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3계절 (3)
“마음에 드세요?”
“이야~ 난 숨도 못 쉬었어.”
이예진의 말에 이신형 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숨 못 쉬면 어떻게 해요. 숨은 쉬고 살아야지.”
“그러게 말이야. 드라마 하나 터지고 나더니 연기가 더 늘었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럼 좋은 작품이나 주세요.”
이예진이 능청스럽게 이신형 감독에게 말했다.
“아, 그건 좀 미안한데. 먼저 봐둔 사람이 있어서.”
그러나 이신형 감독은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예진에게 답했다.
“알아요. 민희한테 들었어요.”
“그래?”
“네.”
이신형 감독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이예진이 모니터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예진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신희진에게로 갔다.
이예진은 노련하게 금방 배역의 감정에서 벗어났는데 신희진은 아직이었다.
이 장면이 아무래도 3계절의 장면 중 가장 감정 다루기가 힘든 장면이라 생각한다.
신희진 곁에 있으면서 내 시선은 모니터에 뭉쳐서 대화하는 인원들에게로 향했다.
“근데 예진이도 예진이지만 희진이도 장난 아니네. 이 감독 다시 갈 거야?”
이신형 감독이 이예진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이진철에게 말했다.
“아니요. 굳이 다시 갈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이거 가이드라인 삼아서 진행하면 될 듯싶습니다.”
“그래. 잘 선택했어. 이 장면은 다시 갈 필요가 없어. 오히려 더 안 나올 거 같은데.”
이신형 감독의 말에 이진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 입에서 그런 말을 하시니 좀 이상한데요?”
“뭐야?”
“항상 하나 더 찍으셨잖아요.”
“하하하.”
그림이 아주 이쁘고 만족스럽게 찍혀서 그런지 촬영장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내가 촬영장의 분위기를 살펴보고 있을 때 신희진이 내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자연히 내 시선이 신희진에게로 향했다.
“좀 진정 됐어?”
“네.”
몰입의 여파인지 신희진이 이제서야 몰입이 끝난 것 같았다.
“한번 볼래요? 두 분 다?”
신희진이 진정된 모습을 본 건지 이진철이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네.”
이예진과 신희진이 대답하고는 이진철이 있는 모니터 앞으로 갔다. 나도 신희진을 따라갔다.
모니터에서 좀 전의 장면이 재생되었다.
다시 봐도 첫 테이크에 다 쏟아낸 듯한 감정선이었다.
신희진이나, 이예진이나.
모니터에서 재생이 끝났다. 재생이 끝남과 동시에 안재성이 커피를 들고 왔다.
“다들 커피 한잔 드시고 하세요. 제가 쐈습니다!”
“무슨 돈이 있다고 사 왔어?”
이신형 감독이 안재성을 보고 구박했다.
“이 정도는 충분하죠. 하하하.”
“근데 이거 저도 다시 찍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갭이 너무 큰데요?”
안재성은 촬영이 끝나고 사람이 바뀌었다. 이제 자기 촬영은 끝났으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나 뭐라나. 참 독특한 사람이다.
“짜샤. 다 끝나고 말하면 뭐해?”
“희진이가 갈수록 좋아지는데 어떻게 해요. 지금부터 다시 촬영하면 안 될까요?”
“미쳤냐?”
이신형 감독과 능글능글하게 대화하는 안재성을 보며 처음 만난 모습과 오버랩 되어 보였다.
안재성의 다른 모습에 솔직히 적응이 잘 안 됐다.
이신형 감독이 막 생각났다는 듯 안재성을 보며 손바닥에 주먹을 쳤다.
“아, 맞다. 재성아 너도 촬영 준비해.”
“예?”
“엔딩 장면 추가 컷 생겼어.”
“갑자기요?”
안재성이 이신형 감독의 말에 당황했다.
“이거 끝나면 바로 들어갈 거니까 미리 메이크업이랑 의상 받아놔.”
안재성이 이신형 감독의 말에 당황해했다.
“허, 안 되는데….”
“뭐가 안 돼?”
“저 캐릭터 털어내고 있었단 말이에요.”
“누가 촬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털어내?”
“끙, 알겠습니다.”
안재성이 이신형 감독에게 잔소리를 열심히 듣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말마따나 메이크업 받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안재성이 사라지자 이예진이 한마디 했다.
“첫 촬영 때랑 좀 다르네요? 재밌는 친구네요.”
“저도 저런 사람 두 번째 봅니다.”
“어머, 저랑 똑같네요. 저도 한 사람 아는데.”
