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 (1)
“안녕하세요. 안재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신희진입니다!”
안재성과 자리는 빠르게 만들어졌다.
“이쪽 분은…?”
“아, 저는 신희진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반갑습니다.”
내 소개를 하자 안재성이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마치 ‘네가 왜 여기에 있어?’라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난 안재성이 더 의아했다.
매니저가 따로 없나?
“제 소개는 따로 할 필요 없죠?”
“네.”
“네!”
내 말이 끝나자 이진철이 바통을 이어받아 말했다.
“다른 게 아니고 그래도 두 분이 촬영 전에 한번은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랑 김현진 매니저는 잠깐 자리를 비켜 드릴 테니 두 분이 이야기하시겠어요?”
“네!”
“아니요.”
이진철이 말하자 신희진은 밝게 답했지만, 안재성은 우중충하게 말했다.
심지어 알겠다는 대답도 아니고 ‘아니요’란다.
뭐 하는 놈이야?
“하하하. 잠깐 자리 좀 옮기시죠. 매니저님.”
“아, 네.”
신희진을 안재성과 둘이 놔둬도 되나 잠깐 고민을 했지만 보이는 곳에 있으니 상관없겠다 싶었다.
“좀 이상한데?”
“아냐. 너 승기 형 알지? 그 과야.”
“그 과?”
“배역 맡으면 딱 그 배역에 맞게끔 행동하더라. 아마 상대역 만나서 더 그럴지도 모르고.”
“설마 지금 ‘현승’이야?”
“그럴걸.”
“미쳐버리겠네. 승기 형 같은 사람이 또 있어?”
“재밌지?”
“재밌긴. 주위 사람만 피곤하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홍승기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건 재앙이었다.
“작품 끝나고 보면 재밌는 애야. 말도 많고.”
“그래?”
이진철과 이야기하다가 신희진이 있는 테이블을 힐끔 쳐다보았다.
나랑 이진철이 빠지자 그래도 서로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하는 듯했다.
“참, 저번에 못 물어봤는데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그렇게 발전했냐?”
“난 한 게 없어. 아마 도와줬다면 이예진 선배님이 도와준 게 아닐까 싶은데.”
이진철이 신희진에 관해 물어왔다.
근데 내가 해줄 말은 없었다.
“선배님?”
“저번에 한번 희진이 보러 왔었거든. 그때 둘이 이야기하고 난 뒤에 애가 변하더라고.”
딱 그 기점이었을 거다.
이진철도 내 이야기가 흥미로운 듯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래?”
“뭔가 독해졌다고 해야 하나… 좀 바뀌긴 했어. 본인 말로는 딱 서바이벌 할 때 그 기분이라던데. 그리고 뭔가에 대입하는 것 같더라고.”
신희진이 그렇게 말했지만 조금 신기하긴 했다.
연기가 그렇게 단기간에 늘기가 힘든데 아무래도 본인과 배역이 접점이 많다 보니 습득이 빠른 것 같았다.
학생, 같은 나이대, 공감대까지.
“신기하네. 무슨 감정으로 하길래 그러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잘 풀어나가니까 됐지 뭐. 그건 그렇고 5월은 준비 좀 더 한다 치고 정확히 촬영 날짜는 언제로 잡혀 있는데?”
“6월 중순? 대학교 시험 끝나고 애들 방학할 때쯤 들어가려고. 윤 PD님이 조율 중이라더라.”
우리 회사와 프로덕션을 맡은 윤진수 PD와 이야기한 날짜랑 얼추 맞는 것 같았다.
6월에 시작하고 7월 중순 안에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그게 찍기는 편하긴 하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스태프는?”
“가을동화 때 했던 팀 대부분.”
“그 사람들이 시간이 돼?”
“나도 이렇게 다들 도와주겠다고 할 줄 몰랐어.”
“복 받았네.”
이진철이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신형 감독의 참여도 이슈였지만 같이 따라다니는 스태프들이 따라간 것도 꽤 화제가 되었다.
이것도 같이 가는 모양인 걸 보면 예전부터 말이 돼 있는 것 같았다.
“그치. 복 받았지. 이제 잘 찍어서 보답해야지.”
당사자들이 없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이진철의 표정은 고마움이 가득했다.
이진철을 보다가 신희진이 있는 테이블을 봤다.
마침 신희진과 눈이 마주쳤다.
보자마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신희진의 눈빛이 마치 ‘살려 주세요’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
그렇게 이야기 나누기가 힘든가?
