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6월의 어느 날 (1)
“완전체 스케줄은 오랜만인 것 같다.”
차에 타자마자 벌써 시끄럽게 떠드는 스타즈였다.
오늘의 첫 화두를 던진 주자는 유미소였다.
“한 달 만인가?”
“그런 듯?”
유미소의 말에 서지영이 대답했다.
“오늘 배 터질 때까지 먹어야지.”
서지영이 오늘 촬영인 먹방 프로그램 ‘Eating road’를 염두에 두고 전의를 불태웠다.
“너 그러다가 투 턱으로 캡처 돌아다닌다. 지금도 위험한 거 알지?”
“이 정도면 괜찮은데….”
“카메라는 안 괜찮아.”
그러나 박혜연의 말에 서지영이 움찔하며 본인의 턱을 만졌다.
“오빠. 오랜만에 보네요?”
“저번 주에도 봤잖아.”
“스케줄로 보는 건 간만이잖아요. 한 2주? 3주? 된 거 같은데.”
이나라가 나에게 말을 걸길래 대답해 줬다.
회사에서는 종종 봤는데 이렇게 스케줄로 보는 건 꽤 오랜만이긴 했다.
내가 신희진을 맡아서 영화 촬영에 집중하자 남진수가 맡아서 다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드 매니저 하나 더 뽑거나 지원받아도 될 것 같은데 남진수가 혼자 한다고 해서 혼자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왜 나한테 항상 투덜대는지 모르겠다. 그냥 지원받지.
“희진이 일정이 바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지.”
“벌써 희진 언니부터 챙기는 거 봐.”
“완전 개인 매니저야. 우리만 바라봐주던 그 사람이 아니라구!”
내 말에 우우하고 야유하면서 유미소와 서지영이 성토했다.
서지영의 말과 행동에서 거의 비련의 여주인공인 줄 알았다.
“우리가 오빠 없는 동안 팀장님한테 얼마나 시달렸는데요!”
“팀장님. 완전 잔소리꾼. 엄마보다 더해.”
박혜연도 목소리 높여 나에게 말했다. 린도 같이 투덜댔다.
많이 힘들었나?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나를 찾는 애들을 보니 뿌듯했다.
애들에게 내 빈자리가 이만큼 커졌구나 싶어서.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확 오더라.”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돌아와요. 김푸우. 돌아와요. 김 매니저!”
이나라가 유명한 비유를 들어 표현했는데 유미소가 냉큼 받아 채서 말했다.
아니 뭐… 그래도 희진이 촬영은 끝내야 뭘 어떻게 하지.
내가 그 영화에 투자한 지분이 좀 돼서 어쩔 수가 없어.
내가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자 서지영이 이제는 타깃을 신희진으로 돌리는 듯했다.
서지영이 신희진 뒤에서 신희진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게 백미러로 보였다.
내가 보기엔 가면서 심심하니까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것 같았다.
“언니 언제까지 촬영해요?”
“나 다음 달까진 촬영 있을걸?”
“숙소에서는 맨날 대본만 보구… 놀아주지도 않구….”
“하핫.”
신희진이 서지영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이건 장난이 아니고 정말 섭섭해 보였다.
시무룩한 서지영의 얼굴이 보였다.
이내 서지영이 백미러로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이 모든 원흉은 바로 당신!”
“내가 뭐? 난 내가 할 일한 거뿐인데.”
서지영이 징징거리길래 한마디 했다.
서지영은 내 말에 콧김을 씩씩 뿜으며 더 날뛰었다.
“아, 왜 우리 언니 뺏어가요! 나랑 놀던 언니 돌려줘!”
“지영아, 우리 나이를 생각하자. 친구라고 말하기 쪽팔려. 쫌.”
보다 못한 박혜연이 내 편을 들어 서지영을 나무랐다.
박혜연이 그렇게 말하자 서지영이 이제는 박혜연을 괴롭히고 있었다.
“오늘 근데 진짜 먹기만 하면 돼요?”
이나라가 그사이를 노려 내게 오늘 프로그램 정보를 다시 물었다.
진짜 이나라 없었으면 이 그룹은 어떻게 됐을까.
“그냥 맛집 탐방이야. 적당히 MC들이 말하는 거 맞춰주면서 토크하다가 먹으면서 감탄해주고 그러면 돼. 프로그램 모니터링 했잖아.”
“그래도 이런 건 좀 낯설어서요. 이렇게 방송을 날로 먹어도 되나 싶고.”
이나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나머지는 아닌 것 같았다.
“난 좋은데?”
“나도.”
