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각자의 생각 (2)
“의외네. 네가 이런 거에 관심 있어 할 줄은 몰랐는데. 제작자도 겸하는 거야? 아니 그냥 투자인가?”
“뭐, 어쩌다 보니….”
이진철을 데리고 따로 편한 장소로 나왔다. 아무래도 둘이 이야기하는 게 훨씬 편했다.
“영상에 나온 친구는 네가 맡은 친구지?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맞아.”
“이미지, 마스크 다 훌륭하네. 근데 연기는 평범해.”
덤덤하게 말하는 이진철의 모습이 낯설었다.
“왜? 괜찮지 않아?”
“자매 감정 씬을 빼면 괜찮지. 그 외에는 특출 난 연기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그래?”
내 말을 듣고 사색에 잠긴 이진철에게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어. 나이대도 맞고, 이미지도 맞고. 자매 감정 씬은… 난 괜찮을 거라고 봐. 둘의 호흡도 중요하겠지만 희진이가 최근 겪은 일이 있어서 감정은 충분히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
이진철의 시나리오에 나오는 연희의 감정선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면 배우는 급격하게 발전한다.
내가 노리는 건 발전과 성공이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가 화제는 확실히 보장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 부연 설명에 이진철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침묵을 깨고 이진철이 내 눈을 바라봤다.
“좋아. 다음 미팅까지 발전 가능성이 보이면 오케이 할게. 나도 조금은 알쏭달쏭한데 배역에는 딱 맞는 이미지라 고민이었어.”
“다음 미팅이라….”
“순전히 너의 안목을 믿어서 그러는 거야. 근데 그때도 내 마음이 안 움직이면 다른 사람을 물색할 거다.”
이진철과 나는 서로 잘 알아서일까.
지금 이진철은 나를 믿고 선택을 유보한 것 같았다.
이진철은 아직 신희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았다.
좋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내가 채워야 하는 게 숙제다.
그래도 이렇게 물러나기엔 아쉬웠다.
조금 떠볼까.
“놓치면 투자 건이 물 건너간대도?”
“내가 왜 이렇게 배짱부리는지 대충 알지 않아?”
“그래. 알지. 로케이션이나 다른 건 다 끝났어?”
“조율은 하고 있는데 될 것 같아. 예산만 집행하면 될 정도까진 왔어.”
떠보려고 했지만, 이진철은 역시나 여유로웠다.
투자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에서 고집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감독하는 사람들 치고 고집이 안 센 사람이 없다.
유들유들해 보여도 어느 부분에선 확고한 선이 있었다.
“남자 주인공은 이미 섭외되어 있지?”
“어. 내가 예전에 이야기 안 했나? 안재성이라고 예전에 이신형 감독님 작업하면서 알게 됐어. 이야기도 꽤 많이 나눈 사람이기도 하고.”
이건 바뀌지 않고 똑같이 흘렀다.
하긴 둘이 서로 이야기 나누며 호흡 맞춘 기간이 꽤 긴 거로 알고 있다. 바뀔 리가 없지.
그리고 안재성 배우는 이진철의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다른 배역들은?”
“연희 역을 제외하고는 얼추? 연화 역이랑 성재 역을 지금 고민 중이긴 해. 물망에 둔 사람은 있지만….”
“그래? 우리 회사에서 넣어준 프로필에서 맞는 사람은 없고?”
“그건 생각해둔 사람이 거절하면 다시 생각해볼게. 지금은 그 사람이 딱이거든.”
이진철의 영화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은 딱 네 명이다.
연희와 연희의 언니 연화.
현승과 현승의 친구 민수.
현승은 안재성이 맡을 거고 민수 역은 누가 하려나?
연화 역도 궁금하긴 하네.
“누군데?”
“그건 비밀. 나중을 위한 서프라이즈로 남겨두려고.”
예전에는 죄다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었던 기억인데. 누굴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데.
“…….”
서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사실상 일 이야기는 끝났기 때문이었다.
미묘한 기류의 분위기는 내가 먼저 말을 함으로써 깨버렸다.
“데뷔가 코앞이네.”
“그러게. 이렇게 데뷔하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야.”
상업영화 데뷔는 아니지만 준 상업영화 수준의 스케일이기 때문에 데뷔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관 스크린에도 걸릴 테니까.
데뷔를 입에 담은 우리 둘의 모습에서 예전에 혈기왕성했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어허. 벌써 김칫국이네. 그러다 엎어진 영화가 한둘이야?”
“내 영화는 아닐걸?”
내가 웃으며 말하자 이진철도 웃으며 화답해줬다.
“절대란 건 없다. 친구야. 고사는 할 거냐?”
“난 하는 게 마음 편하더라. 고사는 해야지.”
“그래. 감독이 편한 대로 해야지.”
서로 낄낄대며 웃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다.
우리 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프로덕션 측과 우리 회사 투자팀장이 기다리고 있으니 슬슬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도 끝난 거 같은데 들어가실까요, 감독님?”
“그러시죠.”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은 뒤에 회의실로 들어갔다.
