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휴식 (3)
“연락하자마자 이렇게 안 오셔도 됐는데요.”
“아유, 할 거 없이 놀고 있는데요, 뭘.”
안재성이 웃으며 내게 계약서를 건넸다.
안재성에게서 계약서를 받아 보관 용지에 넣은 후 말했다.
“지금을 그리워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감사하네요.”
내 말에 안재성이 환하게 웃었다.
“따로 뭐 스케줄 잡으시거나 오디션 준비하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오디션은 없고요, 단편영화 건으로 하나 잡힌 게 있는데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안재성은 막 영화촬영이 끝남에도 불구하고 또 뭔가를 찾아서 하고 있었다.
작품이 끝나면 무기력해져서 놀만도 할 텐데 열정이 대단한 것 같다.
“알겠습니다. 선호하시는 배역이나 방향성에 관해서는 서로 차츰 맞춰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저도 배역을 딱히 가리진 않습니다. 그냥 작품이 재미있으면 돼요.”
“좋은 작품 찾아볼게요.”
“감사합니다.”
서로 훈훈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서로 어색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색한 공기가 맴돌아 슬슬 자리를 파할까 했는데 이진철이 말을 걸었다.
“아, 근데… 진철이 형이랑 친구라고 하셨죠?”
“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음… 그럴까요?”
“네.”
천천히 알아가면서 하려고 했는데 대뜸 이렇게 말해주니 나야 땡큐였다.
“그래, 편하게 할게.”
“네. 저도 그게 편해요.”
“지금 당장 작품 고르기는 힘들고, 우리 쪽에서도 검토해야 하니까 일단은 잡아둔 스케줄 하고 있어.”
“네.”
“그리고 단편 정도에 내가 같이 움직이는 것도 좀 이상할 거 같고… 거기도 많이 불편할 거고. 그건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많이 해봤을 테니까.”
“네.”
말을 편하게 놓자 하고 싶은 말이 술술 나왔다.
어색했던 분위기도 많이 편해졌다.
“오느라 고생했어. 연락할게.”
“네, 잘 부탁드립니다요~”
안재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시종일관 웃으며 말하는 안재성이 내게는 어색했다. 3계절 촬영 당시에는 웃는 걸 잘 못 봤기에.
촬영 끝난 후와 쫑파티 때 서글서글해진 모습을 봤었지만, 잠깐 봤던 거라 괴리감이 꽤 있었다.
“너 근데 원래 이렇게 생글생글했냐?”
“이게 원래 제 성격이고, 촬영 들어가기 직전부터는 배역 성격으로 생활해요. 그게 몰입하기도 좋아서요. 제 나름의 메소드 연기론입니다.”
“너 같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이진철에서 들어서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본인 입으로 자부심 가득한 어투로 들으니 절로 피곤해졌다.
누군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홍승기 선배님요?”
“어, 진철이가 이야기했지?”
“진철이 형한테도 들었고, 예진 선배님한테도 들었거든요.”
“언제 한번 소개해줄게.”
“네.”
고개를 끄덕이는 안재성을 보며 둘이 정말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원래 괴짜는 서로 통하는 법이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안재성에게 말했다.
“들어가.”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재성도 일어나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같이 회의실을 빠져나와 나는 사무실로, 안재성은 집으로 갔다.
* * *
“실장님, 지금 시장에 돌아다니는 시나리오나 드라마 확인 좀 가능할까요?”
“벌써 일이냐?”
이진성 실장이 질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스타즈 애들이 휴식기에 들어섬에 따라 우리 팀도 할 일이 대폭 줄었기에 이 시간을 활용해 안재성에게 일거리를 던져주고 싶었다.
“이런 건 빨리빨리 해야죠. 마침 스타즈 애들도 휴식기라 시간도 널찍하고요.”
“그건 차 팀장한테 물어봐. 우리 쪽은 배우 담당이 아니라서 들어오는 정보나 소식이 좀 더뎌. 차 팀장이 배우 매니지먼트 맡고 있으니까 거기가 확인하기 빠를 거야.”
“알겠습니다.”
