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비 온 뒤 맑음 (4)
신희진과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신희진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 허둥대는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네? 하….”
어버버하던 신희진이 내 말에 답했다.
그러고 나서는 웃음기를 싹 뺀 얼굴을 하며 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뭔데요?”
“야, 야. 떨어져.”
“두근거리게 해준다면서요.”
갑자기 신희진이 훅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신희진이랑 거리를 살짝 떨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떨어지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키득키득 웃는 신희진이 보였다.
자각이 없네.
아니면 알고 저러는 거 같기도 하고.
저번에 줬던 영상 이후로 신희진이 나를 좀 더 편하게 대하는 것 같기는 했다.
“아니, 아니. 딴 게 아니라 연기해 보자고 말하려고 그랬지. 네가 두근두근 댄다길래 얼결에 튀어나온 말이었어.”
“아~ 연기요? 연기 좋죠. 근데 바로 들어갈 작품이 있어요? 작품 들어가려면 원래 엄청 오래 걸리는 거 아니에요?”
제대로 용건을 이야기하자 신희진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바뀌었다.
“될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연기 잘해? 너?”
“선생님들이 집어주시는 건 바로 잘 따라 하는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그래?”
“왜요?”
“나중에 한번 봐야겠다.”
“보면 뭐 달라져요?”
신희진의 말투가 마치 ‘네가 뭘 아냐?’라는 말투였으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이래봬도 전공자라고.
“레슨 해주는 선생님들은 거의 연기 공부했거나 연기해 보셨던 분들이잖아. 연출가 처지에서 보면 또 다르지.”
“연출가? 아, 맞다. 연영과 나오셨다고 했지. 근데 연출이요?”
내 말에 신희진이 손뼉을 짝! 치며 지금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
“근데 왜 매니저 해요?”
“그냥.”
“그냥이 어딨어요.”
이 질문은 꽤 자주 받는 것 같다.
이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왜? 나는 매니저 하면 안 되냐?”
“궁금하잖아요. 보통 연출하다가 매니저 하는 경우는 잘 없을 거 같은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연출하는 게 힘들었어. 군대 전역하고 단편 하나 만들었는데 진이 너무 빠졌거든. 뭐, 현실 생각하니 막막하기도 했고. 그리고 매니저가 연예인들 뒷바라지하는 역할이라지만, 생각보다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보는 눈이 은근히 좋다? 그래서 딱이다 싶었지.”
말을 내뱉고 나니 뭔가 감성적으로 말한 것 같았다.
신희진을 살펴보니 애꿎은 땅만 발로 툭툭 치고 있었다.
“그렇구나.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네요. 뭔가 숨겨진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재미없는 아저씨랑 놀지 말고 들어가서 놀아.”
땅을 바라보면서 툭툭 치며 말하는 신희진에게 한마디 했다.
이렇게 밖에 있는 건 생각보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네,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내 말에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슬슬 들어가 볼까 싶었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형!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하세요!”
“어, 그래. 오랜만이야.”
남자는 낯이 익긴 했는데 가물가물했고 여자는 누군지 아는 얼굴이었다.
남자 이름이 뭐였지. 얘가 1학년 입학할 때 본 거 같은데.
4년 만인가 5년 만인가?
“몇 년 만이지?”
“4년 만일걸요?”
“오빠! 술 사준다고 해놓고 왜 안 와요?”
남자애가 가까이 와서 어깨동무하며 인사를 받았고 여자애는 옆에서 예전처럼 땍땍거렸다.
임지예는 여전한 것 같았다.
“야, 바쁜데 여길 왜 와? 졸업하면 장땡이지.”
남자애와 어깨동무를 풀고 임지예에게 말했다.
“형, 방금 들어간 애가 희진이죠? 진짜 이쁘네요.”
남자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풀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이름이 생각 날 듯 말 듯 안 나네.
이름 물어보면 섭섭해할 것 같은데.
“오빠랑 같이 옆에 있으니까 둘이 엄청나게 안 어울리던데.”
“야. 쟤 옆에 가면 너도 오징어야.”
둘이 서로를 말로 툭툭 건드리면서 으르렁거렸다.
“말넘심!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지예야, 사실이잖아.”
“희수 오빠! 오빠는 현진 오빠보다 더 안 어울리거든요?”
“그건… 그래, 인정. 현진이 형이 낫다.”