* * *
“이렇게 하는 게 효과가 있을까요?”
“경험하는 것만큼 가장 좋은 건 없어.”
“대학교랑 고등학교랑 크게 다른 것도 없잖아요.”
이진철과 미팅 후, 회사에 요청해서 스케줄이 빌 때 신희진을 대학교에 데려가기로 했다.
단기간에 디테일을 살린다면 이런 방법도 나쁘지 않다.
신희진이 연기에 대한 감은 있는 편이었으니 신희진이 공감하고 느끼기만 하면 연기에도 변화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분위기가 달라. 분위기가.”
“학교가 뭐 다를 게 있나?”
“중얼중얼하지 말고 일단 일주일만 다녀봐. 이야기는 해놨으니까. 오늘은 혹시 모르니까 같이 있어 주는 거고 다음부터는 바래다만 줄게. 그리고 여기가 촬영지가 될 테니까 배역 따면 장소가 익숙해서 더 수월할 거야.”
“원래 이렇게까지 해요?”
처음에는 볼멘 목소리로 한껏 토해내던 신희진이었지만 내 말에 점차 설득되어 갔다.
“연기자마다 다르긴 해. 내가 아는 사람은 그 배역을 아예 체험하거나 동화하는 사람이 있거든?”
“어떻게요?”
내 말에 호기심이 생긴 듯했다.
“예를 들어 자기 배역이 거지면 거지가 되어본다던가, 정말 하지 못하는 직업 분류의 배역이면 다큐멘터리 같은 자료 엄청나게 찾아보고 그 배역에 관해 직업 종사자를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다던가… 방식은 다양해.”
“그냥 되는 게 아니었구나.”
“대본 받고 수월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가지각색이야. 근데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건 경험만큼 좋은 게 없다고 이야기하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신희진의 모습이 신기했다.
내 말을 듣고는 본인 스스로 감정을 잡아본 듯했다.
그러나 쉽게 감정이 안 잡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그냥 따라 하는 거랑 알고 따라 하는 거랑은 깊이가 달라. 어느 정도 숙달되면 대본만 보고 감정과 디테일을 뽑아낼 수 있겠다지만, 넌 아니잖아?”
“으으으.”
내 말이 틀린 게 없었는지 신희진이 반박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올 때가 됐는데….”
“누구 기다리는 거였어요?”
“엉.”
아무리 학교에 협조 요청을 했다지만 도우미 없이는 버거웠다.
그래서 도와줄 도우미를 한 명 섭외했다.
다행히도 조금 기다리자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어, 왔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희진 씨 팬이에요!”
임지예는 오자마자 신희진을 보고는 갓 잡은 생선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임지예의 반응에 놀란 신희진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팬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네?”
“일단 사인 좀 해주세요! 저번에 주막에서는 사인 받을 틈이 없더라구요!”
“인사해. 학교 오면 너 데리고 다녀줄 친구야. 너보다 두 살 많고. 이름은 임지예.”
“아, 잘 부탁드립니다! 언니!”
서로 인사를 시켜주고 나서 임지예를 진정시킨 후 일정을 물어봤다.
“오늘 수업 스케줄 어떻게 돼?”
“오늘 한영훈 교수님이랑 이유경 교수님이요.”
“한 교수님은 뵙기 껄끄러운데….”
한영훈 교수는 내 담당 교수이자 멘토였다.
그래서 내가 매니저 한다고 했을 때 펄펄 뛰었었다.
졸업하고 나서 너무 껄끄러워 연락을 안 했는데 하필이면 한영훈 교수 수업일 줄이야.
“오빠 온다니까 꼭 데리고 들어오라던데요?”
“나는 그냥 근처 매점 가 있으면 안 되냐?”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냥 들어가요. 제가 시달리긴 싫거든요. 오빠는 오늘 그냥 튀면 그만이지만 저는 아직 2년 더 봬야 한다구요.”
“알았어. 대신 쟤 좀 잘 부탁한다.”
“그건 당연하죠!”
내가 부탁하는 처지고 임지예가 시달리면 그것 또한 민폐니 감수해야지 싶다.
임지예를 따라 신희진과 같이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아는 얼굴 몇몇과 모르는 얼굴 몇몇이 보였다.
앞자리는 아무래도 시선이 모일 것 같아 뒷자리로 향했다.
그러다 수업시간이 시작되자 한영훈 교수가 들어왔다.
한영훈 교수가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김현진, 오랜만이다? 너 강의 끝나면 연구실로 따라와.”
“제가 지금 일하고 있어서 그러는데 나중에 다시 찾아뵈면 안 될까요?”
“오빠! 희진 씨는 제가 껌처럼 붙어 다니면서 잘 알려드릴 테니 다녀오세요.”
“야, 야.”
일 핑계로 한영훈 교수한테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임지예가 단칼에 가로막았다.
“지예가 말을 잘한다니까? 이뻐 죽겠어. 김현진, 너는 잔말 말고 따라와.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한영훈 교수에게 대답하고 나는 임지예를 째려봤다.
