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비 온 뒤 맑음 (1)
“회사 방침은 일단 이렇게 갈 거야.”
“그럼 다 들어주는 거예요?”
“회사에서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남진수의 설명을 듣고 이나라가 물었다.
“지금 저희 바쁘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남는 시간 틈틈이 하는 거지.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많이 바쁜 것도 아니야.”
“그렇구나.”
이나라가 남진수의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음악 방송할 때보다는 조금 더 여유 있게 스케줄을 짤 수 있었다.
행사만 죽어라 도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저 10억만 일시불로 꼽아주세요.”
“다음.”
“왜요? 들어줄 수 있잖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다 들어준다면서….”
신희진의 말에 남진수가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정작 신희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게 포인트였다.
“저는 그럼 작곡 능력을 더 키워보고 싶어요.”
“저도요.”
서지영과 박혜연은 자기계발을 더 하고 싶은 듯했다.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아니면 우리 회사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더 배워보고 싶은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둘 다 원래 소속사가 그렇게 썩 좋은 곳은 아니니까.
오히려 거기에 있기에는 얘네 둘이 아까운 인재다.
“저는 미국에서 유명한 크리스 안무가님한테 배워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이나라도 앞선 두 명과 마찬가지로 자기계발을 하고 싶어 했다.
이나라의 소속사도 그리 좋은 데가 아닐뿐더러, 나이도 있다 보니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국? 요청은 해볼게. 근데 그런 것도 해줄 수는 있는데, 혹시 연기하고 싶다거나 예능 하고 싶은 애들은 없어? 인지도 더 쌓고 싶다거나.”
원래 남진수의 의도는 자기계발이 아니었는지 직접 회사의 방침을 말해줬다.
남진수는 회사 방침을 말하면 애들이 방송 잡아달라고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애들은 지금보다는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자기 가치를 올리면 알아서 다른 건 딸려온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저능… 예능 해보고 씨퍼요.”
“유코 말고는 없어?”
“저는. 연기. 해보고 싶은데.”
“저도요.”
조심스럽게 유코가 말하고 그 뒤를 이어 린과 신희진이 말했다.
“린이는… 한번 알아볼게. 희진이도?”
“네. 원래부터 조금씩 레슨 받았는데 본격적으로 해본 적은 없어서요.”
나는 린이가 한국에서 배우 생활을 하기에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언어 장벽은 생각보다 더 크다.
그것도 현실과 같은 메소드 연기를 중점으로 하는 한국 시장이면 더더욱.
내가 봤을 때 신희진은 작품을 잘 만난다는 가정 하에 성공 가능성이 꽤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배우 시장은 20대 여배우 풀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희진의 마스크나 분위기는 아이돌보다는 배우 쪽에 더 가까웠다.
“알았어. 미소는?”
“지금도 힘든데… 굳이 한다면 예능이요.”
“예능 둘, 연기 둘, 자기계발 둘, 아니 자기계발 셋이네.”
의외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애들이 적었다. 유코와 미소가 방송을 택한 건 더더욱 의외였다.
“지영이는 예능이나 MC 이런 거 별로야?”
“작곡이 더 재밌는 거 같아요. 솔직히 실력을 더 키워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죠.”
나도 남진수처럼 예능은 서지영을 1순위로 꼽고 있었다.
감도 좋고 진행센스도 좋고 방송에 최적화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지능이 멍멍이 수준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우리 혜연이가 오늘따라 선을 마이 넘네?”
“선이 어디 있어? 안 보이는데?”
“곧 보일 거야. 사선이라고.”
“잠깐잠깐잠깐. 옆구리는 반칙!”
“그런 게 어딨어?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지금만 봐도 서지영이 얼마나 활달하고 성격이 좋은지 알 수 있다. 저런 행동과 성격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박혜연도 서지영과 붙어 다니더니 캐릭터가 독특해졌다.
투닥거리는 둘을 보고 작게 한숨 쉬는 남진수였다.
둘을 제외한 스타즈 애들은 웃겨 죽으려고 했지만.
“크게 무리는 없겠네. 오후에 스케줄 있는 거 알지? 잠깐 연습실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의견은 다 들은 것 같으니 남진수가 자리를 파했다.
