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3계절 (4)
안재성이 나가고 단둘이 있는 방 안에는 조용한 침묵만 맴돌았다.
이런 숨 막히는 공기가 싫어 신희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무 답답했다.
“이 정도면 합격점인가요?”
“…….”
신희진의 말에 이예진이 양손을 깍지 끼고 그 위에 얼굴을 얹은 뒤 맞은편에 있는 신희진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그냥. 재능이 좋은 걸까 아니면 메이킹이 좋은 걸까 생각 중.”
신희진의 물음에 신희진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예진이 답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신희진의 되물음에 이예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 그대로의 뜻이야. 갑자기 확 좋아져서.”
“둘 다겠죠.”
신희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신희진을 바라보는 이예진의 눈은 올라간 입꼬리와 다르게 웃지 않았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깜찍하다고.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난 후자인 거 같은데?”
“어째서요?”
“너도 잘 알지 않니?”
“모르겠는데요.”
“그래? 정말?”
“…네.”
재차 되묻는 이예진의 말에 신희진이 끝에 가서는 자신 없게 대답했다. 힘 빠진 목소리에서 신희진도 이예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 같았다.
“이 감독도 알지만 그냥 넘어간 거 같은데… 너. 감정. 다른 유사 감정으로 잡았잖아? 모를 거로 생각했니? 애초에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넘어간 거야. 기대치 이상을 보여줘서.”
“…….”
이예진의 말에 신희진이 움찔했다.
이예진이 그런 신희진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던 술병을 들고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아리까리했는데 호흡 조금 맞춰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래도 칭찬은 해줄게. 온실 속에서만 자란 건 아니었나 봐?”
“…그래서 어떠셨는데요?”
“내 생각보다는 잘해서 놀랐고, 내 기준치에는 못 미친달까…. 아직은 좀 더 봐야겠다는 생각? 그래도 뭐 나쁘진 않네.”
이예진이 덤덤하게 신희진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그래서! 제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할 정도였나요? 하긴 현장은 두 번째니까 잘 모르시죠? 제가 어떻게 연기했고 현장이 어땠는지.”
자기가 원한 대답이 아니라는 듯 신희진이 강조해서 말했다. 그런 신희진의 모습에 이예진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보다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네.”
이예진의 말에 똑 부러지게 신희진이 대답했다.
신희진의 대답을 들은 이예진이 생선이 펄쩍 뛰듯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웃으며 말했다.
“하핫, 너 의외로 독하네.”
“말해주세요.”
신희진이 이예진의 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예진을 쳐다봤다.
“너에 대한 건 보류. 현진 씨의 메이킹은 놀라웠고. 그러니까 무승부라고 봐야 하나?”
이예진이 자세를 바로 하고 신희진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할 말이 끝난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연기는 나쁘지 않았어. 본인의 색깔에도 맞고, 이미지도 딱 들어맞았으니까. 근데 너 그거 말고 다른 인물도 연기할 수 있어? 가령 변호사라던가, 의사라던가.”
“그건….”
이예진의 말에 신희진이 대답할 말을 못 찾은 듯했다. 신희진이 고장 난 기계처럼 머뭇거리자 이예진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배역에 잘 맞아떨어지는 걸 구해다 줘서 그렇지. 다른 것도 그럴까? 그걸 봐야 하지 않을까?”
“선배님도 한 이미지로만 쭉 미셨잖아요.”
이예진의 말에 신희진이 고무줄 튕기듯 발끈해서 말했다.
그런 신희진의 말에 이예진이 피식 웃고는 술이 따라져 있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래. 근데 난 한 이미지 내에서도 다양하게는 했어. 내가 민 이미지는 ‘청순함’만이었지. 근데 그 이미지도 이제 나이가 들어 한계가 오긴 했지만 말이야. 이번에 마녀를 통해 이미지 변신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 게다가 너 하는 거 보고 확실히 느꼈어, 그 사람… 작품 초이스가 너무 좋더라고. 그래서 탐이나. 무척이나.”
이예진이 신희진에게 말하고 나서 술잔에 들어 있는 술을 먹었다.
그리고 술에 젖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 같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신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 * *
“꽤 길게 이야기하네요.”