하긴 시나리오의 ‘현승’ 역이면 재미도 없고 숙맥인 캐릭터였다.
안재성이 성격을 죽이고 ‘현승’ 캐릭터 성격대로 대하고 있었다면 어색해 죽을 맛이지 않을까 싶다.
“슬슬 우리도 다시 가볼까?”
“좀 더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으려나?”
“소개팅도 아니고 뭘 더 이야기하겠어. 그리고 슬슬 시간도 다 됐기도 하고.”
“그도 그렇네.”
이진철과 자리에서 일어나 신희진과 안재성이 있는 자리로 갔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어요?”
“네….”
이진철이 말하자 신희진이 맥없이 대답했다.
나는 그런 신희진을 바라봤다.
“넌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펄펄 넘치는데요?”
내 말에는 신희진이 쾌활하게 답했다.
“스케줄 바로 있다고 하셨죠?”
“네.”
“아쉽네요. 식사나 같이했으면 했는데.”
이진철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스타즈 애들이 개인 스케줄을 돌리고 있다지만 그래도 스타즈 스케줄은 꽤 바빴다.
“그러게요. 하하하.”
나도 내심 같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멋쩍게 대답하는 말만 나왔다.
“그럼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보죠.”
“네! 다음에 봬요!”
묵묵히 가만히 있던 안재성이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안재성의 말에는 신희진이 화답했다.
신희진의 말을 끝으로 나와 신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낯을 되게 많이 가리시는 분 같아요. 저분.”
“이상하지 않았어?”
“네? 뭐가요?”
“이진철 감독 말로는 지금 ‘현승’ 캐릭터라던데?”
“어…?”
차로 향하면서 내 말을 들은 신희진이 갑자기 멈춰 섰다.
“왜?”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와….”
“너야 지금 네 성격이 연희 캐릭터랑 닮은 면도 있기도 해. 아무래도 첫 만남이기도 하니까 더 ‘현승’ 캐릭터처럼 군 거일 수도. 근데 이건 나도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본 게 아니라 잘 모르겠다.”
“와… 그럼 원래 성격은 어떻대요?”
신희진은 제자리에서 연신 감탄했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안재성에 관한 걸 묻기 시작했다.
“말 많고 장난 잘 치는 성격?이라던데.”
“상상이 안 되는데….”
“원래 사람은 첫인상이 쭉 가니까.”
말하면서 생각해봤다.
안재성이 첫 만남에도 굳이 그렇게 나온 건 첫 인상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배역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촬영에도 그 영향이 갈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신희진 입장에서는 원래의 ‘안재성’보다 시나리오상의 ‘현승’에 익숙하고 몰입하는 게 더 좋으니까.
“쇼크다 쇼크. 저는 자신과 배역은 항상 분리하라고 배웠거든요.”
“사람마다 방식은 다양하니까.”
“신기하네요.”
자신과 배역을 분리하라는 말도 맞다.
배역에 몰입하게 되면 그 배역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이 폭발적인 작품을 만나면 배우들은 감정 때문에 힘들어 했다.
“신기할 게 뭐가 있어. 빨리 가. 애들 데리러 가야 해.”
“네~”
계속 신희진이 걷지 않고 있자 한마디 했다.
그러고 나서 신희진과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차로 걸어갔다.
차에 탄 뒤에도 신희진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출발할게.”
“네.”
차에 시동을 걸고 애들을 데리러 이동했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현진아. 다음 주부터 촬영 들어가지?”
“네.”
“촬영 때까지 당분간 희진이 혼자 맡아서 담당해.”
이진성 실장이 업무를 보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서 대뜸 말했다.
“네?”
“그래봤자 길어야 2주잖아.”
“그럼 나머지 애들은요?”
“어차피 두 명 빼고는 다 회사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일곱 명 같이 가야 하는 스케줄은 스케줄 장소에서 합치면 되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 고사 가기 전에 애들 다 모여서 한번 Y앱으로 소통하는 거 잊지 말고.”
“네.”
현재 스타즈 애들은 개인 스케줄 위주로 진행하고 있다 보니 팬들 사이에서 불만이 종종 나오고 있기도 했다.
우리야 일곱 명 모두 함께인 스케줄을 잡고 싶었다.
그렇지만 애들이 소속된 각 소속사에서 단기적 이득보다는 장기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팬덤과 충돌이 있는 편이었다.
