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비 온 뒤 맑음 (2)
“제가…요?”
“그래, 너 타율 좋잖아? 이번에는 장외 홈런 시켰고.”
정인수 대표가 소파 등받이에 푹 기대어 말했다.
그러나 나는 정인수 대표의 말에 허리가 더욱더 빳빳이 곤두세워졌다.
“제가 한 건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애들 타이틀곡 밀어줘, 담당 연예인 케어한 행동이 얻어걸려 곡이 역주행까지 해. 이게 네가 때린 게 아니고 뭐야?”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반복되면 실력이야.”
내 대답에 정인수 대표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면서 피식대며 말했다.
“영화는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영화를 만들랬나? 투자하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한테 말을 안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
“투자만 하면 아깝지. 이거 읽어봤는데 배역들이 아주 매력적이던데? 이거 올리면서 생각해둔 배우는 있었겠지?”
지금 상황은 마치 정인수 대표가 기획자고 내가 투자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습니다.”
아니, 있다.
그렇지만 괜히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정인수 대표에게 말릴 것 같았다.
“투자하면서 우리 회사 배우 하나둘 꽂아 넣을 수는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그게…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 회사에 이미지가 맞는 배우가 있었던가?
나는 잠시 회사 소속 배우를 생각했다.
“왜? 친구라서?”
그러나 나는 생각을 더 할 수 없었다.
정인수 대표가 무심한 목소리로 나에게 불의의 일격을 날렸다. 정인수 대표도 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정인수 대표의 화법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네. 맞습니다. 친구라서 잘 압니다. 메가폰을 맡은 이진철 감독은 이신형 감독처럼 연기력이 구리면 안 쓸 겁니다.”
“우리 회사 배우들이 연기력이 구렸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본인이 원하는 배역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안 뽑을 겁니다.”
흥미롭게 나를 쳐다보는 정인수 대표의 모습이 구렁이 같았다.
풍채만 보면 그리즐리 베어인데 말이야.
“투자를 해주는데도?”
“다른 투자처를 찾겠지요.”
“그러면 지금 스타즈 애 중에서는 어때? 신희진이를 여기 연희 역에 해보는 건? 꽤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야.”
정인수 대표가 다시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
“그건….”
“나랑 같은 생각이었던 거 같은데?”
내가 머뭇거리자 정인수 대표가 다시 치고 들어왔다.
잠깐의 고민 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내 말에 박장대소하는 정인수 대표였다.
그리고 이내 눈빛이 변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번에도 잘 포장해서 이것도 한번 성공시켜 봐. 그러면 스타즈 애들 계약 끝나고 성과를 봐서 팀장… 아니 실장도 달아주지.”
정인수 대표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능력 있는 놈이 좋거든.”
* * *
“왜 이렇게 멍 때리고 있어?”
“아, 팀장님.”
인터뷰하기로 한 카페에서 내가 멍하니 있자 남진수가 걱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내가 쉬면 본인이 일을 더 해야 하니 그런 걸까 순수하게 걱정한 걸까.
“곧 화제 연예 섹션에서 리포터 온대. 연락 왔어.”
“네. 애들 아까 준비 끝내놨어요.”
“아까 대표실에서 털렸어?”
“아뇨. 오히려 이번에 쓴 기획안 투자할 테니 그거 가지고 배우 꼽아보라던데요.”
내 말에 언제 걱정했냐는 듯 남진수는 황당해했다.
“햐. 능력도 좋아. 아니지. 너 대표님 직계야? 그게 아니면 이렇게 푸시해 주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그럴 리가요. 전 김 씨인데요. 대표님은 정 씨고. 저도 잘 모르겠네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생각해보면, 정인수 대표가 나에게 호의를 가진 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 그럼 그냥 하는 행동이 본인 판박이라 그런가.”
“제가요?”
남진수의 말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미친 행동을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을까?
“어. 대표님도 그랬거든.”
“대표님이요?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지만 제가 정상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데요….”
“그래, 잘 아네? 그러니까 제발 이제 미친 짓 좀 그만하면 안 되냐? 대표님도 그때 당시 미친놈이라고 소문이 파다했어.”
