마지막 촬영까지 끝마치고 지금은 옹기종기 모여 쉬는 시간을 보냈다.
“내일도 오늘만큼 걸어야 해.”
“으엑.”
내 말에 유미소가 몸서리쳤다.
“옛 건물을 그대로 남겨놓은 구시가지 투어, 그리고 거기서 성벽투어, 그다음 산 정상에서 보는 노을로 마무리. 이게 내일 일정이야.”
“으어….”
다시 이어진 다음 날 브리핑에 질렸는지 유미소가 흐물흐물해졌다.
“와, 근데 마을이 진짜 이쁘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마을인데?”
“어! 나, 이거 봤어!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보던 건물 같아!”
핸드폰으로 내일 갈 곳을 찾아보던 박혜연과 그 옆에서 이나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신희진은 또 다른 곳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여기 집이 맛있다는데?”
“내일도 식당은 우리가 알아서 가면 되죠?”
“어.”
신희진이 옆에 있던 서지영에게 묻자 서지영이 남진수에게 되물었다.
남진수의 대답을 들은 둘이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찾기에 다시 열을 올렸다.
“대충 있다가 해산해. 내일 일찍 공항 가야 하니까.”
“네.”
“난 피곤해서 먼저 올라간다.”
“네!”
남진수의 말에 애들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곤 내일 어떻게 해야 알차게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하며 회의에 들어갔다.
나도 피곤해서 남진수와 같이 올라가고 싶었으나 혹시 모르기에 남아 있었다.
“됐다! 완벽해!”
“좋았어!”
내일 일정에 대한 회의가 끝났는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축했다. 그리고 내게 인사를 하며 하나둘 방으로 사라졌다.
“내일 뵐게요!”
“그래.”
사라지는 애들을 보면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삼촌.”
“어. 왜?”
뒤를 돌아보니 서지영이 혼자 남아있는 게 보였다.
“저… 내일 촬영 끝나고 할 이야기 있어요.”
“응?”
“내일 대뜸 이야기하면 이상할 것 같아서요.”
“어? 그래.”
“내일 뵐게요! 쉬세요!”
붙잡아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가 말할 새도 없이 휙 하고 사라졌다.
게다가 서지영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니 당황스러웠다.
뭘까.
밀려오는 의문과 함께 내 방으로 돌아갔다.
* * *
“지금까지 ‘Stars travel’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안녕!”
카메라를 바라보며 전원이 손을 흔드는 모습은 내가 본 클로징 화면 중 가장 밝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스타즈가 하는 멘트들은 ‘Stars travel’의 촬영 종료를 알리는 클로징 멘트이기도 했다.
게다가 뒷배경으로 오렌지 색깔의 고딕풍 지붕이 한눈에 보이고 저녁노을이 뉘엿뉘엿 지는 배경으로 하니 환상적인 그림이 나왔다.
“컷!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고생하셨습니다!”
PD의 컷과 함께 크로아티아에서의 여정이 끝이 났다.
오늘 아침 일찍 자그레브에서 비행기를 타고 드보르니크로 넘어와 옛 흔적이 남아 있는 고딕풍의 시가지를 돌아다니고 마지막으로 산 정상으로 온 거였다.
특별한 일이라고 하면 애들이 시장에서 안 되는 영어로 흥정하는 장면 정도였을까.
여기에서 린의 영어 실력이 나타났다.
의외의 영어 실력에 모두가 놀랐었다.
결국, 디스카운트하는 데에 성공했는데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 외에는 평이하게 흘러갔다.
구시가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쏘다니고, 그 유명하다던 성벽투어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훌쩍 해가 져서 부랴부랴 산 정상에 왔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엔딩까지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이 이후로는 자유시간이니 알아서들 하세요!”
“와!”
PD의 말에 스태프고 우리 애들이고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특별한 사고 없이 끝나 정말 다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건진 것은 애들의 컨셉과 방향을 어떻게 할지와 바쁘게 활동을 하면서 제대로 된 휴식을 못 느낀 스타즈에 휴식을 준 점 정도인 것 같다.
물론 촬영도 겸했지만, 애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그 두 가지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멍하니 저녁노을에 취해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서지영이 서 있었다.
“뭐 해?”
“촬영 끝나고 할 말 있다고 했잖아요.”
“아, 응. 뭔데?”
서지영의 뜬금없는 행동에 조금 긴장됐다. 집중해서 서지영을 바라보고 있자 서지영의 입이 열렸다.
“고민 해결을 잘해주시는 거 같아서요.”
“내가?”
서지영의 말에 내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치며 의아한 목소리로 서지영에게 말했다.
“네.”
“누가 그래?”
“멤버들이요.”
“딱히 내가 도와준 건 없는 거 같은데.”
“혜연이 미소 언니 희진 언니 나라 언니 다 큰일 있을 때마다 해결해줬잖아요.”
“그런…가?”
난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할까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였던 것 같다.
아니, 아직 이상한 말을 하기 전인가.
그래도 서지영의 말을 생각해보면 굵직굵직한 건 내 손을 거치긴 했다.
무어라 답하기 힘들어 어색하게 내가 웃자 서지영이 어제 지었던 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도 좀 도와줘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