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3계절 (2)
환하게 웃는 이예진과 달리 촬영장 분위기는 고요했다.
이신형 감독은 통과의례라 생각하는 듯 둘의 눈치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팔짱 끼고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진철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보려는 것 같았다.
“제가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미안해요. 악의는 없었어요. 궁금했거든요.”
“뭐가 말입니까?”
이진철의 어조는 다소 싸늘했다.
이예진은 그런 이진철의 어조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게다가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이예진을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마녀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관계라지만 제가 손해지 않아요? 또 신인 감독한테 전적으로 맡겨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제 커리어잖아요?”
“첫 촬영 때는 안 그러셨잖습니까.”
“첫 촬영이라 넘어갔죠. 그리고 크게 비중 있게 다루는 장면도 아니었고요. 뭐, 제가 첫 촬영부터 그럴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랍니다.”
“…….”
이예진과 이진철의 공방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숨죽이면서 둘의 공방을 지켜봤다.
이예진의 말이 끝나자 촬영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이진철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저는 합격입니까?”
이예진에게 말하는 이진철의 눈이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 같았다.
“물론이죠. 만점이에요.”
이예진이 이진철의 말에 눈웃음과 함께 화답했다.
“다행이네요.”
이예진의 말을 듣고 내뱉는 이진철의 말에 현장의 긴장감이 확 풀렸다.
나도 둘의 대화에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이내 이예진의 말에 삐걱대던 톱니바퀴가 맞물려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맥락을 못 짚으면 한두 번 더하거나 촬영 다시 가자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눈썰미가 확실히 좋으시네요. 참고로 제가 이런 건 이신형 감독님이랑도 이야기가 된 거예요.”
“것봐. 내가 그럴 필요 없댔잖아.”
이진철은 이신형 감독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그를 쳐다봤다. 이신형 감독은 이진철의 시선을 회피하면서 이예진의 말에 이어 말했다.
“와, 감독님. 이렇게 발 빼기예요? 감독님도 동의했잖아요. 나만 나쁜 년 만드시네.”
“난 그런 적 없어.”
이신형 감독이 이예진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실 현장에 잡음이 없던 건 이신형 감독의 힘도 알게 모르게 컸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여기 있는 스태프는 이신형 감독과 손발을 꽤 장기간 맞춰온 스태프들이다. 물론 이진철이랑도 장기간 맞춰온 스태프겠지만.
그렇다 보니 이신형 감독이 조감독을 맡은 상황에서는 잡음이 나올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지금도 이예진이 했던 행동은 이신형 감독에게 사전에 허락 맡은 행동이지 않은가.
“저 혼자 안 죽어요? 서로 오픈 해봐요?”
“크흠, 촬영 들어갑시다.”
하하하.
다소 경직된 분위기를 이예진과 이신형 감독이 노련하게 풀었다.
상황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지금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바로 내 배우인 신희진이 토끼 눈을 뜨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처음 겪는 상황이라 그런지 놀란 것 같았다. 그런 신희진의 눈을 마주치며 ‘괜찮아?’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자 신희진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촬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10분만 쉬었다 들어갑시다. 다들 진정하고 제대로 마무리해 봐요.”
나와 신희진이 하는 행동을 본 모양인지 이진철이 잠깐의 휴식을 알렸다.
“감독님 말 들었지? 예진이 덕에 10분 쉰단다.”
“감독님!”
이진철의 말에 이신형 감독이 이예진을 물고 넘어지자, 이예진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신희진은 이진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물 좀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내가 생수병을 건네주며 말하자 신희진이 고개를 저었다.
“놀랐어?”
“조금요.”
내가 묻자 신희진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너 지금까지 찍은 컷 다 좋았어.”
“네?”
“그냥 지금은 선배님이 돌출 행동 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될 거야.”
“네. 감사합니다.”
혹시 긴장했을까 봐 이야기했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단지 지금 신희진의 관심사는 이예진인 듯, 시선이 쉬고 있는 이예진에게로 향했다.
그런 신희진을 보며 말했다.
“왜? 신경 쓰여?”
“네.”
“왜?”
“선배님이랑 호흡을 맞추면서 조금씩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제대로는 못 느꼈거든요. 아직 부족한가 봐요.”
“그거랑은 상관없지 않을까?”
“상관 있어요.”
아무래도 이예진의 행동이 신희진의 자존심도 같이 긁은 모양이었다.
눈이 불타고 있었다.
마침 신희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예진이 그녀를 마주 보곤 눈웃음을 지었다.
신희진은 그런 이예진에게 똑같이 웃고는 고개를 돌려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이예진과 내가 눈이 마주쳤다. 이예진은 나를 보며 무어라 말하곤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이예진과의 거리가 제법 돼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읽을 수 있었다.
입 모양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귀엽네요.’라고 한 것 같았다.
무슨 뜻이지? 어리둥절했다.
“오빠, 저 물 좀 주세요.”
“어? 어.”
이예진의 말을 해석하느라 멍하니 있었는데 대본을 보던 신희진이 말을 걸었다.
신희진에게 물병을 건네주고 계속 생각해 봤지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그냥 후배로서 귀엽다는 뜻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스탠바이 해주세요!”
어느새 임지예가 쉬는 시간이 끝난 걸 알렸다.
“저 가볼게요.”
“그래. 힘내서 잘하고 와.”
“네.”
