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휴식 (4)
대표실에서 나오자 몸이 축축하게 젖어 든 게 느껴졌다. 작금의 상황에 몸이 확실히 반응했다.
짝!
정신을 차리려고 양손으로 내 뺨을 세게 쳤다.
정인수 대표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짚어보자.
다음 스타즈의 정규 앨범을 내가 메이킹 해보라는 것.
향후 어떤 트렌드가 먹힐지는 알고 있으니까 내가 기획해서 메이킹 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든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 혼자 모든 걸 하기는 힘들다.
배가 선장이 있다고 혼자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도와주어야 가능하다.
이처럼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 * *
“네? 뭐요?”
“도와달라고요.”
민서희 팀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민서희 팀장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대표실에 나와서 바로 떠올랐던 인물이 민서희 팀장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와 충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능력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뭘요? 대뜸 오자마자 도와달라고 하면 제가 뭘 어떻게 해드려야 하는지 모르잖아요.”
“그게….”
민서희 팀장의 반응에 급했던 마음이 점차 이성적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후 상황 설명 없이 너무 대뜸 말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깐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따로요?”
“네.”
내 말에 민서희 팀장이 짐짓 인상을 굳혔다.
지금은 나와 정인수 대표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대외적으론 정인수 대표가 하는 거로 말을 맞춰놨었으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부탁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를 뭐로 보시고요.”
“알았어요. 휴게실로 가죠.”
“네.”
내게 그렇게 말하고는 민서희 팀장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나도 민서희 팀장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따라가면서 민서희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라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이상한 부탁이라니, 회사에서 내 이미지가 도대체 뭐인 걸까.
민서희 팀장을 따라 휴게실에 도착해서 서로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뭔데요? 여기면 둘밖에 없어요. 말해 봐요.”
“듣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내 말에 민서희 팀장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정자세를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다른 의미로 민서희 팀장이 조금 무서워졌다.
“일단 들어보죠.”
“제가 이번 스타즈 정규 앨범 기획을 맡게 됐습니다.”
“뭐라고요?”
내 말을 듣자마자 민서희 팀장이 눈을 찌푸렸다.
“그… 이번 스타즈 정규 앨범 기획을….”
“미쳤어요? 누가요?”
민서희 팀장이 내 말을 듣다 말고 끊으며 말했다.
이거 본전도 못 찾을지도 모르겠다.
심호흡 한번 한 뒤에 얼굴이 굳은 채로 아무 말 안 하는 민서희 팀장에게 말했다.
“대표님이랑 방금 이야기하면서요. 근데 민 팀장님 같은 반응 나온다는 걸 아시니까 최대한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 정 대표님도 참, 어휴….”
내 말에 민서희 팀장이 머리를 감싸쥐며 탄식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이해도 갔다. 그러나 어찌 됐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별개의 문제다.
“저도 그건 좀 곤란하다고 계속 말씀드렸는데도 해보라고 하셔서요.”
“그러시겠죠. 그래도 프로세스는 좀 지켜주시지. 또 그러시네. 그러지 말라고 말씀드렸었는데.”
“또요?”
“네. 또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민서희 팀장이 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게 또 있었었다는 이야기다.
이내 민서희 팀장의 표정을 풀더니 팔짱을 끼고는 내게 물었다.
“제 나이가 몇 개일까요?”
“으음.”
민서희 팀장의 나이라.
중반은 되어야 저 위치에 있지 않을까?
“서른 중반?”
“뭐요?”
내가 내뱉은 말에 민서희 팀장의 표정이 오늘 본 표정 중에 가장 험악한 표정을 보였다.
“…초반?”
“서른입니다.”
“아, 네. 서른이셨군요.”
지금 나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가 싶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모습에 민서희 팀장이 피식 웃더니 내게 말했다.
“나이에 비해 직급이 높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나이와 직급을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긴 했다.
