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사이에서 (3)
“팀장님.”
“어. 왔어? 그냥 퇴근하지.”
“궁금하기도 하고 제가 가져온 영화니까요.”
이나라의 녹화가 끝나고 숙소에 데려다주고 급히 신희진이 있는 촬영장으로 왔다.
다행히도 끝나기 전에는 온 것 같았다.
“거의 다 끝났어. 야, 근데 희진이 연기 좋더라. 잘한다고 하기엔 뭐한데, 그냥 캐릭터가 좋은 건가?”
“캐릭터가 딱 희진이에게 맞는 옷이에요. 성격도 배역이랑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남진수가 촬영장 안에서 스탠바이하는 신희진을 보며 말했다.
그는 신희진이 연기하는 걸 제대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같은 팀이지만 신희진의 칭찬에 괜히 뿌듯했다.
내가 저렇게 키운 거 같아서.
“이런 영화를 용케 구했네.”
“운이 좋았죠.”
“안재성은 확실히 연기를 잘하더라. 감정 잘 잡아서 하네.”
이번에는 남진수가 상대 배역인 안재성을 언급했다.
안재성.
확실히 탐나는 인재다.
“아, 팀장님. 혹시 제가 배우 계약이나 스카우트 같은 것도 할 수 있나요?”
“계약? 누구?”
“저기 안재성이요.”
신희진이랑 리딩하고 있는 안재성을 보며 말했다.
“회사 없대?”
“네.”
내 말에 남진수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한번 데리고 와봐. 정확한 건 회사가 진단하겠지만 난 괜찮아 보인다.”
“괜찮죠?”
“어.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개봉하기 전에 낚아채려고요. 이야기는 좀 해봤어요.”
내 말에 남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재성이랑 이야기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
촬영도 슬슬 거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채갈까 전전긍긍했다.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 채갈 사람은 나밖에 없다.
어쨌거나 안재성이든 신희진이든 검증된 배우가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나라 녹화는 잘했어?”
“네. 제작진 말로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던데요? 녹화도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것 같고요.”
남진수가 화제를 바꿔 이나라를 언급했다.
“오늘 뭐 경연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출연진 모아서 하는 거 아니야? 오래 걸릴 게 없는데.”
“출연진끼리 퍼포먼스 마음에 들 때까지 하는 거랑, 파트너 확인하고 이야기 나누는 거 때문에 좀 걸려서 하루 비워달라고 한 건가 봐요.”
스튜디오에서 녹화하는 분량은 별거 없었다.
출연진들의 퍼포먼스와 출연진끼리 댄스 배틀. 그리고 사전 인터뷰하면서 나왔던 내용과 출연진끼리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파트너를 정하기까지.
하루를 비워달라는 건 녹화가 끝나고 파트너랑 이야기 나누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고려했던 스케줄 같았다.
“그래? 누구랑 하는데?”
“메이요.”
“메이? 내가 아는 메이가 맞아?”
내 말에 의아한 얼굴로 남진수가 되물었다.
“그 예명 쓰는 사람이 또 있어요? 맞아요.”
“걔도 진짜 춤 잘 추는데… 근데 방송 안 나온 지 꽤 됐거든. 가만, 그러고 보니 연차가 한 10년 나겠는데? 텃세 안 부리디?”
“나라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요? 아기 다루듯 귀여워해 주시더라고요.”
“걔도 호불호가 확실해서 다행이네.”
남진수는 메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불호였으면 어떤 행동을 하길래 남진수가 다행이라고 하는 걸까.
“아세요?”
“예전에 촬영 같이한 적 있었어. 걔도 좀 성격이 지랄 맞아. 근데 걔 마음에 들어 하면 무난할 거야.”
“아하.”
남진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억으론 둘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었다.
“다음 촬영은?”
“2주 뒤에요. 2주간 서로 연습하면서 창작 안무로 연습하고 그거로 경연으로 올린대요.”
“경쟁 시스템은 없다며?”
“아예 없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냥 편하게 하는 거래요.”
“출연진들 의욕 돋우려고 넣었나.”
남진수의 말처럼 아무런 장치 없이 서로 퍼포먼스만 보여주는 건 밋밋하니 댄싱 투나잇 측에서 적정 수준의 순위 경쟁 시스템을 넣었다.
