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화랑 (1)
“나라는 요즘 어때?”
“저번에 메이 씨랑 만나고 나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어요.”
이나라는 메이와 의견을 나누면서 퍼포먼스를 짜고 있었다.
이나라가 보여준 춤도 춤이었지만 내 의견이 상당수 먹혀들어 갔다.
메이도 내 의견에 힘을 실어줘서 이나라의 퍼포먼스는 스트리트 댄스 계열로 가고 있었다.
“희진이는?”
남진수가 이번에는 신희진에 대한 진행 상황이 궁금했는지 물어왔다.
“곧 마무리 들어가요.”
신희진도 이제 막바지다.
이번 주에 있는 이예진과의 촬영으로 촬영이 종료된다.
지금쯤 숙소에서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고 있겠지.
내 말에 남진수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 벌여놓은 거 거의 다 마무리해 가고 있네.”
“네.”
“아, 현진아.”
“네.”
용건이 끝난 줄 알았는데 남은 모양이었다.
돌아서서 가려던 찰나에 남진수가 나를 다시 불렀다.
“내일 시사회 때 협찬 받을 옷 오늘 픽업해서 갖고 와. 수연이가 골라놓은 거 있어. 의상 구겨질까 봐 자기 차로 못 갖고 왔대.”
“시사회요?”
“이야기 안 했나?”
“네?”
내 대답에 오히려 남진수가 의아해했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시사회라니 전달받은 게 없는데.
게다가 날짜도 내일?
“화랑 VIP 시사회 초청한다고 연락 왔었는데.”
“안 하셨는데요.”
“확실해?”
“정말 안 하셨어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남진수였지만 나는 너무 억울했다.
진짜로 나는 들은 게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애들 스케줄 넘길 때 확인 안 했어?”
“전 나라랑 희진이 스케줄만 확인했었거든요. 나머진 팀장님이 맡고 계셨잖아요.”
내 말에 남진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따로 이야기가 없으면 난 이나라와 신희진 스케줄만 확인했었다.
“린이 이야기를 안 했나 보네. 내가 깜빡했나 보다.”
“언제 온 거예요?”
“저번 주?”
“화랑 시사회 소식은 제가 또 몰랐네요. 체크 해뒀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이건 내 잘못도 있다.
화랑이 개봉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린이 데리고 갔다 와. 너랑 린이 이름으로 왔어. 그리고 얼굴 비추는 건 이번만 보이면 된다네.”
“네.”
예전에 기술 시사회 때, 화랑 감독이 VIP 시사회에 초청하겠다고 했었지만 정말로 오라고 할 줄 몰랐다.
나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애초에 한 씬밖에 안 나오는 린을 VIP 시사회에 초청한다는 건, 영화 보러오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연 배우들 사이에서 꼽사리로 언론 타게끔 해주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시사회가 끝나고 무대 인사까지 하니까.
그건 그렇고 신파는 걷어냈는지 모르겠다.
걷어내면 괜찮은 스코어가 나올 것이고 아니면 망하겠지.
예전이랑 똑같이 지금 영화관에 볼만한 게 없다고 다들 아우성이니, 화랑 정도면 흥행 스코어가 괜찮게 뽑힐 거다.
“팀장님. 저 연습실 좀 갔다 올게요.”
“어. 영수증은 다 처리했어?”
“네.”
“그래. 난 유코랑 미소 픽업하러 간다.”
남진수도 애들 스케줄 때문에 나가봐야 했던 것 같다.
둘이 같이 사무실을 빠져나와 나는 연습실로 향했다.
* * *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나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네 명의 시선이 나를 향했지만, 용건을 보러 온 이나라에게 다가갔다.
“잘 돼 가?”
“네.”
이나라의 대답을 듣고는 옆에 있던 세 명을 쳐다봤다.
“너네는 왜 또 여기 있어?”
“언니가 보고 어떤지 말해달라고 해서요.”
“왜요? 있으면 안 돼요?”
이나라가 불러서 회사 녹음실에서 내려온 듯했다.
서지영과 박혜연이 툴툴댔다.
그리고 옆에는 린도 있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긴 한데….”
“언니. 다시 보여줘.”
린이 여기 있는 게 조금 의외였는데 아마도 서지영이 내려올 때 린도 같이 꼬셔서 온 것 같았다.
린을 보니 내일 시사회 일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린아, 내일 시사회 있는 거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었다고?”
“네.”
린의 짧은 단문에 당황했다.
정말 나만 몰랐던 거구나.
“왜요? 오빠는 몰랐어요?”
내 반응에 박혜연이 말했다.
“응. 난 오늘 알았거든.”
“저번 주에 팀장님이 알려 줬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린이 보고 부럽다고 했고요. 우린 언제 그런 곳 가보냐고….”
