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비 온 뒤 맑음 (3)
“신난다. 신나!”
“와, 많다.”
방방 뛰어다니면서 흥을 내는 서지영과 학교 측에서 마련해준 천막 대기소에서 바깥을 힐끔 보던 유미소가 말했다.
“왜 데뷔 때랑 비슷하게 떨리는 거지?”
“분위기가 좋아서 그래. 분위기가.”
이제는 무대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애들도 분위기에 취한 것 같다.
축제는 묘한 마력이 있다.
“오빠가 여기 다녔다고요?”
“어.”
공교롭게도 축제 공연 때문에 온 학교가 내 모교였다.
정말 징글징글한 곳이다.
“학창시절 어땠어요?”
서지영이 슬그머니 다가와 내 학창시절을 물어봤다.
“나? 모범생이었지.”
“에이.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말이 안 되니깐 말이 안 되죠. 뺀질뺀질했을 거 같은데요?”
“나 4년 내내 장학금 받고 다녔는데?”
정말이었다.
서지영이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왜 이렇게 억울한지 모르겠다.
“거짓말.”
“히야. 못 믿네. 얘네들. 확인시켜줄 수도 없고.”
“왜요? 확인시켜줄 수 있잖아요.”
“어떻게?”
“축제하면 주막이죠!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으면 후배들도 있을 거고, 그 후배들이 지금 주막 할 거 아니에요? 맞죠?”
저 말을 하려고 아까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쌓았던 것 같다.
기적의 논리를 펼치네.
“글쎄? 했었나? 했었던 거 같기도 하고.”
“뭐야. 그거 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거 하나 기억 못 해요?”
“바빠서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었거든. 학회마다 방침이 다르기도 했고.”
나와 서지영이 대화하는 주제에 관심이 생겼는지 박혜연도 와서 물었다.
“대학 축제할 때 주막 같은 거 하잖아요. 그런 곳 한번 놀러 가고 싶은데… 오늘 이거 끝나면 스케줄 없잖아요. 어떻게 안 돼요?”
“미성년자 있잖아.”
“보호자 있잖아요.”
“나한테 말해도 내가 그걸 정하지는 못해.”
서지영이 말하면서 살살 나를 간 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권한이 있겠니.
나 말단이야.
“저도 노올고 시퍼요. 어떠케 안대요?”
어느새 유코도 다가와 애처롭게 말했다.
애들보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유코가 발음이 새면서 말하는 모습에 애처롭기보다는 귀여웠다.
“그렇게 눈빛 보내도….”
“그럼 이렇게 해요. 딜 하죠? 저랑 유코 언니 생일 선물로 오늘 저녁에 축제 즐길 수 있는 자유이용권 주기!”
“그건 더더욱 안 돼. 너네 움직이면 사람 몇 명이 같이 움직이는데. 그리고 내 권한도 아니야.”
서지영이 여세를 몰아 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편이 많아지자 기세등등한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왠지 얘네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어느새 서지영이 위풍당당하게 나한테 와서는 어깨를 잡고 내 귀에다 대고 쪼기 시작했다.
“말해볼 수는 있잖아요. 해줘요. 해줘. 해줘. 해줘. 해줘.”
“귀 아프니 그만 매달려서 말할래?”
“빨리요.”
“에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한번 해야 이 소요가 해소될 것 같았다.
해냈다고 말하는 애들을 뒤로하고 남진수에게로 갔다.
“팀장님.”
“어. 왜?”
“혹시 애들 축제 행사 끝나고 잠깐 축제 구경하고 싶다는데 될까요?”
“되겠냐?”
“그렇죠? 그럼 팀장님에게 맡기겠습니다.”
내가 남진수에게 말하고 다시 애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자 무서운 속도로 애들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안 돼요?”
“안 돼요?”
서지영이 말하자 메아리치듯 다른 애들이 똑같이 말했다.
“안전 문제 때문에 안 돼.”
“푸 삼촌이 여기 졸업생이래요. 거기 주막에서 놀면 안전 괜찮지 않을까요?”
“너희 가면 무슨 민폐겠냐. 사람 바글바글해질 텐데.”
서지영이 누구보다 간절한 눈빛과 표정으로 남진수를 흔들어 보았지만 남진수는 부처였다.
저렇게 아쉬워하는 거 보니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얘네가 이런 축제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눈이 따라붙으니까.
“팀장님 한번 연락해 볼까요?”
“누구한테?”
“후배들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내일 오전 스케줄은 없으니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요? 게다가 홍보로도 괜찮을 거 같고요. 친숙한 이미지로.”
