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각자의 생각 (1)
“그럼 오늘은 저희 하교할 때까지 학교에 있으면 돼요?”
학교에 온종일 있는 게 불만인지 서지영이 얼굴을 찡그린 채로 내게 물어왔다.
“오늘 스케줄 저녁이잖아. 네 시쯤 데리러 갈게.”
“언니들은 쉬는데 왜 우리만… 헝헝.”
박혜연도 본인들만 학교에 가는 이 상황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박혜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아마 들으라고 한 말 같았다.
“싫으면 검정고시 보던가. 그리고 학교에서 실컷 쉬잖아. 졸리면 바로 엎어져 디비 잘 거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책상에 엎어져 자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서지영이 분개했다.
“평소 행동 보면 알지.”
“내가 그렇게 자주 잤나?”
서지영은 생각보다 생체 배터리가 빨리 닳는 편이었다.
한번 왕성하게 활동하고 나면 푹 꺼져서 다시 충전 상태로 돌아갔는데, 보통은 잠을 잤다.
백미러로 입술을 삐쭉 내미는 서지영을 보고 화제를 바꿨다.
“학교는 다닐 만해?”
내 질문에 이번에는 박혜연이 답했다.
“그냥저냥요? 근데 예전에는 큰 부담은 안 됐는데 지금은 좀… 학교도 재밌긴 하지만 조금 부담스럽긴 해요. 내가 알던 학교가 아니랄까.”
조금 떨떠름한 모습을 보아하니 학교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듯했다.
연예인의 학생 삶은 어떨까.
“정말 친했던 애들 아니면 대하기가 좀 힘들어요. 서로 힘들어한다고 해야 하나….”
“왜?”
박혜연의 말에 이어서 서지영이 축 처진 목소리로 이야기하길래 궁금해졌다.
“일단 저랑 혜연이는 혹시라도 구설수 오를까 봐 조심하죠. 그리고 애들도 저랑 혜연이가 연예인이다 보니까 우와! 하거든요? 그래서 벽이 좀 느껴져요. 데뷔 전에 친했던 애들이랑은 크게 거부감은 없는데….”
“그래서 얘랑만 붙어 다녀요. 징그럽게.”
서지영의 말이 끝나자 박혜연이 서지영을 보고는 몸서리쳤다.
“야! 누군 안 징그럽냐! 숙소에서도 붙어 다녀, 학교에서도 붙어 다녀, 24시간 중에서 23시간은 같이 있을걸요?”
“한 시간은 뭐야?”
분노에 차오른 서지영이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는데 마지막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24시간이면 24시간 붙어 있지 23시간은 또 뭐야?
“화장실요. 거기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네, 화장실 가는 시간은 빼야겠네.
박혜연이 답해준 뒤로는 애들이 조용해졌다.
아침에 텐션이 갑자기 올라서 그런지 자체적으로 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용히 애들의 학교로 가고 있을 때 등교를 하는 학생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 댕지다. 댕지.”
박혜연이 밖을 보면서 친구를 발견했는지 작게 이야기했다.
“저희 여기서 내려주세요! 친구랑 같이 갈게요.”
“알았어. 잠시만.”
박혜연의 말을 들은 서지영이 내려달라고 이야기하길래 근처 인도로 향했다.
“댕지야!”
서지영이 창문을 열고 힘껏 소리쳤다.
서지영이랑 박혜연이 다니는 학교가 공연예술 고등학교라 그런지 잠깐의 관심만 있을 뿐 호들갑 떠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학생 신분의 연예인들도 꽤 많은 곳이니까.
애들을 가까운 인도에 내려주고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내리자마자 댕지라고 불린 친구에게 웃으면서 안기는 서지영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평소보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잠시간의 시간 동안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차를 끌고 회사로 향했다.
* * *
“그럼 우리는 투자자의 입장에 맞춰서 진행하겠습니다.”
“네.”
“회사 투자처에서 움직여도 상관없으시다는 거죠?”
“네. 저보다 더 전문가이시니까요.”
정인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 후 투자 방향은 급물살을 탔다.
지금 이야기하는 투자 회의도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다.
내가 기획해서 발안했다지만, 정인수 대표의 입김도 있지 않을까 싶다.
보통이라면 다른 헤드급이 맡아 진행했었을 테니까.
내가 회의에 참여한다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투자는 회사에서 알아서 하게끔 하고 나는 배역만 따내면 된다.
