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확신과 그리고 그 경계 (3)
“으, 추워….”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 연희였다.
“추워?”
“응.”
연희의 말에 현승이 갈팡질팡했다.
안재성이 확실히 캐릭터 표현을 잘하고 있었다.
표정. 눈빛. 떨리는 제스처까지.
화면에서부터 현승의 떨림이 느껴졌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장이 쿵쿵댔다.
연기는 계속됐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는 연희가 현승의 팔을 꽉 붙잡더니 머리를 기대며 안겼다.
현승이 연희의 행동에 연희를 보다가 정면을 보고, 다시 연희를 바라봤다.
안재성이 현승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하는 게 확연히 보였다.
지금 옆에 있는 연희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의 현승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꿀꺽.
이 모습을 보니 고인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다시 또 내 귓가에 들렸다.
시나리오 내용이면 지금 입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신희진은 액션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돌발 상황에 컷 소리가 나올까 싶어 이진철을 바라봤다.
이진철은 묵묵히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다시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에는 밤 골목길 사이로 한 줄기 가로등 불빛이.
그리고 그 옆으로 불빛에 어스름히 비치는 연희와 현승.
그림은 정말 예쁘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 감탄과 별개로 이제 슬슬 뭔가 행동이 나오지 않으면 NG다.
첫 테이크가 배우가 감정을 가장 날것 그대로 담을 수 있는 테이크라 날린다면 아깝게 느껴질 것 같다.
지금 감성도 딱 좋고.
돌발 상황에 안재성이 당황하지 않고 애드리브로 이어갔다.
안재성의 행동은 간단했다.
연희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을 보는 것.
그리고 그때.
연희가 돌발적으로 현승의 볼에 뽀뽀했다.
그러고는 추운지 현승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상황이 뭔가 싶은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현승이 연희를 바라봤다.
이제 다시 현승이 복잡한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연희의 얼굴, 즉 연희의 입술에 자신의 얼굴도 천천히 가까이 다가갈 듯 말 듯.
그때.
“너네 뭐하냐?”
민수의 목소리와 함께 맥이 확 풀렸다.
민수가 숙취해소제를 마시면서 연희와 현승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어? 아니… 갑자기 이러네.”
“깨워서 이것 좀 먹여봐.”
“어, 그래.”
현승은 갑자기 나온 민수에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내 현승이 민수에게서 숙취해소제를 건네받았다.
시나리오상으로는 여기까지가 이번 씬의 끝이다.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이진철을 바라봤다.
이윽고 이진철이 일어나면서 외쳤다.
“컷!”
멈추라고 외친 이진철 곁으로 이신형 감독이 묘한 얼굴을 하고는 이진철에게 말했다.
“흐음. 괜찮은데? 넌 어때?”
“음….”
화면을 보던 이진철이 고민에 잠긴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신희진이 냅다 모니터 쪽으로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근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타이밍을 놓친 거예요? 아니면 애드리브였나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는 신희진에게 이진철이 물었다.
“어… 음, 반반인 거 같아요.”
“반반?”
신희진의 말에 이진철이 반문했다.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내가 연희라면? 나는 연희다. 연희다. 라고 되새기면서 있었는데… 연희의 마음으로는 섣불리 그럴 거 같지 않았어요.”
신희진이 이진철의 눈을 마주치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듯 이야기를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술에 취했고, 마음이 조금은 있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연희도 자신의 상황을 알기에 섣불리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입맞춤보다는… 조금 더 소극적인 볼에다가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았어요.”
“으음….”
“하고 나서 보니까 오히려 더 쑥스러웠어요. 게다가… 솔직히 그 상황에서 입에다 뽀뽀하는 것도 상황이 너무 공교로운 것 같아서요.”
신희진의 말에 이진철이 상념에 젖어 들어갔다.
나도 신희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봤다.
신희진의 말도 일리가 있다.
시나리오의 창작은 감독이 했지만, 그 배역을 연기하는 신희진은 또 다를 수 있다.
