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사이에서 (2)
“나라 단독으로는 첫 촬영이기도 하고, 내가 이야기해서 잡힌 스케줄이기도 하고. 내가 너랑 촬영장 가서 해주는 게 별로 없잖아. 너도 이제는 촬영장에 적응한 것 같고.”
신희진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내 말에 신희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날은 그럼 팀장님이랑 가야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표정이 별로였는데 지금은 또 괜찮은 것 같았다.
“28일 촬영이면… 86씬이네요.”
“으음.”
신희진의 말에 대본을 보고 찍을 씬 넘버를 확인했다.
현승과 연희가 헤어지는 장면이구나.
이 장면도 중요한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하이라이트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현장에 가서 나도 같이 보고 싶은 장면이긴 한데….
“잘할 거야.”
“이미 잘하고 있거든요?”
“그래. 그래.”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신희진이 대본을 만지작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나라 언니 촬영 끝나면 촬영장 와요?”
“촬영장? 어디? 3계절?”
“네.”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있나 싶은데.”
“알았어요. 이제 리딩이나 도와주세요.”
“어? 어.”
신희진의 묘한 반응을 보니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나랑 계속 다니다가 매니저가 바뀌니까 섭섭함을 느낀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남진수가 불편하다거나.
“내가 나라 스케줄로 간다니까 섭섭해? 아니면… 팀장님이 불편해?”
“아뇨! 그럴 수도 있죠! 팀장님이 불편! 할 게 뭐가 있어요.”
신희진의 반응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내 생각이 정답이었군.
내가 애들과 정말 친해졌구나 싶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실실 쪼개면서 신희진에게 물었다.
“나라 촬영 일찍 끝나면 가줄까?”
“아니라니까요. 근데 나라 언니 촬영이 언제 끝나는데요?”
“하루 비워달라고 해서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는데 전달받은 거 보면 좀 길게 하려나 봐.”
“됐어요. 빨리 리딩이나 해요.”
“알았어.”
신희진이 툴툴대면서 대본을 보며 말했다.
이나라 촬영이 일찍 끝나면 남진수에게 연락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3계절 스케줄 짜는 거 보면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은 제일 마지막에 넣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감정이 터지는 장면이라 생각보다 딜레이 걸릴 확률도 있기도 했다.
“여기 71씬부터 해요.”
신희진의 말에 나도 대본을 펼치고 리딩을 시작했다.
* * *
이나라의 ‘댄싱 투나잇’ 녹화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나라랑 ‘댄싱 투나잇’ 대기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와, 안 떨릴 것 같았는데 떨리네요.”
이나라가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 말했다.
“그냥 평상시처럼 방송하는 건데 뭘.”
“혼자 찍는 건 또 처음이어서요. 데뷔 때보다 더 떨리는데.”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말해줘도 불안한지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아까 인사드릴 때보니까 제가 여기 있어도 되나 싶고….”
“방송은 화제성이 다야. 우리 정도면 훌륭하지. 여기서 지금 너보다 화제성 뛰어난 참가자 없어.”
이나라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한마디 했다.
춤 좀 춘다는 사람들이 참가하긴 했지만 최근 상승세가 엄청난 스타즈에 비빌 만한 참가자는 없었다.
“미션이 뭘까요?”
“글쎄… 일단 녹화 시작해서 진행하는 걸 봐야 알 것 같은데. 큐시트에는 따로 안 나와 있더라.”
“어려운 거 아니면 좋겠어요. 아니면 경쟁하는 것도 싫구요.”
“어려워도 다 해치우면 되지. 경쟁 시스템은 아닐 거야. 그건 아니라고 했거든.”
이나라가 다른 애들에 비해 나이가 제일 많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이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니 다른 애들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계속 숨겨온 게 아닐까 싶다.
“진짜 너아누 할 때 너무 피 말려서 서바이벌이나 경쟁은 진짜 노이로제 걸릴 거 같아요.”
