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휴식 (2)
“기사님은?”
“이번 주는 안 계셔.”
“왜?”
“내가 일단 보고 정리한다고 이야기 드렸거든.”
이진철과 같이 작업하는 편집실에 들어왔다.
영화는 철저한 분업이다.
그래서 보통 영화 편집은 감독이 다 하지 않는다. 편집 기사와 같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본인이 편집하는 게 편하다고 하는 감독들은 본인이 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편집 기사와 작업하지만.
“그래서 몇 분 나왔는데?”
“160분.”
“생각보다 적게 나왔네.”
영화를 찍으면 감독은 120분을 생각하고 찍지만, 막상 컷을 붙여놓으면 원하는 러닝 타임보다 훌쩍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업영화의 경우 200분 300분도 우습게 넘어간다. 이걸 편집으로 쳐내서 우리가 보는 120분짜리 영화로 만드는 거다.
“어, 다행이긴 해. 그래도 40분은 날려야 하고.”
“러닝 2시간?”
“응. 스크린 상영 러닝 타임으로 맞춰야지. 감독판은 일단 편집 좀 해보고 생각하게.”
“한번 봐도 되냐?”
“으음.”
슬쩍 물어보자 이진철이 고민하는 기색을 비쳤다.
“고민할 거면 왜 불렀어.”
“와서 내 히스테리나 받아 달라고 불렀지.”
이진철이 내게 툴툴대며 말하면서 편집 툴을 켰다. 그러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궁금한 거야?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보여줄까?”
대뜸 영상을 틀려고 하길래 손사래를 쳤다.
나도 이진철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처음부터 쭉 볼 생각은 없었다.
“지금 보면 나중에 스크린에서 보는 맛이 떨어지잖아. 그냥 오늘은 놀러 온 거야. 그래서 뭐 불안하거나 그런 장면은 없어?”
“없을 리가 있나.”
내 말에 이진철이 피식 웃었다.
“기사님이나 이신형 감독님은 뭐라시던?”
“그냥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하라고 놔두시던데.”
사실 나도 이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도 언론에서 뻐꾸기처럼 말했던 내용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는 내가 외적이나 내적이나 너무 힘든 상황이라 누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이진철의 시나리오는 예전부터 조금씩 봤지만, 영화라는 게 시나리오대로 절대 나오지 않는다.
시나리오대로 나오기만 한다면 천만 영화가 흔할 거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시나리오가 좋아도 막상 나온 결과물이 아주 별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잠깐 딴생각하고 있자 이진철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말 돌릴 생각 말고 그냥 말해. 너 신희진 어떻게 나왔나 보려고 온 거잖아.”
“어? 티 났냐?”
지금 이진철이 엉뚱하게 짚긴 했지만 사실은 이진철이 말한 게 맞다.
영화가 궁금한 것보다 신희진이 어떻게 찍혔는지가 더 궁금해서 오게 된 거였다.
“네가 대뜸 여기 놀러 온다고 말하는 거면 그것밖에 더 있냐.”
“큼.”
이진철의 말에 너무 머쓱했다.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이진철이 말했다.
“생각보다 잘 나왔어.”
“그래?”
“일단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은 이거.”
이진철이 손을 능숙하게 움직였다.
“호오.”
보여준 영상을 보고 짧게 감탄사가 나왔다.
“그림 이쁘지?”
“그러네.”
“아직 색 보정이 다 들어간 건 아니고 내가 원하는 톤만 넣어놨어.”
이진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은 첫 촬영 때 찍은 장면이었다.
그때 당시에 모니터로 봤을 때도 그림 좋다고 느꼈는데, 색깔을 얼추 잡은 다음에 보니 더 좋았다.
“원판이 좋아서 그래.”
“근데 너는 희진이 캐스팅한 거에 만족해?”
모니터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진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말에 이진철이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나마 웃었다.
“반반?”
“반반?”
“이미지나 마스크는 만족. 연기는 상대적으로 아쉬움. 이 정도네.”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난 그렇게 봤는데.”