A&R팀의 체계는 어떻게 되는지 잘은 모르지만, 말을 하는 걸 보니 민서희 팀장의 위상이 조금 높은 듯했다.
A&R팀은 실장이 없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저도 현진 씨랑 비슷해요. 어비스 애들… 정인수 대표님이 다 맡아서 했다고 알고들 있지만 제 입김도 3할은 들어갔다고 생각하거든요. 대표님이랑 가장 많이 이야기 나누는 게 저이기도 하고.”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줄곧 정인수 대표가 어비스를 전적으로 도맡아 한 줄 알았는데, 민서희 팀장이 숨은 공신인 것 같았다.
새침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민서희 팀장이 다시 내게 말했다.
“대표님이 알려주시던가요?”
“네?”
“잘 모르는 정보거든요. 이건.”
“아뇨. 대표님이 알려주신 건 아니었어요.”
내 말에 민서희 팀장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럼 뭘 보고 저한테 와서 도와달라고 하신 거죠?”
“통하는 게 있나 봐요, 하하.”
“장난해요?”
분위기를 환기할 겸 농담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민서희 팀장에게는 나름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았다.
나도 분위기에 맞춰 진지한 얼굴로 민서희 팀장에게 말했다.
“음… 그냥 저랑 부딪힐 때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었어요. 이 사람이면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일로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으응….”
칭찬에 약한 타입인 것 같다.
나도 말하면서 낯부끄러웠는데, 민서희 팀장이 몸을 배배 꼬는 모습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활로를 찾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도와주시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으음….”
내 말에 고민하는 기색이 짙어졌다.
조금 더 긁어볼까.
“어쩌다 보니 대표님이 저에게 맡기시겠다고 했지만, 전체적으로 총괄해서 진행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민 팀장님의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어깨가 펴지고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어떠세요?”
“좋아요. 그렇지만 제가 담당했던 그룹도 아니고, 스타즈 애들 앨범과 기본 컨셉, 그리고 노선은 정인수 대표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저는 방향만 잡을게요. 운전은 현진 씨가 해보세요. 정 대표님이 원한 것도 운전이겠죠? 너무 허무맹랑한 컨셉이 아니라면 의견에 한 손 보탤게요.”
“네. 맞습니다.”
“조만간 리얼리티 촬영차 떠나죠?”
“네.”
“애들 갔다 오면 기본 뼈대는 잡혀 있을 거예요. 와서 한번 이야기 다시 나눠보죠.”
“알겠습니다. 근데 혹시 지금 잡힌 컨셉은 있나요?”
“이야기가 나온 건 있어요. 근데 기존 그룹들과는 노선이 좀 달라서 좀 어렵네요. 의견이 조금 분분하거든요. 원래라면 데뷔 컨셉 그대로 쭉 밀고 가면서 조금씩 변화를 줄 텐데 얘네는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죠.”
보통 데뷔 때 그룹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가지고 조금씩 변화하면서 나아가는 게 보통의 아이돌 그룹이다.
그러나 스타즈의 경우에는 단기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그런 방향성을 잡아두지 않았다.
지금의 스타즈는 제대로 된 정체성이 없었다. 그저 대중성과 아이들의 능력에 의지할 뿐이었다.
“그래서 애들의 색을 정해주셔야 해요. 아마도 정인수 대표님도 그걸 원하시는 거 같고요.”
“색이라….”
스타즈의 색은 뭘까.
내 궁금함도 잠시였다. 민서희 팀장이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예를 들면 티어즈 애들은 귀여움이에요. 어비스는 조금 복합적이긴 한데, 걸그룹이랑은 노선이 완전히 다르니까 이야기하지는 않을게요. 일단 걸그룹들의 기본 컨셉들이 있어요.”