팬들은 아무래도 더 많은 매체에서 보는 걸 원하니까.
지금 스타즈 스케줄은 오프라인 스케줄이 많았다.
방송 매체에는 예능을 원하는 유코와 미소 빼고는 딱 두 번 정도 완전체로 나갔었다.
그래도 이렇게 스케줄을 하면서도 꾸준히 Y앱이나 SNS를 통해서 소통하고 있어서 팬들이 들고 일어날 정도로 불만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소통이 단절되면 보통 수납된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 깜짝할 새에 벌써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고사 지내는 날까지 다가왔다.
오늘 고사 지내고 나면 바로 며칠 뒤부터 촬영이 시작된다.
신희진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이제는 촬영 들어가서 호흡 맞춰보는 일만 남았다.
고사 때 열심히 기원해야겠다.
무사히, 그리고 더 대박 나기를.
* * *
“윤 PD 돈 좀 더 쓰지? 쪼잔하게 5만 원이 뭐야 5만 원이.”
“감독님! 이 정도면 많이 쓴 겁니다.”
“누가 쪼잔이 아닐까 봐 쪼잔하게.”
이신형 감독이 투덜투덜대면서 만 원 한 장을 돼지 코에 박아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진수 PD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황망한 표정으로 이신형 감독을 바라봤다.
“감독님?”
“뭐?”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실 게 아닌 것 같은데요?”
“PD랑 조연출이랑 같아? 한 푼이라도 더 버는 PD가 더 써야지.”
“다음 작품 하실 때 기대합니다~”
“누가 또 같이한대?”
툴툴거리는 이신형 감독과 윤진수 PD의 사이는 꽤 가까워 보였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저런 농담도 편하게 못 하겠지.
“예진이가 와서 돈 좀 꼽았어야 했는데.”
“선배님은 몇 회 나오시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오고 싶었는데 스케줄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
돼지머리에 꽂혀 있는 돈들이 불만인 듯 이신형 감독은 계속 툴툴댔다.
그런 이신형 감독을 이진철이 웃으면서 응대했다.
“그럼 돈이라도 계좌로 보내라고 해.”
“그렇게 말하면 진짜 보낼걸요?”
“농담도 못 하나?”
하하하.
고사를 지내는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영화를 찍기 전에 고사를 지내는 건 감독에 따라 다른데 이진철은 첫 데뷔작이라 그런지 미신이라도 믿고 싶은 듯했다.
고사를 지내면 무사고에 영화가 대박 난다는 흔한 미신.
미신이지만 나라도 했을 것 같다.
고사를 지내서 마음이 편하면 그걸로 된 거다.
나는 신희진에게 돈 봉투를 건네준 뒤 가라고 밀어냈다.
“지금요? 가요?”
“가서 꼽고 인사하고 나오면 돼.”
신희진이 쭈뼛쭈뼛 가서 돼지 입에다가 봉투를 물리자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며 좋아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고사장에서 나온 금액으로 회식을 하기 때문이다.
적게 나오면 제작사나 감독이 돈을 더 풀기는 하지만 보통은 고사장에서 나온 돈으로 커버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봉투로 해서 넣은 건 주연배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투자자 입장도 같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큰 거 한 장이다.
“색깔을 보니까 큰 거 한 장인가?”
“그게 보여요? PD님?”
“지금까지 돈 봉투를 얼마나 많이 봤는데.”
아무리 봐도 흰색인데 어떻게 보이지?
PD의 감인가?
“크. 오늘은 포식하겠네.”
돼지 앞에서 인사를 하고 신희진이 부끄러운지 빠른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시 왔다.
다음으로 안재성이 돼지 앞에 서서 봉투를 입에 물렸다.
시끄러운 분위기와 다르게 고사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이제 마지막인 감독 차례였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처럼 이진철이 얼굴을 굳히고 돼지머리 앞에 섰다.
그리고 품 안에서 돈 봉투를 꺼내고 입에 물리고 큰절을 올렸다.
“무사고! 대박 기원!”
이진철의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떨리긴 한 것 같았다.
아니 실감이 안 난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 싶다.
이진철이 물러서자 윤진수 PD가 돼지머리에 꽂혀 있는 돈을 회수하고서 목을 가다듬었다.
“자, 그럼 이제 회식 장소로 이동합시다~”
윤진수 PD가 예약해둔 곳이 있었는지 정해둔 장소로 이동하자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나는 감독도 배우도 아니지만 뭔가 설렜다.
이제 시작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