가장 편한 방법은 이진철이 신희진을 마음에 들어 하면 깔끔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재가는 떨어졌으니 프로덕션 측이랑 미팅 잡아 진행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미팅 진행하시고 감독이랑은 제가 따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 내에 노는 배우들을 집어넣으려고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만… 대표님이 김현진 씨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서 진행하라 하셨기에 투자자 위치를 이용해서 억지로 넣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넣어봤자 지금 키우고 있는 신인 배우급들이겠지만요. 건의 정도는 상관없겠죠?”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프로덕션 측과 감독이 마음에 안 들면 퇴짜 놓을 테니 상관없을 것 같아요. 아마 어느 정도 캐스팅이 끝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실제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남자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을 거다.
찍기 위해서 준비를 예전부터 했었으니까.
단지, 연희 역에 해당하는 배우를 고심하고 있는 단계일 테니.
“알겠습니다. 또 따로 이야기하실 게 남아 있습니까?”
“아뇨, 없는 것 같아요.”
모은 돈을 개인투자자 성격으로 투자해볼까 잠시간의 고민을 했지만 그렇게 큰돈은 아니라 그만뒀다.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자 서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시간을 보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업무를 시작해볼까.
* * *
밥을 먹고 업무를 끝낸 뒤 전반적으로 커뮤니티 모니터링을 했다.
어제 같은 경우 돌출 행동도 했으니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스타즈 행사 풀 직캠.avi]
연락을 돌리느라 애들 무대는 자세히 못 봐서 궁금했다.
들어가자마자 댓글부터 확인했는데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이뻐지네
└포텐 개 터지는 듯
└아… 유코야… 제발….
└왜 ㅋㅋ 난 웃기기만 한데
└아조씨 몇 살?
└아조씨 아니다. 오빠다.
└아저씨네.ㅋㅋㅋㅋ
└우리 유코 하고 싶은 거 다 해!
반응을 보니 유코가 무슨 말을 한 것 같다.
예상이 가는 건 있었는데 설마설마 하고 영상을 틀었다.
플레이되는 영상을 틀어 보니 무대에서 있었던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중간에 쉬면서 멘트 치는 부분인 것 같은데….
보통 행사 때는 첫 곡 끝나고 멘트를 치니, 영상에서 한 곡 마무리 하는 부분으로 갔다.
- 여러분 축제 재미있으신가요?
- 네!!
- 분위기가 너무너무 좋은 것 같아요.
- 그래서 유코가 할 말이 있다는데요!
보통 이런 진행 멘트는 이나라와 서지영이 도맡아 했다.
능숙하게 둘이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마지막 서지영의 말에 또 누군가가 멘트를 치려고 했던 듯싶었다.
둘만 무대에서 이야기하면 그러니 골고루 집어서 이야기할 시간을 주기도 했다.
근데 느낌이 안 좋은데.
- 저히 보내기 씨르시죠?
- 네!
- 보내기 씨르시다면서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닝데….
유코가 풀죽은 모습으로 말하자 영상 속에서 웅성거림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 보내기 씨르면 가위나 주먹을 내야죠!
유코의 말에 영상 속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이 1초 정도는 사고가 정지되었을 거로 생각했다.
왜 애들은 유코를 말리지 않았던 것일까.
유코의 개그 영역은 내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예능도 나가고 싶다고 한다더니 저 컨셉으로 쭉 밀고 가려고 하는 것 같다.
본인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회사에서도 독특한 컨셉이라고 생각하고 건드리지 않기도 했고.
- 어… 다음 곡 들려드릴게요! 다음 곡은 이번 앨범에 나왔던 곡이죠? 같이 즐겨 주세요!
서지영이 아찔한 표정으로 장내를 수습하고 다음 곡을 이어나갔다.
나도 머리가 띵하면서 아찔한 기분이었다.
이내 영상에서 신나는 비트가 흘러나왔다. 영상에서 애들이 무대를 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행복해 보였다.
계속되는 행사와 팬 사인회, 그리고 방송 스케줄 때문에 힘들만도 했을 텐데 저렇게 버티는 체력이 대단해 보였다.
영상을 끝까지 쭉 감상하고 나왔다.
무대 뒤에서 볼 때랑 이렇게 누군가 찍어준 영상으로 볼 때랑은 느낌이 꽤 달랐다.
근데 주막 영상은 없나? 한두 명이 슬쩍 찍었을 법도 했는데.
찾아보니 영상이 있었다. 영상을 틀어 첫 화면을 보니 허둥지둥대는 내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모두의 시선이 주목한 그때인 듯했다.
영상으로 본 내 모습은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강희수가 안 왔다면 평생 남을 흑역사였겠네.
그 외에는 딱히 큰 이상은 없었다.
오히려 애들에 대한 반응만 더 좋아졌다.
연예계는 확실히 흐름이 있다.
잘나갈 땐 쭉쭉 뻗으면서 잘나가고 무너질 땐 확 무너진다.
참 무서운 동네다.
애들 모니터링을 하다 보니 애들이 생각났다.