“당연히 낫죠. 현진 오빠면 잘생긴 편이거든요?”
다행히도 둘이 투덕거리면서 임지예가 남자의 이름을 말해줬다.
이름을 듣고 나니 성과 함께 떠올랐다.
강희수였지.
“내가 쟤랑 어울리면 매니저 하고 있겠냐? 배우하고 있지.”
내 말에 동감한다는 듯 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 딴 게 아니라 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쟤네 투표도 하고 엄청 열심히 봤거든요. 사인 한 장 가능할까요?”
“나중에 받아줄게. 지금은 애들 놀고 있으니까.”
강희수는 전역하고 복학한 것 같았다. 내가 다닐 땐 못 봤으니까.
군대에서 걸그룹이 가지는 의미가 참 크긴 하지.
“네! 감사합니다!”
“오빠! 저도요!”
황송하다는 듯 강희수가 허리를 넙죽 숙이며 과도하게 인사했다.
그런 강희수를 보며 임지예도 똑같은 부탁을 해왔다.
“넌 왜?”
“저도 팬인데요?”
“알았어.”
걸그룹도 여덕은 많으니까 특별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을 뿐.
내가 아는 임지예는 딱히 연예인에 관심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
“…….”
서로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기류를 깨고 싶어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근데, 둘이 사귀냐? CC야?”
잠깐 대화에 공백이 생기며 어색한 침묵이 흘러가길래 말을 내뱉었다.
강희수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는지 우리 둘이 동시에 말이 나왔다.
“아뇨.”
“미쳤어요!?”
내 말에 잠시간의 멈칫도 없이 둘이 똑같이 반응했다.
둘 다 쑥스러워하는 얼굴 보니 뻔했다.
둘이 마음 있는 거 맞구만. CC는 지옥인데 알아서 하겠지.
“뭐, 그래. 서로 아니라는데 아니겠지.”
“오빠! 제 눈을 어떻게 보시고….”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됐고, 술 먹으러 온 거야?”
둘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보고 적당히 끊었다.
“겸사겸사요. 안에 자리 있어요?”
“없지. 있겠냐?”
“기다려야 하나….”
“우리 애들 있어서 안 빠질걸? 소문 듣고 계속 오는 거 같던데. 자리도 잘 안 빠지더라.”
내 말에 어떻게 할까 고심하는 강희수였다.
“도와준다고 하고 사심이나 채워야겠네요.”
“너무 그렇다고 동물원 구경하듯 보지는 말고.”
보통 축제 즐기기 바쁘지 주막에서 노동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오늘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에이. 그 정도 눈치는 있죠.”
“없으면서.”
“뭐래. 내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내 말에 강희수가 답하고는 임지예가 받아쳤다.
서로 티키타카 하면서 둘이 천막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것 같아 보이자 강희수가 돌아보며 말했다.
“안 들어가세요?”
“들어가야지.”
강희수의 말에 나도 같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잠깐 멈칫했다.
밖에 나온 건 다른 게 아니라 점검할 내용이 있어서였다.
또 까먹으면 정리를 안 할 것 같아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들고 다니던 노트를 꺼내어 체크리스트를 살펴보았다.
[3월 신희진 왕따설]
[4월 2집 미니앨범 발표 후 하락세]
[5월 린의 소속사와 마찰]
[6월 팀 내 불화 가속]
월별로 큼지막한 사건들을 표기해놨는데 6월까지는 다 쓸모없는 사건들로 변해버렸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되겠지?
닥치지도 않은 문제를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기도 했다.
일어난 사건과 안 일어난 사건들을 다 지우고 나니 7월까지는 공백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노트를 접어두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도 엄청 시끄러웠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더했다.
나오기 전에는 애들 편하게 놀라고 자리를 따로 잡아줬는데 어느새 남진수도 합석해서 같이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팀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너 나가고 혼자 있으니까 애들이 오라던데?”
테이블에 가까이 가서 남진수에게 말을 거니 남진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웬 주책이야.
“애들 불편할 거 같으니 따로 테이블 차리자는 건 팀장님 의견이었는데요.”
“야, 너 잠깐 나간다더니 몇 분째 안 들어온 지 알아?”
“잠깐이었잖아요.”
내 말에 남진수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여줬다.
30분이면 잠깐이지.
