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 (2)
냠냠.
“그렇게 먹으면 안 질려?”
“안 질리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배부르지 않아?”
“밥 배. 디저트 배. 과자 배 다 따로 두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난 밥만 먹으면 다른 건 못 먹겠던데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첫 촬영이라고 하면 긴장해서 잠 설치는 건 기본이고 입맛 없다고 아무것도 안 먹는 사람도 많았는데.
신희진은 긴장도 안 되는지 청소기처럼 흡입했다.
백미러로 힐끔힐끔 본 신희진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무심하게 과자봉지에 손을 넣어 과자를 먹을 뿐.
“첫 촬영인데 긴장 안 돼?”
“긴장해서 먹는 건데요?”
“…그래.”
쟤 배 속에는 뭐가 들어가 있을까.
블랙홀?
“근데 희진아.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뭔데요?”
내 말에 신희진이 과자 먹는 걸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너 아이돌은 왜 했어?”
“왜 했다뇨?”
“아, 질문이 좀 이상했네. 어쩌다 하고 싶어진 거야?”
“내가 제일 예쁘니까?”
“…….”
어이가 없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농담이고요. 사랑받는 게 좋았어요. 관심 가져주는 것도 좋았고요. 시간이 갈수록 뭘 할까 하다 고민하다가 기획사 오디션 보고 결국 연습생으로 들어갔죠. 뭐.”
“흐음.”
신희진이 말하고 나서 뭔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과자를 봉지째로 들어서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입 안에 있는 남은 과자부스러기를 우물우물하고 다 먹었다.
그 광경을 백미러로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과자 먹는 거 처음 봐요? 그렇게 보는 거 실례라고요.”
내가 주의 깊게 자신의 먹는 모습을 보는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왜 관심 받는 게 좋다며?”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내 말에 신희진이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근데 갑자기 궁금한 건데 말이야.”
“네.”
“먹는 게 좋아? 아니면 연예인이 돼서 관심 받는 게 좋아?”
“으음….”
내 말에 깊은 고민에 빠지는 신희진이었다.
지상 최대의 문제를 눈앞에 둔 듯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희진이 언제까지 고민할지 궁금했다.
신호등을 여섯 개쯤 지나쳤을 때쯤에 뒤에서 신희진이 말을 걸어왔다.
“너무 어려운 문제였어요.”
“그래서 뭐야?”
“지금은 연예인으로서 관심 받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왜?”
의외였다.
난 먹는 거를 고를 줄 알았다.
그 신희진이 먹는 걸 포기하다니.
“연예인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그중 좋은 사람들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요. 지나치게 관심 받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 좋기도 했거든요.”
관심 받는 게 좋다면 천상 연예인이 딱이다.
물론 관심을 받을 만한 매력이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이번엔 또 다른 게 궁금했다.
“그럼 연기랑 가수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둘 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가수는 무대에 섰을 때, 그리고 팬들이랑 만났을 때 좋았구. 연기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요. 이건 진짜 선택 못 할 것 같아요.”
“그래?”
“네.”
긴장을 풀어주려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낸 거였는데 생각 외로 신희진을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좀처럼 없기도 했다.
내가 별말 안 하자 신희진도 긴장이 풀렸는지 대본을 읽고 있었다.
풀린 게 맞겠지?
안 먹고 대본 보고 있으니까.
대본을 보는 신희진의 집중을 방해하기 싫어서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운전만 했다.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진철부터 찾았다.
이진철이 나랑 오래된 친구라 사이가 편하다지만 여기는 촬영장이고 이 촬영장의 감독은 이진철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오늘 첫 촬영인데 잘 해봐요.”
“네! 감독님!”
이진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희진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의상이랑 메이크업은 현장에서 받으면 된다고 전달받아서 안 하고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아, 잠시만요.”
이진철이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현장은 촬영 세팅으로 한창 바빴는데 우리가 콜타임보다 30분 더 일찍 온 편이었다.
신인이기도 하고 현장 분위기도 빠르게 익힐 겸 일찍 왔다.
이진철이 찾던 사람을 발견했는지 그쪽으로 크게 소리쳤다.
“지예야!”
“네!”
이진철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지예? 내가 아는 그 지예?
이진철이 부른 곳에서 두두두 달려오는 임지예가 보였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오늘 찍을 콘티 가져다드리고, 메이크업 어디서 받는지 안내해드려.”