“그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지금의 네가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맞지만요….”
내 말에 이나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긍정적으로.”
“오빠는 보면 매사 너무 긍정적이시네요.”
“네가 매사 너무 부정적인 거야.”
나도 오히려 이나라와 비슷했었다.
내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똑같지 않았을까.
되돌아온 1년은 나 자신을 다시 보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계속 실패하면 부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실패? 네가? 데뷔도 못 한 애들은 뭐야 그럼.”
“아,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자신감 가져도 된다니까.”
“네.”
이나라가 내 말에 심호흡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촬영 시작 전에 어느 정도 멘탈 케어는 한 것 같다.
“근데 오빠.”
“어?”
“희진이요.”
“응.”
“요즘 되게 투덜거리지 않아요?”
이나라가 이제는 긴장이 풀렸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만 느낀 게 아니었구나.
“어. 연기하고 나서 부쩍 그러더라.”
“그래도 꽤 부담되나 봐요. 숙소에서도 엄청 열심히 해요.”
“그래?”
이나라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는 내색을 안 해서 잘 몰랐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네.”
“리딩 해줄 때만 대본 보는 줄 알았더니. 하긴 그때만 보고 대사 다 외우는 거면 천재지.”
“숙소에서도 대본 보다가 이미지 트레이닝 한다고 영상 찾아서 보다가… 암튼 열심히 하더라고요.”
“알려준 대로 잘하고 있네.”
알려준 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내 말에 이나라가 눈을 크게 떴다.
“오빠가 알려준 거였어요?”
“경험하지 못했으면 간접 경험이라도 해보라고 했거든. 그래서 희진이 데리고 병원도 한번 갔다 왔었잖아.”
“아하, 맞네요.”
신희진이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배역을 위해서 결국은 병원도 갔다 왔었다.
신희진은 가서 느낀 게 많았는지 병원에서도 펑펑 울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계속 울었다.
“지금 배역은 희진이가 하기 어려운 배역이 아니기도 하고….”
“저도 봤는데 딱 맞던데요. 그 시한부라는 설정 빼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한부라는 설정만 빼면 아무리 생각해도 연희 역할은 신희진이 제일 어울렸다.
아직 시한부라는 걸 티내는 장면이 몇 없어 연기가 어색하거나 하는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제 끝을 바라보고 있어서 설정이 조금씩 튀어나오기도 하고 감정도 커지긴 했다.
신희진을 떠올리니 지금 촬영을 하고 있을 신희진이 생각났다.
잘하고 있겠지?
똑똑!
“방송 10분 전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네.”
이나라와 떠들고 있는데 스태프가 노크하고 우리에게 시간을 알려줬다.
우리도 대기실을 정리하고 현장으로 나갔다.
이나라와 현장으로 나와서 촬영장 세트를 보는데 마냥 신기했다.
아까도 본 세트장이지만 고작 2주짜리 프로그램치고는 예산 투자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출연진분들 스탠바이 해주세요! 곧 시작합니다!”
스태프가 크게 말해주면서 촬영 시작 임박함을 알렸다.
“저 그럼 무대 뒤쪽으로 갈게요.”
“그래. 잘해!”
“네!”
댄싱 투나잇 출연진이 나오는 건 무대 뒤에서부터 차례대로 나온다.
나오면서 각자 퍼포먼스를 간단히 1분 정도 자기 PR 형식으로 하고 진행되는 순서였다.
그리고 적당히 진행하면서 미션을 뽑고, 파트너가 정해지면 녹화가 끝난다.
큐시트를 보면 간단한 거 같은데 왜 하루를 비워달라고 했는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했고 이젠 열심히 응원해야겠다.
나라 파이팅.
* * *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뇨.”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네.”
“오늘 마지막 촬영이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네.”
남진수의 말에 신희진이 평탄한 어조로 대답했다.
신희진이 아무 말 없이 대본을 보다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진수에게 말했다.