“물론 연기가 나쁘다고 볼 순 없지. 발연기도 아니었고, 배역에 몰입도 어느 정도 해줬고. 그래도 한두 작품 정도 하고 만났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정도? 지금도 적당히 풋풋해서 나쁘지 않았지만, 한 작품 정도 하고 만났다면 딱 내가 원하는 느낌이었을 거 같아서.”
“그건….”
이진철의 말에 신희진이 조금 부족했던 걸까 싶었다. 그래도 그게 최선이었다.
“만족 못 하는 건 아니야. 난 만족해.”
“흐음.”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생각한 베스트 배우들로 하려면 내 위치론 힘들지. 지금 내 역량, 내 위치로는 정말 베스트였다고 봐.”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감독이 만족해서 다행이다.
항상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수는 없지 않은가.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 같아지자 이진철이 내게 물었다.
“보고 싶은 장면이라도 있어?”
“엔딩.”
내가 말하자 이진철이 말없이 컴퓨터를 조작해 영상의 끝부분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안재성이 천천히 신희진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기존 엔딩과 내가 건의한 엔딩 두 가지로 갈린다.
안재성이 신희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면 기존 엔딩, 신희진을 터치하고 ‘잡았다’라고 말하면 내가 건의한 엔딩.
과연 뭘 선택했을까.
안재성이 느릿하게 신희진에게 가는 모습에 빠르게 뒷부분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도 길지도 않은 짧은 기다림 끝에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잡았다.
역시 난 기존안보다 이게 더 좋다.
게다가 영화에 집중해서 자세히 보면 안재성이 터치했을 때, 신희진의 미세한 손 떨림까지.
이 장면은 충분히 기존 엔딩보다 더 나은 엔딩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하고 있을 때 이진철이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거 희진이 머리에서 나온 거 아니지? 너지?”
“어?”
희진이가 말했나?
“아무리 봐도 희진이 머리로 나올 엔딩은 아닌 거 같아서. 너지?”
이진철이 확신하고 내게 물었다.
발뺌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사실대로 말했다.
“맞아. 내가 희진이한테 이야기했었어.”
“그냥 네가 나한테 와서 말하지. 왜 희진이 시켜서 이야기했어?”
“희진이가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신희진이라는 배우가 작품에 이만큼 신경 씁니다. 라는 걸 어필하고 싶기도 했어. 게다가 거기서 매니저가 너한테 직접 감독님 이거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하기엔 그러잖아. 내가 짬 되는 것도 아니고.”
“투자자로 이야기해도 됐잖아.”
이진철의 말에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배우 매니저라고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직급이 하나 더 있는 셈이었다.
“그러네? 그건 내가 생각을 못 했다. 딱히 간섭할 생각도 없었거든.”
“아무튼 고맙다. 나도 이게 더 좋은 거 같더라.”
내 말에 이진철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 쓰다듬고 엔딩 내는 건 너무 구려.”
“새끼….”
말하고 나서 생각이 든 건데 기존 안대로 갔어도 괜찮았다면, 지금은 더 괜찮아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신형 감독님은 뭐래?”
“희진이보고 연출해 보라고 말씀하시던데?”
“크, 역시!”
그래, 이 엔딩이 더 좋은 게 맞다.
“역시는 뭐가 역시야, 미친놈아.”
감독도 동의했고 다른 사람들도 마음에 든 평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제는 다른 게 거슬렸다.
“근데 너 언제부터 희진이보고 희진이라고 불렀냐?”
“왜?”
내 말에 이진철이 무슨 잘못이냐는 듯 물었다.
“아니, 그냥. 촬영할 때는 꼬박꼬박 존대에 씨도 붙였던 거 같아서.”
“쫑파티 때 주요 스태프랑 배우끼리 밥 먹었잖아. 그때 편하게 하라길래 나도 촬영 끝났으니 알겠다고 했지.”
“음.”
묘한 기분이었다.
일도 끝났고, 사적으로 친해질 수는 있기는 하지만….
“왜?”
“아냐.”
“너 뭐 감정 있냐?”