“네!”
나만 놀란 건 아닌지 신희진도 무척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잠깐 학교 탐방을 같이하면서 무척 친해진 듯싶었다.
요즘도 간간이 연락하는 것 같기도 하더니만.
“저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 네.”
얌전히 임지예를 따라갔다.
신희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임지예가 반가웠지만, 어찌 됐든 간에 일로 만났고 여긴 일터이기 때문에 구분은 해야 했다.
임지예를 따라서 간 곳은 따로 대기실을 만들어둔 곳이었다.
오늘 첫 촬영은 학교에서 시작해서 병원에서 끝이 나는 촬영 일정이었는데, 학교가 모교이다 보니 여러 가지 배려를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안에 들어가시면 분장팀이랑 의상팀이 같이 있을 거예요.”
“네!”
안으로 들어가니 임지예 말대로 의상팀과 분장팀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퍼블릭 페이스팀의 팀장 안지선입니다.”
안지선 팀장이 반갑게 우릴 맞이 해주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신희진 매니저 김현진 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도 안지선 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팀장은 우리를 보고 웃더니 신희진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관찰했다.
우리가 아니라 신희진을 보고 웃은 건가?
신희진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인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면 돼요~ 와! 실물은 처음인데 진짜 예쁘시네요!”
“감사합니다!”
안지선 팀장이 신희진을 끌고 가면서 연신 예쁘다 말했다.
신희진은 끌려가면서 나를 쳐다보고 갔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냥 손만 흔들어줬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옷걸이가 있었다.
그 옆으로 여성분이 계셨는데 아무래도 의상팀인 것 같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여성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의상 담당인 장소영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신희진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오늘 의상은 간편한 대학생 캐주얼 룩이구요. 협찬받은 옷들이라 멀쩡하게 반환해 주셔야 해요. 어디 망가지면 꼭 알려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잘나가는 아이돌이라 그런지 협찬받기가 편했어요.”
“뭘요.”
장소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분장팀이나 의상팀은 우리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촬영장에서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어? 그럼 저도 협찬받을 수 있어요?”
장소영의 말이 들렸는지 신희진이 메이크업 받으면서 물어왔다.
장소영이 그런 신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따로 문의해 보세요. 알려드릴 테니까.”
“네!”
어디 매체에 홍보되는 것도 아닌데 협찬을 해주려나 싶다.
해줄 수도 있긴 하겠네.
이제 메이크업에 들어갔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 현장이나 보고 와야겠다.
문밖으로 나와 보니 임지예가 서 있었다.
“왜 안 가고 여기 있어?”
“뭐 더 물어보실 거 있나 해서 있었죠.”
“너 학교는?”
“곧 방학이잖아요. 시험은 다 끝났어요.”
“연출팀 알바하러 온 거야?”
“네. 과사에서 할 사람! 하길래 바로 낚아챘죠.”
짐작했던 게 맞았다.
그래도 이진철은 모교라고 페이를 후려치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도?
“미련한 짓인고….”
“내 최애랑 같이 작품 할 기회인데 놓칠 수야 없죠!”
방학을 알차게 쓰질 못할망정 현장에 나와 고생하려는 임지예를 보고 한마디 했더니 임지예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아, 그리고 여기 콘티요.”
내가 영혼 없이 이야기해도 별 타격이 없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콘티를 건네주었다.
콘티를 보니 생각보다 오늘 일정이 빡빡해 보이지는 않았다.
“음, 생각보다 몇 컷 없네?”
“오늘은 간만 본다고 널널하게 짜셨어요. 오늘 촬영하는 거 보고 다시 짜신대요.”
“그래? 윤 PD님만 머리털 빠지시겠구만.”
“그건 또 모르죠~”
실시간으로 촬영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니 끔찍하네.
이미 나온 스케줄에서 퍼즐 맞추듯 짜 맞추시는 거겠지만 저것도 보통 할 일이 못 된다.
“근데 촬영장에 학교 사람들 되게 많네요.”
“아무래도 현장에 많이들 나가는 편이니까. 그리고 감독이 학교 사람이잖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뭐. 너만 해도 학교 사람이고.”
임지예의 말을 듣고 내가 아는 정보를 이야기해줬다.
내 말에 공감하는지 임지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팀에 두 명 조명팀에 한 명 있던데요?”