“나한테만 말 안 했었나 보네.”
박혜연이 린이 스케줄을 언제 알려줬는지 내게 말했다.
오늘 남진수가 한번 확인 안 했으면 내일 스케줄이 엄청나게 꼬일 뻔했다.
다른 애들도 황당한 것 같았다.
매니저가 담당 연예인 스케줄을 몰랐다고 하니까.
근데 나만 할까.
“그게 말이 돼요? 매니저가 스케줄 모르는 게?”
“그러게. 말이 되냐?”
서지영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하자 나도 똑같은 말투로 대답해줬다.
“혹시 회사에서 왕따 당해요?”
“뭐?”
서지영이 불쌍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학교도 아니고 일하는 곳에서 왕따가 어디 있니.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무슨 놈의 왕따. 그냥 전달이 꼬인 거지.”
나랑 서지영이 으르렁거리고 있자 이나라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도 온 김에 한번 봐주세요.”
“저번이랑 달라진 거 있어?”
“네.”
이나라가 우리 곁에서 멀어지더니 노래를 틀고는 비트를 타기 시작했다.
나는 연습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들도 나를 따라서 앉더니 같이 이나라가 춤추는 걸 구경했다.
조금씩 몸을 푸는가 싶더니 본격적으로 추기 시작했다.
“오.”
“다시 봐도 되게 멋있다.”
“난. 왜 저렇게. 안 되지?”
서지영이랑 박혜연이 감탄하면서 춤을 보고 있는데 린이 이나라의 동작을 따라 하면서 푸념했다.
“너만 안 되는 거 아니야. 린아.”
푸념하는 린을 박혜연이 끌어안았다.
박혜연 말이 맞다. 린만 안되는 게 아니라 이나라 빼곤 다 저렇게 안 된다.
지금 이나라가 추고 있는 동작들이 기교도 많고 역동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은 이나라처럼 이런 춤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쉽게는 못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바뀐 건 크럼프 비중을 조금 줄인 정도인 것 같다.
“헉헉… 어때요?”
이나라가 춤이 끝나고 헐떡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언니 여기 물.”
“땡큐.”
숨차하는 이나라에게 박혜연이 물을 챙겨줬다.
“난 지금이 더 낫네. 한지연 쌤은 뭐래?”
“비중 줄여보라고 해서 줄인 거예요. 아직 안 보여 드렸어요.”
“메이 씨가 보내준 건 봤어?”
“네. 그거 보고 조금씩 수정했어요.”
이나라의 춤을 보면서 느낀 건, 나는 고저 없이 그저 감탄하는 기계가 될 뿐이라는 점이다.
춤에 관한 건 이나라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군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말했다가 더 안 좋아질까 섣불리 이야기를 못 하는 편이었다.
“오빠! 근데 질문 있어요!”
“뭔데.”
“한지연 쌤이요, 팀장님이랑 사귀어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박혜연이 나도 모르는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줬다.
둘이 그런 기류가 있는 건 못 봤는데.
“여기 연습생들한테 들은 건데요. 저번에 카페에서 둘이 데이트하는 거 봤다고….”
“두 분이 친구 사이라고 듣긴 했어.”
박혜연이 회사 연습생들이랑은 언제 친해진 걸까.
아무튼, 놀라운 정보였다.
“올! 그럼 친구에서 연인으로!?”
“꺄아!”
서지영과 린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호들갑 떨었다.
애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의 연애사는 신경 꺼. 얘들아.”
“이런 소소한 낙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해요. 연애도 못 하는데.”
“하려면 할 수 있잖아.”
“에이, 연애라뇨. 일해야죠. 일.”
서지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연애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애들도 서지영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독 도드라졌을 뿐.
“나랑 팀장님이 대쉬하는 애들 자른 거만 몇 번인데.”
“그러니까요. 창창한 18살 소녀의 연애를 방해하시다니요.”
서지영의 말에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너도 2월의 미소처럼 열애설 나고 싶어?”
“아뇨.”
질색하면서 서지영이 대답했다.
“얘 왜 이래?”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애들에게 물었다.
“요즘 달달한 드라마 보고 있거든요.”
“어휴. TV 선을 끊든가 해야지.”
박혜연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금 쉬고 살 만하니까 나태해졌어.
이러다가 정말 연애라도 하면 큰일인데.
“안 돼!”
내 말에 서지영이 귀신을 본 듯 기겁했다.
서지영의 표정은 참 다양했다.
기겁한 서지영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안 새어 나올 수가 없었다.
“헛소리 자꾸 하면 끊을 거야.”
서지영에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일하러. 볼일은 다 봤으니까.”
“네. 고생하세요!”
“고생하세요!”
이나라가 나가는 나를 향해 묻길래 대답해줬다.
