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일단 찍어 봐 (1)
“가지 마아!”
신희진이 이나라에게 찰떡같이 붙어서 징징대고 있었다.
“얘 왜 이래요?”
“나도 몰라.”
이나라는 못 볼꼴을 봤다는 듯 신희진을 토닥이면서 혀를 찼다.
“언니 가지 마아….”
기운이 다 빠졌는지 좀 전 같은 포효는 하지 않고 얌전해졌다.
“저번이랑 비슷하지?”
“그때는 얌전하기라도 했지, 이번엔 발광하잖아요. 이렇게 되기 전에 오빠가 컷 했어야죠!”
이나라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아니 그게….”
“그때도 다음 날에 일어나자마자 기억하냐고 물어보니까 하나도 기억 못 하더만. 오늘도 또 그러겠네. 가만… 기억하는데 못하는 척하는 건가? 야, 야.”
이나라가 말할 때마다 특정 단어에서 신희진이 움찔움찔하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가?
“기절한 애 깨우지 마. 또 난동 피운다. 조절 못 한 건… 내가 할 말이 없다.”
“당연히 없어야죠.”
내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이나라를 보고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근데 생각해보면 억울했다.
내 눈앞에 있어야 조절을 하지, 내 눈앞에 없는데 어떻게 조절을 하나.
이나라가 신희진을 부축한 채로 내게 물었다.
“오빠는 그럼 어떻게 가요?”
“나? 택시 타고 가야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아, 참. 너 댄싱 투나잇 준비는 잘 돼 가?”
내가 댄싱 투나잇에 관해 묻자 이나라가 비릿하게 웃었다.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야. 네가 큰 틀 잡은 뒤로는 안 보여줬잖아. 나중에 무대로 보라고. 그래서 이야기 잘 안 한 거야. 메이 씨랑 연습할 때도 따라가면 나가라고 소리치던 게 누군데.”
“관심을 주는 거랑 안 주는 거랑은 다르거든요? 세심하지가 못하시네.”
내 말에 이나라가 흥 하며 토라졌다.
어렵다. 어려워.
여기서 더 나가면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지니 재빨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어이구야. 그래, 어때?”
“좋아요. 빨리 촬영했으면 좋겠어요. 준비 다 됐거든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이나라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나라를 보니 댄싱 투나잇을 추천해준 건 확실히 잘한 일이었다. 프로그램하면서 이나라의 자신감도 자존감도 많이 회복했다.
밝아진 이나라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3일만 참으면 녹화잖아. 참, 내일이었지? 마지막으로 맞춰보는 게.”
“네. 그다음은 당일 리허설이구요.”
“잘하고 있나 보네. 자신감 넘치는 거 보면.”
“네. 만족해요.”
만족한다는 말에 이나라의 자신감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었다.
“가지 마아!”
조금 더 이나라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이나라 옆에서 꿈틀대던 신희진 때문에 무산됐다.
“얼른 애 데리고 들어가.”
“넵! 들어가세요.”
내 말에 이나라가 신희진을 부축하면서 숙소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나도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오자마자 기운이 쭉 빠졌다.
아마 큰 프로젝트 하나가 무사히 끝나서 오는 해방감인 것 같았다.
침대에 눕자마자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냥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러자 안에서 남진수가 인사를 받아줬다.
“어제는 몇 시에 들어갔냐?”
“어제 희진이가 일찍 뻗어서 금방 들어갔어요.”
“그래?”
“네.”
내 곁으로 남진수가 커피를 마시면서 다가왔다.
“오늘은 나라 말고는 스케줄 없죠?”
“어. 나라만 오후에 메이 연습실 갔다 오면 돼.”
내가 남진수에게 묻자 남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의 연속이구나. 일. 일. 일.
“나도 쉬고 싶다….”
“야, 나도 안 쉰 지 오래됐어. 그래도 그동안 달려온 게 있어서 나라 스케줄 끝나면 하루 빼줄 수 있을 거 같긴 해.”
“오, 정말요?”
남진수도 같이 푸념했다. 자세히 보니 남진수의 얼굴도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그것보다 남진수의 이어지는 말에 갑자기 피로감이 가시는 걸 느꼈다.
“그래. 어차피 나라까지 프로그램 끝나면 애들 완전 휴식기야.”
“지금도 휴식기 아니었어요?”
지금도 쉬엄쉬엄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지금은 애들 행사나 스케줄 돌리잖아.”