그리고 남진수가 나가기 전에 나를 돌아봤다.
딱 보니 뭔가를 시키려고 하는 표정이었다.
“현진아. 너는 A&R팀 가서 CD 좀 받아와.”
“CD요?”
“노래 1분씩 날린 버전으로 따로 만들었어. 그거 받아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해산!”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남진수가 나한테 일을 시키고 회의실을 휙 나가버리자 그 뒤를 따라서 스타즈 애들도 우르르 나갔다.
나도 회의실을 나와 A&R팀으로 향했다.
회귀 전에는 A&R팀 근처도 안 갔는데 이번에는 꽤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다.
“안녕하세요. CD 받으러 왔습니다.”
“CD요?”
“스타즈 애들 노래 단축한 버전이라고 들었는데요.”
“아, 잠시만요.”
A&R팀에 도착한 뒤, 예전에 나에게 행사용 CD를 건네준 직원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CD는 미리 준비해 놨는지 빠르게 CD를 건네받고 A&R팀을 나가려 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만 안 들렸으면 말이다.
“잠깐만요.”
등 뒤를 돌아보니 민서희 팀장이 서 있었다.
언제 왔지?
“네? 안녕하세요. 민서희 팀장님.”
“네, 안녕하세요.”
민서희 팀장은 스타즈 애들의 노래가 역주행한 뒤로는 오늘 처음 봤다.
“무슨 일이시죠?”
“이리 와 봐요.”
“네?”
“그냥 좀 와 봐요.”
갑자기 다급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데려가는 민서희 팀장에게 당황했다.
끌고 간 자리에서 노래를 두 곡 들려주더니 대뜸 내 얼굴을 바라봤다.
“뭐가 나아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우리도 그 감 좀 믿어보려는데 왜 그렇게 삐딱선 타요. 도와준다면서요?”
“네? 제가 언제요?”
우리 사이가 이렇게 좋았나?
근데 내가 언제 도와준다고 했어?
“빨리 골라 봐요.”
“누구 노래인데요.”
“어비스 애들 이번에 담을 수록곡이요.”
“안녕히 계세요.”
누구 노래인지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민서희 팀장의 입에서 나온 그룹을 듣고 미련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렇게 돌린 내 발길은 어깨를 붙잡은 민서희 팀장의 손에 저지당했다.
“왜요? 부담 없이 골라 보라니깐요.”
“그게 왜 부담이 없어요. 부담 백 배구만.”
“그냥 참고만 한다니까?”
“저는 제가 맡은 애들 아니면 안 건드립니다.”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듯했다.
되게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또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거, 되게 쪼시네. 예전에 총 회의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의견을 냈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잘나가는 애들 거 건드렸다가 시체 되고 싶지는 않네요.”
“못 나가는 애들이면 된다는 거죠?”
기필코 내 선택을 받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좋다. 그럼 그 기대에 부응해야지.
“안녕히 계세요.”
“이봐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그리고 무슨 수록곡이야.
긴가민가했지만 조금씩 기억을 되짚어보니 기억이 났다.
들려준 곡 중 두 번째 곡이 어비스 애들의 타이틀곡일 거다.
어차피 잘나갈 애들 거 건드려봤자지. 그냥 조용히 가는 게 현명하다.
고르고 생색낼 수도 있지만 내 정보에 한계가 있으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요즘 강하게 들고 있었다.
괜히 이곳저곳 들쑤시다가는 나중에 역풍이 거세게 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곳저곳 많이 들쑤신 것 같은데 상관없으려나.
걸으면서 문득 손에 쥔 CD를 보았다.
CD를 보며 왜 애들 노래시간을 단축한 게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오늘 저녁에 잡혀 있는 대학 축제 행사 때문인가?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됐다.
전체적으로 볼륨을 줄이고 여러 곡을 하려고 하는 건가 싶다. 엔딩무대가 아닌 이상 가수별로 정해진 시간이 있었으니까.
애들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로 복귀했다.
* * *
정신없이 밀린 업무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현진아.”
“네?”
착각이 아니었는지 이진성 실장이 내 자리로 다가와 내 뒤에서 말을 걸었다.
“너 예전에 나한테 기획서 제출한 거 있지? 독립 장편 영화 하나.”