“그래도 결과는 좋았잖아요.”
“그러니까 더 미칠 노릇이지.”
나야 미래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막무가내로 행동했다지만, 정인수 대표의 행동 근원은 어디에서 온 걸까.
정인수 대표도 설마 회귀한 인물인 걸까?
아니다. 이건 너무 나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면 지금 위치가 아니었겠지.
스타즈 애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나와 남진수도 리포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카페 입구에서 카메라와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화제 연예 섹션의 황정미 리포터입니다!”
짐짓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황정미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네. 잠깐 애들한테 이야기 좀 하고요.”
황정미가 대표로 남진수와 이야기하는 걸 보니 인터뷰에 영향을 끼칠 작가나 PD는 오지 않은 듯했다.
사실 그렇게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황정미 리포터는 연예 섹션에서 리포터만 4년 차다. 믿고 맡길 만한 베테랑이다.
“애들한테 갔다 올게요. 이야기 나누세요.”
남진수와 황정미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애들한테 스탠바이 하라고 이야기하러 내가 빠졌다.
“얘들아. 인터뷰하러 이제 막 오셨거든?”
“네!”
“질문지는 다 받았지?”
“네!”
“거기 외에서 질문 나와도 당황하지 말고.”
“네.”
일곱 명이 한 번에 대답하는 이때만큼은 내가 어미 새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묘한 느낌이다.
“잘할 거야.”
“그럼요. 저희 프로잖아요.”
인사치레로 긴장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유미소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서로 킥킥대며 웃고 있는데 남진수와 황정미가 이야기가 끝났는지 우리 곁으로 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화제 연예 섹션의 황정미입니다!”
“둘, 셋.”
“안녕하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갯빛 스타즈입니다!”
“아직 녹화 안 했으니까 FM으로 안 하셔도 돼요.”
“인사받으면 원래 이렇게 인사드려요!”
“그래요? 신인답고 좋네요.”
황정미는 다가와서 노련하게 애들과 대화하고 긴장을 풀어주며 사전 탐색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럼 시작해도 될까요?”
“네!”
짝!
황정미의 박수 소리와 함께 녹화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집중! 화제 토크! 황정미입니다. 오늘은 화제의 스타즈분들을 모셨습니다!”
“둘, 셋.”
“안녕하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갯빛 스타즈입니다!”
“와우! 정말 상큼하네요! 각자 빛이 나서 눈이 부신데요?”
“황정미 리포터님이 더 빛나시는데요?”
서지영이 황정미의 멘트를 받는 거 보고 감탄했다.
쟤는 아이돌 말고 그냥 어디 내놔도 잘살 거 같다.
“아이돌보다 빛나면 저도 아이돌 해도 되겠네요.”
“저희 여덟 번째 멤버로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인터뷰는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로 치켜세워주면서 적당히 진행되자 황정미가 본론을 꺼냈다.
“제가 이분들을 뵌 이유가 궁금하시죠? 바로바로 다름 아닌 화제의 역주행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타즈 분들을 낱낱이 파헤치려고 제가! 파견되었습니다!”
“와!”
황정미의 매끄러운 진행에 스타즈도 리액션을 해주었다.
“Love Up&Down의 역주행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역주행의 계기가 희진이 친구들이 응원해 주려고 커버 영상을 올리고 그게 화제가 돼서 시작된 거잖아요? 사실 루머로 희진이가 무척 힘들어했거든요.”
“아…. 그때 루머가 많이 돌았죠?”
“네. 본인이 너무 힘들어해서 저희를 서포트해주는 김현진 매니저님이 희진이 지인을 찾아가서 힘내라고 영상 편지를 만들어줘서 극복했어요. 희진이 친구들도 그때 연락해서 만들어준 거라고 해요.”
지금 이 자리는 방송 프로그램 ‘화제 연예 섹션’을 통해서 화제를 부추기려는 용도로 잡은 인터뷰 자리였다.
곡이 역주행하고 스타즈의 인지도가 상승해서 화제가 무척 높아진 것도 있으나, 거기에 딸린 비하인드 스토리가 꽤 그럴싸하고 흥미로웠던 것도 한몫했다.