임지예는 짐짓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얄미워 죽겠네.
한영훈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진행했다.
“오늘 발표자는 누구야?”
“심현식부터입니다, 교수님.”
“시작하자.”
토론하면서 수업하는 이 수업 방식은 여전하시네.
* * *
“시나리오는 틈틈이 쓰고 있지?”
“아니요. 매니저 일 시작하고 시간이 없어서요.”
“영화 안 할 거야?”
연구실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이야기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는 교수님의 마음에 조금은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해 보려고요.”
“아깝지 않냐?”
“아까울 게 뭐가 있겠어요. 버리는 것도 아닌데요.”
“너 하는 행동 보면 버린 거 같은데?”
“아닙니다. 영역만 다르지 같은 틀이잖아요. 지금도 영화 찍으려고 하고 있고요.”
내 말이 못마땅했는지 한영훈 교수가 인상을 구겼다.
“그 고집을 영화 하는데 좀 쓰지. 답답하다. 아니 영화 할 때도 그랬지. 너 나랑 침 튀기면서 대립했잖아.”
“하하하. 원래 우리 학교 식구들이 다 한 고집하잖아요.”
“됐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사라져.”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말하는 한영훈 교수를 보고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에는 진철이랑 다시 찾아뵐게요.”
“징그러우니까 오지 마.”
“고생하십쇼! 가보겠습니다!”
화를 불같이 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해해 주셨다.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하기도 했고 많은 걸 알려 주신 분이라 뵙기 꺼렸었는데 잘 풀린 것 같다.
* * *
“언니! 들어가!”
“응! 나중에 봐!”
임지예와 신희진이 친근하게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황당했다.
그렇게 임지예와 작별인사를 하고 신희진과 함께 차에 탔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냐?”
“원래 공통의 씹을 상대가 있으면 급격하게 친해지는 법이죠.”
“그거 혹시 나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임지예가 친화력이 좋은 편이긴 했는데 몇 시간도 안 돼서 이렇게 친근감을 표시할 줄 상상도 못 했다.
아니면 나를 얼마나 씹어댔길래 이렇게 급격하게 친해졌을까.
“무슨 이야기 했는데?”
“비밀인데요?”
“말을 말자. 말을 말어.”
“말을 어떻게 말아요~”
“말장난할래?”
내가 짐짓 정색하자 신희진이 시선을 딴 곳으로 두고 딴청을 피웠다.
“근데 오빠, 언니한테 들은 건데요. 학교에서 영화 찍으실 때도 저랑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면서요?”
“응?”
“처음 리딩에 배우가 배역에 몰입을 못 했는데 오빠가 바꿨다면서요?”
임지예가 내 학교 다니던 시절 이야기를 신희진에게 한 것 같았다.
“배우랑 이야기를 많이 했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습득했으니까. 그리고 그때 그 배우 이미지는 내가 찾던 배역에 부합했어. 배우도 나도 노력 많이 했지.”
“저도 똑같은 거예요?”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그때 그 배우나 신희진이나 비슷했다.
당시 배우도 연기력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길을 못 잡는 것 같아 잡아준 거였으니까.
“언니는 오빠가 매니저 하는 거 되게 아쉬워하던데. 필모그래피도 좋은 사람이 그러면 자기는 어쩌냐면서.”
“음….”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던지라 표정관리가 잘 안됐다.
내 표정을 본 신희진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화제전환을 했다.
“와! 근데 진짜로 고등학교랑 대학교랑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네요?”
“그럼 같을 줄 알았어?”
“초중고 다 비슷했으니까 같을 줄 알았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대학 갈걸.”
“받아주는 곳은 있고?”
내 말에 신희진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와. 저 이래 봬도 공부 좀 했거든요?”
“몇 등?”
“공부 좀 했다고요!”
“그래서 몇 등?”
“아 진짜 공부 좀 했다니깐요? 좀 넘어가죠?”
신희진의 요즘 행동을 보면 서지영 닮아가고 있는 게 내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죄다 닮아가는 게 서지영일까.
차라리 이나라를 닮아가지.
“이제 퇴근이에요?”
“무슨 퇴근이야. 스케줄 하러 가야지.”
“엑!”
“왜 모르는 척이야? 이야기했잖아.”
알면서도 물어보는 걸 보니 오늘 학교 간 게 어지간히 재미있었던 듯했다.
“싫다….”
“배부른 투정을 요즘 자주 하네.”
“이게 한가할 땐 스케줄이 많았으면 했는데, 그렇다고 스케줄이 많아지니까 또 다르네요.”
“가면서 좀 자둬. 바로 이동하니까.”
“메이크업은요?”
“가서 할 거야.”
“네.”
오늘은 정말 무슨 일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내가 다 진이 빠졌다.
지금은 체력을 위해 눈을 감고 자고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반대로 신희진은 팔팔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 재미를 느낀 듯했다.
아이돌 생활이란 게 어떻게 보면 꽤 단조로운 생활이기도 했으니까.
긍정적인 효과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연희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