“네.”
“대표님이 관심 있으시다는데?”
“대표님이요?”
분명히 기획서를 이진성 실장 통해서 올린 적이 있었다.
이진성 실장이 한번 해보라고 권유도 했었고 나도 흥미도 있었으니까.
그냥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넣은 기획안이었다.
관심이 있다고?
볼륨이 큰 작품도 아니고 혹시나 해 써본 기획서였는데 여기에 관심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영화 크기는 작지만, 꽤 괜찮아 보인다고 하시던데? 난 잘 모르겠더라.”
정인수 대표가 확실히 안목이 좋은 것 같다.
내가 넣은 그 작품은 영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꽤 이슈가 났던 작품이다.
단순히 내 친구여서 집어넣은 기획안은 아니었다. 내용 자체는 평범했다는 평이 주류였었다.
그러나 연출과 영화의 느낌이 탁월했다는 평 또한 많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기에 참여해준 스태프가 죄다 ‘이신형 사단’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됐다.
그리고 이신형 감독 본인이 조연출을 맡아 이진철을 도와준 아주 파격적인 행보였기 때문이다.
기성 감독이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기에 모두가 놀랐었다.
최근 이진철과 이야기를 몇 번 했을 때 들은 정보로는 이번에도 똑같은 길을 걸을 것 같았다.
“그런가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사실 그거 제 친구 작품이거든요.”
“친구? 친구….”
내 말에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이진성 실장의 모습에 의아했다.
이게 그렇게 크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기억났다. 이신형 감독님이랑 같이 구른 그 친구 말하는 거지?”
“네.”
내가 이진성 실장에게는 따로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소문이 퍼진 듯했다.
역시 이 바닥은 비밀이 없다.
용건은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진성 실장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남은 건가 싶었다.
“뭐해?”
“네? 업무 보려고요.”
“안 올라가?”
“어딜요?”
“지금 뭐 들었어? 대표님이 관심 있다고 말했잖아.”
이진성 실장이 뭐하냐는 듯 나무랐다.
그게 대표실로 올라오라는 말이었구나.
“대표님 뵈러 올라가요?”
“어.”
“알겠습니다.”
이진성 실장과 이야기를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자꾸 일이 묘하게 잘 풀리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정도로.
* * *
“들어가겠습니다.”
말을 하고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는 정인수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정인수 대표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자기 맞은편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소파에 앉자 정인수 대표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오랜만이네? 저번에 타이틀곡 선정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
“네. 그때 이후로 뵌 적 없었습니다.”
“진성이한테는 들었을 것이고… 다른 게 아니야. 우리 회사가 조금 독특한 건 알지?”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아리송했다.
“네? 저는 엔터 회사는 헥사곤이 처음이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올린 기획안 말이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엔터들은 부서가 따로 갈려 있어. 이렇게 무분별하게 기획안을 받지 않지. 물론 이렇게 받아도 그럴싸하게 쓸 사람이 넣긴 하지만 말이야.”
“아….”
정인수 대표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이런 건 전략실이나 기획투자실이나 다룰 법한 내용이지, 매니저들이 다룰 만한 내용은 아니긴 했다.
“다른 건 없어. 이 회사가 큰 게 그렇게 컸거든. 어비스 애들 키워가면서 여기저기 드라마나 영화 투자한 게 꽤 쏠쏠했거든. 뭐 나처럼 타율이 좋은 애들은 아직은 없었지만 말이야. 다 말아먹기만 했지.”
영화나 드라마도 확실히 보는 안목이 없으면 망하기 쉽다.
이예진만 봐도 개고생하다가 이번에 겨우 살아나지 않았나.
이예진이 보는 안목이 없는 건지 케어해주는 회사가 안목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인수 대표가 말을 하면서 나를 보는데 마치 뱀 앞에 서 있는 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 대표의 눈이 마치 포식자의 눈처럼 보였다.
“근데 말이야… 요즘 싹수가 보이는 놈이 내 눈에 보이네? 몇 년 묵은 애들보다 안목도, 감도 쓸 만해. 그래서 키워보고 싶더라고.”
정인수 대표의 말에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때? 네가 들고 온 이 영화 기획안. 한번 해볼래?”
(다음 편에서 계속)