단지 내가 더 표면에 떠오른다는 게 조금 걸리긴 했다.
이나라가 황정미의 질문에 대표로 차분하게 내용을 풀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내가 더 부끄러웠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매니저로서 정말 최상의 매니저인데요?”
“그래서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과분할 정도로.”
과장되게 리액션하는 황정미가 내겐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건, 이나라의 말에 스타즈 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하는 게 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로는 Love Up&Down이 김현진 매니저님이 추천해준 곡이었거든요? 내부에서는 다른 곡을 밀려고 했었대요.”
“오?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이번에는 서지영이 진행을 토스 받아 진행했다.
다 듣고 온 황정미가 정말 프로 리포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인터뷰를 4년 한 게 아닌 것 같다. 기본이 되어 있었다.
“단독공개 붙이셔도 돼요! 처음 말하는 거니까요.”
“와우! 확실히 밀어드려야겠네요.”
“정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매니저님은 저희 스타즈의 요정 같은 존재 같아요.”
“요정이요? 요정이라고 하기엔….”
“사실 저희는 곰 닮았다고 푸우라고 불러요. 데뷔 초기 때부터 그렇게 불렀는데 팬들도 어느새 푸매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렇군요.”
사람 앞에 두고 이것저것 잘도 말하는 서지영이었다.
내 얼굴이 뜨겁고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뒤로는 별반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애초에 이 자리는 스타즈 애들이 더 탄력 받게 할 장치로써 만든 자리였으니까.
“지금까지 화제 토크의 황정미였습니다!”
“컷.”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한 시간가량의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앉아서 스타즈 애들을 상대하던 황정미가 남진수에게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황정미 리포터님.”
“아니에요. 데뷔 반년 됐죠? 서지영 씨는 듣기는 했지만, 프로 방송인이던데요?”
“그 얘기 많이들 들어요. 하하하.”
“옆에 계신 분이… 김현진 매니저님?”
남진수와 이야기하다 말고 남진수 옆에 있던 나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황정미가 나를 쳐다봤다.
“네. 맞습니다.”
“안목이 대단하시던데요?”
“너무 과도하게 띄우셔도 남는 거 없습니다.”
“입담도 좋으시네요. 나중에 인터뷰 한번 어떠세요?”
인터뷰 내용의 반이 나에 관련된 내용인지라 닭살이 우두두 나 있었는데 나를 또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하니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저요?”
“네.”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죠.”
“하하하. 그때가 되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내가 소극적으로 말하자 아쉽다는 듯 말하는 황정미 리포터였다.
다시 황정미 리포터의 시선이 남진수를 향했다.
“어쨌든 오늘 유쾌하고 즐거웠어요.”
“좋은 인터뷰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인데요, 뭘. 그럼 고생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황정미와 인사를 마치자 스타즈 애들이 우리 쪽으로 우르르 다가왔다.
“다음은 밥 먹고 축제 스케줄이네.”
“저, 축제 처음 가는 거라서 진짜 기대돼요!”
남진수가 다음 스케줄을 이야기하자 유미소가 두 손을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축제를 기대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무대에서 받는 에너지와 축제 때 받는 에너지는 사뭇 다르다.
그 에너지가 좋아서 몇몇 가수들은 축제 페이에 연연하지 않고 도는 가수들도 있기도 했다.
물론 우리 애들은 페이에 연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엔딩 무대는 김진하 선배님이 하시고 우리가 그 전이죠?”
유미소 뿐만 아니라 이나라도 기대가 되는지 축제에 관해 남진수에게 물었다.
“응. 한창 흥 올랐을 때 들어가는 순서야.”
“와, 진짜 기대된다.”
“떨려. 어떠케?”
신희진과 유코도 기대되는 듯 가만히 있다가 한마디씩 보탰다.
원래 축제 라인업하면 걸그룹이 항상 껴 있었지만, 요즘은 인디 가수나 힙합 하는 친구들이 많아져서 참여하는 비율이 확 줄었다.
아무래도 그룹 단위로 부르려면 단가가 비싸니 상대적으로 행사시장에서 그룹들이 가지는 파워가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인기가 있으면 단가가 비싸도 불러준다.
지금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