오히려 배우가 캐릭터 분석을 제대로 했다면, 캐릭터에 몰입한 연기자의 손에서 더 좋은 캐릭터가 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희진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오히려 이진철이 신희진에게 뭐라고 한다면 나설 생각도 하고 있었다.
상념에 잠긴 이진철 곁으로 이신형 감독이 다가와 말했다.
“어떻게 할래? 고민되면 두 가지 버전으로 찍던가.”
“아니요. 이 버전으로 가겠습니다.”
이신형 감독의 말에 시원하게 이진철이 대답했다.
솔직히 저 모습에서 나는 조금 놀랐다.
저렇게 빠르게 판단을 내리다니.
고민할 법도 했다.
이번 장면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고민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나 더 찍고 섞어서 편집 때 붙여 보지.”
“오히려 그게 더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신희진 배우가 말한 감성과 느낌이 ‘연희’의 느낌일 테니까요.”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이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보니까 이제 기술적인 문제나 연기적인 문제만 없다면 오케이 할 것 같았다.
아니면 같은 버전으로 한 두 테이크 더 찍던가.
“그래. 감독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럼 같은 버전으로 한 테이크 더?”
이신형 감독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아니요. 어차피 지금 이상 가는 감성은 안 나올 것 같아요. 오케이로 갈게요.”
“오케이입니다!”
이진철이 오케이라고 이야기하자 옆에서 대기하던 임지예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나 더 찍을 법도 한데 큰 욕심을 안 부리네.
하긴. 나도 마음에 드는 컷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또 찍어서 더 마음에 드는 게 나온 적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하나 더 찍은 적은 있어도 항상 마음에 드는 컷을 썼다.
연출들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이진철의 말에 이신형 감독이 기지개를 켜고는 현장을 둘러보다 말했다.
“그래. 다음 컷 들어갑시다!”
“네!”
이신형 감독이 촬영장 스태프들에게 독려하자 스태프들이 웃으면서 힘차게 대답했다.
“다음 컷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컷은 세 인물의 대화입니다! 세팅에 시간이 걸리니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임지예는 쉴 틈 없이 말하면서도 현장에서 미장센을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 바빠 보이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눈치를 보던 신희진이 내 곁으로 왔다.
“오빠!”
“왜?”
“저 어땠어요?”
무슨 용건으로 오는가 했더니 바로 전에 찍은 컷에 관해 물어보려고 온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아직 촬영 안 끝났잖아?”
“두근두근했어요?”
한마디 더 할까 하다가 눈을 보니 기대하는 눈빛이길래 원하는 답을 말해줬다.
“그래. 두근두근했어.”
“예쓰!”
앙증맞게 양 주먹을 쥐면서 좋아하는 신희진을 보니 허허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신희진 배우님! 여기로 와주세요!”
멀리서 신희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보아 임지예가 다음 컷을 위해서 동선이나 배우들의 리허설을 하려고 하는 모양인 것 같다.
신희진도 자신을 부른 쪽을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저 가볼게요!”
“그래. 열심히 해. 계속 보고 있을 테니까.”
“네!”
멀어져 가는 신희진을 보고 생각했다.
연기라는 옷이 아무래도 신희진에게는 맞는 옷인 것 같다.
오늘 하는 행동과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확신이 섰다.
얘는 연기자로 대성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아이돌도 신희진에게 나쁜 옷은 아니지만, 확실히 배우가 더 맞는 옷인 것 같다.
근데 문득 예전에 ‘연희’ 역을 맡은 배우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누가 맡았을까?
지금 신희진은 ‘연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재성의 힘으로는 영화의 완성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현승의 비중이 높다지만 연희의 비중도 빼놓을 수가 없는 영화다.
그 생각을 하니 예전에 조금 더 관심 있게 알아둘 걸 하는 후회가 생겼다.
그래도 뭐, 여기서 ‘현승’ 역할의 안재성 하나라도 낚아 올 수 있다면 좋은 결과이지 않을까?
누가 낚아채기 전에 조금씩 이야기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방금 촬영을 보고 다짐했다.
좋은 배우를 낚는 것도 매니저의 일이니까.