“팀장님 혼자 멍하니 계시길래 같이 놀자고 했어요.”
“팀장님… 제일 나이 많은 나라랑 띠동갑이잖아요.”
“왜 또 제 나이랑 비교해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나이 많아 보이잖아요!”
이나라가 하는 말에 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 표정 그대로 남진수에게 말을 했더니 남진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이나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졌다.
스타즈에서 제일 나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뭐! 그냥 같이 먹을 수도 있지.”
“그래서 무슨 이야기 하고 계셨는데요?”
“이번 달 스케줄 이야기….”
“어휴.”
처음에 남진수가 톡 쏘면서 말하길래 일말의 기대를 했는데 기대를 한 내가 바보였다.
“야. 너라고 뭐 다르냐?”
“다를 건 없겠지만…. 스케줄 이야기는 안 할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당장 말해봐. 얼마나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는지 보자.”
“네?”
갑자기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양반의 화살 돌리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와!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해도 되죠?”
“어….”
이렇게 멍석 깔리면 백에 구십구는 분위기 싸해지던데.
애들뿐만 아니라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다들 힐끔힐끔 우리 테이블을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주문하신 계란말이 나왔습니다.”
침묵만 흐르는 테이블에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이었다.
“엉? 왜 네가 오냐?”
“도와준다고 하니까 영석이 형이 바로 시키던데요?”
“아는 사람이에요?”
나와 강희수가 대화하는 게 궁금했는지 박혜연이 물어왔다.
“어? 내 후배야. 강희수라고.”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애들에게 강희수를 소개해주니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강희수를 파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얘가 너희 팬이래. 데뷔 전부터 투표하면서 팬이었다던데.”
“와! 감사합니다!”
애들에게 내가 소개해주자 강희수가 눈에 띄게 부끄러워했다.
“실물로 봐서 영광입니다!”
“아니에요.”
“데뷔 전부터면 프로그램도 보셨겠네요?”
군기가 바짝 든 표정으로 대답하는 강희수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애들도 팬 대하듯 편하게 강희수를 대했다.
하지만 유미소의 말에 다시 테이블이 얼어붙었다.
“누구. 투표했어요?”
린이 몹시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린의 질문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던 강희수가 매우 당황했다.
“어, 그게….”
“누구예요?”
“누굴까?”
“누구누구?”
곤란해하는 강희수를 스타즈 애들은 한껏 골려 먹고 있었다.
강희수가 잠깐의 고민 후 굳게 마음먹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유코 씨요!”
“헤~ 나래. 꺄하하.”
“좋겠네~ 유코는.”
“우리는 찬밥인가 봐~”
“부럽다~”
강희수의 말에 기분 좋다는 듯 웃는 유코였으나 다른 애들은 짐짓 삐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다른 애들의 표정에 쩔쩔매는 강희수가 딱해 보였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 희수야.
보다 못한 남진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거만 마저 먹고 자리 일어나자.”
“네.”
애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수긍했다.
“그럼 전 가볼게요.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강희수도 잠깐 테이블을 보고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래도 갈 때 꽤 행복한 표정을 보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고 간 듯싶었다.
“팀장님 나가서 노는 건 안 되겠죠?”
“그건 안 돼. 너무 위험해.”
“아쉽다.”
“어쩔 수 없어. 지금도 아슬아슬해.”
신희진은 축제를 더 즐기고 싶었는지 깜찍한 표정으로 남진수에게 건의를 했으나 단칼에 저지당했다.
애들은 웃고 떠들면서 오래간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있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이다 보니 지금 상황이 재미있는 듯했다.
“자, 그럼 일어날까?”
“네….”
어느새 테이블에 있던 주전부리들이 없어지고 남진수가 한마디 하자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애들이었다.
“내일! 학교! 가기! 싫다!”
“내일 오전에 나 깨우는 사람 진짜 죽어. 건들기만 해봐.”
애들이 일어나면서 투덜투덜했다.
서지영은 온몸으로 표현했고 유미소도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애들을 풀어주는 것도 내일 스케줄이 저녁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학교에 가야 하는 박혜연과 서지영은 아니었지만.
내일 애들 학교 데려다주고 오늘 신희진과 했던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회사와 다시 진행해야 했다.
잘 돼야 할 텐데….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만큼 애들이 잘나가는 시기가 없었으니까.
기세를 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