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각자의 위치에서 (2)
나야 애들을 하도 보니까 면역되어서 그렇지 신희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감탄했다.
괜히 배우상, 배우상 하는 게 아니었다.
“나라 올 때까지 좀 더 자고 있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시러어어.”
내가 말만 하면 칭얼거리는 신희진이었다.
더 말해봤자 의미 없는 소모전만 될 것 같아 문을 닫고 차에서 빠져나왔다.
얘는 왜 안 나오지. 전화해야 하나.
1분만 기다리고 안 나오면 전화해야겠다 생각했을 때, 수면 바지에 편한 잠옷 차림의 이나라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몇 시인 줄 알아요!?”
이나라가 다가와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데리고 올라가기엔 좀 그렇잖아. 시간도 그렇고. 조심해야지. 그리고 너희 오전 스케줄도 없잖아.”
“아니… 저도 일찍 잠들고 싶었다고요.”
“너 일찍 안 자잖아?”
괜한 엄살은.
이나라는 진짜 잠이 없었다.
아마 평균을 내면 네 시간에서 좀 더 자려나 싶다.
그렇게 자고도 체력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엇. 누가 그래요?”
“다 정보가 있지.”
“누구예요? 진짜 걸리기만 해봐.”
살살 캐면 술술 불 애가 한 명 말고 더 있겠니, 나라야.
이나라는 투덜투덜하더니 차 안을 쓱 살피더니 내게 물어왔다.
“희진이는요?”
“차에서 드르렁 중. 말 걸면 으르렁거려서 나왔어.”
“진짜요? 저 희진이 취한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래? 말하는 걸 보니 평소에 숙소에서 술 좀 마시고 있었나 봐?”
“앗. 취소, 취소. 같이 술 마셔 본 적이 있어야 알죠~”
애들도 성인이니 술 마시는 거에 부정적인 건 아닌데 마실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용케도 그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서 멤버들끼리 마시고 있었나 보다.
“됐고. 얼른 데리고 가.”
“얼마나 마신 거예요?”
“몰라. 쟤 아니었으면 나도 지금 정신 놨지. 죽을 거 같아.”
“어쩐지. 술 냄새가 진동하더라니.”
내 말에 이나라가 코를 잡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그럴 만했다.
아마 술 먹은 양으로 따지면 궤짝 하나 정도는 먹었을 거다.
“다른 애들은 자?”
“린이는 자고 나머지 애들은 깨어 있어요.”
“왜? 벌써 지금 세 시인데.”
“그냥 어찌하다 보니까요.”
“얼른 데려가. 나도 집 좀 가게.”
“네, 네.”
이나라만 안 자는 줄 알았더니 나머지도 안 자고 있는 듯했다.
근래 들어 스케줄이 죄다 오후부터 시작이라 그런가 싶었다.
이나라가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신희진을 흔들었다.
“희진아~ 일어나. 희진아.”
“언니이이이이.”
“그래. 그래.”
“언니이이이이이!”
“그래, 그래 우리 희진이~”
신희진이 이나라를 붙잡고 징징거렸는데 이나라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마치 얘가 미쳤나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표정과 별개로 달래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아예 정신을 놨네요?”
“그치?”
“아구 무거워라.”
이나라가 신희진을 부축하면서 차 안에서 빠져나왔다.
이나라를 본 처음만 난리를 치던 신희진은 바깥 공기를 마시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얌전히 있었다.
“들어갈게요.”
“어, 그래.”
“내일 봬요!”
“들어가~”
이나라가 나를 보고 인사를 하고 신희진을 끌고 숙소로 향했다.
“야! 거기 만지지 마. 간지럽단 말야. 야. 야!”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나라의 말이 들려왔다.
신희진이 술버릇이 별로 좋지 않구나.
자제시켜야겠다.
그래도 술 먹고 개가 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술 먹고 개 되는 사람은 정말 상대하기 힘들다.
이나라와 신희진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 내 눈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한시름 놨다.
이제 집 들어가서 자야지.
애들은 오전이 비어 있지만 나는 정시에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냥 회사에서 잘까 하는 깊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났겠지.
어떻게 신희진이 뽑혔는지 이진철이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가 않아 제대로 듣지를 못한 게 아쉬웠다.