이진성 실장의 말에 대답한 뒤, 핸드폰을 꺼내 차태수 팀장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차 팀장님. 스타즈 담당 김현진입니다. 통화 가능하세요?”
- 어, 무슨 일이야?
“제가 이번에 배우 하나를 맡게 되었는데요.”
- 아~ 안재성?
“네.”
내가 안재성을 영입하게 된 건 회사 내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차태수 팀장이 배우 담당인데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 뭐가 필요한데?
“시나리오랑 드라마 오디션 정보요.”
- 메일로 보내줄 수는 있는데 우리 쪽으로 올래? 이것저것 이야기할 것도 있고.
“알겠습니다.”
- 그래.
차태수 팀장이 전화를 끊은 걸 확인한 뒤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진성 실장에게로 향했다.
“실장님. 저 차 팀장님 좀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래.”
이진성 실장이 내 말에 가보라며 손짓했다.
우리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차태수 팀장이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차태수 팀장만 있는 게 아니고 옆에 홍승기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왔냐?”
“야, 너는 나 담당하기는 싫다면서 신인 배우는 되는 거냐? 이거 완전 웃긴 새끼네?”
차태수 팀장이 내 인사를 먼저 받아주었지만, 홍승기는 나를 보자마자 구박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장면인데.
“형은 바쁘시잖아요. 제가 맡은 배우는 안 바쁘고요.”
“섭섭하다, 야.”
내가 능글맞게 이야기하자 홍승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우리 둘을 보던 차태수 팀장이 내게 말했다.
“와서 작품이랑 오디션 확인해보고 알아서 골라가.”
“네. 근데 지금 두 분이 작품 고르시는 거였어요?”
슬쩍 둘의 곁에 다가가니 여기저기 영화 시나리오와 작품들이 보였다.
작품 수가 꽤 많았다.
아마 화랑이 흥행해서 들어온 작품도 많아진 것 같다.
화랑은 예전보다 150만 정도가 더 들어왔다. 그래서 예전보다 150만이 더 많은 920만 스코어.
충분히 대박을 터트렸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 얘가 계속 뺀질대서 오늘 불렀어. 와서 일단 고르라고.”
“아니 형. 마음에 드는 게 없는데 어떻게 해요?”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확신이 없는 거겠지.”
“그게 그거죠.”
“언제까지 놀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거 몰라?”
“아, 저도 젓고 싶은데 노가 없잖아요.”
“야, 지금 널린 게 노야.”
차태수 팀장의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항상 이예진과 있는 모습을 봐서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차태수 팀장과 홍승기의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다 보니까 둘의 사이가 친근해진 것 같다.
“이건 다 승기 형에게 들어온 작품들이겠죠? 오디션 정보나 이런 건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잠시만, 메일로 보내줄게.”
“네.”
차태수 팀장이 내게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갔다.
“야, 네가 추천 좀 해줘 봐.”
“제가요?”
“어.”
대뜸 추천해달라는 홍승기에 당황했다.
“지금 제목만 보고 찍으라고 하는 건 아니시죠?”
“말이 그렇게 되나?”
홍승기가 머리를 긁적이며 내 시선을 피했다.
“읽을 시간은 있어야 추천을 해드리죠.”
“안재성? 안재성 씨인가? 나보다 어리지?”
“네.”
“걔 거 골라주면서 나도 좀 골라줘 봐.”
홍승기가 슬쩍 일감을 내게 찔러넣었다.
들어온 목록 중에서 고를 만한 게 있을까?
근데 이걸 내가 골라줘도 되는 건가 싶었다.
“팀장님 계시잖아요.”
“나랑 안 맞아.”
슬쩍 차태수 팀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홍승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칼같이 답했다.
“승기야. 다 들린다.”
“제가 틀린 말한 거 아니잖아요.”
“저거 저거.”
차태수 팀장이 들린다고 말하자 홍승기가 차태수 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태수 팀장은 그런 홍승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이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업무용 메일로 정보 정리한 자료 보내놨으니까 확인해봐.”
“네, 감사합니다.”