“둘이 무슨 일 있었나?”
안재성과 이진철이 안쪽에 있는 방을 곁눈질하며 각자 한마디씩 했다.
“예전에 캐스팅 확정 전에 선배님이 한번 희진이 찾았거든. 그때 무슨 말을 한 거 같긴 하던데….”
“그래?”
“응. 근데 둘 다 무슨 이야기했는지는 안 알려주더라고.”
이진철이랑 안재성만 궁금한 게 아니라 나도 궁금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재성아, 나오기 전에 안에서 무슨 일 없었어?”
“딱히 없었는데….”
이진철의 말에 안재성이 의아함만 가득 품었다.
“근데 두 명은 저기 있다 치고, 민혁이는 어디 갔어?”
“민혁이 이신형 감독님한테 붙잡혀 있어요.”
“그래? 그럼 걔는 버리자.”
이진철이 권민혁의 소재를 안재성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신형 감독에게 붙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관심을 껐다.
“형도 찾던데요?”
안재성이 말하자 이진철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저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나? 거길 왜 가? 갔다가 기어 나올 일 있냐? 지금도 겨우 빠져나온 건데.”
“섭섭해하시지 않을까요?”
“서업~섭? 어차피 편집하면서 쭉 붙잡혀서 진탕 마실 테니 난 봐주라.”
안재성의 말에 이진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이진철은 이신형 감독이랑 껌처럼 끈끈했다.
“아, 재성 씨.”
“네.”
“아직 소속사 안 구했죠?”
“네.”
“우리 회사는 어때요?”
“어….”
내 말에 안재성이 머뭇거렸다.
“뭐야? 꼬시는 거야?”
“넌 좀 조용히 해.”
지금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있는데 웬 방해꾼이 들어오는 것 같아 빠르게 퇴치했다.
안재성이 나와 이진철의 투덕거리는 모습에 웃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헥사곤 좋죠. 근데 거기가 배우 풀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 집중해줄 수 있겠죠?”
“으음.”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요.”
“아무리 그래도 저는 배우 매니지먼트가 더 좋아서요.”
안재성이 내 말에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렇게 물러나면 안 된다. 이제 약을 팔아야 할 시간이다.
“이예진 선배님도 헥사곤인 건 아시죠?”
“네.”
“이번에 개봉해서 지금 꽤 흥행하고 있는 화랑에 나오는 승기 형도 우리 회사예요.”
“흐음.”
“선배님은 우리 회사 옮기고 마녀로 흥행 터트렸고, 승기 형도 조연급에서 이제 주연급으로 올라갈 거 같고요. 기세가 있습니다, 기세가.”
내 말에 안재성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봤다. 조금 더 팔면 될 것 같다.
“근데 갑자기 궁금한 건데요. 왜 이예진 선배님은 선배님이고, 홍승기 선배님은 형이에요?”
안재성이 화제를 돌렸다.
“승기 형은 같은 학교 동문이라서 그래. 쟤랑 나랑 승기 형 셋은 같은 학교 출신. 그리고 학교도 1년 정도 같이 다녔어.”
“아아.”
내가 대답하려는 찰나에 이진철이 안재성의 물음에 답해줬다.
“소속사는 일단 생각해 볼게요. 저도 제 나름대로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명함 있으신가요?”
“잠시만요.”
조금 더 약 팔면서 꼬시면 올 것 같았는데 안재성이 노련하게 피해버렸다.
입맛만 다시면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서 안재성에게 줬다.
내가 안재성에게 명함을 주는 모습을 본 이진철이 내게 물었다.
“너 명함도 있었어?”
“내가 안 줬나?”
“로드가 무슨 명함이야?”
“매니저는 말단이어도 뭔가 있어 보여야 한다고 파주던데?”
“그래? 나도 줘봐.”
“잠시만.”
이진철에게도 명함을 꺼내 줬다.
명함을 받아든 이진칠이 명함을 요리조리 보다가 내게 물었다.
“근데 명함이 왜 주니어 매니저야?”
“로드 매니저라고 하면 없어 보이잖아.”
