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확신과 그리고 그 경계 (2)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도 영화 내용상으로는 벌써 중반 조금 안 되게 진행된 상태였다.
특히 오늘은 어제 신희진이 말했던 키스신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어제 신희진이 갑자기 키스를 어떻게 하냐고 땍땍거리는 통에 진땀을 뺏다.
“언니. 키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키스요. 키스.”
신희진이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안지수 팀장에게 물었다.
그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고 있던 나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시작했네.
“안 해봤어?”
“네.”
“진짜?”
“네!”
안지수 팀장이 토끼처럼 눈이 크게 떠지면서 신희진에게 되물었다.
안지수 팀장의 놀람과 다르게 신희진은 담담히 대꾸했다.
“웬일이야. 남자들이 가만 놔뒀어?”
“네? 중학교 때는 연애에 별 관심 없었고 고등학교 때는 본격적으로 연기 배우면서 소속사 들어가니까 이성 친구들이랑은 이야기를 잘 못 하게 돼서요….”
“으음, 키스라는 게 말이야….”
안지수 팀장이 키스의 경험을 떠올리는지 묘하게 얼굴이 붉어졌다.
“오빠 말로는 혀가 뱀처럼 왔다 갔다 하는 거라는데요?”
“풉! 뭐? 뱀?”
아이고 희진아… 제발.
잠깐 자리에서 벗어나 있을까 하는 충동이 일어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금 있다가 들어와야겠다.
장단에 맞춰 준다고 이야기했던 건데 그 이야기를 여기서 꺼낼 줄 상상도 못 했다.
“엇, 오빠 어디 가요! 언니랑 같이 알려주세요!”
거울로 나를 보던 신희진이 도망가려는 나를 잽싸게 붙잡았다.
“오빠가 김현진 매니저님?”
“네!”
안지수 팀장이 나를 곁눈질하면서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시선을 나는 슬쩍 피했다.
화제가 흥미진진했는지 옆에 있던 장소영 팀장도 다가와서 대화에 합류했다.
“혀가 왔다 갔다 하는 건 맞지~”
“언니!”
장소영 팀장의 말에 여기저기서 쿡쿡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따로 마련된 3계절 촬영 장비 창고 겸 분장실이었는데, 팀장들 말고도 팀원들도 있었다.
게다가 나 빼고 전부 여자라 뻘쭘함이 더했다.
초여름이라 그렇게 덥지는 않았지만 내 몸은 이미 터질 것처럼 더웠다.
이 장소를 한시라도 빨리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그냥 신희진이 장난치고 있는 거라고 말할까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지해 보였다.
“내가 틀린 말 했어? 희진이도 스물한 살이야. 몰라서 물어보는 거겠어?”
“몰라서 물어보는 걸 수도 있죠. 어휴. 요즘에 이런 애도 드문데.”
“그럼 더더욱 알아야지. 오늘 당장 키스신 있잖아. 알 건 알아야지.”
“어차피 그거 그냥 입만 맞추는 거잖아요.”
안지수 팀장이 신희진의 얼굴을 메이크업 하면서 장소영 팀장에게 말했다.
신희진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요즘 드라마 키스신 보면 혀 넣던데? 완전 리얼해.”
“어우, 언니도 참.”
안지수 팀장이 망측하다는 듯 웃으면서 장소영 팀장에게 손을 내저었다.
장소영 팀장이 유부녀라 그런지 빠꾸가 없네.
“자! 다 했어.”
“감사합니다!”
어느새 다 끝냈는지 안지수 팀장이 메이크업을 마무리 짓고 신희진에게 말했다.
신희진도 의자에서 내려와 거울을 봤다.
“오늘은 진짜 잘 먹었다.”
“그래요?”
“응. 진짜 이뻐.”
안지수 팀장의 말에 신희진이 기분이 좋은지 방실방실 웃었다.
예쁘다는 말은 많이도 들었을 텐데 저 말은 항상 기분이 좋은가보다.
“혜진아, 오늘 의상 좀 희진이 가져다줘.”
“네!”
신희진을 보던 장소영 팀장이 근처에 있던 팀원에게 말했다.
이내 팀원이 옷을 가져와 신희진에게 건네줬다.
신희진이 옷을 한번 보더니 옷을 들고는 나를 바라봤다.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어.”
내 대답을 듣고는 신희진이 바깥으로 나갔다.
“정말 귀엽다니까.”