신희진도 임지예의 말을 듣고는 대본을 내려놓고 내게 인사하고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예진과 신희진이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서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도 위치를 바꿔 슬그머니 이진철이 있는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 * *
“희진이 연기 잘하네?”
“네. 영화 찍으면서 많이 늘었어요.”
차태수 팀장이 내게 말했다.
오전에 찍을 분량인 연희와 연화의 대치 장면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이예진의 돌발 행동 이후에 신희진도 자극이 되었는지 훨씬 다채로운 표정과 호흡을 보여줬고, 이예진도 촬영에 진지하게 임해 예정된 시간 안에 촬영이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건 연희의 병 악화로 인한 자매들의 감정 씬뿐.
지금은 오후 촬영 전에 배우가 리허설 하는 때에 차태수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많이 는 정도가 아닌데? 첫 촬영 때 봤던 모습이랑 영 딴판이야.”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때는 두 명이 호흡 맞추는 장면이 거의 없었잖아요.”
내 말에 차태수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도 그때는 조금 움츠러들어 있는 게 보였는데 오늘은 예진 씨랑 호흡 맞추는데도 노련하게 맞받아치잖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잘하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낯설진 않아서요.”
“드라마나 영화 작품만 잘 만나면 연기돌로 성장할 수도 있겠어. 지금까지 아이돌에서 연기 전향해서 잘된 애들이 거의 없는데.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나도 신희진의 가능성은 크게 보고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포텐은 지금도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었고.
하지만 신희진도 벽은 있었다. 바로 아이돌로 먼저 데뷔했다는 점.
“아무래도 아이돌 이미지 희석하기가 힘들긴 하죠.”
“작품만 잘 만나서 잘 터지면 한 번에 확 바뀌니까 상관은 없는데 그게 너무 힘들지. 망한 애들만 트럭일걸.”
“전 그래도 희진이가 경쟁력 있다고 봐요. 지금 20대 여배우 풀이 없잖아요.”
차태수 팀장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긴 해. 남자 배우는 꽤 많은데 여배우는 이렇다 할 20대 대표가 없으니까.”
“딱 지금이 세대교체 시기인 것 같아요.”
“이럴 때 잘 잡으면 평생 먹고사는 거지. 다들 노리고 있을 거고.”
차태수 팀장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이런 경우는 누군가 왔을 때뿐인데.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가 왔습니다!”
활기찬 목소리로 안재성이 커피를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모든 시선이 안재성에게 쏠렸지만 다들 인사를 대충 받아주고는 촬영 준비에 몰두했다.
그에 맞춰서 임지예의 목소리도 들렸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안재성이 오는 타이밍을 잘못 잡은 듯싶었다.
차태수 팀장과 말하고 있는 사이에 리허설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대망의 마지막 촬영이다.
안재성은 가지고 온 커피를 입구에 두고는 이진철에게로 가 인사했다.
그리고 모니터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팀장님. 저쪽으로 가시죠.”
“그러자.”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를 지나 이진철이 보고 있는 모니터로 다가갔다.
모니터에 가까워지자 카메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
“스피드.”
“95-1-1!”
딱!
준비가 다 된 음향 감독이 카메라 감독의 말에 뒤이어 말했다.
그러자 미리 카메라 앵글에 맞춰 슬레이트를 가져다가 대고 있던 임지예도 바로 씬 넘버를 외쳤다.
“레디! 액션!”
이진철의 목소리에 맞춰 나도 모니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니터 속에 있는 이예진과 신희진이 감정을 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진철의 액션 소리가 10초 정도 지났을 때 신희진이 시작을 끊었다.
그리고 나는 신희진의 첫 한마디를 들었을 때 이번 테이크를 무조건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니. 있잖아.”
“응.”
“수술… 많이 아플까?”
병실에서 연희가 공허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마취하니까 아플 새도 없을 거야.”
“그런가?”
연희의 말을 연화가 담담하게 받아줬다.
“언니. 있잖아.”
“응.”
“나… 깨어날 수 있을까?”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는 연희. 그리고 여전히 담담히 말하는 연화.
“물론이지.”
“정말로?”
자신 있게 대답하는 연화의 말에 연희가 연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연화는 그런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응.”
“…….”
오히려 더 확신에 찬 연화의 대답에 연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숨 막히는 적막감이 둘 사이를 감싸 쥐었다. 그러다 이내 연희의 입이 열렸다.
“나 기대는 안 했다?”
꿀꺽.
모니터를 계속 보면서 미처 삼키지 못해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을 억지로 삼켰다.
“근데, 근데 있잖아….”
“…….”
“지금은 기대하고 싶어.”
“…….”
연화가 묵묵히 연희의 말을 들었다. 연화의 표정은 담담한 것 같았지만 연희 모르게 꽉 쥔 두 손은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살고 싶어.”
연희가 조용히 읊조렸다. 연희의 표정은 금세라도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이었다.
이와 반대로 연화의 얼굴은 미동이 없었다. 단지 연화의 시선이 안 닿는 곳에서 변화가 있을 뿐.
“살고 싶어, 언니….”
“누가 죽는다고 그래. 완쾌될 거야. 그럴 거야. 그런 소리 다신 하지 마.”
쿨럭쿨럭.
연화의 말이 끝나자 연희가 기침을 심하게 했다.
“컷!”
이진철의 외침과 함께 95-1-1이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현장이 조금 어수선해졌다.
현장이 어수선한 이유는 내 옆에 있던 안재성이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와, 장난 아닌데?”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