“아마 같은 사람인 거 같네요.”
“그렇죠? 그런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이예진과 이진철은 안재성이 나간 곳을 보며 말했다.
근데 그 사람 나도 아는 사람인 거 같은데.
“자, 그럼 이제 다음 컷 준비할까요?”
“그래요.”
“다음 컷 준비하겠습니다!”
이진철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신희진이 쭈뼛쭈뼛 내게 다가왔다.
“가볼게요.”
“좀 힘들겠지만, 감정 조절 잘해보고.”
“네.”
신희진의 대답을 듣고 신희진에게 물병을 건네주자 신희진이 물을 한 모금 먹고는 내게 돌려줬다.
“자요. 진짜 갔다 올게요.”
“잘하고 와.”
지금 추세면 잘하고 올 것 같다.
아까 이예진과 이진철의 기 싸움 이후로 신희진의 연기는 물이 올랐다. 어떻게 신희진은 이예진과 얽히면 연기가 일취월장하는 기분이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임지예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관람객으로 돌아갔다.
* * *
“컷!”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이진철의 컷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신형 감독이 샴페인을 이진철에게 뿌렸다.
“고생했다!”
이신형 감독만 샴페인 뿌리는 거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느새 각 파트 헤드 급들도 샴페인을 들고 이진철에게 부었다.
“저 예비 옷 없단 말이에요!”
쏟아지는 샴페인 세례에 이진철이 눈도 뜨지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감독님~ 그건 걱정 마세요. 의상실에서 맞는 의상 골라 입으시고 깨끗하게 반납해 주세요~”
“그래, 그래. 옷이 뭐 대수야?”
의상 담당인 장소영 팀장이 나른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이신형 감독도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니, 팬티까지 젖었단 말이에요.”
“인마. 촬영이 무사히 끝났으면 팬티 젖는 게 대수냐?”
“그렇긴 해요.”
이진철이 몸에 남아 있는 샴페인을 털며 소탈하게 웃었다.
“남은 거 다 부어!”
촬영장 분위기가 참 밝았다.
돈이 들어간 이상 지금 찍은 영화도 상업적으로 개봉을 하겠지만 수십억대의 상업영화를 할 때보다 다들 마음 편하게 찍은 것 같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잘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부담이 적으니까.
게다가 보통 투자자나 제작사 등, 촬영에 간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투자 지분이 상당수 있었던 헥사곤에서 작품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현장에 신희진과 함께 나오기 때문이었다.
“오늘 쫑파티 바로 있습니다!”
윤진수 PD가 쾌활하게 말했다.
어쩐지 오늘 일정이 이상하게 짧다 싶더니만.
“오늘 지나면 또 이렇게 모이기 힘들잖아요? 바로 끝냅시다.”
“그래도 쫑파티라도 하네. 안 하는 곳도 부지기순데.”
“우리가 언제 안 한 적 있어?”
“암요. 무조건 했죠.”
윤진수 PD의 말에 헤드 급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윤 PD! 얼마큼 먹어도 되는 거야?”
이신형 감독이 아이 같은 눈빛으로 물었다.
“오늘은….”
윤진수 PD의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고삐 푸셔도 됩니다.”
와아!
윤진수 PD의 한마디에 촬영장은 더 후끈 달아올랐다. 오히려 촬영 끝났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다.
그중 내 옆에 있던 신희진이 제일 기뻐했다.
* * *
“감독님 건배사 듣겠습니다. 모두 잔을 들어주세요!”
윤진수 PD의 말에 모두 잔을 들었다.
“부족한 감독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너무 새롭지 못한데요? 트렌드에 맞게 좀 해주시죠?”
하하하.
이진철의 건배사에 이신형 감독이 개구쟁이처럼 딴지를 걸자 모두가 웃었다.
“내가 트렌드하지 못해서… 그럼 조감독이 한마디 하자.”
이진철이 위트 있게 말했다.
오오오.
그리고 이진철의 한마디에 좌중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신형 감독을 바라봤다.
지금 회식 자리에서는 어찌 됐든 이진철이 이신형 감독보다 위였다.
“야! 촬영 다 끝났어, 인마.”
“제가 배운 감독님 밑에서는 쫑파티까지가 촬영의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잘못 배웠나?”
하하하.
이신형 감독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이진철이 능수능란하게 받아쳤다.
한편의 코미디 같은 상황에 모두가 웃었다.
“말이나 못 하면. 아이고, 속 터져.”
“얼른 해주시죠?”
이진철의 말에 이신형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난 감독 따라가시느라 고생들 많았습니다. 다음 작품에도 같이 작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액션!”
