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각자의 생각 (3)
“4 매니지먼트실을 맡고 있는 이진성입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진성 실장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정인수 대표 앞에 가져다 놓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넘버 6로 인한 매출은 저번 분기에 보고 드렸으니 뺐습니다.”
이진성 실장의 말에 정인수 대표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이진성 실장에게 턱짓했다.
“스타즈에 대한 수익은 아직 적자와 흑자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다음 앨범과 콘서트를 분기로 해서 수익이 극대화할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타즈가 지금 두 번째 미니앨범 타이틀곡인 Love Up&Down이 상승지표가 매우 좋습니다.”
“그건 좀 배 아프긴 하군.”
이진성 실장의 말을 듣다가 정인수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진성 실장이 말을 안 하자 정인수 대표가 이진성 실장에게 계속하라며 손짓했다.
“각 소속사에 약속한 게 있어서 제대로 수익을 뽑아내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합니다.”
“어쩔 수 없지. 애들은 좀 어때? 제법 괜찮아 보이던데.”
이진성 실장의 말에 정인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서류를 보면서 재차 질문했다.
“눈여겨보는 애들이 몇 있습니다.”
“그래?”
“어찌 됐든 시장에서 살아남은 애들이니 일곱 명 모두 훌륭한 재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스타성이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누구? 유미소?”
정인수 대표가 흥미가 생긴 듯 이진성 실장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현재 한국 시장만 바라봤을 땐 서지영, 신희진, 유미소 셋입니다. 린의 경우에는 중국 시장에서 좋아할 법한 상이라 중국으로 넘어가면 크게 수익이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린을 데리고 있는 소속사도 그렇게 준비하는 것 같고요.”
“나머지는?”
“이나라의 경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만… 여러 조건이 합쳐지면 괜찮은 친구라고 보고 있습니다. 박혜연, 유코의 경우에는 아직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잠깐의 고민이 필요한 듯 정인수 대표가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바라봤다.
“일곱 명 중에 얘는 무조건 뜨겠다 싶은 애는?”
“보고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는 서지영과 신희진입니다. 서지영은 성격이 방송특화 체질이고 가수로서의 포텐도 괜찮은 편에 속합니다.”
“지영이가 확실히 그런 면이 있지. 그런 캐릭터도 드물어.”
정인수 대표도 이진성 실장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끼어들어 말했다.
“계속해봐.”
“신희진은 이번 활동을 하면서 연기에 관한 결과를 봐야겠지만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꽤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20대 여배우 풀은 거의 전멸이기에 틀만 잘 잡히면 차세대 톱여배우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애들을 빼 올 가능성은?”
“그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쉽게 빼 오긴 힘들 것 같습니다. 넘버 6때도 무산됐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인수 대표는 서류를 처음부터 중간까지 쓰윽 훑더니 서류를 덮어놓고 이진성 실장을 응시했다.
“일단 계속 알아봐. 딱 어중간한 상품이었으면 먹기 좋았을 텐데 말이야.”
“사실 스타즈가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몰랐죠.”
정인수 대표의 말에 이진성 실장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알았어. 그만 가봐.”
정인수 대표의 축객령에 이진성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 그래. 예진이 왔어?”
문이 열리고 이예진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 있던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도 일어나서 이예진을 맞이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선배님?”
“그럼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하루인데요.”
“하하하. 바쁘시겠네요.”
“생각보다 그렇게 바쁘진 않아요.”
이진철이 먼저 말문을 열고 이예진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오시기 전에 먼저 시켰습니다. 회는 괜찮으시죠?”
“네. 여기 회가 참 괜찮은데.”
테이블에 깔린 음식들을 보고 이진철이 말했다.
이전철의 말에 이예진이 회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근데 혼자 오셨어요?”
“회사에는 오늘 개인 일 본다고 이야기하고 혼자 나왔어요.”
“그래? 난 매니저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비즈니스기도 하거든.”
이진철이 조심스럽게 묻자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이예진이었다.
이진철 옆에서 회를 먹던 이신형 감독이 이예진의 말을 듣고는 무심하게 본론을 툭 던졌다.
“뭐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어요. 뭔데요?”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예진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이진철이 나섰다.
“제가 이번에 독립 장편 영화를 하나 찍을 계획입니다. 거기에 출연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상업이 아니고 독립?”
“네.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영화는 아니고 제 데뷔작이거든요. 여기 시나리오요.”
이진철의 말에 호기심을 나타내는 이예진이었다.
그런 이예진에게 이진철이 가져온 시나리오를 건넸다.