내 말에 남진수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
“티임자앙니이임!”
서지영이 고민하는 남진수 곁으로 다가가 말을 끌면서 좀 더 애절하게 말했다.
“제발요.”
서지영을 필두로 일곱 명이 매달려서 징징거리자 칠색 팔색하는 남진수였다.
“나도 그럼 인가 좀 받고.”
남진수가 애들을 떨쳐내고 바깥으로 나갔다.
“난 최선을 다했다.”
“알았어요.”
“실패하면 선물 받을 거예요.”
“비싼거루 바들거야.”
눈을 빛내는 서지영과 유코였다.
나도 값진 추억을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연예인들한테는 여러 가지가 겹쳐 있다 보니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제일 우선이었으니까.
다시 남진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손으로 OK사인을 보내왔다.
“야호!”
“오늘은 파티다!”
“근데 나도 주막 하는지 안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는데?”
“아….”
“아….”
방방 뛰다가 내 말에 급격하게 실망하는 애들이었다.
“팀장님, 저도 그럼 연락 돌려서 한번 알아볼게요. 근데 이게 갑자기 연락하는 거라 바로 될지는 모르겠어요.”
“안 되면 지들 팔자지.”
남진수는 내 말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해.”
“너무해도 어쩔 수 없어.”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래.”
나가는 길 사이로 본 애들의 눈빛이 너무 애절하고 처절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천막 바깥으로 나오니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애들 얼굴이라도 보고자 온 사람들 같았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확실히 인기가 많이 올랐구나 싶었다.
공연장 근처는 너무 시끄러워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 왜?
이진철은 한결같이 레퍼토리가 똑같았다.
징한 놈이다. 이놈도.
“야, 이번에 학회 누가 학회장이냐?”
- 이번 학회장은 왜? 아마 영석이일걸?
“영석이? 황영석? 걔가 학회장 맡았어? 의외네.”
- 학회장은 항상 의외의 인물이 하더라고. 아무튼, 그건 왜?”
이진철에게 전화를 한 건 이진철이 학교 사정에 대해 많이 알았기 때문이다.
본인 영화의 배경이 우리 학교여서 뺀질 나게 드나들며 협조 요청을 끌어냈다.
“아니, 나도 협조 구할 일이 있어서. 참, 진철아.
- 왜 또. 안 그래도 머리 아파죽겠는데.
“지금 자세하게 말해주긴 좀 그렇긴 한데, 아마 우리 회사에서 네 영화 투자 할 거야.”
- 무슨 말이야?
“조만간 연락 갈 거야. 그리고… 아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바빠서 끊는다.”
- 야! 뭔데?
“지금 내가 일 중이라 자세히는 이야기 못 하고 나중에 할게.”
애 좀 타봐라.
이진철과 통화를 끊고 후배인 황영석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첫 마디가 여보세요야?”
- 바빠서 번호를 안 보고 받았어요. 형, 웬일로 전화 주셨어요?
“학회장이라며?”
- 하하하, 네.
“딴 게 아니라 지금 축제에 스타즈 와 있는 거 알지?”
- 아, 들었어요. 학교세요? 공연 보고 싶었는데 저 지금 일하고 있어서요.
와아아!
함성이 들리는 걸 보니 애들 무대가 시작한 것 같았다.
“주막은 안 해?”
- 지금 일하는 게 그 주막입니다.
“야.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하자.”
- 부탁이요? 형이 부탁한다고 하면 좀 겁나는데요.
“이상한 부탁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스타즈 애들 매니저인데 애들 데리고 주막 좀 가도 될까? 그나마 좀 안전할 거 같은데.”
- 네? 매니저 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지금 공연하러 온 스타즈요? 음… 될 것 같기는 해요.
내 말에 잠깐의 고민을 하는 황영석이었지만 오케이를 받아냈다.
“안전 문제 때문에 부탁하려고 하는 건데 괜찮으려나?”
- 안전은 모르겠는데 애들한테 말은 해둘게요.
“알았다. 그게 차라리 낫지. 애들 끝나고 찾아갈게. 위치 어디야?”
- 그… 항상 하던 위치예요.
“알았어.”
전화를 끊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막사 대기실 안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마지막 엔딩 무대를 장식할 김진하가 와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무대 쪽으로 나왔다.
애들은 내가 전화를 하고 온 사이에 벌써 마지막 곡인 Love Up&Down을 하고 있었다.
무대 뒤편 근처에서 무대에서 뛰노는 애들을 보니 흥겹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축제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근처에 남진수가 보여 그 근처로 다가갔다.
