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각자의 생각 (4)
김현진이 나가자 이예진이 신희진을 응시했다.
신희진은 김현진이 나가고 이예진과 단둘이 있자 불안한 듯 눈동자가 불안정했다.
“이름?”
“신희진입니다. 선배님!”
이예진이 신희진의 코앞에 와서 신희진에게 물었다.
신희진은 경직된 얼굴로 이예진의 말에 대답했다.
“연기는 얼마나 했어?”
“작년에 서바이벌 프로그램하기 전까진 꾸준히 했는데 데뷔 준비 기간이랑 데뷔했을 때는 못 했어요. 요즘 다시 배우고 있는 중이구요.”
“영화 찍어 본 적은 있니?”
“제대로 찍어 본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때 뮤직비디오 조금….”
“그러니?”
이예진이 신희진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한쪽 눈썹이 질끈 위로 올라갔다.
신희진은 그런 이예진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내가 질질 끄는 걸 싫어해서, 너 꼭 이거 해야겠니?”
“네?”
“이거. 꼭. 해야겠냐고.”
“…….”
이예진이 바닥에 있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 시나리오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예진의 손끝에 걸린 곳을 보고는 신희진도 표정을 다듬고 이예진을 바라봤다.
“네. 꼭 하고 싶어요.”
“그래?”
이예진이 신희진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근데 난 안 했으면 좋겠네. 내 식구와 내 작품, 아니 아끼는 작품이 맞나? 아무튼, 작품 망가지는 걸 그냥 바라보고 있기에는 내 성격이 좋지 못해서.”
평소 말하듯 나긋나긋한 어투로 이예진이 말했다.
이예진의 말을 들은 신희진이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고 이예진을 바라봤다.
“선배님 입장에서는 제가 많이 부족해 보이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제게 이 작품을 추천하고, 제가 이 배역을 맡도록 열심히 도와준 김현진 매니저님 때문이라도 꼭 하고 싶어요.”
“뭐?”
신희진이 이예진의 눈을 응시하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예진이 그런 신희진을 한번 보더니 신희진 쪽으로 다가갔다.
“게다가 캐스팅 문제로 이야기하는 건 배우들이 말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신희진이 말하다가 말을 끊었다.
이예진이 갑자기 손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요즘 애들은 많이 당돌하네.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아이돌 애들은 위아래도 없니? 요즘 많이 좋아졌구나? 그리고… 누가 네 선배야?”
이예진은 말투는 칼에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말이 끝난 게 아닌지 호흡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난 너같이 아이돌로 인기 얻은 뒤 연기 시작하려는 애들이 제일 싫어. 연기에 깊이도 없고. 편하게 들어오기도 하고. 게다가 괜히 겉멋만 잔뜩 들어가고 말이야. 그래서 말해주려고 왔어. 괜히 비교돼서 욕먹고 모든 사람 힘들게 하지 말라고. 시간 낭비는 피차 서로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니?”
멍해 있던 신희진이 이예진의 마지막 말에 눈을 똑바로 뜨고 이예진의 눈을 바라봤다.
“저도 연기를 가볍게 보지 않아요. 편하게 하지도 않았구요. 너무 편견이 심하신 것 같은데요?”
“핫. 너 웃기는 재주가 있는 애구나? 그리고 편견? 아니, 사실이야.”
“어떻게 하면 그 편견 깨드릴 수 있을까요?”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깨.”
활활 타오르는 신희진과 냉기가 풀풀 흐르는 이예진의 모습이 서로 상반되었다.
잠시 동안 둘의 눈빛이 오간 뒤, 이예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길래 궁금했거든. 어떤 애인가 하고. 근데 내가 보기엔 다른 애들이랑 다른 게 없는 거 같네. 다른 게 있다면…. 운이 좋은 정도일까?”
이예진의 말에 신희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저 콧대를 눌러줄 수 있을까.
“아직 제대로 못 보셨잖아요?”
“안 봐도 비디오지.”
이예진이 신희진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표정이 쓸쓸해졌다.
“나도 데뷔 때부터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은 참 불공평하네.”
“……?”
이예진이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신희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고 회로가 소용돌이처럼 복잡하게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람…?
“반년 남았지? 그다음에는 내가 데려갈 거야.”
“…….”
이예진의 말에 신희진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예진이 말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왜 굳이…? 뭐지?’