“더 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애들 기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평범한 회사소속 그룹이면 그랬겠지. 얘네 노래 안 터졌으면 이렇게까지 안 돌렸어. 인마.”
“아….”
생각해보니 회사에서 세운 초기 전략은 보여줄 듯 말 듯 하면서 이미지 소모를 낮추는 거였다. 지금은 노래가 폭탄 터지듯 터져버려서 그렇지 예전에는 활동을 많이 안 했다.
물론 활동을 안 한 그 배경에는 그룹의 이미지가 안 좋았던 점도 한몫했다. 지금은 반대지만.
“암튼 나라까지만 잘 케어해. 하루 쉬게 해줄 테니까.”
“넵!”
남진수의 말에 힘차게 대답했다.
하루 쉬면 뭐 할까.
행복한 고민과 함께 내 자리로 갔다.
* * *
“희진이는 아직도 자?”
“네. 중간에 한번 깼다가 물 찾고 바로 다시 자던데요.”
오후가 되어 이나라를 태워 메이의 연습실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한 번에 빠르게 많이 마시니까 그렇지. 술병은 아니지?”
“네. 술병 같지는 않았어요. 근데 누구랑 마신 거예요?”
“이예진 선배님.”
“아….”
내가 이예진을 언급하자 이나라의 표정이 짐짓 굳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이나라에게 물었다.
“왜?”
“아뇨. 예전에 저희한테 날 세워서 대하시던 게 생각나서요.”
“으음.”
애들이 이예진과 처음 마주친 게 Y앱 처음 할 때였지, 아마.
“그때 이후로 선배님 본 적 있어?”
“아뇨. 희진이 말고는 다 그때가 처음이었을걸요.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뵀어요.”
애초에 같은 회사라고 소속된 연예인들을 모두 자주 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못 보는 경우가 많았다.
“선배님이랑 몇 번 일도 같이 해봤는데… 그때는 뭐가 예민했었나 봐. 희진이랑도 그렇게, 어… 모르겠다.”
이나라에게 이예진에 대한 내 생각을 늘어놓다가, 신희진과 이예진의 관계를 떠올리니까 말이 꼬여버렸다.
이나라도 내 모습에서 이상함을 캐치했는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왜요? 뭐 있었어요?”
“아냐.”
“뭔데요.”
“몰라.”
내용이 궁금한지 상체를 내 쪽으로 숙이며 접근하며 물었다.
알려주고 싶어도 나도 둘의 관계가 어떤지 진짜 몰랐다.
나도 궁금해.
괜히 내가 안 알려준다고 생각했는지 이나라가 의자 시트에 다시 기대며 툴툴거렸다.
“희진이한테 물어봐야겠다.”
“알아내면 나도 알려줘. 궁금하니까.”
“헤? 무슨 일 있긴 한가 봐요?”
내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나라가 호기심을 비췄다.
근데 솔직히 지금은 신희진과 이예진보다 이나라의 퍼포먼스 완성도가 더 궁금했다.
“나도 궁금해. 그건 그렇고 오늘도 난 나가 있어야 해?”
“네!”
“뭘 그렇게 꼭꼭 숨겨.”
이나라에게 핀잔을 줬다.
이나라는 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관총처럼 다다다 말했다.
“그래도 멋지고 이쁜 거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에요. 출입 금지입니다! 그리고 오빠가 봐도 모르잖아요.”
“내가 너네 망가진 거 한두 번 보냐?”
“아 쫌!”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아무래도 연습하다가 중간에 습격해야겠다.
어떻게 하는지 맛이라도 봐야지.
* * *
“아메리카노 4잔, 캐러멜 마키아토 2잔, 카페라테 2잔, 카페 모카 1잔, 전부 아이스로. 맞으시죠?”
“네.”
점원에게서 커피를 받아 들고 나왔다. 빈손으로 습격하기는 힘드니 커피를 들고 가는 계획을 세웠다.
커피를 양손 가득 들고 메이의 지하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 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쿵쿵대는 비트의 음악이 들려왔다.
때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연습 중인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이나라와 메이가 슬라이딩하면서 교차하는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이나라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잠깐만요!”
이나라의 외침과 함께 춤의 흐름이 끊겼다.
들어가는 타이밍은 좋았으나 퍼포먼스의 타이밍은 내게 매우 안 좋은 타이밍이었다.