그 부분은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아무래도 있는 게 그래도 나으니까요. 떨어지고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누가 좋았나 정도인 거 같아요.”
“그 정도면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겠네. 자기들만 잘하면 되니까.”
“네. 나라도 의욕적이던데요. 솔로로 하는 게 아니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해서 조금 아쉬워하는 거 같기도 했는데, 만족하는 거 같았어요.”
“다행이네.”
남진수와 이야기를 하면서 신희진을 쳐다봤다.
마침 신희진도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바로 손을 들어 인사를 해줬다.
그러자 신희진이 앞에 있던 안재성에게 뭐라고 하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언제 왔어요?”
“방금.”
“언니 잘했어요?”
“아직은 몰라. 녹화는 잘 끝냈어.”
“숙소 가서 물어봐야겠다.”
신희진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촬영은 순탄한 것 같았다.
내가 없으면 안 될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인 듯했다.
“왜 왔어?”
그건 그렇고 신희진이 갑자기 왜 온 건지 궁금했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길래 왔죠.”
“난 안 반가웠구만. 그리고 끽해야 오늘 하루 떨어졌으면서.”
남진수가 신희진의 말에 섭섭하다는 듯 구시렁거렸다.
“팀장님! 팀장님은 계속 핸드폰 들고 다니다가 없어지면 안 불안해요? 그런 거라고요.”
신희진의 말에 남진수가 어이없다는 듯 황망한 표정으로 신희진을 바라봤다.
“내가 핸드폰이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나도 어이가 없었다.
내가 핸드폰이야?
그건 그렇고 신희진 뒤편을 바라보니 촬영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스태프들의 스탠바이가 눈에 보였다.
“준비해야겠다. 슬슬 슛 들어 갈 거 같네.”
“네.”
내 말에 신희진이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떠나는 신희진을 보며 남진수가 말했다.
“둘이 케미가 좋네.”
“하하하, 애들이랑 많이 친해져서 그렇게 보이시나 봐요.”
“다른 애들도 아우성이더라. 왜 너만 희진이한테 보내냐면서. 이거 서러워서.”
“큼.”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남진수한테 내가 해줄 말은 헛기침밖에 없었다.
내 반응에 남진수가 피식 웃었다.
“잘하고 있어. 근데 이러면 나중에 헤어질 때 어떻게 하냐?”
“그건 나중에 생각하려고요.”
“너무 정 주지 마. 너만 힘들어져. 아니 서로가 힘든가.”
“네.”
남진수가 정을 주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정이 많이 들어버렸다.
나중을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막막해졌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아직 다가온 게 아니니 지금에 집중하자.
* * *
이나라의 댄싱 투나잇 스튜디오 녹화 이후로 메이와의 스케줄이 잡혔다.
지금은 이나라와 같이 댄싱 투나잇 경연을 위해 메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뭐로 정했어?”
“저희 컨셉이 ‘조화’잖아요. 그래서 선배님은 ‘구세대’를, 저는 ‘신세대’를 표현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나누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컨셉과 둘의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이나라는 괜찮을지 몰라도 메이는 잘못하면 구닥다리라는 인식만 박힐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둘이 대비되니 우리야 좋다만.
“이건 저보다 선배님이 이야기해 주신 거예요. 저도 이야기 드렸는데 이렇게 하자고 하셨어요.”
“그래?”
내 의문을 이나라가 풀어줬다.
어떻게 보면 도전인가 싶기도 했다.
“네. 오히려 이게 더 신선하게 다가올 거라고. 그리고 자기가 구세대인 건 변함이 없다고도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떻게 표현하려고?”
나보다 이나라와 메이가 더 전문가이니 어련히 알아서들 하겠지.
근데 어떻게 표현할지가 궁금하긴 했다.
“선배님은 아무래도 복고풍의 느낌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고, 저는 지금 고민 중이에요. 트월킹으로 할까, 왁킹으로 할까 아니면 걸스힙합으로 무난하게 할까….”
“음.”
이나라의 말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어때?”
“그게 뭔데요.”
“아, 그….”