그러자 이나라와 애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애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알아서 잘하겠지.
옷이나 픽업하러 가볼까.
* * *
“어때? 이쁘지?”
“예뻐요!”
스타즈 스타일리스트인 김수연과 린이 오늘 의상을 입고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도 어제 의상을 픽업하고 감탄했는데 린이 옷을 입자 그 감탄은 배가 되었다.
“누나 너무 힘준 거 아니야? 시상식도 아닌데?”
“뭐 어때. 이벤트성 시사회 참석인데. 그리고 이게 뭐가 힘준 거야. 힘준 거였으면 전통 의상으로 아예 팍 힘줬지.”
“치파오라니….”
“전통 복장은 아니래도? 캐주얼 치파오야.”
전통 복장이고 캐주얼이고 자시고 의상을 입은 린은 눈 돌아갈 정도로 예뻤다.
“그리고 이건 제작사 쪽 요청 사항이기도 했어. 단발성이니까 최대한 이쁘게 입고 오라고.”
“주연 배우들이 묻히는데?”
“그 영화에서 이쁘게 나오는 거 린뿐이라고 상관없다던데?”
“아, 그랬지.”
나와 김수연의 대화에는 린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냥 제 모습에 취한 것 같았다.
근데 내가 린이었어도 본인 모습에 취했을 것 같다.
그리고 린은 자기애가 무척 강한 편이기도 했다.
뭐, 자기애가 나쁜 건 아니니까.
“슬슬 가야 해. 린아.”
“네!”
시간을 체크해보니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 린을 불렀다.
그러자 김수연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잘 보고 와.”
“네. 누나는 또 어디 가요? 일 남았어요?”
“아니, 오늘은 너희가 마지막.”
내가 묻자 김수연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오늘은 칼퇴근하겠네.
부럽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언니! 가볼게요!”
내가 인사하자 린도 옆으로 다가와 김수연에게 인사했다.
“그래. 근데 그거 망가트리면 안 돼”
“네!”
영화관 가는 건데 별일 있을까 싶다.
린과 함께 차에 타서 VIP 시사회가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 * *
“곧 도착하는데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영화관 뒤편에 따로 마련된 주차장이 있어요. 거기로 오시면 됩니다.
“네.”
전화를 끊고 백미러로 린을 봤다.
그러자 린이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떨려요.”
“왜?”
“이런 거. 처음이라.”
“별거 없어. 그냥 팬 사인회라고 생각해.”
“아! 그러면 되겠다.”
내가 린에게 한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차이점이라면 여기에선 인사만 한다는 것.
관계자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하니 밴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던 듯했다.
그러고 보니 승기 형도 오랜만에 만나겠구나 싶었다.
린을 차에 놔두고 차에서 내려 관계자를 찾았다.
“이대로 입장하면 되나요?”
“안에 대기할 곳이 없어서 여기서 잠깐 기다리다가 김진성 씨 오시면 같이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혹시 홍승기 씨는 도착했나요?”
“네, 무슨 일이시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여서요. 어떤 차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기 세 번째 줄 끝에 있는 검은색 차량이에요.”
“감사합니다.”
관계자가 일러준 곳으로 가서 운전석 쪽으로 노크를 했다.
노크하자 창문이 내려가고 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네.
“무슨 일이시죠?”
“아, 저는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이라고 합니다. 린이랑 같이 왔어요. 다른 게 아니라 홍승기 씨랑 아는 사이여서 인사하려고 들렸어요.”
“어, 현진이. 왔어?”
내 말에 차 안쪽에서 홍승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형. 안녕하세요.”
홍승기랑 대화를 이어가려던 찰나에 관계자가 다가왔다.
“김진성 씨 오셨습니다! 입장하시면 됩니다!”
“형. 조금 있다가 다시 봬요.”
“그래.”
나는 홍승기와 운전석에 있는 매니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린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주연 배우들이 먼저 입장한 후, 그 뒤를 린과 함께 따라 들어갔다.
어느 정도 따라가자 관계자가 여기서부터는 배우와 감독만 입장 가능하다고 해서 시사회가 열리는 영화관으로 직행했다.
영화관에 입장해서 마련된 자리에서 기다리니 밖에서부터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무래도 배우들과 감독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배우들과 감독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와 차례대로 지정된 좌석으로 가 앉았다.
인사는 끝나고 할 모양이다.
“시간이 다 됐으니 먼저 영화를 감상하시겠습니다.”
관계자가 마이크로 스크린 앞에서 한마디를 하고는 휙 하고 나갔다.
영화 출연진들이 도착하고 나서 웅성거리던 영화관 내부가 잦아 들어갔다.
나도 조용히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참 궁금했다.
신파는 뺐겠지?
영화관이 암전되고 웅장한 BGM이 영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