“슛 들어가겠습니다!”
임지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팅이 끝난 듯했다.
나는 다시 감시하러 슬금슬금 모니터로 향했다.
* * *
“피곤하다….”
“먼저 들어갈래?”
촬영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신희진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먼저 보내줄 요량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아뇨! 저도 나라 언니 하는 거 볼래요.”
“몇 시간 전에 전화했을 때는 먼저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일단 나라한테 전화 좀 해볼게.”
“네!”
신호음은 가는데 받질 않는다.
자고 있나 싶었다.
“안 받아요?”
“응. 들어갔나 본데.”
“오늘 딜레이 걸려서 조금 늦게 끝나긴 했는데….”
지금은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신희진이 시나리오를 틀어서 그 구도에 맞춰서 컷 몇 개가 추가됐더니 예정 촬영종료 시각보다 두 시간 늦게 끝났다.
이 정도면 그렇게 큰 딜레이가 아니긴 했지만….
- 몇 시인 줄 알아요?
“아, 미안. 자고 있었어?”
전화가 연결됐다.
이나라의 목소리를 들으니 목이 잠겨 있었다.
자다가 일어난 거 같은데 숙소인가?
- 저 아직 회사예요.
“그래? 혼자야?”
- 네. 애들은 먼저 숙소 들어갔어요.
“그냥 팀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하고 같이 들어가지.”
- 그냥 좀 더 다듬으려는 것도 있었고… 그래도 오빠한테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냥 피곤해서 목이 잠겼던 건가.
얼른 가서 이야기하고 숙소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무척 피곤한 듯 나른 나른한 목소리였다.
“알았어. 한 15분 정도면 도착해.”
- 알겠습니다아~
“언니가 오빠랑은 대화 톤이 좀 다르네요?”
통화를 끊자 뒤에서 신희진이 머리를 불쑥 내밀면서 내게 말했다.
“야, 위험해. 앉아서 말해.”
“네, 네.”
정색하면서 말하자 신희진이 얌전히 자리로 복귀했다.
“근데 뭐가 달라?”
“딱 보면 알죠.”
난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뭐가 다르다는 걸까.
평소 톤이랑 같은 거 같은데.
“그냥 우리 회사 소속에서 제일 친한 회사 사람이 나라서 그런 거 아냐?”
“그러려나요….”
내 말을 듣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신희진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신희진의 모습이 조금 아리송했다.
“아무튼, 보고 갈 거야?”
“네.”
“그냥 숙소 들어가서 쉬면 될 걸 굳이….”
“우리 언니 춤 보고 가고 싶다는데! 뭐요!”
“아우, 알았어. 알았어.”
내가 보내려고 하자 신희진이 땍땍거렸다.
목청도 좋아.
신희진을 내버려 두고 조심히 운전하면서 회사에 도착했다.
* * *
연습실에 들어가니 우리를 반기는 건 흥겨운 비트와 땀에 젖어 있는 이나라였다.
“지금 몇 시야, 몇 시!”
“언니이!”
이나라의 말에 내 옆에 있던 신희진이 부르짖으며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하는 줄 알겠어.
“왜? 또 누가 괴롭혔어?”
“무슨 말이야. 현장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데.”
“너 저번에 나한테….”
“언니!”
아무래도 숙소에서는 열심히 호박씨 까고 있던 듯했다.
없는 자리에선 누군들 욕 못할까.
누구 욕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호기심을 충족할 필요는 없겠지.
하하 호호하는 이나라와 신희진을 놔두고 나는 주섬주섬 영상을 찍을 준비를 하고는 말했다.
“늦었어. 바로 찍을게.”
“지금까지 준비한 거 피드백 없이요?”
내 말에 이나라가 당황해했다.
“이나라니까 없이 해도 돼.”
“하.”
내 말을 들은 이나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난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올, 그건 인정.”
신희진도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신희진이 이나라의 어깨를 힘내라고 두어 번 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신희진이 내 옆에 오자 이나라가 말했다.
“시작할게요.”
“그래.”
그 말에 맞춰서 나도 녹화 버튼을 눌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