저 질문은 내 명함이 나왔을 때 나도 남진수에게 했던 말이었다. 남진수가 내게 했던 답 그대로 이진철에게 말했다.
“주니어나 로드나 그게 그거 아니냐?”
“야, 그러면 다시 줘.”
“줬다 뺏는 게 어디 있냐?”
내가 명함을 뺏으려 하자 이진철이 자기 지갑에 넣었다. 나와 이진철의 모습에 안재성이 신기하게 바라봤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두 분 참 친해 보이시네요.”
“아무래도 안 지 10년은 넘었으니까요.”
안재성에게 내가 말하자 이진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징그럽다 징그러.”
“그거 내가 할 말이야.”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이었다. 그러다가 서로 웃으며 술잔을 들어 건배했다.
셋이서 기분 좋게 술자리를 이어 가고 있을 때 이예진과 신희진이 있는 방문이 열리더니, 이예진이 나를 불렀다.
“현진 씨!”
“네!”
“여기 좀 와 봐요.”
“네! 잠시만요.”
이예진의 말에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나 보다. 갔다 올게.”
“어.”
이진철에게 말한 뒤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테이블에 엎어진 신희진이 보였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진 이예진도.
“이게?”
“술 먹고 뻗은 사람 처음 봐요?”
내가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이예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어쩌다….”
“그냥 둘이 한잔했어요.”
“…….”
내가 침묵하자 이예진이 신희진을 바라보며 나무랐다.
“이렇게 술이 약해서 어떻게 해?”
이예진의 말에 비어 있는 술병을 어림잡아 세어 봐도 열 병은 되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이 쌓여 있는 술병에 닿은 걸 본 이예진이 손사래를 쳤다.
“저건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쌓여 있던 거예요. 둘이 마신 건 다섯 병쯤 되려나?”
“재성 씨 나간 뒤로 다섯 병입니까?”
“그럴걸요?”
“한 시간도 안 돼서 다섯 병이면….”
“적당하죠?”
이예진이 내 말을 끊고 웃으며 말했다.
뭐가 적당해. 작정하고 애를 보내려 했구먼.
능글맞게 말하는 이예진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희진이 데리고 가라고 부르신 거죠?”
“네, 맞아요. 전 다른 술 상대 찾아야겠네요.”
“알겠습니다. 잠깐 인사 좀 드리고 다시 올게요.”
“그러세요.”
내 말이 끝나자 이예진이 어깨를 으쓱한 뒤 바로 술을 자작했다.
방을 나온 뒤에 이진철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 들어가.”
“이신형 감독님한테 이야기 드리고 가볼게. 촬영 정말 고생 많았다.”
“아직 남았는데, 뭘.”
내 말에 이진철이 쓰게 웃었다.
“들어가세요.”
“네, 재성 씨 연락 기다릴게요.”
“하하.”
안재성의 어색한 웃음을 뒤로한 채 이신형 감독을 찾았다. 이신형 감독 옆에 죽어 있는 권민혁이 눈에 띄었다.
“감독님, 희진이가 뻗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으잉? 예진이랑 둘이 대작한다더니 술 잘 마시는 거 아니었어?”
“하하….”
이신형 감독의 말에 나도 조금 전 인사를 나눴던 안재성처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둘이 대작하고 있는 걸 다들 알고 있던 듯했다. 지금 기절해 있는 권민혁도 같은 방이었으니까.
“알았어. 들어가. 참, 근데 이진철 이 새끼 어디서 마시고 있어?”
“저기 구석에서 마시고 있습니다. 감독님.”
“장 감독. 나 진철이랑 좀 마시고 올게.”
“예, 그러십쇼.”
이신형 감독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촬영 감독에게 말하고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이건 내 잘못 아니다, 진철아.
이신형 감독은 이진철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고 나는 다시 이예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이예진은 없고 신희진이 아까 나간 상태 그대로 똑같이 있었다.
“희진아, 희진아. 집에 가자. 일어나 봐. 희진아?”
“…….”
신희진 옆으로 가서 신희진을 부르고 흔들어도 대답이 없었다. 완전히 죽은 듯했다. 밖에 있는 여자 스태프 중 한 명에게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는데 내 바지를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신희진이 깨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