이나라 앞에 있던 유미소가 이나라의 말에 대꾸하자, 그 앞에 있던 신희진도 조용히 거들었다.
“아무튼, 가서 주는 대본 한번 훑어보고 요령껏 하면 돼.”
“네!”
“유코랑 미소는 저번에 나간 예능은 잘 찍었어?”
나도 애들의 근황이 궁금해 유코와 유미소에게 물었다.
“그거… 말도 마요.”
“왜?”
“유코가 진짜… 하아….”
“내가 머어!”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말하는 유미소를 보니 짐작이 갔다.
유코는 반발했지만.
“내가 그 이상한 아재 개그 하지 말랬지?”
“반응 조핫능데….”
“형우 삼촌이 잘 받아줘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망했어!”
유코가 방송에서 또 개그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동갑내기 둘이 옥신각신 투닥거렸다.
근데 뭐라고 했길래 저럴까 궁금하긴 했다.
“뭐였는데?”
“우유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근데 유코가 갑자기 우유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형우 삼촌이 ‘무슨 우유가 좋아요?’라고 물으니까 글쎄 유코가….”
“아이 러브우 유!”
“…….”
유코가 답을 이야기하자 차 안이 싸해졌다.
흔히 이런 정적은 귀신들렸다 갔다고도 하던데.
“으음….”
“저걸 받아준 형우 삼촌이 대단하네. 역시 국민 MC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내가 침음을 삼키며 있자 서지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저걸 어떻게 받아준 걸까.
예능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저렇게 말하고 지금처럼 스튜디오 1초간 정적이었어요. 진짜루. 편집 안 하고 방송 나왔으면 좋겠다. 너, 팬이 계속 재밌어 유코야! 재밌어! 하니까 정말 재밌는 줄 알지? 그거 팬들이 너 민망할까 봐 재밌다고 해주는 거라구!”
유미소가 얼굴이 뻘게지도록 열변을 토하며 말했다.
유코가 유미소의 모습에 기가 죽은 듯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난 재밋능데….”
“그냥 컨셉으로 냅둬. 이젠 뒤가 없어.”
“에휴.”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유미소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겪는 왁자지껄한 이 분위기가 좋았다.
신희진을 제외한 다른 애들도 각자의 스케줄을 잘 보내고 있던 모양이다.
애들 컨디션을 보니 최상인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완전체 스케줄이라 그런지 더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스케줄도 즐겁게 끝날 것 같다.
* * *
“안녕하세요! 스타즈입니다!”
“안녕하세요. 서 작가! 게스트 도착했어.”
“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애들을 데리고 PD에게 가 인사했다.
애들의 인사를 받은 PD도 웃으며 애들에게 답했다.
그리고 작가를 부르더니 작가가 다가와 스타즈 애들을 데려갔다.
“안녕하세요, PD님.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아, 네. ‘Eating road’ 황종수 PD입니다. 남 팀장님은 안 오세요?”
황종수 PD가 남진수의 근황을 물어왔다.
프로그램 이야기는 남진수랑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내가 신경 쓸 건 없는 프로그램이긴 했다.
“따로 일이 있으셔서 제가 오게 됐어요.”
“아… 그러시구나. 진행 상황이나 프로그램 성격은 들으셨죠?”
“네. 애들한테 전달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황종수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큐시트랑 오늘 진행 대본 드릴게요.”
나에게 말을 하고는 황종수 PD가 누군가를 손짓해서 불렀다.
“오늘 큐시트랑 대본 가져다드려.”
“네.”
황종수 PD가 그렇게 말하자 황종수 PD가 부른 사람이 다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연출부 쪽인 것 같았다.
조연출이려나?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그럼, 고생하세요.”
“네, 고생하세요.”
황종수 PD는 일이 있는지 짧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고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프로그램은 여타 다른 예능 방송프로그램과 달리 놀고먹고 대화 하는 게 끝이다.
말 그대로 힐링 프로그램.
MC 두 명이 게스트로 온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맛집에 소개해 대화를 나누고, 게스트와 함께 맛집으로 가서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전형적인 먹방 프로그램이다.
아직 MC들은 도착을 안 했는지 안 보였다.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스타즈 애들이 우르르 내 곁으로 왔다.
“아, 좋다. 이런 프로그램만 하고 싶다.”
“작가님이 뭐라셔?”
“오늘 진행하면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하는지, 촬영 분위기는 어떤지, 그런 거 말씀해 주시던데요?”
“딱히 별다른 말은 없었네.”
“네.”
정말 꿀 같은 프로그램이다.
원래라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을 텐데.
이 와중에 나를 툭툭 건드리는 인물이 있었다.