머릿속에 간질거리면서 갑자기 명칭이 떠올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묘사해서 알려주는 수밖에.
“그, 막 주먹 쥐고 쿵쿵 치면서 절도 있고 힘 있게 하는 거 있잖아.”
“뭐지? 크럼프요?”
“어! 그거!”
“으음.”
내 말에 이나라가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다.
“지금 스타즈는 러블리한 컨셉으로 유지했잖아. 반전 매력으로 어때?”
“크럼프는 너무 센데요.”
“아니면 거기서 걸스힙합 조금 섞어서. 네가 말한 왁킹이나 트월킹도 생각해보면 스타즈랑은 안 어울리지.”
“흐음.”
이나라가 조금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길래 재차 권해 보았다.
고만고만한 컨셉보다 오히려 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나라면 충분히 소화가 될 것 같았다.
녹화 때 보여준 퍼포먼스를 보니 스트릿 댄스 계열도 제법이었다.
크럼프는 그중 하나의 계열이다.
“고민해 볼게요. 선배님이랑 이야기도 좀 하고요.”
“알았어. 그냥 의견이야.”
“아니에요. 괜찮은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나라의 에너지면 충분히 크럼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파워풀하고 에너지 넘치는 안무여서 오히려 기존의 이미지와 색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문제는 이걸 할 수 있느냐는 것.
“근데 너 크럼프 할 수 있어?”
“그럼요.”
“한 번도 못 봤는데?”
“당연히 못 보셨겠죠. 보여준 적이 없는데.”
“언제 배웠어?”
“연습생 때도 조금씩 했고, 이번에 미국에서 안무가 선생님 초빙해서 배운 것도 있고요.”
“아.”
이나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춤에 대해서는 확실히 자부심이 엄청 나네.
- 목표 지점까지 200m 남았습니다.
“다 왔네요?”
“그러게.”
어느새 다 왔었구나.
백미러로 다시 이나라를 슬쩍 보니 얼굴이 굳어 있었다.
“갑자기 긴장되네.”
“편하게 해.”
내 말에 이나라가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이나라와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지?”
“네.”
장소는 이나라가 메이에게 개인적으로 받았기에 나는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왜 연습실은 거의 다 지하일까?”
“싸니까요.”
“그렇군.”
내 말에 이나라가 현실적인 답을 말해줬다.
그러네. 지하가 싸지.
이나라와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왔지만, 이제는 일을 해야 했다.
“잠시만. 제작진한테 연락 좀 하고.”
“네.”
이나라한테 기다리라고 말한 뒤에 댄싱 투나잇에서 우리 담당을 맡은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가기가 무섭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스타즈 이나라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 네, 도착하셨어요?
“네. 그냥 바로 내려가면 될까요?”
- 잠시만요. 그쪽으로 인원 보낼게요. 어디세요?
“여기 바로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작가가 내 대답을 듣고는 바로 끊어버렸다.
잠시 후 카메라맨과 함께 작가와 PD가 우리한테 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내 작가가 가지고 온 마이크를 이나라에게 건넸다.
“마이크 착용해 주시구요. 춤추다가 음료수 마실 때 꼭 상표 노출시켜 주세요. 따로 큐시트는 없고 자유롭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딱히 주의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그나마 상표 노출해달라는 것뿐.
“음료수는 뭐예요?”
마이크를 차던 이나라가 작가에게 물었다.
“이온 음료예요.”
“협찬인 거죠?”
“네.”
작가가 이나라에게 말하는 걸 듣고는 물었다.
이런 걸 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협찬밖에 없지.
드라마만 PPL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에서 빨간색으로 녹화 불이 들어왔다.
“아, 떨려.”
이나라가 어색하지 않게 한마디 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나라를 선두로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연습실에 들어갔고,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따라갔다.
연습실에 들어가자 땀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건 어디에나 똑같구나 싶었다.
안을 둘러보니 안에는 댄싱 투나잇 제작진도 다수 있었다.
“언니! 저 왔어요!”
“어, 왔어?”
마치 오는 줄 몰랐다는 듯 진행하는 메이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메이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우리 각자 준비한 거 빠르게 볼까?”
“네!”
“손님이니까 내가 먼저 보여줘야겠지?”
메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