민서희 팀장이 말을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건가 싶어 무언가라도 말하려던 찰나에 민서희 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귀여움, 청순, 섹시. 다양하죠. 스타즈는 지금 조금 애매해요. 확실한 컨셉이 없거든요. 물론 미니앨범 두 개를 지나오면서 어느 정도 나온 건 귀여움과 청순함, 그나마도 많이 잡은 컨셉은 사랑스러움이겠죠.”
쉴 새 없이 말한 민서희 팀장이 숨을 고르며 뚜렷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보고 다시 한번 확실히 느꼈다. 이 사람도 무엇보다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근데, 이번에 스타즈 말고도 배우 한 명 영입해 오셨다면서요? 신인 배우.”
“아, 네.”
회사가 좁은 것인지 아니면 내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다 같은 이야기를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같이할 수는 있어요? 일만 벌이는 거 아닌가?”
“배우 쪽은 상대적으로 괜찮습니다. 배우와 의논도 어느 정도 끝났고, 제가 해줘야 할 것보단 배우가 헤쳐 나가야 하거든요.”
“그래요?”
“네.”
“흐음.”
안재성은 마냥 쉬는 게 아니었다.
선정할 만한 작품은 없었지만, 대신 내 기억에 의존해 한 가지 숙제를 던져줬다. 좀 더 거칠고 날것의 사람이 되어보라고.
게다가 배우의 이미지는 첫 작품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안재성의 경우에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현승’으로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었다. 그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그래서 노리는 영화가 있었다.
시장에는 안 나왔지만, 곧 나올 성재원 감독의 Finder.
내가 노리는 건 거기에 나오는 조연이었다.
영화판에서 알음알음 이야기가 나왔던 그 배역.
아직 정보가 오픈되지 않았고, 오디션이 나오지 않았기에 나도 스타즈 정규 앨범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대신 확실하게 집중해줘요. Love Up&Down 때처럼.”
“알겠습니다. 그건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자세한 건 차차 진행하면서 맞춰보죠.”
“네.”
어떻게 이야기가 잘된 것 같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민서희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뭐해요? 악수해야죠.”
“아, 네.”
민서희 팀장의 말에 얼른 손을 내밀고 웃으며 악수했다.
그리고 왠지 이번 앨범도 잘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여권 다 챙겼지?”
“네!”
시간은 ‘아차’ 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정인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날 이후로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은 해외로 가는 그날이었다.
이번 리얼리티는 복귀 전에 방영되는 게 아닌, 앨범 준비 기간의 공백기에 방영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기획이 통과되자마자 빠르게 날짜가 잡혔다.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촬영하러 가는 거야. 너무 텐션 높다. 그러다가 방송 사고나.”
“가서 그냥 여행하는 모습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
유미소가 내 말에 대답했다.
“촬영도 겸해서 하는 거야. 그리고 잊었나 본데, 지금도 촬영 중이거든?”
“아, 몰라요 몰라. 리얼리티라면서요. 리얼하게 가야지.”
“어휴.”
서지영은 평소에도 컨트롤하기 힘든 텐션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하이텐션이라 어떻게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통제가 안대. 언니 말도 안 듣꾸.”
방송하면서 발음이 꽤 늘어난 유코가 서지영을 보고 한마디 했다.
“나 비행기 처음 탄단 말이야!”
“별거 없어.”
방방 뛰는 서지영에게 이번엔 린이 말했다.
유코와 린은 비행기를 1년에 한두 번은 타다 보니 별로 감흥은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 타보는데!”
하지만 서지영만 신난 게 아니었다.
점잖을 줄 알았던 이나라도 서지영처럼 텐션이 높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신희진, 박혜연도.
여행 리얼리티를 추진한 게 옳은 판단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방 뛰는 애들을 보니 한편으론 좋기도 했고, 한편으론 걱정도 되는 온갖 감정이 몰려왔다.
내가 지금까지 본 텐션 중 가장 높았다. 그러다 보니 걱정돼서 애들을 백미러로 슬쩍슬쩍 확인하면서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없이 무사히 갔다 올 수 있게 기도나 해야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