“팀장님. 저 다음 촬영 전에 감정 좀 잡고 싶은데 혼자 있으면 안 될까요?”
“어? 어. 알았어.”
남진수가 신희진의 말을 듣고는 차에서 내렸다.
“너무 불편해….”
신희진이 남진수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내뱉었다.
“에휴.”
이내 신희진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에 달린 문어를 만지작거렸다.
만지던 핸드폰을 옆 좌석에 두고, 대본을 들어 오늘 할 장면을 보기 시작했다.
대본은 지저분했다.
캐릭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지문 옆에는 어떤 마음으로 대사를 하는지 빼곡한 분석이 쓰여 있었다.
똑똑.
집중해서 대본을 보고 있는 때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쳐다봤다.
밖에서 남진수가 나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신희진이 차 안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스태프들의 세팅에 여념 없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소나무처럼 우뚝 솟은 조명기구들 덕에 낮을 연상케 할 만큼 밝았다.
“거의 다 끝났대.”
“네.”
신희진과 남진수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촬영장만 바라봤다.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있을 때 멀리서 신희진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희진 배우님! 동선 다시 한번만 맞춰볼게요!”
“네!”
신희진이 임지예의 말에 대답하고는 남진수를 바라봤다.
“저 가볼게요.”
“어.”
신희진이 남진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임지예를 따라갔다.
임지예를 따라간 장소에는 안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잘 부탁드려요.”
“무슨 소리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데.”
웃으며 이야기할 법한 말들이었지만 서로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벌써 둘 다 감정 잡고 있네.”
이신형 감독이 다가와서 말했다.
“아니에요.”
“자자, 빨리 동선 맞추고 시작하자고. 아직도 달 못 띄웠어?”
이신형 감독이 신희진의 대답을 듣고 한마디 한 뒤 열심히 조명을 만지고 있는 조명팀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돼갑니다!”
대답을 들은 이신형 감독이 배우들과 함께 동선 체크를 했다.
“조감독님 세팅 끝났다고 합니다.”
임지예가 동선을 보고 있던 이신형 감독과 배우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럼 슛 들어갑시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이신형 감독의 말에 큰 소리로 임지예가 말했다.
이신형 감독이 모니터에 있던 이진철 곁으로 갔다.
“어때?”
이신형 감독이 이진철에게 물었다.
“좋아요. 늦었는데 빠르게 가죠.”
“그래.”
이진철이 모니터를 바라보다 이신형 감독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임지예가 슬레이트를 가져다 대는 게 모니터에 나왔다.
그러자 촬영장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86-1-1”
딱!
“레디!”
촬영감독과 사운드 감독 그리고 슬레이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이진철의 준비 신호까지 왔다.
그에 맞춰서 배우들의 눈빛이 변했다.
“액션!”
이진철 감독의 말과 멈춰 있던 배우들이 움직였다.
이진철이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이 배우들이 걸음걸이에 맞춰 조금씩 흔들렸다.
고정된 카메라로 찍는 게 아닌 카메라를 손에 들고 찍는 핸드 헬드 기법이었다.
이렇게 화면이 조금씩 흔들리면 관객들은 화면에 흔들림에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불안한 심리를 담은 컷을 짜거나 역동적인 컷을 짤 때 쓰는 기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화면의 흔들림과 같이 조금씩 조금씩 연희와 현승이 전진했다.
“연희야.”
“응?”
“나 할 말이 있는데….”
현승이 굳은 얼굴로 연희에게 말했다.
그런 현승에게 연희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전에 나도 할 말이 있어.”
“어, 그래. 말해봐.”
연희의 말에 현승이 걸음을 멈췄다.
연희도 같이 걸음을 멈췄다가 한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은 뒤에 멈춰서 현승을 바라봤다.
“우리… 술래잡기해 보지 않을래?”
“술래…잡기?”
“응.”
현승이 황당한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봤다.
그러나 연희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