“괜찮네요. 근데 이거 굳이 독립으로 돌릴 필요 있어요?”
“상업적으로 접근하면 아무래도 간섭이 심하니까요. 첫 장편 데뷔작은 오롯이 제 것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기회가 오기도 했고요.”
“흐음. 그러면 여기서 나한테 원하는 건 연화겠죠? 나오는 장면이 얼마 없으면서도 내 이미지와 맞는 캐릭터면 이 캐릭터뿐인데? 연희는 아닐 거고.”
“네.”
“좋아요.”
이예진은 이것저것 이진철에게 물어보다가 고민의 기색도 없이 명쾌하게 답을 내놨다.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겠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확답을 하는 이예진에게 이신형 감독도 놀라 되물었다.
“감독님. 저를 뭐로 보시고요?”
“잘나가는 배우 아니야?”
“작품 선정 권한은 다 저한테 있어요. 그리고 쉬면서 감 유지용으로 찍기에도 괜찮을 거 같고, 마녀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어요?”
“빚이요?”
이신형 감독과 이예진이 하하 호호 웃으며 이야기하는 도중에 의아한 단어를 캐치한 이진철이 되물었다.
“마녀를 나에게 선물해준 건 이진철 조감독이랑 김현진 매니저였죠. 저는 은원관계는 확실히 해요.”
이진철의 궁금증을 이예진이 간단하게 풀어줬다.
이예진의 목소리에서는 고마움이 가득했다.
가만히 둘을 보던 이신형 감독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한테 빚진 건 없어?”
“어머, 감독님. 저한테 갚으셔야죠. 가을동화도 거의 노개런티 급으로 찍었는데?”
“크흠. 노개런티라니 흥행에 따른 개런티지.”
이신형 감독의 짓궂게 말했지만 노련하게 받아치는 이예진이었다.
말하고 본전도 못 찾은 이신형 감독이 혼자 중얼거리며 툴툴댔다.
“감독님은 징검다리 삼아서 나오신 거죠?”
이신형 감독의 모습에 살포시 웃은 이예진은 그가 무안하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아니, 나도 여기 영화 들어가.”
“네? 이거 이진철 조감독 데뷔작이라면서요. 아니지. 이제는 감독님인가?”
“이제는 내가 이거 조연출이야.”
“네?”
이예진이 자기가 들은 게 제대로 들은 건지 확인하는 눈빛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남자에게 보냈다.
두 남자는 이예진의 눈초리를 묵묵히 받아냈다.
“말이 돼요?”
“말이 왜 안 돼? 되지.”
“기가 막혀. 정말.”
어처구니없어 하는 이예진과 다르게 이신형 감독은 태평했다.
“좋아요. 오히려 더 하고 싶어지네요. 아주 재밌네요. 좋은 작품 기대해도 되죠?”
이신형 감독의 태평함이 오히려 이예진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기성 감독이 데뷔 감독의 조연출이라.
상황이 재밌지 않은가.
“그럼요.”
“연희 역이랑 현승 역은 누가 맡죠?”
“현승 역은 예전에 인연을 맺었던 안재성이라는 배우가 맡을 겁니다. 신인이긴 하지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있습니다. 저랑 호흡도 거의 1년 가까이 맞춰왔고요.”
이진철은 이신형 감독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는 이예진을 상대했다.
“연희 역은… 고민 중입니다.”
“생각해둔 사람은 있어요? 없으면 추천해주고 싶은데.”
고민하는 이진철에게 이예진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게, 이미지나 마스크로는 현진이가 담당하고 있는 신희진이라는 친구가 괜찮긴 한데 연기 면에서는 조금 애매해서요. 현진이 말로는 시간을 주면 디테일하게 잡아 오겠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김현진… 매니저요? 거기 담당이면 아이돌인데?”
이진철의 고민을 들은 이예진이 의아해했다.
이신형 감독은 그런 둘의 대화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네, 맞아요. 근데 아이돌보다는 배우 쪽이 더 맞는 것 같아요. 그 친구는.”
“나도 봤는데 아이돌 하기엔 마스크가 아까워. 배우가 낫지.”
“어찌 됐든 아이돌로 데뷔했잖아요?”
이진철과 이신형 감독의 변호 아닌 변호에 이예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렇긴 하지.”
“근데 추천해 주신다는 배우는 누굽니까?”
이신형 감독이 이예진 물음에 답했다.
그리고 이예진의 물음에 화제를 돌리는 이진철이었다.
“저랑 같이 드라마 찍었던 송민희라는 친구요.”