신희진이 생각에 잠길 때 이예진은 땅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말을 했네. 이건 내 실수. 술기운에 별말을 다 했네.”
이예진이 손을 내저으며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색을 하고 신희진을 바라봤다.
“좋아. 그러면 현장에서 직접 보자.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근데 이것도 배역을 따내야겠지? 아직 확정도 아니라면서? 근데 말이야… 내가 너 연기하는 영상을 봤거든? 그걸로는 힘들 거야. 경쟁자가 만만치 않거든.”
“…….”
이예진이 말하는 연기에 대해서는 신희진은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예진이 자신보다 연기를 잘하기도 하거니와 연기라는 분야에서 10년 이상 버틴 베테랑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경쟁자라는 말이었다.
누굴까?
“기회가 된다면 현장에서 보자. 난 될 수 있으면 현장에서는 안 봤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이예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자기 할 말만 하고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런 이예진을 신희진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예진이 문밖으로 나가자 신희진이 털썩 주저앉았다.
“화나네….”
갑자기 닥친 상황에 황당하기도 했고 너무 억울했다.
이내 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뭔데… 친한 척인데….”
“누가 준대…?”
“두고 봐…. 꼭….”
신희진이 킁킁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 * *
이예진이 걸어 나오는 게 보여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렇지만 이예진이 나를 보고 하는 말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바로 들어가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은데?”
“네?”
이예진이 웃으며 말하는데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한 10분? 15분 정도 있다가 들어가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뇨. 별일은 없었는데요?”
“근데 왜…?”
이예진이 시간을 두고 들어가라는 이유가 궁금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둘이 있던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생글생글 웃는 이예진을 보니 특별히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굳이 알아야겠어요? 여배우들끼리 일이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한번 건드려 봤는데 재밌네요. 좀 더 거칠게 할 걸 그랬나? 뭘 보고 그러는지 알 것 같아.”
“네?”
이예진이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나랑 수수께끼를 하자는 건지 스무고개를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예진이 말하는 게 알쏭달쏭했다.
건드려? 뭘?
“그리고 이걸로 저도 빚은 없는 거예요?”
“네?”
계속해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이예진이 거북했다.
빚? 내가 빚도 달아놨나?
내 표정이 이상한지 내 얼굴을 뚜렷이 응시하던 이예진이 쿡쿡대며 웃었다.
“부럽네. 저 애가. 그래서 조금 추해졌나? 핫.”
“…….”
술 냄새가 나더니 술에 완전히 취한 건가?
술 취한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나는 이예진이 하는 말의 포인트를 잡기가 힘들어 대답을 해주기가 어려웠다.
“갈게요. 나중에 봐요.”
이예진이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든 뒤 휙 하고 지나쳐갔다.
그런데 용건이 남았는지 뒤를 돌아보고 내 눈을 응시했다.
“아, 근데….”
“네?”
‘네?’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또 뭘까?
“현장에서 연희와 연화로 만나게 된다면, 제 기준치에 충족이 안 된다면… 얄짤 없어요?”
이예진은 말을 한 뒤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사라졌다.
이예진이 사라지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봤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열심히 짱구를 굴려 본 결과 이예진이 신희진에게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근데 그걸 배우끼리의 이야기라고 숨길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기준치라… 기준치는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습득력이면 괜찮을 것 같다.
근데 연화와 맞부딪히는 장면은 감정 씬이 큰 장면이라 기준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기준치가 높다면 꽤 험난할 것 같다.
배역이 확정 난 것도 아닌데 너무 김칫국을 마신 것 같다.
이예진의 말대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복도에서 서성이면서 애들 일정을 다시 점검했다. 요즘 애들은 전부 각개전투를 하고 있었다.
신희진은 연기, 린도 중국 분위기에 맞춰서 연기 레슨.
서지영이랑 박혜연은 엔지니어와 함께 작곡에 빠져 있었고 이나라도 여러 안무가랑 함께 레벨업 중이었다.
유미소와 유코도 섭외 들어온 예능 중 괜찮은 걸 꼽아 지금은 준비 중이었다.
착실히 스케줄을 해나가면서도 열심히 했다.
음원도 아직 탑 10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어서 이 추세면 올해에 큰상 하나는 받지 않을까 하고 회사에서도 조심스럽게 예측 중이었다.
아무 탈 없이 이대로만 쭉쭉 흘러갔으면 좋겠다.