지금 시간이면 레슨 받고 있으려나?
신희진이 연기하는 모습도 한번 봐야 하는데.
잠깐 보러 가야겠다.
책상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연습실에 가보니 중앙에 신희진 혼자 대본을 쥐고 덩그러니 있었다.
“왜 혼자 있어?”
“대본 보고 있었어요.”
다른 애들은 각자 흩어져 레슨 받고 있었다.
“뭐로 연습하고 있었어?”
“이거 삼촌이 물어다 준 거라면서요?”
어떤 거로 연습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는데 신희진이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이진철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인 것 같았다.
“상업영화나 미니드라마같이 큰 건 아닌데 웹드라마보단 나을 거야.”
나는 말하면서 신희진 곁으로 다가갔다.
“근데 이게 잘 먹힐까요?”
“글쎄, 연출 방향과 연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안 읽어 보셨죠?”
“당연히 읽어봤지. 내가 기획해서 승인받은 건데.”
“그래요? 맞네. 읽어 볼 수밖에 없겠네. 이거 좀 슬픈 것 같아요.”
신희진이 말하면서 모호한 표정을 지어서 잘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나리오는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슬픈가?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시한부 인생인 20살 새내기 대학생 간에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니까. 시나리오는 어때? 마음에 들어?”
“이게 안 슬퍼요? 냉혈한 아니면 되게 슬퍼할 것 같은데…. 그래도 엔딩은 마음에 들어요. 시나리오도 좋은 것 같아요.”
“나도 아련한 느낌이 좋더라.”
“근데 이거 제목도 잘 지어진 것 같아요.”
신희진이 영화 제목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부분은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봄에서 가을뿐인 거?”
“네.”
“연희와 현승에게는 봄, 여름, 가을까지니까.”
“그렇죠… 그래서 더 애틋해요.”
신희진이 아릿한 표정으로 대본을 두어 번 보더니 내게 말했다.
“근데 이 시나리오는 남자 주인공이 잘 표현해야 살 것 같은데요?”
“남자 주인공도 남자 주인공이지만 여자 주인공도 얼마나 사랑스럽고 설레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겠지. 그래야 더 극대화될 테니까.”
이것저것 물어오는 신희진의 모습에서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잘할 수 있을까요?”
“나이로 보나 이미지로 보나 잘될 거야. 내가 말했지? 내가 보는 눈은 좋다고.”
“글쎄요….”
“말이 많아. 일단 한번 해볼래?”
“네.”
영화 작업은 처음 하는지 신희진이 살짝 불안한 모습도 보였으나 의욕적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연기를 배워왔으니까.
연기는 잘할까?
국어책 읽기 정도만 아니면 연희 역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풋풋한 느낌을 살리기엔 걸음마를 시작한 지금이 오히려 더 최적일 수도 있다.
“어느 부분 연습하고 있었어?”
“첫 부분이요. 학교 가고 싶다고 난리 치던 부분.”
“거기 말고는?”
“현승이와 첫 만남 부분?”
“첫 만남 부분부터 해볼까?”
“네!”
* * *
신희진의 연기를 보고 난 이후 투자처에 가서 프로덕션 미팅 때 나도 같이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신희진의 연기가 아직은 익지 않고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연희 역에 신희진을 넣는 건 이진철의 성향상 불발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럼 그 가능성을 줄이고 욱여넣으려면 내가 있는 게 더 좋다.
어필한다면 내가 어필하는 게 더 좋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오늘 나온 자리에는 프로덕션 인물만 나온 게 아니었다.
“보내주신 동영상 확인했는데요.”
“네. 괜찮지 않습니까?”
무심하게 말하는 이진철과는 대조적으로 화사하게 답하는 투자팀장이었다.
“투자 조건이 영상을 보내주신 배우를 연희 역에 써야 한다는 조건이면 투자… 안 받겠습니다.”
단호하게 내뱉는 이진철의 말에 같이 온 투자팀장이 당황했다.
오히려 이진철은 당황한 투자팀장과 다르게 덤덤했다.
이진철의 배짱에는 근거가 있었다.
솔직히 이신형 감독의 이름을 팔면 투자처는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진철 연출이 아닌 이신형 연출이 될 거다.
그래서 투자에 관해서 자기 스스로 받으려고 고집부리는 걸 거고.
정 안 되면 이름 팔아서 투자를 받겠지만 지금 시점에 어느 누가 투자를 거부한다는 말을 하겠나.
이진철이 같이 나온 걸 보고 어째 불안불안했는데 현실이 되어버렸다.
어쩐지 이렇게 흘러갈 것 같더라니.
“감독님, 저랑 잠깐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요?”
이제는 내가 약을 팔 시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