“덤으로 승기 작품 온 것도 같이 보냈으니까 같이 검토 좀 해주고.”
“네?”
차태수 팀장이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어조로 말했다.
“뭐가 네? 야, 너 지금 하는 거 없잖아. 스타즈 휴식기라며.”
“그렇긴 한데요….”
차태수 팀장의 말에 벙쪄버렸다.
홍승기는 옆에서 차태수 팀장 말에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에 더욱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배우도 데리고 왔으면 배우 업무도 같이 해야지.”
“어….”
차태수 팀장의 말에 더더욱 얼떨떨했다.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다니.
나와 반대로 차태수 팀장은 한층 얼굴이 밝아졌다.
“혼자 하려니 죽을 거 같았는데 잘됐다.”
“제 안목을 믿으세요?”
“믿으니까 검토해 보라고 보내준 거 아냐. 승기도 원하는 거 같고.”
“알겠습니다.”
갑자기 코가 꿰어버렸다.
스타즈 활동 들어가면 과로로 죽는 게 아닐까?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히려 스타즈 애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더 바쁜 시기를 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스타즈 애들도 마냥 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레슨을 더 많이 받았다.
그 이유는 곧 정규 앨범이 나온다는 것과 무대에서 올 라이브 추구하려는 점 때문이었다.
정규 앨범의 경우 애들의 활동 성적이 너무 좋았기에 나오는 거였다.
예전에도 정규 앨범 이야기는 나왔지만 망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었다. 지금은 성적이 너무 좋았기에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내가 건의한 애들의 여행 리얼리티 안건도 통과가 되었고 K.NET과 협의 후 스케줄 조정에 들어갔다.
모든 게 순탄하고 매끄럽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요즘 바쁘다며?”
“네.”
“차 팀장이 그렇게 하자고 하자고 해도 승기가 작품 고사했는데 한 방에 해결했다지?”
홍승기 작품 선정은 생각보다 까다롭게 결정되었다.
영화 쪽으로 들어온 작품 중에는 확실한 흥행 정보가 없었고, 드라마 쪽에서 흥행했던 작품이 보여 그쪽을 추천했다.
그렇다고 홍승기가 바로 오케이 한 것은 아니었고, 왜 이 배역과 이 드라마가 본인에게 맞는지 설득해야 했다.
“해결했다기보다는 서로 이야기하다 보니 괜찮아 보여서요.”
“이번에 영입해온 친구 것은 아직 못 골랐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홍승기의 작품 선정은 그래도 순항이었지만 안재성을 들이밀 작품은 생각보다 보이지 않았다.
신중한 것도 있었지만 기다리는 작품 목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요즘 자주 보는 거 같아.”
“…….”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하는 정인수 대표에게 나는 멋쩍은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정인수 대표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제 좀 바빠질 예정이거든. 어비스 애들 때문에.”
“들었습니다. 해외 시장 노리고 계시다고요.”
“그래. 그래서 이번 스타즈 정규 앨범 말인데….”
“네.”
“네가 해볼래?”
“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뇌가 정지가 왔다.
눈만 끔뻑끔뻑하다가 이어지는 정인수 대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네가 맡아서 해보지 않겠냐고.”
“제가…요?”
“그래.”
정인수 대표가 웃음기를 싹 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가 맡아서 기획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이틀곡 밀 때의 깡은 어디 가고 내빼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차분하게 정인수 대표의 제의에 대답했다.
타이틀곡만 미는 것과 애들의 전체적인 앨범을 기획하는 것의 난이도는 너무나도 다르다.
게다가 그때와 다르게 흥행에 대한 확신이 없다.
“괜찮아. 곡을 만들고 컨셉을 짜라는 건 아니야. 가이드라인은 나와 있으니까.”
“…….”
“단지, 그 가이드라인 안에서 네가 메이킹 해보라는 거야. 왜 굳이 너보고 맡아서 해보라고 하냐고? 웬만한 애들보다 감도 좋고 성적도 좋았으니까. 게다가 이전의 경우에는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라고 외친 인물이기도 했고.”
정인수 대표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내 눈을 깊게 응시하며 바라봤다.
“어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