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각자의 위치에서 (1)
“반갑습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이진철입니다.”
“…….”
이진철이 일어서서 본인 소개를 했다.
다들 말없이 이진철을 바라봤다.
아무 반응이 없자 이진철은 무안한지 헛기침을 했다.
“큼큼. 이렇게 인사하면 보통 박수라도 쳐주시는데 참 민망하네요.”
짝짝짝.
이진철의 말에 다들 웃으며 박수를 쳐줬다.
이진철의 저런 모습이 낯설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오늘 이 자리는 다른 게 아니라 연희 역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두 분을 선상에 두고 많은 고민을 한 결과, 한번 보자는 거였습니다. 어차피 오늘 확인하려고 했던 자리이니만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진철이 말하는 도중 나와 눈을 한번 마주쳤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듯싶었다.
우리랑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끼어든 거였으니까.
사실 큰 걱정은 안 됐다.
내 옆에 있는 신희진은 긴장이 되는지 자꾸 침을 꿀꺽꿀꺽 삼키는 게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나한테 보여준 만큼만 하면 될 텐데.
낯선 환경과 과한 긴장은 독이 되기 마련이니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진철은 송민희와 신희진에게 한 번씩 시선을 준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두 분의 연기를 본 뒤 이신형 감독님과 상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이진철을 바라보던 윤진수 PD가 이진철의 말을 듣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럼 두 배우님 말고 다른 분들은 나가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이라고 해봤자 나와 김명성 매니저뿐이다.
이신형 감독과 윤지수 PD 그리고 이진철은 남아서 두 배우의 연기를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김명성 매니저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렇게 볼 줄 몰랐지만요.”
“그러네요.”
“굳이 이런 작은 영화에 나오게 된 이유가 있나요? 한창 주가 올라서 바쁠 거 같은데.”
복도에 김명성 매니저와 나란히 벽에 기대어 내가 궁금한 걸 물어봤다.
솔직히 송민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희 마음에 들었나 봐요. 이예진 선배님 추천도 있었고요. 그리고 작은 영화라고 하기엔 꾸려진 스태프가 너무 퀄리티 있어서요. 흥행은 안 돼도 작품은 되겠다 싶었죠. 상 하나는 받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런가요?”
“또 시나리오 읽어보니 좋더라고요.”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가 보다.
근데 나야 정보가 확실하니 뛰어든 판이었다지만 송민희와 김명성도 감이 꽤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회사 차원에서는 별로 소득이 없는 영화일 텐데.
“회사에서도 똑같은 생각인가요?”
“최대한 민희 비위 맞춰주는 거죠. 계약이 올해까지거든요.”
“아하.”
궁금해서 김명성에게 물어봤더니 역시 계약이 걸려 있었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 노심초사하면서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나가는 배우의 재계약 시즌만큼은 엔터사가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시즌이었다.
“누가 맡게 되든 계 타는 거 아닌가요?”
“네, 저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안에 남아있는 둘이 걱정되지는 않은지 웃으며 말하는 김명성이었다.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
근데 우리 애는 잘하고 있겠지?
* *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이진철이 일어나서 인사를 건네자 다들 말없이 이진철만 바라봤다.
이진철도 딱히 인사를 바란 건 아닌지 송민희와 신희진을 한번 바라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거창한 건 아니고 간단히 캐릭터만 보겠습니다.”
이진철은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네, 저부터 할까요?”
이진철의 말에 송민희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래 주시겠어요?”
“잠깐 나도 한마디 해도 될까?”
“네, 말씀하세요. 감독님.”
이진철이 진행하려고 말을 열자 옆에 있던 이신형 감독이 끼어들었다.
“민희 씨.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네. 감독님.”
“이 자리에는 조감독으로 왔으니 조감독이라고 해줘. 감독이 있잖아. 껄껄.”
“네.”
다소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듯 이신형 감독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신형 감독의 노력 덕분인지 공기가 전체적으로 다소 풀어졌다.
“아무튼. 겨우 이런 작은 볼륨의 영화에 이런 자리까지 가지는 건 별로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않나? 회사에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 쌓아두고 있을 텐데.”
이신형 감독의 말에 풀어진 공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이신형 감독의 말에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던 송민희가 입을 열었다.
“저는 독립 영화를 좋아해서요. ‘마녀’ 이전에는 단편 중편 장편 할 것 없이 독립 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독립 영화는 분위기가 정말 편하더라고요. 상 받은 건 없었지만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라 생각하거든요.”
“흠.”
송민희의 답을 들은 이신형 감독은 웃지도 그렇다고 정색하지도 않은 모호한 표정으로 송민희를 바라봤다.
“그래서 ‘마녀’ 이후로 다른 걸 하기보다는 독립 영화 하나 해보고 다른 걸 하고 싶었어요. 괜히 초심을 잃을 것 같았어요. 지금도 불안 불안해요. 이 인기가 언제까지 갈까? 내일이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요.”
“…….”
송민희의 말을 들은 이신형 감독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팔짱을 풀고 송민희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상업적인 접근이랑은 좀 다르다?”
“네. 전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알겠습니다. 답변 고마워요.”
송민희의 답변이 마음에든 듯 이신형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이신형 감독의 말이 끝나자 이번엔 이진철이 손을 들었다.
“이신형 감독님이 송민희 배우에게 질문했으니 저도 신희진 배우…에게 질문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이번 영화에 캐스팅되면 이걸로 영화에 첫 데뷔라고 했죠?”
“네.”
“연기하는 이유가 뭔가요?”
“처음엔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는 게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감정에 동화되는 게 조금 힘들지만요. 지금은 아이돌 가수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무대에 있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이에요.”
“음.”