“저희 메이크업은 어디서 받아요?”
“샵 갔다 왔잖아.”
메이크업하고 왔는데 또?
“저 메이크업 좀 뜬 거 같아요.”
“어, 저도요!”
유미소가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유미소가 그렇게 행동하니 하나둘 확인하더니 신희진도 말했다.
“그래? 잠시만.”
나는 별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 여자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애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근처 스태프에게 물어봤다.
스태프가 위치를 알려줬는데 따로 마련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음식 먹다가 메이크업이 망가지기도 하니 종종 건드려야 해서 마련된 것 같았다.
“저쪽이래. 가면 메이크업 손봐주실 거야.”
“네!”
유미소랑 신희진이 손잡고 내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사라졌다.
둘이 사라지자 식당 문 쪽에서부터 두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Eating road의 MC인 안창석과 이지수가 힘차게 인사했다.
그리고 둘을 따라서 몇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오! 오늘은 둘이 같이 왔네?”
“요 앞에서 만났어.”
황종수 PD가 반갑게 둘을 맞이하더니 안창석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촬영 시작하겠구나.
메이크업 받으러 간 둘을 제외한 스타즈 애들을 데리고 안창석과 이지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스타즈입니다!”
“대세 걸그룹이랑 식사라니 영광이에요”
“오빠 저는요?”
“넌 너무 많이 봤잖아. 질려.”
“와, 진짜 말하는 거 봐. 검은 머리 짐승이라니까.”
하하하.
스타즈의 인사를 받은 안창석이 넉살 좋게 이야기하자 이지수도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면서 농담을 했다.
둘의 케미에 촬영장이 한껏 훈훈해졌다.
안창석이 씨익 웃더니 스타즈 애들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요청했다.
“오늘 잘 부탁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분위기를 보니 오늘 촬영은 순탄할 것 같다.
“다 도착했으니 준비하고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촬영장이 분주해졌다.
* * *
촬영이 시작되고 게스트 소개를 한 뒤에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행되었다.
음식이 나오고 대화를 하면서도 촬영은 소소하면서 잔잔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에 이지수가 스타즈 애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반년 지났죠? 반년 뒤면 어떻게 되나요?”
“아, 그게….”
이지수의 물음에 눈치를 살피는 스타즈였다.
애들은 남은 활동 기간에 대한 질문을 받을지는 몰랐는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내가 봤던 대본에도 없는 질문이었다.
아마 임의로 꺼낸 질문인 것 같았다.
애들이 너무 눈에 띄게 당황하는데 방송에 나갈 수 있으려나?
잠시 지켜보려고 하는지 황종수 PD를 바라봤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상황만 보고 있었다.
애들이 계속 우물쭈물하자 그제야 나섰다.
“컷!”
애들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그런지 진행이 안 되자 황종수 PD가 보다가 촬영을 끊었다.
“아, 미안해요. 이야기 나누다가 궁금해서 꺼냈는데 이렇게 당황할 줄 몰랐어요.”
“아니에요. 갑자기 남은 기간 생각하니 저희도 당황스러웠던 것 같아요.”
이지수가 미안한 표정으로 애들에게 사과했다.
애들도 촬영이 끊기자 정신 차렸는지 웃으며 이지수에게 답했다.
이런 이들 사이로 황종수 PD가 다가갔다.
“어떻게 그 질문 빼고 다시 갈까요?”
황종수 PD가 스타즈 애들에게 물었다.
“지수가 또 사고 쳤네. 사고 쳤어.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한다니까.”
“정말 미안해요. 민감한 질문인 줄 몰랐어요.”
“아니에요.”
안창석 MC가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하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이지수도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사과했다.
애들도 악의가 없는 걸 느꼈는지 웃으면서 둘을 대했다.
“언제고 한번 말해야 했던 문제긴 했어요. 방송 표면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요.”
유미소가 말하자 나머지 멤버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나라는 고개를 돌려 황정수 PD를 바라봤다.
“PD님 잠깐 저희끼리 잠시만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잠깐 10분 쉬었다 갑시다!”
이나라의 말에 황정수 PD가 잠깐의 쉬는 시간을 만들어줬다.
이나라가 나를 보더니 오라며 손짓했다.
“현진 오빠! 오빠도 와주세요!”
“어.”
말하지 않아도 가려고 했었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두 MC도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다.
테이블에 다다르자 이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한번 시원하게 말하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보다는 열심히 하자! 아자아자! 같은 느낌으로 방송 나가는 것도 좋을 거 같아. 모르는 거 아니잖아. 우리.”
“그래, 그러자.”
내가 도착하자 애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애들은 애들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