“응? 난 모르겠던데. 또 있었구나.”
“촬영 세컨드랑 막내 조명팀 막내요.”
“그래?”
가을동화했던 팀 그대로 다시 온 게 아니었나?
그때는 없었는데.
“네.”
“나보다 선배야?”
“아뇨.”
“그럼 됐어.”
“와, 꼰대.”
내가 모르는 후배인 것 같은데 거기까지 챙겨주지는 못한다.
알아서 아는 척하면서 밥그릇 챙겨야지.
근데 임지예의 마지막 한마디는 나를 움찔하게 했다.
“지예야, 이제 일해야지?”
“갑니다. 가요.”
내 말투가 퉁퉁거리는 말투로 바뀐 것 같아지자 임지예가 꼬리를 내렸다.
“아, 맞다. 지예야.”
“네?”
“이신형 감독님은 어디 있어?”
“못 보셨어요? 현장에 계실 텐데.”
“그래? 일단 인사드리러 가야겠네.”
“그럼 전 가볼게요!”
“그래. 수고해.”
임지예가 바쁘게 뛰어갔다.
그런 임지예 뒤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와 이신형 감독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여기선 감독 아니고 조감독.”
내 말을 정정해주는 이신형 감독이었다.
촬영 현장 직급이 꼬일까 봐 확실히 하려는 것 같았다.
“아, 네. 조감독님.”
“무슨 일 있어요?”
“아뇨. 특별한 일은 없고 인사드리러 왔어요.”
내 말에 이신형 감독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실수라도 했나?
“이진철 감독한테는 갔다 왔어요?”
“먼저 갔다 왔습니다.”
아무래도 선후 관계가 궁금했던 듯했다.
이신형 감독의 말에서 이진철을 먼저 생각하는 이신형 감독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진철은 전생에 어떤 덕을 쌓았길래….
“잘했네. 오늘 촬영 잘해봅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신형 감독과 대화를 나눈 뒤 멀찍이 떨어져 현장을 둘러봤다.
라인을 정리하고 있는 촬영부.
조명 위치를 보면서 조명 들고 뛰고 있는 조명부.
모니터 위치 잡은 연출부.
그리고 슬슬 사람 통제를 하려고 위치 잡은 제작부까지.
매니저 일을 시작 안 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있었겠지.
상념에 젖어 있던 때에 멀리서 안재성이 오는 게 보였다.
오늘 촬영할 인물은 다 도착한 것 같았다.
첫 촬영 장면은 연희와 현승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번 촬영은 최대한 감정선 따라서 찍는다고 한 것 같은데 잘 되려나 모르겠다.
보통 영화 촬영은 시나리오의 감정선이 아니라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순서배열이 잦다.
이렇게 찍을 수 있는 게 윤진수 PD의 능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시나리오와 장면 구성을 이진철이 잘한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배우들에게는 시나리오 순서의 흐름 따라 촬영을 하는 게 감정을 잡기 쉬웠다.
감정에도 기승전결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 하세요?”
내 뒤에서 신희진의 목소리가 들리길래 돌아봤다.
“뭐야, 벌써 왔어?”
“이거 어때요? 좀 대학생 새내기 같아요?”
메이크업과 의상을 맞춰 입고 온 신희진의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샤랄라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무대 메이크업보다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확실히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무대 메이크업은 조금 과하게 하는 편이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연희 같네.”
“뭐야. 메이크업 해주시는 언니는 완전 여신 같다고 했는데.”
내 말에 신희진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투덜댔다.
원하는 대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분들은 일로 하는 거잖아. 뭐 그래도 이뻐.”
“그냥 이쁘다 해주면 덧나요? 칭찬에 되게 인색하시네.”
이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워서 사족 한마디를 달았더니 핀잔을 들었다.
신희진은 그래도 목표로 한 대답을 들어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면서 재성 오빠도 만났는데 곧 촬영 들어가겠죠?”
텐션이 업 됐는지 흥얼거리면서 이어서 말했다.
오면서 안재성과 마주친 듯했다.
“그러겠지?”
“긴장되는 것보다 그냥 조금 떨리긴 하는데 재밌을 거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
촬영장을 보는 신희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 보였다.
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숨길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나도 똑같았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은 예전보다도 더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지금 신희진을 보면서 그런 촉이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