“특히 이번 기회에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지만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될 때 꼭 다시 만나서 한마디 해주고 싶은 분이 생겼거든요.”
신희진이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에서 풋풋함이 새어 나왔다.
“목표가 생긴다는 건 좋지.”
귀여운 딸 바라보듯 이신형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신희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돌은 연기 못한다.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단호한 말투로 신희진이 말했다.
“그건 사실 못한다기보다는 이미지가 아이돌로서 대중에게 각인된 게 큰 겁니다. 물론 저도 부족한 사람도 많다고 보는 편이지만요.”
“그걸 꼭 깨고 싶습니다.”
이진철의 말에 신희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실 예전에 본 영상으로는 솔직히 합격점은 아니었습니다. 현진이가 일주일 안에 발전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했을 때도 긴가민가했습니다. 근데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마법을 부린 적이 있어서 못 믿겠다고 말할 수가 없겠더군요. 원래라면 이 자리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
이진철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말했다.
김현진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노라고.
신희진도 이에 할 말은 없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이진철의 말에서 김현진이 생각나 떠올리느라 답변하는 게 늦어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설이 길었는데, 시작할까요?”
“네.”
이진철의 말에 신희진이 침을 꼴깍 삼켰다.
* * *
“끝난 것 같은데요?”
김명성의 말에 문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송민희와 신희진 곁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들어갈까요?”
“그래도 될 것 같은데요?”
김명성과 같이 안에 눈치를 살피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희 씨 연락 줘요.”
“네. 감독님.”
“진철이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마우시면 이번에 잘 도와주시면 됩니다.”
“돕긴 뭘 도와? 내 얼굴 먹칠하지 않나 감시하러 가는 거지.”
“네, 네. 감시 잘 부탁드립니다.”
왜 누구 하나 시무룩한 사람이 없고 웃고 있는지 상황 파악이 안 됐다.
내 곁으로 신희진이 웃음꽃이 만개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표정만 보면 얘가 붙은 거 같은데 송민희의 표정도 신희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빠! 붙었어요!”
“됐어?”
“네!”
신희진이 다가와서 결과를 알려줬다.
근데 왜 송민희도 웃고 있지?
내가 의아하게 있자 신희진이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선배님은 이신형 감독님 차기작에 캐스팅되셨어요.”
“뭐?”
“이신형 감독님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차기작 이야기하시던데요?”
“그럼 민희 씨는 이신형 감독님 차기작?”
“네.”
송민희가 더 좋은 쪽으로 캐스팅되었구나.
어쩐지 얼굴이 밝더라.
지금 들어가는 이진철 영화야 두 달 안팎이면 끝날 테니 올해 준비하고 내년에 크랭크인하시겠구나.
이신형 감독님은 쉴 틈 없이 찍으시네.
“이야기도 잘 풀렸는데 스케줄 되면 우리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이신형 감독이 기분이 좋은 듯 저녁 이야기를 꺼냈다.
말이 저녁 먹자는 소리지 저건 술 먹자는 것과 똑같았다.
“네, 좋아요. 전.”
“거기는 스케줄 어떻게 되나?”
“저희도 될 것 같습니다.”
송민희가 바로 된다고 이신형 감독에게 이야기하길래 빼기가 뭐 했다.
오늘 스케줄은 쭉 비워놔서 우리도 스케줄이 없었다.
송민희 측에서 거절했으면 스케줄이 있다고 핑계 댔을 텐데.
“감독님 전 프리 진행하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윤 PD가 빠지면 노땅 상대해줄 사람이 없는데?”
윤진수 PD가 빠지면 좀 곤란한데.
여기서 이신형 감독을 마크해줄 사람은 윤진수 PD밖에 없었다.
“진철이 있지 않습니까.”
“저놈은 심심해서 안 돼. 재미가 없어.”
“아니면 저기 싱싱한 남자 두 명 있잖아요. 배우들은 좀 봐주시고요.”
“쟤들 다 이진철이 동년배잖아? 똑같은 놈들 아냐? 그리고 배우들은 알아서 먹겠지. 관리 들어갈 때는 먹자고 해도 죽어라 안 먹는 것들인데.”
윤진수 PD가 노련하게 나와 김명성으로 이신형 감독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쓸데없는 곳에서 노련하시네요. 윤진수 PD님.
이신형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닙니다. 대리 부르면 되죠. 하하하.”
“맞습니다.”
조졌네.
저번 가을동화 회식 때 술 먹는 양을 보니까 감당이 안 되던데.
희진이가 술을 좀 마셨던가?
* * *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네~ 다음에도 언제나 8282 콜 대리 불러 주십쇼!”
차에서 나와 대리기사에게 대리비를 주고 차를 바라봤다.
술을 잘 마실 리가 없지.
20살은 데뷔하느라 바빴고 21살은 데뷔해서 바빴으니까.
적당히 마시라고 이야기했는데 본인이 더 마시고 싶다고 눈을 빛내면서 한사코 마시길래 뺏을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있는 이신형 감독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진철은 배우들이랑 이야기한답시고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나와 김명성이 이신형 감독을 마크했다.
김명성이 술발이 세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나도 지금 골로 가 있었을 거다.
“희진아. 다 왔어. 나라 오면 나라가 데리고 올라갈 거야.”
차 문을 열고 신희진에게 말했다.
근데 죽어 있는 거 보니 괜히 말했나 싶었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수도 없을 텐데.
“프하… 왔쏘요?”
술에 뻗어 골로 가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자는 건 아니었던 듯했다.
게다가 말하면서 혀 꼬인 거 보니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햐… 좋다. 좋아요.”
“뭐가?”
“다아… 다요.”
눈을 감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하는 신희진의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저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건 반칙인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