내가 불편한 표정인 것 같아지자 이진철이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그건 이진철의 헛다리였다.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딸이 남자 친구 소개해주는 느낌?”
“미쳤냐?”
내 말에 이진철의 경악하는 표정이 보였다.
나도 말하고 나서 급격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애들한테 정이 좀 많이 갔나 봐.”
“반년 만에 아주 푹 빠졌네.”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이진철에게 반발하고 싶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그것보다 이진철이 말한 반년이라는 시간이 와 닿았다.
남에게는 반년이지만 내게는 남들이 모르는 1년이 더 있었으니까.
“그래. 반년 만이지….”
“아, 맞다. 너 재성이랑 계약은 어떻게 됐냐?”
“재성 씨가 그것도 이야기하디?”
“애초에 너 가고 쫑파티 때 선배님이랑 재성이랑 계약 이야기도 한참 했어.”
“그래?”
불현듯 안재성이 미팅 때 쫑파티에서 얼핏 이야기를 나눴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그래서 뭐, 계약해? 네가 담당하고?”
“아마도 그럴 거 같아. 회사에서 검토 중인데 특별한 일 없으면?”
“잘해줘. 좋은 애야.”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일단 같은 식구가 되면 홍승기와 자리는 만들 생각이었다.
둘이 아주 잘 맞을 거 같거든.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잘 해줄 수밖에 없지.”
내 말에 이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때 보니까 선배님도 은근히 너 원하는 티내시던데.”
“흐음.”
이진철의 말에 고민이 됐다.
배우는 스타즈 애들 해체 전까지는 안 맡겠다고 했는데, 안재성과 같이 가게 되는 지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진철이 굳어진 내 표정을 보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야기한 적은 있나 보고만.”
“그렇긴 해.”
“현진이 많이 컸네. 이예진 까고 신인 배우랑 먼저 하고.”
웃으며 말하는 이진철이 얄미웠다.
나는 이제 머리 굴려서 어떻게 말할까 생각해야 하는데.
“야, 웃지 마.”
“상황이 웃기잖아. 너 배우들이 집착하거나 기분 상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많이 힘들어진다?”
“그런…가?”
“그럴걸?”
자기 일이 아니니 편하게 말하는 이진철이 왜 이리 미운지.
잠깐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이진철이 내게 말했다.
“더 볼래?”
“아니. 나중에 완성되면 보련다.”
이진철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말에 이진철이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그러면 그렇지.”
“야, 그럼 예전처럼 죽치고 앉아서 보다가 이거 건드리고 저거 건드리겠냐?”
“그럼 나갈까?”
이진철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안 바빠?”
“오늘 괜히 기사님 안 계셨겠냐? 성과급도 받았다며? 술이나 사.”
“그래. 알았다.”
지금은 저녁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일부러 늦게 와서 잠깐 보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진철도 나랑 생각이 비슷했던 것 같다.
이진철과 같이 편집실을 빠져나와 술집으로 향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굿 모닝.”
내 인사에 남진수가 밝은 얼굴로 받아줬다.
“다들 하루 쉬니까 혈색이 좀 돌아왔네.”
“쉬면서 일해야죠.”
남진수와 내 얼굴을 보며 이진성 실장이 한마디 했지만 남진수가 쾌활하게 받아쳤다.
“여기가 쉬면서 일할 수 있는 동네냐?”
“그래도요.”
이진성 실장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휴식이 달콤하긴 했던 것 같다. 얼굴색이 확 좋아졌다.
“아, 그리고 현진아. 기획팀 갔다 와라.”
남진수와 대화하던 이진성 실장이 몸을 내 쪽으로 틀며 내게 말했다.
“기획팀이요?”
“거기서 계약서 받아서 진행하라고 업무 메일 왔더라.”
우리와 접점이 크게 없는 곳인데 나를 찾기에 뭔가 했더니 안재성 계약 건과 관련해 계약서 검토가 완료된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본인이 낚아온 첫 담당이겠네. 계약 성사되면.”
“빠르긴 빠르네.”
이진성 실장이 한마디 하자 남진수도 한마디 보탰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해봐.”
“네.”
드디어 계약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