내일 시간 날 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저녁에 전화하면 받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이신형 감독과 술을 마시고 있을 이진철을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코랑 미소 빼고 나머지 애들 개인 스케줄 관리는 네가 봐라. 어차피 단체로 움직일 때는 보통 같이 움직이니까 상관없고 나머지 애들은 희진이 빼고는 크게 스케줄 없으니까.”
“다섯 명만요? 유코랑 미소는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남진수에게 불려갔다.
남진수는 이제 역할 배분을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인지 분담해서 나눠 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둘은 방송 스케줄 잡혀 있으니까 걔네는 내가 관리할게.”
“희진이도 팀장님이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보니까 걔는 네가 맡는 게 더 나을 거 같던데? 어차피 영화도 네가 손댄 거잖아. 연기 지도도 지금은 네가 하고 있고.”
“그렇긴 하죠.”
신희진의 스케줄은 거의 내가 도맡아서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냥 한 말이기도 했다.
남진수도 나랑 같은 생각인 듯했고.
“희진이는 어때?”
“잘하고 있어요.”
“그래?”
“별로였으면 어제 배역도 못 따냈겠죠.”
남진수가 손에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물어왔다.
내 대답을 들은 남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투자했는데 배역은 따내야지. 아무튼 잘 해봐. 영화 볼륨은 작지만 커리어에는 괜찮아 보이더라.”
“네, 알겠습니다.”
내가 신희진에게 집중하느라 애들에게 소홀했는데 애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남진수에게 물었다.
“미소랑 유코는 프로그램 정했나요?”
“어, 일단은 패널 위주의 프로그램 좀 돌아보고 다른 거 생각해 보려고.”
“둘이 같이 프로그램해요?”
“일단은?”
“조합이 신선하긴 하네요.”
“둘이 콩트도 짜던데.”
“그건 안 했으면 좋겠는데요….”
“냅둬. 알아서 하겠지.”
유코와 유미소는 방송 스케줄 위주로 스케줄을 짰다.
근데 콩트라….
안 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싸늘한 그림이.
문득 시계를 보니 애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저는 애들 데리러 가볼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내 말에 남진수가 시간을 확인하고 놀라워했다.
“알았어. 오늘 저녁 스케줄 가기 전에 애들 Y앱 켜고 소통하는 거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네.”
남진수도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혹시나 해 이진철에게 전화를 해봤다.
그러나 이진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녁에 다시 걸어야겠네.
신희진이 배역을 따내긴 따냈지만, 여전히 궁금한 문제기도 했다.
어떤 점이 송민희보다 신희진이 마음에 들었을까.
* * *
“오늘 다섯 시쯤에 단체 Y앱 한번 해야 하고 그전까지는 레슨 받으면서 보내고 있으면 돼.”
“네!”
애들을 태우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중에 오늘 스케줄을 이야기했다.
서지영이 눈감고 뻗어 있는 신희진을 보더니 대뜸 내게 물었다.
“어제 언니 술 많이 마셨어요?”
“쟤가 마신 건 얼마 안 돼.”
“아닌데. 많이 마셨다던데?”
“두 병도 안 마셨을걸?”
“두 병이 나요?”
서지영이 내 말을 듣고는 눈이 커졌다.
서지영과 내 관점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희진이가 한 병 좀 넘게 먹었을 거고 송민희 배우가 네 병인가 먹었나. 일곱 명이 다 합해서 궤짝 하나 정도 먹었을걸?”
“궤짝 하나면 몇 병인데요?”
“30병.”
“와우.”
서지영은 내 대답에 어처구니없어 했다.
나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는 어제 술자리를 떠올렸다.
나는 김명성이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지 몰랐다.
이신형 감독 커버를 혼자 다 했으니.
보니까 일곱 명 중에 나랑 이진철은 그냥 평범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나머지들이 술 귀신이었지.
아마 일곱 명 중에는 신희진 다음으로 덜 먹은 게 나일 거다.
“사람이 그렇게 술을 마실 수가 있어요?”
“먹다 보면 그렇게 먹어진다. 방송계나 영화계나 술 잘 먹는 사람 찾아보면 많을걸? 하도 먹어서.”