예전 이 시기에는 터질 대로 다 터져서 한 해가 지나갈 때까지 암흑기였다.
이렇게 보니 참 대비되는 것 같다.
이예진이 말한 10~15분은 흐른 것 같아 신희진이 있는 연습실로 들어갔다.
“왜 지금 와요?”
“어? 아 잠깐 사무실에 일 좀 보다가 내려왔어.”
내 인기척을 느낀 신희진이 대본을 보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예진과 이야기하고 왔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핑계를 둘러댔다.
“그래요?”
“어. 선배님이 뭐래?”
“별일 아니었어요.”
“그래?”
“네.”
신희진이라면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신희진도 별일 아니라며 화제를 피했다.
궁금하네.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걸까.
“오빠, 근데요… 저 부탁이 있어요.”
“어? 뭔데?”
신희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며 다가왔다.
“저 그때 이야기한 거요. 자원봉사. 그거 가면 안 돼요?”
“그건 이야기했잖아. 감정에 매몰될 수도 있어서 안 된다고.”
“아뇨. 그럴 거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음….”
‘시한부 인생’인 연희를 알기 위해서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추천하지 않았다.
연기자는 감정에 동화되기 가장 쉬운 직업이다.
자칫 잘못하면 감정에 동화되어 매몰되기 쉽다.
신희진은 더욱이 연기 스타일이 배역의 감정선을 잘 따는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다른 감정으로 메꿔보자고 이야기했었다.
다른 문제로는 시한부를 살아가는 분들 또한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도 있었다.
생각하면서 신희진을 바라봤다.
신희진의 표정을 보니 확고한 생각인 것 같았다.
“알았어. 회사에 말해볼게.”
“네.”
내가 허락하자 한시름 놓았다는 듯 신희진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풀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이야기한 것도 저 표정에서 고집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리딩은 어떻게 할래? 더 할까?”
“아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그래, 그러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는 신희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데요….”
“또 있어?”
신희진의 용건은 끝이 난 게 아닌 것 같았다.
정리하고 나가면 될 줄 알았는데.
“아줌… 아니, 이예진 선배님이랑 같이 하시기로 했어요?”
“뭘?”
“저희 스타즈 끝나고요. 저희는 지금 단기 계약이잖아요. 연장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내가 배우 매니저 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종종 해. 선배님이랑 같이 일할지는 모르겠어. 예전에 같이 하자고 했는데 지금은 너희 맡고 있으니까 안 되겠다고 했거든.”
안에서 내 향후 행방에 관한 이야기도 같이한 건가?
어쩌다 나온 주제인지 모르겠다.
“그렇구나…. 그럼 우리 끝나면 바로 가겠네요?”
“글쎄, 그건 또 모르겠다.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신희진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그럼 우리 회사 올 생각 없… 아, 아니에요.”
“하하하. 생각해볼게. 근데 내가 옮겨진다고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모르겠네.”
막상 애들과 헤어질 때를 생각하니 많이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기도 했고 그때가 돼봐야 알 것 같다.
아니, 많이 남은 건 아닌가.
“됐어요. 가요.”
내가 가만히 있자 빨리 가고 싶은지 신희진이 내 손을 잡고 질질 끌었다.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신희진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서자 예상외에 인물이 자리해 있었다.
“오늘 자리가… 오디션 자리였던 건가요?”
“오디션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확인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원래 그런 자리였고요.”
윤진수 PD가 내 말에 답해줬다.
제작 PD도 가을동화를 맡았던 윤진수 PD가 다시 맡았다.
윤진수 PD도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저예산 독립 장편 영화의 경우 잘 터지기만 하면 고효율로 남겨 먹을 수 있는 장사기도 했다.
그럴 확률이 매우 낮아 힘든 게 문제였지만.
“송민희 배우님이 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어떻게 하다가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래도 두 분 다 보고 감독이 결정한다고 했으니 크게 달라질 건 없죠.”
송민희와 접점이 있는 건 이예진뿐이었다.
이예진이 말해준 것 같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송민희 배우가 인사를 건네오자 신희진도 응대했다.
둘을 보고 상황이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고작 독립 영화에 얽혀 있는 인물들을 까보니 상업영화 저리 가라 하는 수준이라니.
재밌네. 재밌어.
그와 별개로 오늘 온 송민희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희 배역은 신희진이 가져갈 거다.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전했거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