“연기는 어떻고. 난 아이돌이라고 연기는 조금 부정적이었는데 완전 잘해. 매니저님 계신 자리에서 이런 말은 실례인가요?”
쌩하고 나가는 신희진을 보고 안지수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장소영 팀장도 신희진이 나간 문을 보면서 말하다가 이내 나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좋게 봐주시는 건데요 뭘. 그리고 연기는… 그냥 나이 대에 잘 맞아떨어진 캐스팅인 것 같아요.”
“그것도 못 하는 애들이 한둘인가요? 근데 매니저님은 희진이나 아이돌 애들 맡으면 사심 안 생겨요?”
신희진이 확실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을 홀리는 재주는 탁월한 것 같다.
현장에도 신희진을 좋게 봐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어진 장소영 팀장의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사심이요?”
“네. 그래도 남자잖아요. 생길 것 같은데?”
“글쎄요. 그냥 동생 같기만 해서….”
장소영 팀장이 묘한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해준 뒤에 짧게나마 생각해봤다.
내 쪽에서 사심이 생겨도 쟤 눈에 내가 찰까.
나보다 잘생긴 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허황된 생각에 웃음만 나왔다.
“원래 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요. 저도 지금 남편이랑 만날 때 오빠부터 시작했는데요, 뭘.”
“애초에 매니저랑 담당 연예인이랑 만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왜요? 혹시 모르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하하하.”
매니저랑 사랑에 빠진 연예인이라….
들은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다 옛날이야기다.
마치 할머니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말하는 전래동화처럼.
“저 왔어요!”
때마침 대화 주제가 떨어졌을 때 신희진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와우! 오늘은 러블리하게 힘 좀 줬더니 완벽하네.”
장소영 팀장의 말처럼 의상은 평범한 일상적인 캐주얼한 의상이었지만 색상을 화사하게 가서 그런지 좀 더 산뜻해 보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네.”
“가볼게요!”
“오늘도 화이팅!”
“네!”
인사를 나누고 신희진과 함께 촬영장소로 향했다.
“아, 맞다! 키스 어떻게 하는지 못 물어봤네.”
“어차피 입만 맞추잖아.”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잖아요~”
신희진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이러다간 계속 키스 이야기만 하게 될 것 같아 급히 화제를 돌렸다.
“대본은 다 외웠어?”
“당근이죠.”
“너 저번처럼 어버버하면서 NG 내면 안 돼.”
“그때는 진짜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꼬인 거라니까요?”
“그런 거치고는 대사는 곧, 잘하는 거 같던데?”
“와, 진짜!”
신희진은 천천히 배우로서 연기를 학습하며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연기하면서 연기 실력이 늘어나는 배우가 있고, 그대로인 배우가 있고, 퇴화하는 배우가 있다.
신희진은 습득력이 좋은지 실력이 늘어나는 배우였다.
이런 신희진이지만 오늘은 조금 걱정되긴 했다.
지금까지는 평범한 대학생 연기였다면 오늘 연기는 아슬아슬하게 줄 타는 감정 연기라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리딩하는 걸 봤을 때는 조금 모자라지 않을까 싶은데, 또 촬영에 들어가 상대 배우와 호흡하다 보면 또 달라서 정말 모르겠다.
걱정을 한 아름 가득 안으며 촬영장에 도착해보니 오늘 같이 촬영할 안재성과 권민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권민혁은 극 중 ‘현승’의 친구 역할인 ‘민수’를 맡은 배우다.
오디션을 보고 이진철이 뽑았다고 했는데 예전에도 민수를 맡은 배우인지는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연기만 잘하면 상관없다.
권민혁도 연기가 꽤 되는 편이다.
현장에 주눅 들지 않고 곧, 잘하는 편이었다.
성격이 원래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권민혁은 애초에 성격이 극 중 ‘민수’와 상당히 흡사했다.
“어! 왔어?”
“왔어?”
“안녕하세요!”
우리를 보고는 밝게 인사하는 권민혁과 차분하게 인사하는 안재성이었다.
권민혁은 건들거리면서 다가왔고, 안재성은 올곧게 걸어왔다.
지금 저 둘의 모습이 작 중 두 인물과 흡사했다.
가만 보면 언밸런스한데 묘하게 어울렸다.
“오늘 드디어 재성이랑… 캬! 저돌적으로 기냥 막!”
“아하, 하….”
권민혁의 말에 신희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배우님들! 리허설 있다고 합니다!”