“고생하시는 것 같아 시원한 커피 사왔습니다. 하하하.”
“오빠!”
기회는 딱 한 번뿐이었는데 아쉬웠다. 나중에 녹화할 때 봐야겠다.
“와! 감사합니다!”
“언니!”
“왜? 다 보여드린 것도 아니잖아?”
메이도 나와 이나라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나라의 행동에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다른 분들 것도 넉넉히 사왔어요.”
“잠깐 쉽시다!”
내 말에 메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런 메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방해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이번 합 맞춰보는 거 끝나고 쉬려고 했어요.”
“합 맞추는 게 좀 어렵나 봐요?”
“거기까지!”
하하하.
메이의 말에서 뭔가 힌트라도 얻어 보려고 했지만 이나라가 칼같이 끊었다.
그리고 이나라의 행동에 연습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나라가 매니저님한테 신뢰가 대단한 거 같아요.”
“아니에요. 한 거 없는걸요.”
“에이, 그렇게 빼시면 나라가 뭐가 돼요?”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메이의 말에 내 동공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메이가 그런 날 보고 풋 하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이 둘은 왜 이렇게 놀리는 맛이 있지? 연예인이랑 매니저도 잘 맞으면 닮는다니까.”
“언니!”
메이가 방송계에 구른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럼 전 사라지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어? 좀 더 있다 가시지.”
“아니에요. 하하하.”
메이의 말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연습실에 더 남아 있으면 이나라가 불편할 것 같아서 자리를 빠르게 떴다.
메이의 행동과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계속 있다가는 꽤 짓궂게 행동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퍼포먼스롤 훔쳐 보지 못한 게 아쉽긴 했으나 잠깐 본 것만으로도 기대감은 충족되었다.
연습실을 빠져나와 다시 카페로 향하려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남진수의 전화였다.
“네, 김현진입니다.”
- 어, 현진아. 너 다른 사람한테 회사 추천해줬냐? 찾아온 사람이 있네.
전화를 받자 대뜸 본론부터 남진수가 이야기했다.
회사에 추천? 내가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한 명뿐인데. 벌써?
“네?”
- 그 있잖아. 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잘 몰라요.”
- 이번에 희진이랑 같이 영화 찍은 애. 안재성인가? 걔. 네가 우리 회사 추천해 줬다며?
남진수의 말에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근데 너무 빠른데?
“네, 그렇긴 한데, 어제 이야기했고 본인도 좀 알아보고 연락해 준다고 했는데요.”
- 그래? 일단 너랑 이야기 좀 해보고 싶다고 지금 회사에 찾아왔는데.
“근데 팀장님. 제가 임의로 계약하거나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계약 관련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안재성의 저돌적인 행동에 당황했으나 이렇게 빠르게 직접 올 줄 몰랐다.
게다가 계약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경우가 드물어서. 어떻게? 일단 기다리라고 해?
“제가 나라 스케줄이 있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번호 알려주시면 제가 전화해 볼게요.”
- 그래 연락처 받아서 문자 넣어줄게.
“네.”
일단은 안재성과 다시 통화를 해봐야겠다.
골 때리는 양반이네.
남진수에게서 금방 연락처가 넘어왔다. 연락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재성 씨 핸드폰이죠?”
- 네, 현진 씨?
“네. 지금 회사시라고요?”
- 네!
통화로 들려온 안재성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어제 남아서 술자리를 지켰을 게 분명할 텐데도 멀쩡한 거 보니 이 사람도 주당인 것 같다.
근데 지금은 그거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제가 스케줄이 있어서 지금 당장 회사로 가긴 힘든데 나중에 오시겠어요?”
- 스케줄 얼마나 걸리시는데요?
“저녁 전에는 아마 회사에 도착할 것 같긴 해요.”
-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나중에 따로 날짜를 잡으려고 이야기를 해보았으나 안재성은 확고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 괜히 질질 끌고 싶지 않아서요.
내 말에 바로 확답하는 안재성의 말투에서 오늘 꼭 보겠다는 어투가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근처에서 쉬시고, 마땅한 데가 없으시면 회사 아래에 카페 있어요.”
- 네.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괜찮은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내게 그럴 권한이 있냐는 것.
나는 안재성의 가능성을 크게 보지만 지금 안재성의 가치는 무명 배우다. 회사에서는 굳이? 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안재성을 낚을 수만 있으면 낚는 게 맞다. 근데 어떻게 낚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