이신형 감독이 호기롭게 액션을 외치고 혼자 술을 쭉 들이켰다.
“액션!”
그에 맞춰 모두가 액션을 외치며 술을 먹었다.
딱!
“여기 팀은 언제 봐도 파이팅 넘친다니까.”
차태수 팀장이 잔에 있던 술을 한 번에 비우고 테이블에 호기롭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바쁘시죠?”
“아니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아. 여유로운 것도 아니긴 한데 적당해.”
“차기작은 정하셨대요?”
슬쩍 이예진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나 내 말에 차태수 팀장이 끙 하고 앓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고민하고 있는 것 같더라.”
“왜요?”
“드라마 하나를 더 할지, 아니면 영화를 할지.”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신가 보네요?”
그냥 쉬고 싶은 건가? 들어온 대본이 쏟아졌을 텐데.
아니면 흥행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것도 아닌 거 같은데… 뭐 급한 건 아니니까. CF도 꽤 많이 찍고 있고.”
“벌써 6개 찍었죠?”
“어. 아직 방영 안 된 거까지 포함하면 총 9개야. 찍어야 할 거 3개, 방영된 거 3개, 방영 안 된 거 3개.”
“돈을 쓸어 담으시네요.”
“작품 한 방에 확 올라갔다니까.”
작품이 터지기만 하면 정말 억하고 돈을 쓸어 담는 게 연예인이다. 그 작품 하나 터지기가 무척 힘들다는 게 함정이지만.
“아, 그러고 보니 남 팀장한테 들었는데 안재성 씨 노리고 있다며?”
“네. 괜찮은 인재 같아서요. 아직 무소속이기도 하고.”
차태수 팀장이 안재성에게 물었다.
남진수 이 양반은 입이 너무 가볍다니까.
“그 정도야? 내가 잠깐 봐서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충분히 포텐 있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놓치고 이번 영화 터지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죠.”
“흠, 나쁘진 않은 것 같긴 해. 뭐 내가 단적으로 본 것보다는 꾸준히 봐온 네가 더 맞겠지. 네가 안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 말에 차태수 팀장이 팔짱을 끼며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내가 쌓아온 신용이 있어서인지 내 안목을 믿는 듯했다.
그렇게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팔짱을 풀고 내게 말을 걸었다.
“벌써 네 팀 꾸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탐나잖아요. 한번 던져 보는 거죠.”
차태수 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했다.
안재성 영입이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
“너도 참 돌연변이야. 매니저업계의 돌연변이.”
“네?”
“실적이나 하는 행동 보면 미친놈 같잖아. 보면 대단하달까?”
“아니에요. 운이 좋은 거죠.”
“이 바닥은 운도 실력이야. 운도 반복되면 그것도 실력이고. 럭키 펀치가 어디 있어? 이 바닥에.”
“너무 띄워 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차태수 팀장의 비행기에 몸이 화끈거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저녁인데도 더 더운 것 같았다.
“이게 뭐가 띄워 주는 거야? 내가 4팀도 아닌데. 그냥 사실만 말하는 거지.”
“하하.”
차태수 팀장의 말에 난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차태수 팀장과 서로 누가 힘든지 푸념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회식 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차태수 팀장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을 마셨다.
저렇게 마시는 걸 보니 이예진과 따로 이야기되어 있는 듯했다.
차태수 팀장이 자리를 뜬 사이, 나는 이진철과 대작했다.
“크, 술이 달다.”
“영화 망하면 술이 쓰지 않을까?”
“이 새끼. 쫑파티에 무슨 망발이야.”
내 말에 이진철이 피식 웃었다.
이런 농담도 정말 친해서 할 수 있는 거였다. 나도 다른 의도는 없고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야,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됐어. 그럴 일 없을 거다.”
“그래야지.”
“낄낄.”
촬영이 끝나서 기분이 좋은지 이진철의 얼굴이 밝았다.
그런 우리 곁으로 안재성이 다가왔다.
이진철이 나랑 마시게 된 것도 배우끼리 이야기 좀 하겠다고 자리를 비켜줘서 할 수 있게 된 건데, 끝났나 싶다.
근데 그럼 희진이도 나왔을 텐데 왜 안 보이지?
“넌 왜 나왔어?”
“희진이는요?”
“단둘이 할 말 있다고 나가라던데요.”
나와 이진철의 물음에 안재성이 답해줬다.
“누가? 선배님이?”
“네.”
이진철의 말에 안재성이 나온 방을 쳐다봤다.
불안하게 또 뭔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