“네! 가요~”
멀리서 들리는 임지예의 목소리에 권민혁이 대표로 답했다.
“노가리 좀 까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가서 노가리 까면 되지.”
“임마. 거긴 이신형 감독님 계시잖아.”
“그러니까 제발 거기로 가자. 어?”
안재성이 질린 목소리로 권민혁을 나무라며 데리고 갔다.
“민혁 오빠는 참 매사 밝은 것 같아요.”
“안재성도 저 성격이랑 비슷하다는 게 신기하네.”
“그게 더 안 믿기지만요.”
“나도 그래.”
신희진이 권민혁의 성격을 안재성에 대입해 보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우리도 빨리 가자.”
“네.”
신희진과 함께 촬영 장소에 도착하니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선 체크한 다음에 액팅 리허설 하고 촬영 들어가실게요!”
임지예가 현장에 배우가 다 도착한 걸 확인하자 크게 소리쳤다.
신희진이 현장을 한번, 나를 한번 보더니 내게 말하고는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 가볼게요.”
“어. 고생해.”
멀어져가는 신희진을 보면서 현장을 둘러봤다.
지금 촬영 현장에서 배우 매니저는 나뿐이었다.
권민혁은 소속사가 있지만, 매니저를 따로 둘 정도의 급은 아니었고, 안재성은 매니저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안재성을 한번 낚아서 회사로 영입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금슬금 이야기 꺼내면서 작업을 쳐봐야겠다.
이진철이 배우들과 이야기하면서 동선과 씬에 대해서 체크하고 있었다.
지금 찍는 장면은 사실 별다른 게 없었다.
셋의 캠퍼스 생활을 장면들을 나열해서 보여주는 거였다.
중요한 건, 이다음에 찍는 장면이었다.
종강 파티 후 민수가 술에 취한 현승과 연희를 위해 숙취해소제를 사러 갔을 때, 술 깨기 위해 단둘이 계단에 앉아 있는 그 장면.
초중반부터 열심히 둘의 미묘한 흐름을 쌓으면서 보여주다가 이때 확 터지게 된다.
그것도 연희의 돌발 행동으로 인하여 현승이 연희에게 확 빠지는 그런 전개였다.
“좋아. 좋아. 이렇게만 합시다! 촬영 준비하고 슛 들어갑니다!”
만족스러운 이진철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리허설이 끝난 것 같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임지예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의 촬영 시작을 알리는 한마디였다.
* * *
오늘의 촬영은 빠르게 흘러 벌써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은은한 전봇대의 불빛. 그 옆으로 나 있는 계단.
그리고 이 주위에 서성이는 인물 셋.
“33-12-1!”
딱!
임지예가 슬레이트를 치고 급하게 카메라 화면에서 벗어났다.
“레디!”
임지예가 사라지는 걸 보고 이진철이 화면을 보며 기다렸다.
“액션!”
그리고 이진철의 외마디와 함께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시작되었다.
지금 찍는 33씬의 12컷은 씬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테이크에 담는 컷이었다.
씬 처음부터 끝까지 찍는 샷을 보통 마스터 샷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찍는 컷이 마스터 샷이었다.
이렇게 아예 통째로 씬 전체를 마스터 샷으로 담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이진철은 아무래도 이 씬에서 배우들의 감정을 파악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도 이 장면의 중요함을 시나리오에서 느꼈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했다.
“많이 힘드나?”
민수가 연희를 부축하고 있는 현승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연희는 죽을라 카네. 정신을 못 차리네.”
“몇 잔 안 마신 거 같은데… 술이 워낙 약한가 봐.”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야 하는데. 이 가시나는 누굴 믿고 이렇게 인사불성이여.”
“…….”
연희는 현승과 민수의 대화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민수가 비틀거리면서 연희와 현승에게서부터 멀어졌다.
“현승아. 내 숙취해소제 좀 사오께. 둘 다 먹고 정신 차려라.”
“어? 그래. 알았어. 여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
민수가 화면 밖으로 나가고 화면 안에는 현승과 연희만 덩그러니 남았다.
현승이 가로등 불빛 옆에 있는 계단에 연희를 앉히고 자신도 앉았다.
그림이 예술이었다.
이 장소를 찾아낸 제작팀에게 박수를.
나지막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연희를 바라보는 현승의 시선이 화면에 잡혔다.
꿀꺽.
옆에 있던 스태프가 침 삼키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린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였다.
이내 연희가 머리를 좌우로 휘청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