백미러로 서지영의 모습을 힐끔 보니 입을 떡하니 벌리고 놀라워했다.
그러고 보니 서지영은 주량이 얼마나 되려나.
“넌 얼마나 먹어? 지영아?”
자연스럽게 서지영에게 물어봤다.
“저요? 저는….”
서지영이 말하려고 하는데 잽싸게 박혜연이 끼어들었다.
“저희는 아직 나이가 안 되잖아요. 아직 안 마셔 봤죠.”
“아! 맞아요. 아직 못 먹어 봤어요.”
박혜연의 말에 움찔하면서 서지영이 말을 돌렸다.
저걸 믿는 게 바보지.
숙소에 성인이 셋이나 있는데 못 먹어 봤을 리가 없다.
화제가 껄끄러운 듯 내게 답을 한 뒤로 본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시끄러운 분위기와 별개로 신희진의 상태가 조금 걱정되었다.
그래서 백미러로 계속 신희진의 상태를 체크 했는데 아직도 해롱해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술병은 안 났나 모르겠네.
가다가도 중간중간 백미러로 애들을 확인했다.
애들은 평소의 스타즈였다.
술기운에 눈을 찌푸리며 감고 있는 신희진 빼고.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도 신희진은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눈 감은 상태 그대로였다.
* * *
회사에 도착한 뒤 각자 레슨 받을 장소로 이동했다.
신희진은 도착하자마자 내 눈을 피하더니 휙 하고 사라졌다.
필름이 끊긴 줄 알았는데 기억은 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잠깐 일 좀 보러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이진철의 전화였다.
“왜 벌써 일어났냐?”
- 눈이 떠지더라.
“몇 시까지 먹었냐? 해장은 했고?”
- 너네 가고 해 뜰 때까지만 먹었어. 지금은 라면 끓이는 중. 핸드폰 보니까 네가 전화했길래 전화했어.
이진철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많이 났다.
목소리는 그래도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이진철이 전화의 용건을 물어보길래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아, 다른 게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전화했어.”
- 뭐가?
“왜 송민희 배우 말고 희진이 골랐는지 말이야.”
- 말 안 해주던?
“들을 시간이 없었어. 그리고 걔보단 감독한테 듣는 게 낫지.”
- 그냥 풋풋함이 좋았어. 그리고 네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꽤 많이 자연스러워졌더라. 거기서 일단 혹했지. 일단 마스크로만 따져 봐도 베스트였으니까.
“그리고?”
이건 예상했던 거였다.
내가 궁금한 건 송민희를 왜 깠는지였다.
- 송민희는 너무 노련했어. 경험이 너무 많은 게 오히려 독이 됐어. 너무 노련하더라.
“그게 단점이 돼?”
- 연기가 서툴면 안 되지만 조금 풋풋한 걸 원했거든. 지금 신희진이 딱이야.
아무래도 노련함이 독이 된 케이스인가.
다른 말로하면 신희진이 아직 노련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진철은 그걸 연출로 극복 가능하다고 보고 오히려 포인트를 삼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 확실히 풋풋한 점은 있지.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보면 말이야. 내가 잘 보고 밀어 넣었네.”
- 그래. 잘 봤어. 아, 그리고… 한번 봐야지?
“누구?”
누굴 또 본다는 거지?
- 안재성이. 영화 들어가기 전에 한번 봐야지. 주연 배우끼리 얼굴 한번은 보고 크랭크인해야 할 거 아냐.
“그래, 알았어. 되는 날짜 적어서 알려줘.”
- 그래. 고생해라. 난 해장 좀 해야겠다.
“그래. 쉬고 다음에 보자.”
전화를 끊고 멈춰서 생각에 잠겼다.
안재성이라….
안재성은 향후 이진철의 페르소나가 될 확률이 높은 인물이었다.
보통 감독들은 첫 작품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확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생각이지만 첫 작품에 자신의 색깔이 가장 많이 묻어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안재성의 경우에는 예전에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이진철에게서 들은 건 많았다.
그리고 연예 기사란에서도 봤던 인물이기도 했다.
충무로의 차세대 블루칩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는데 과연 어떨지 궁금하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