“아, 누군지 알 것 같네요.”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이미지로는 차라리 신희진이 낫겠는데?”
이예진이 말하자 이진철과 이신형 감독도 대번에 긍정해줬다.
하지만 이신형 감독의 저울에는 신희진이 더 우위에 있는 듯했다.
“감독님. 영화가 무슨 이미지로만 하나요. 연기가 돼야지.”
회를 한 점 먹고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면서 타박을 주는 이예진이었다.
“일단은 송민희 배우도 염두에 둘게요. 근데 송민희 배우도 바쁘지 않아요? 그리고 몸값도 상당히 올랐을 텐데.”
분위기가 알싸해지는 것을 감지한 이진철이 한마디 했다.
“민희도 쉬고 있어요. 민희가 오케이 한다면 몸값이 문제예요?”
“일단 먹자고. 이야기하느라 시간 다 보내겠어.”
“네.”
이예진이 이진철을 보며 대답해주자 이신형 감독이 식사하자며 다시 화제를 바꿨다.
이예진도 대답하고는 젓가락을 들고 눈앞에 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서로 식사를 시작하자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눈앞에 있는 회와 술을 먹으면서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이예진이 일어났다.
“감독님.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래.”
* * *
“어쩐 일이세요?”
- 무슨 일 있어야만 전화해야 하나요?
신희진과 같이 이진철 시나리오 리딩을 하고 있었는데 이예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로 번호만 있지 이렇게 직접 전화가 걸려온 건 처음이다.
“아뇨. 그건 아닌데… 드라마 끝나고 한창 바쁘실 때 아니에요?”
- 쉬고 있는데 뭐가 바빠요?
“전 바쁘신 줄 알았죠.”
- 아무튼,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이진철 조감독 영화에 신희진?이라는 친구 넣으려고 하고 있다면서요.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 저한테도 캐스팅 요청이 왔으니까요.
아무래도 이진철이 연화 역 선상에 올려둔 게 이예진이었던 듯싶다.
전화 너머로 조금 시끄러운 거 보니 지금 미팅 중인 것 같았고.
“그럼 연화역을 선배님이 하시게 되는 건가요?”
- 그럴 것 같은데… 신희진이라는 친구 어디 있어요? 한번 보고 싶은데.
“지금 저랑 같이 대본 보고 있어요. 다음 주에 이진철이랑 미팅이 있거든요.”
- 회사?
“네.”
- 알았어요.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뭘까.
말투를 보니 술도 좀 걸친 것 같은데.
지금 여기 오려고 하는 건가?
“누구예요?”
“이예진 선배님.”
“왜요? 무슨 일인데요?”
“글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번 영화가 잘 풀리려나 보다.”
신희진도 궁금하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와 물어왔다.
이예진이 합류하게 되면 독립 스케일이 아닌데.
근데 연화 역이면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으니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궁금한 건 이진철이 도대체 어떻게 캐스팅한 걸까였다.
이예진은 지금 마녀 흥행으로 몸값이 장난 아닐 텐데.
“아까 연화 이야기하시던데, 그럼 연화 역할을 이예진 선배님이 맡게 되시는 거예요?”
신희진은 이예진의 합류 여부가 궁금한 것 같았다.
나라도 궁금하긴 하겠네.
영화 출연이 확정 나면 나중에 호흡 맞춰야 하는 배역이기도 하니까.
“확정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런 거 같은데? 뉘앙스가 그러네.”
“와.”
이예진이 합류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자 신희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신희진에게 나는 현실을 알려줬다.
“너도 아직 연희 역에 확정은 아니야.”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면서요.”
“좋아지긴 했지.”
“레슨 받는 것보다 지금 봐주는 시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신희진이 내 모교에 감을 익히러 갔을 때부터 부쩍 나에게 연기에 관한 걸 많이 물어봤다.
지금 와서는 내가 리딩을 봐주고 있기도 했고.
“내가 무조건 옳지도 않고 연기는 연기자한테 배우는 게 더 좋아. 노하우도 그렇고. 가장 좋은 건 작품을 많이 해보면서 경험을 늘리는 거야.”
어쩌다 매니저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나쁘지는 않다.
“자, 다시 해보자.”
“네.”
신희진의 연기를 봐주면서 대본 리딩을 다시 시작했다.
대본 리딩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이예진의 모습이 보였다.
이내 이예진이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내가 거기 있는 애랑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자리 좀 비켜줄래요?”
이예진의 빨갛게 물든 얼굴과 표정이 술에 취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리송했다.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긴장감에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