“팀장님. 팀장님!”
“어? 어! 왔어! 뭐래!”
“와도 된대요!”
근처 앰프에서 노랫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서로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했다.
“그래! 시끄러우니까 끝나고 이야기하자!”
“네!”
무대는 어느새 클라이막스를 향했고 열띤 환호와 함께 무대가 끝이 났다.
앵콜! 앵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스타즈였습니다! 축제 재밌게 보내세요!”
이나라가 마지막으로 멘트를 하고 다 같이 내려왔다.
“고생했어. 안에 김진하 씨 와 계시니까 인사드리고.”
“네!”
다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 우리 처음 보지? 내가 나이도 많고 가수 생활도 오래 했으니까 말 좀 편하게 해도 되지?”
“네! 물론이죠!”
애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김진하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바로 올라가야 할 것 같네. 고생했어. 파이팅하고.”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김진하가 대기실에서 떠나자 애들의 경직된 얼굴이 풀렸다.
아무래도 연차가 높은 선배이다 보니 긴장했던 듯싶었다.
“오빠! 어떻게 됐어요?”
박혜연이 나를 보자마자 소식을 물어봤다.
“어? 안 된대.”
“아….”
괜히 골려주고 싶어 긍정의 말이 아닌 부정의 말이 먼저 나왔다.
애들이 급격하게 실망하는 걸 보니 더 골렸다가는 내가 골로 갈 거 같았다.
“사실은 된대. 가자.”
“야!”
내가 된다고 이야기하자 일곱 명이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 질렀다.
부들부들하는 애들이 웃긴지 남진수가 꺽꺽대며 웃었다.
애들의 소리가 컸던 모양인지 무슨 일인가 싶어 학교 측 인원이 막사에 들어오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하지만 잘 수습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애들을 데리고 일단 차로 향했다.
* * *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자리를 주막으로 옮겼다.
따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들어가자마자 소문이 퍼졌는지 주막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질서를 생각해서 초과하는 인원은 아예 받지를 않았다.
그래서 애들도 주막 안에서 축제 분위기를 즐기면서 주전부리를 먹고 있었다.
주막에서 황영석이 나를 보고는 피곤함에 찌든 몰골로 다가왔다.
“이럴 시간 있어?”
“잠깐 담배 좀 피우러 나왔어요. 피우실래요?”
황영석이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고 나에게 물어봤다.
“아니, 나 평소에는 안 펴.”
“담배 피지 않으셨어요?”
“그때는 한창 영화 찍을 때잖아.”
내가 거절하자 황영석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인 뒤 피우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황영석이 말을 걸어왔다.
“진철이 형은 잘 돼 간대요?”
“그럭저럭 굴러가는 거 같던데. 협조는 다 구해놨더라. 실행시킬 돈이 문제지. 돈도 어느 정도 해결될 거 같기도 하고.”
“그래요? 다행이네요. 확실히 영화 찍으려면 항상 돈이 문제죠.”
“그치… 항상 돈이 문제지.”
“형은 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얼마 쓰셨어요?”
“나? 한 2천 정도 썼을걸?”
“예대라고 등록금도 비싸게 받아먹고는 영화 찍는 것도 사비로 해야 한다니….”
“그래도 우리 학교는 실습 위주라 학교에서 영화 찍다가 현장가도 그대로 적용되잖아.”
“그렇긴 하죠….”
좋은 시나리오 좋은 배우가 있으면 뭐하나. 돈이 없으면 못 하는데.
서로 씁쓸하게 웃으며 넋을 놨다.
“영석 오빠! 어디 갔어요!”
주막 안에서 황영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갈게!”
황영석이 급히 안에 나온 목소리에 화답했다.
아무래도 바쁘다 보니 잠깐 일손이 비자 바로 찾는 듯했다.
우리 애들이 안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물밀듯 주막을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장사가 잘되면 많이 남겨 먹으니까.
“형, 가볼게요.”
“그래,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네.”
황영석이 피우던 담배를 끄고는 이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로 교대하듯 안에서 신희진이 걸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나를 발견한 신희진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뭐해요?”
“왜 나왔어?”
“잠깐 바람 쐬러요.”
“나도 바람 쐬러 나왔지.”
한 명이 가니 다시 한 명이 오네.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신희진을 보는 거겠지만.
“오늘 되게 두근두근하네요. 무대에 설 때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에요. 이런 느낌 참 좋은 거 같아요. 두근두근.”
신희진이 조용히 읊조렸다.
분위기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할 애가 아니었다.
나는 신희진의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쳐다보며 문득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두근거리는 거 해볼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